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양중메이 지음 | 한국경제신문사
2장 청화대학생, 노동개조로 거듭나다후진타오는 중국 제4세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외교, 군사, 경찰 등의 방면에서 최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권력 이양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후진타오는 2002년 가을에 열리는 제16기 당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총서기를 맡고, 이듬해 봄에 열리는 제10기 전인대에서는 국가주석으로 선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후진타오는 당으로부터 배우고, 당에 충성하는 길을 일관되게 걸어왔다. 또 자격을 따지고 서열을 중시하는 정치 풍토에 따라 장쩌민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다양한 상급 지도자들의 호평을 들었다. 감숙성에 있을 때는 송핑의 눈에 들었다. 공청단 시기에는 왕자오궈, 후야오방, 치아오스, 후치리 등에게서 좋은 평가를 들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일할 때 덩샤오핑, 장쩌민, 주룽지 등은 모두 후진타오의 책임감 있는 업무처리와 정치적 표현에 대해 신뢰를 보냈다.
후진타오는 어떤 일을 하든, 혹은 어떤 정치적 장소에서든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말과 행동에서 지나침이 없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다. 단지 덩샤오핑의 이론과 장쩌민의 발언을 받들어 일을 처리했다. 그는 자신의 공을 언제나 '장쩌민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뛰어난 지도자'들에게 돌렸다.
후진타오는 출신성분으로 볼 때 소업주 가정에서 태어난 평민 계층에 속한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중국의 최고 학부인 청화대학에 입학해 공산당에 입당, 당내 제4대 지도자의 정수가 되어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후진타오는 문화혁명의 난관을 겪으면서 당내 쓰디쓴 투쟁을 맛보았다. 이어 변방의 빈곤 지역으로 쫓겨나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그를 통해 사회 밑바닥 민중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각종 폐단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온화하고 붙임성이 있었다. 특히 사람을 대하면서 인정과 이성, 사무 등 3개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키고 발전시켜 일을 처리해갔다. 후진타오는 간부, 지식인, 민중 등에게 모두 사리에 밝은 매력과 친화력을 보여주었다.1장 다중문화권(多重文化圈) 속에서 성장하다9장 세기를 뛰어넘는 후계자의 길(하)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이 돌연 사망했다. 중국문제 전문가들은 덩샤오핑 사후 공산당 정국이 안정적일지의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또 새로운 지도 세력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아 배분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리펑 총리의 후임으로 누가 임명되느냐였다. 송핑은 후진타오를 총리에 앉히려고 하였으나 장쩌민은 주룽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더 이상 예전의 '작은 다크호스'가 아니었다. 후진타오는 제15기 당 대회 준비위원회의 일상 업무를 총 관리하는 책임자이자 주석단의 비서장이었으며 사태의 추이를 움켜쥐고 있는 '관건 인물'이기도 했다. 1997년 9월 열린 공산당 15기 1중전회에서 후진타오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지켰다. 그뿐 아니라 당내 서열이 7위에서 5위로 두 단계 뛰었다. 이와 함께 중앙서기처 상무 서기직도 유지했다. 이어 1998년 3월 후진타오는 9기 전인대 1차 회의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당선됐다.
