명화 속 풍경을 찾아서
사사키 미쓰오 외 지음 | 예담
고흐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 - 불꽃같은 생애와 종말의 땅1890년 5월 20일, 빈센트 반 고흐는 화구와 초라한 소지품을 들고 낯선 땅 오베르 역에 홀로 발을 디뎠다. 싸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비좁은 하숙집 다락방도 창작 의욕에 불타는 고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싶은 대상은 마을 곳곳에 넘쳐났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낮 동안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해가 지면 하숙집으로 돌아와 9시에 잠이 드는 생활을 하며, 고흐는 70일 동안 70점의 유화를 그렸다. 사람들은 고흐를 '불꽃의 화가'라고 부르는데, 고흐가 마지막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 오베르 쉬르 우아즈이다.
1890년 7월 27일 일요일. 점심 무렵 하숙집을 나온 고흐는 오베르 언덕에서 자신의 가슴을 향해 피스톨을 당겼다. "탕!" 하는 폭발음이 울리고 고흐는 그 자리에 조용히 쓰러졌다. 의식이 돌아온 것은 저녁이었다. 하숙집 주인이 놀란 나머지 의사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대신 고흐와 알고 지내던 내과의(정신과) 가셰 박사를 불렀다. 박사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단계라고 판단하고 고흐에게 동생 테오의 주소를 물었다. 하지만 고흐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고흐가 자살을 시도한 언덕 뒤로는 오래된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고흐가 가슴을 움켜쥐며 내려왔다는 길의 붉은 피라칸타 열매가 당시의 선혈을 떠올리게 했다. 고흐의 장례는 자살이라는 이유로 교회에서조차 거절당했다. 그러나 마을 관청에 보관되어 있는 사망신고서에는 자살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고흐의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숨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흐의 시신은 교회 뒤편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현재는 동생 테오의 묘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고흐가 숨을 거둔 하숙집 '라비'의 3층 다락방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고흐 연구소 소장인 장센 씨가 건물을 매입해 서구와 일본에서 자금 원조를 받아 총 10억 엔을 들여 개조를 시작해, 조만간 완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마을을 둘러보니 고흐의 정신장애를 진료한 가셰 박사의 사저와 고흐가 좋아했던 보리밭, 자킹의 <고흐 조각상> 등을 볼 수 있어 마을 전체가 이 '광기 어린 천재'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흐가 그림의 모티브로 선택한 농가는 현재 레스토랑이 되어 있다. 그 옛날 고흐처럼 자신의 그림을 파는 사람도 볼 수 있어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화랑에서 근무했고 탄광에 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86년 파리로 건너와 인상파 화 가들과 조우하고, 2년 후 아를로 이주하지만 신경쇠약과 창조를 향한 광적인 열정으로 정 신착란 증세를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1890년 5월 파리로 돌아와 오베르에 머물다 70일 후에 피스톨로 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르누아르와 샤토 섬 - 슬픈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모파상 단편 「폴의 연인」은 센 강에 길게 떠 있는 샤토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레스토랑 구리옹은 '풀네즈'라 불렸던 펜션을 말하는데 모파상은 1873년부터 17년 정도, 르누아르는 1872년부터 10년 정도 이 펜션에 머무르곤 했다.
르누아르는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거장'이라 불린다. 화가의 풍부한 색채가 유감없이 발휘된 샤토 섬에서의 작품들에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말이 되면 파리 시민들은 섬에 모여 뱃놀이를 즐겼고, 사람들은 레스토랑 앞 수상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화면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그림을 샤토 섬에서 그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르누아르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화상(畵商) 보라르에게 "내 작품 속에 균열이 생긴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고 있다."고 털어놨다. 다시 한 번 초심으로 돌아간 르누아르는 고전을 연구해 화면 구성을 중시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원숙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는 진주색의 반영과 함께 음영이 풍부한 붉은색으로 표현한 건강한 육체를 지닌 여성상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 르누아르는 56세 무렵부터 고통받아 만년에는 휠체어에 앉아 흉하게 변한 손 끝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붓을 놓지 않았던 르누아르는 늘 "팔레트를 들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퐁시누 풀네즈'는 르누아르 그림의 모델이 된 소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샤토 섬의 레스토랑 '풀네즈'의 주인집 딸로 2층 테라스에서 귀여운 포즈를 취하곤 했다. 그림 <알퐁시누 풀네즈>가 완성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센 강의 오염이 심해지자 강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레스토랑도 문을 닫았다.