제4세대 후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 제2세대 원로의 감독과 보호, 제3세대 집권층의 엄격한 관찰을 받아왔던 후진타오는 외교무대에 등장하여 국제적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또 후진타오는 군사와 경찰의 상업활동 금지 업무를 추진하면서 당 중앙의 지지를 얻고 군 지휘관들의 협력도 이끌어냈다. 인민들의 지지도 있었다. 그는 신속하고 침착하게 대책을 세웠으며 빈틈없이 일을 추진했다.후진타오는 용천 후씨 48대손으로, 본적은 안휘성 적계현 영주향의 대갱구촌이다. 이곳은 고대에는 '용천'이라 불렸고 휘주 문화권에 속한다. 용천 후씨 44대손인 후용위안은 청나라 함풍제 때 강남 땅에 와 강소성 태주에 자리잡고 차 도·소매업을 시작했다. 정부에서 매기는 무거운 세금과 일본, 인도 등에서 들여오는 상품과의 경쟁으로 차 도매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후씨 집안은 3대에 걸쳐 차 도매업을 계속했다. 1942년 12월 후쩡위 집안의 장자, 후진타오가 태어났을 때 집안의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아 1946년 봄 후쩡위는 상해의 가계를 청산하고 강소성 태주로 이사한다. 1947년 가을, 다섯 살이던 후진타오는 대포초등학교에 입학했고 후쩡위는 사업 재정비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병상에 있는 아내를 정성껏 보살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어머니는 중국이 건국되기 전 세상을 뜨고 말았다.
후진타오가 태주시 제2중학교 3학년이던 1955년 여름, 중국 공산당은 전국의 개인 상·공업인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기업체제인 공사합영(公私合營, 반민·반관의 기업형태) 제도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모든 개인의 상공업은 공유제로 바뀌었다. 후쩡위가 경영하던 가게도 공사합영의 간판을 내걸게 되었고, 후쩡위는 '소업주(小業主) 계급'에 소속되었다. 소업주 계급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무원의 중간급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단결'로 개조해야 할 대상에 속했다(당은 자본가를 '혁명적 비판'으로 개조해야 될 대상, 노동자와 사무원을 '혁명에 의지'하는 대상이라고 분류했다). 소업주 출신이라는 이 꼬리표는 후진타오의 정치적인 성향 및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56년 여름 후진타오는 고등학교 과정인 태주중학에 입학하게 된다. 태주중학 시절 후진타오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건설 이후 고조된 혁명 분위기와 러시아, 유럽 등에서 유입된 혁명 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학년 때 그는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당)에 입단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그의 정치의식은 높게 평가받았다.
그는 청화대학 수리공정과 하천시설발전소 전공을 택했다. 그의 수학 교사였던 예펑우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 너의 성적과 출신계급을 보면 청화대학에는 갈 수 있다. 그러나 일류 학과는 못 간다. 왜냐하면 그런 학과는 시험점수는 물론 출신성분까지 매우 좋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전력시설 건설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후진타오가 태주중학을 졸업하던 1959년 7월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추진하고 있던 중국 수력발전 건설의 최고 전성기였다. 후진타오가 그 학과를 선택한 것은 당시 수력발전소 건설 열기에 고무된 것으로 보인다. 후진타오가 실용주의 학문을 택한 것은 휘주, 상해, 태주 등 다중문화권 속에서 생활하고 성장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감숙성은 중국 서북부로 황하의 상류지방이다. 1958년 대약진 운동 때 공사를 시작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가협 발전소는 잠시 공사를 중단했다가 1964년 재개했다. 후진타오는 1968년 늦가을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유가협 수력발전소의 수건대군(修建大軍축, 건축수리 대군)으로 활약했다. 집을 짓고, 길을 포장하며, 임시 거주지를 세우고, 토목 일까지 했다. 그는 이후 제4공정국 813분국 기술원을 거쳐 분국 기관비서로 승진했다.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가 빨랐던 후진타오는 1년 뒤인 1971년 기관 당 총지부 부서기로 승진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권력투쟁과 정치적 급변이 계속되는 동안 후진타오는 감숙성에 살면서 청화대학 동창인 류용칭과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유가협 발전소가 완성되고 나서 그는 감숙성 건설위원회 비서를 거쳐, 설계관리처 부처장으로 임명되었다. 후진타오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1976년 9월 9일 덩샤오핑을 타도했던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중앙 정치계는 세 계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예지엔잉, 덩샤오핑 등을 주축으로 하는 원로 간부 실력파, 둘째는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화궈펑과 지앙동싱 등 중도 좌파 성향의 기득권 집단, 셋째는 마오쩌둥의 부인을 비롯한 문화혁명 극좌세력이었다. 북경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일촉즉발의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 중에서 덩샤오핑은 중국 당·정·군 원로 간부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했다. 개혁·개방의 바람은 감숙성에도 불어왔다. 이때 후진타오는 송핑(宋平)을 만나게 된다. 송핑은 반듯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문화혁명이 끝난 1977년 감숙성을 책임지게 된다. 송핑은 맡은 일을 대부분 자신이 직접 처리했고 이때 후진타오를 눈여겨 보고 키우기로 결심한다. 1980년 덩샤오핑이 청년간부의 양성 문제를 언급하자 송핑은 즉시 '후진타오 양성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후진타오를 감숙성 건설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송핑은 1981년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겸 부서기로 승진해 북경으로 옮겨가서도 후진타오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지원으로 후진타오는 1982년 3월 당교의 청년간부 양성반에 입학하게 된다.후진타오가 청화대학에 입학했을 때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삼면홍기 운동(三面紅旗運動,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총노선과 공업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한 대약진, 집단 농장형태인 인민공사운동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약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시골에는 인민공사가 설립됐다. 모든 군중들은 생산 증가 투쟁에 동원됐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60년대 들어 처절한 실패에 직면하게 되었다. 후진타오도 15kg의 잡곡으로 한 달을 났다. 이때 청화대학의 장난시앙 총장은 청화대학의 학제 개혁을 진행 중이었다. 이 개혁안에 따라 4∼5년제였던 몇몇 학과는 6년제로 개편했고, 졸업하는 학생도 석사 수준의 학업과 논문을 제출해야 했다. 후진타오는 다른 학생에 비해 나이가 어렸지만 성적은 가장 좋았다.
후진타오는 대학 1학년 때 공청단에 가입했다. 학과 당 총지부는 그를 양성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당 지도자들은 '정치성과 전문기술을 두루 갖춘(우홍우전, 又紅又專) 인재'를 원했다. 공산당 정권의 확립과 경제건설 추진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도 '우홍우전'의 학생이었다. 1964년 가을 당 지부는 후진타오에게 1·2학년을 책임지는 정치지도원 자리를 맡겼다. 이는 대학을 졸업하면 학교에 남아 정치 간부 또는 교원이 될 거라는 신호였다. 1965년 4월 후진타오는 1년 간의 예비당원의 검증을 거쳐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되었다.
후진타오가 청화대학에 남아 정치지도원 일을 하고 있을 때 '문화혁명(文化革命)'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당 실무파를 공격한 뒤 자신의 세력을 전면에 배치하려 했다. 마오쩌둥은 먼저 학생들을 선동해 당 관료들에게 반기를 들게 했는데, 북경대학과 천진대학은 그 주요 전장이었다. 1966년 6월 1일 북경대학에 북경대학 당 위원회 지도부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은 것을 시작으로 각 대학에 비슷한 대자보가 걸렸다. 당 조직을 보호하려던 학교 간부나 학생들은 반역학생으로 몰렸다. 보수파와 개혁파가 정면충돌하자 6월 5일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앙정치국 상무위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각 대학에 '공작조'를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도 어쩔 수 없이 이에 동의했다.
후진타오는 장난시앙 총장이 이끌고 있는 청화대학 당 위원회에 의해 중점적으로 양성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당 위원회를 옹호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장난시앙 총장의 개혁 노선에 찬성했다. 그러나 돌발변수가 생겨났다. 고급 간부의 자제들이 장난시앙 총장을 비난하고 나섰다. 게다가 공작조가 청화대학에 진입하면서 그는 정치적 혼란을 맛보게 되었다. 공작조는 권력을 잡았고 후진타오는 6월 9일부터 23일까지 근신하면서 상부의 조사를 받았다. 후진타오는 다른 간부들에 비해 자격이 약하고 계급이 낮았으며 신입 간부였다. 그는 공작조로부터 '하루(下樓, 과오를 검토, 군중의 이해를 받은 부류)'로 인정돼 검열을 통과하고 공작조의 '반괴반'에 배치되었다. 이때 청화대학 공정화학과 학생인 쿠이다푸는 공작조의 정치방향에 회의를 표했는데, 반괴반은 쿠이다푸를 반대하는 조직이었다.