그러던 중 1979년 샤토 시가 이 낡은 건물을 매입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국가의 역사 건조물로 지정되는 것을 계기로 개조 공사에 착수해 2년 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새롭게 개관했다. 다시 문을 연 레스토랑 '풀네즈'는 점심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르누아르의 <선상 위의 점심 식사>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르누아르의 아틀리에는 파리 코르트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걸작이라 평가받는 <물랭 드 라 갈레트>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르누아르는 여기서 자유분방한 성격의 쉬잔 발라동과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그녀를 모델로 하여 <도시의 춤>과 <전원의 춤>을 그렸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내의 질투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전원의 춤>의 여성을 부인의 얼굴로 바꾸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르누아르의 아틀리에는 훗날 발라동의 아틀리에가 되었다. 이 아틀리에 근터에 '몽마르트르 박물관'이 위치해 있고 그 앞으로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르누아르를 비롯해 가난한 화가들이 자주 다녔던 주점 '라팽 아질' 옆으로 위트릴로의 묘도 보인다. 이곳에 서 있으니 화가들의 고동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중부 프랑스 리모즈의 성공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유년시절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 주해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27세에 글레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와 시슬레를 알게 된다. 풍경화와 함께 인물화에도 흥미를 보였으며, 따뜻한 색을 주로 사용 한 역동적인 터치로 여성이 지닌 풍부함을 표현했다.
드가와 무희들 - 순간의 동작에서 진실을 발견하다스물한 살 때 드가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끌려 평소에 흠모해왔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를 만나러 갔다. "선을 그어라. 많은 선을 그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물을 보고 그려도 좋고, 기억으로 그려도 좋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거장의 이 말을 드가는 평생 잊지 않았다.
이듬해 이탈리아 곳곳을 다니며 3년 동안 머무르던 드가는 귀국 후 마네를 만나 '카페 게르부아'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예술가로서 드가의 눈은 주위의 실생활로 향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성실하고 내성적인 품성을 지닌 드가가 차츰 상류층 모임에 나가게 되면서부터는 오페라 극장의 발레하는 무희나 경마장의 기수 등이 그림의 대상이 되었다. 또 마을의 서민적인 테마, 예를 들면 카페의 한 장면이나 세탁소에서 다림질하는 여인들의 일상적인 동작도 그렸다. 드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동작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고 싶어했다.
앵그르의 가르침이 충실했던 드가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일생 동안 수백 점에 이르는 데생을 그렸다. 만년에 고독한 나날을 보냈던 드가는 눈의 병이 깊어져 실명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점차 자연과 사람과의 교유도 소원해져 스스로를 고독 속에 던져두었다. 드가는 83세에 그가 사랑한 파리의 몽마르트에 편히 잠들었다.
파리 유수의 댄스홀 '프랑케티 발레 스튜디오'. 오페라 극장의 레슨 교실을 찍고 싶다고 거듭 부탁해보았지만 거절당해 하는 수 없이 이곳을 선택했다.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는 무용수들도 기량을 가다듬기 위해 이곳을 찾곤 하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드가의 작품 <댄스 교실> 그대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은 파리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천장에 그려진 샤갈의 벽화 아래에서 공연히 시작되면 눈부신 화려함이 무대 가득 번진다.
드가가 그린 또 하나의 사교 무대는 경마장이다. 일요일에 찾아간 파리 롱샹 경마장은 열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예상지를 손에 쥔 사람들이 마권 창구에 쇄도하는 풍경은 여느 경마장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귀빈석이었다. 그곳에서는 남녀 모두가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드가는 무희들처럼 움직임이 격렬한 경마장을 그리는 데 사진기를 사용했다. 그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이 근대 문명의 기계를 이용해 그러한 광경들을 화폭에 담았는데 사진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처음 시도한 이가 드가인 셈이다.
몽마르트르 묘지에 잠들어 있는 드가의 묘에는 프랑스 귀족 출신임을 말해 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드가는 죽어서도 눈부신 영광 속에 몸을 뉘이고 있는 듯 보였다.
에드가 드가(1834∼1917) 파리에서 태어난 에드가 드가의 선조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이탈 리아의 나폴리로 도주해 재산을 모았다. 드가는 파리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화가가 되려고 결심한 뒤 다시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만 학교에 다녔 을 뿐 대부분의 시기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조각과 사진에도 재능을 보였던 드가 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쇠라와 아니에르 - 점묘로 표현된 인상주의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빛과 그림자 사이의 인상을 재빠르게 포착해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신인상파의 대표로 불리는 쇠라는 직감에만 의존하여 그리는 것에 반발해 스스로 과학적 색채 이론을 연구했다.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는 대신 캔버스 위에 색을 늘어놓은 뒤 일정 거리를 두고 그것을 바라보면 색깔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에서 섞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점묘'이다.
쇠라가 점묘로 그린 최초의 대작은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이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공기는 탁하고, 배치된 인물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그림이지만 쇠라는 이 모든 것이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표현했다. 뒤이어 발표한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역시 쇠라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늦은 일요일 오후, 아니에르 다리 밑으로 흐르는 센 강은 내리쬐는 태양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쇠라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영불해협에 면한 노르망디 지방으로 향하는 특급열차가 굉음을 울리며 달려간다. "센 강이 오염되어서 이제는 물놀이를 할 수 없어요."라며 동행한 부부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랑드자트 섬 역시 그림과는 다른 경치로 변해 있었다. 센 강 한가운데에 섬이 자리하고 있지만 일대에 고급 맨션과 주택이 늘어서 있어 물놀이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르바루아 다리나 크루부아 다리 옆으로 배 몇 척이 계류되어 있다. 수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주택'으로 해마다 그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센 강의 오염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했다. 쇠라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는 그곳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쇠라가 자주 오가던 도로를 '쇠라의 거리'로 이름을 바꿨다는 안내게시판이 있어 왠지 우스꽝스러운 느낌이었다.
쇠라가 그린 서커스 극장은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 모습 그대로의 상설 서커스 극장이 하나 남아 있었다. 개관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알아보니 난민구제기금을 위한 서커스라고 했다. 쇠라의 생가는 공화국 광장 옆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쇠라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의 카롱 교실을 방문해봤다. 어두워진 파리의 밤하늘 사이로 에펠탑이 보였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으로 쇠라는 그것이 건설되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화려한 에펠탑의 조명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쇠라의 혼을 부르는 듯 파리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조르주 피에르 쇠라(1859∼1891) 파리에서 태어난 쇠라는 집달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파리 국 립미술학교에 입학해 앵그르의 제자였던 앙리 레만의 교실에서 수학했다. 색채학 연구에 몰두해 과학적으로 색채를 이해하려 했던 쇠라의 미술 이론은 당시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 을 미쳤다. 신인상파의 대표 화가였던 쇠라는 전염성후두염으로 서른두 살에 사망했다.
시슬레와 폴 마를리 - 걸작을 낳은 가혹한 운명요절한 인상파 화가를 제외하고 그 명맥을 이어온 화가들은 만면에 가서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시슬레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도 못한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불행은 1870년에 보불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영국 태생의 수출업자였던 부친의 회사가 전쟁의 여파로 도산하고, 그때부터 시슬레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시슬레는 화상이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근근이 살아갔다. 이 불운한 화가의 그림 <폴 마를리의 홍수>는 그의 생전에 180프랑에 팔렸으나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00년의 경매에서 4만 5,000프랑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시슬레는 평생토록 풍경화만 그렸다.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가혹한 삶 때문에 인간보다 자연에게서 평온함을 구했던 것이다. 영국 국적의 시슬레는 프랑스 국적을 얻어 귀화하려 했지만 관청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속 때문에, 결국 국적을 얻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마저 겪어야 했다. 시슬레의 그림에 대한 비평도 냉혹했다. 그의 그림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 비교해 개성이 없고 대담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빈곤의 바닥에 빠져 있던 1870년 이후 그림은 점차 밝아졌다. 부친이 파산한 이후 10년 간 살았던 파리 남쪽 근교, 센 강변의 마를리에서 그린 시슬레의 그림은 인상파 회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폴 마를리는 파리 서쪽 26킬로미터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불안정하더니 취재를 하던 중 호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주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이 불어 시슬레의 작품 <폴 마를리의 홍수>와 똑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근처에 산다는 주부 츠레크 씨가 우리의 취재를 도왔다. "시슬레의 그림이요? 물론 잘 알죠. 이곳은 1912년에도 큰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고 해요. 하지만 최근에는 댐과 제방시설이 잘 갖춰져 5, 6년 전에 한 번 수해가 일어났을 뿐이에요. 폴 마를리가 유명한 게 시슬레 덕분인지 홍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 중 하나이겠지요." 시슬레가 <폴 마를리의 홍수>를 그린 것은 1876년으로 그해 일어난 대홍수를 테마로 하고 있다. 시슬레는 <마를리의 생 제르맹 거리>, <마를리의 수도교(水道橋)>, <루브시엔의 설경>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마를리의 양수장>도 그중 하나로 현재는 센 강 중앙부에 잠겨 벽돌색 건물과 토대만 보일 뿐이다.
모레 쉬르 루앙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7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운 강변에 서 있는 모레 쉬르 루앙 교회는 오랜 역사가 깃든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 가면 시슬레가 숨을 거둔 당시의 집도 그대로 남아 있다. '북호텔'은 파리의 생 마르탱 운하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시슬레의 그림보다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 <북호텔>의 무대로 더 유명하다. 이곳은 철거되기 직전 영화로 인기가 높아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시슬레가 그린 풍경이 세월의 흐름 속에 하나둘 바뀌어가고 있었다.
알프레드 시슬레(1839∼1899) 부유한 영국계 부모를 둔 시슬레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역상이 되 기 위해 4년 간 영국에서 공부했지만 화가가 되려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샤를 글 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와 르누아르를 만난다. 풍경화 화가로 일생을 보냈지만 야외에서의 무리한 작업 탓에 심한 류머티즘을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