7월 17일 마오쩌둥이 돌연 북경으로 돌아와 공작조를 파견한 것은 잘못이라며 다시 돌려 세우라고 말한다. 류사오치는 그의 발언에 놀랐지만 상대는 당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절대 권력의 마오쩌둥이었다. 류사오치는 자신의 공작조가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기회를 원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7월 29일 공작조는 폐지되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은 공작조 문제로 조사를 받았다. 쿠이다푸는 하루아침에 반혁명에서 문화혁명의 장수로 돌변했다. 반괴투쟁에 나섰던 간부들과 교수, 학생들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자산계급과 반동노선을 비판하는 문화혁명 추종자로 돌변했다. 후진타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다시 '반괴' 운동원이라는 멍에를 뒤집어 써야 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좇았던 공작조의 반동노선 추종 경력 때문에 노동개조를 받아야만 했다.
1967년 3월 중앙 문화혁명 소조의 대변자였던 기관지 「홍기」가 "청화대학 공작조 간부가 극소수를 보호하고 대다수를 공격하는 자산계급의 반동노선을 걷고 있다"는 논평을 싣자 다시금 분열과 대립 양상으로 접어든다. 청화대학 간부들의 문제를 변론하는 '사파(四派)'와 혁명좌파 대표로 인정받았던 '단파(團派)'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1968년 여름 청화대학의 단파와 사파는 대규모 격투를 벌였다. 이것이 '100일 전쟁'이다. 학생들은 각자 대량의 총과 탄약, 몽둥이와 칼 같은 무기들을 스스로 제작했다. 7월 27일 마오쩌둥은 3만 명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수도노동자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일명 공선대)'를 조직했다. 그들을 청화대학에 투입해 무력투쟁을 제지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마오쩌둥은 각 파의 간부와 학생을 전국 각지에 배치함으로써 그 조직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8341 중앙경위대는 지도자 간부로 조성된 군선대(軍宣隊)를 청화대학에 파견, 공선대가 모든 권력을 물려받도록 지원했다. 그리고 1968년 10월에 열린 제8기 12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를 영원히 당에서 축출했다.
후진타오는 문화혁명 초기, 북경에서 벌어진 맹렬한 정치 대혁명을 직접 겪고,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그는 좌파와 우파 어느 조직에도 참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군선대와 공선대가 청화대학에 들어온 뒤 후진타오는 그들의 배치를 따르겠다는 뜻을 전달한다. 군선대와 공선대는 후진타오의 말을 흡족하게 생각하고 그를 감숙성에 있는 유가협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으로 배치했다. 그곳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이 몰려있는 황량하고 적막한 곳이었다.후야오방은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 주석으로 선출됐다. 후야오방은 전국적으로 중청년 간부 양성 작업에 들어갔다. 후진타오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후야오방에게 추천되었다. 물론 송핑이 중간 역할을 했고, '신원보증'을 맡았다. 후진타오는 12기 당 대회에서 당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서부 지방 간부로 두각을 나타냈던 그가 단번에 당 중앙 권력핵심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후야오방은 12기 당 대회에서 중앙 총서기로 임명됐다. 그는 39명의 새로운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을 데리고 중남해로 가 덩샤오핑, 천윈, 덩잉차오 등 개국 원로들을 접견토록 했다. 중앙조직부 책임자인 왕자오화가 후진타오를 소개했다. "그는 서른아홉 살로 이번 당 12기 위원 중 최연소입니다. … 현재는 감숙성 건설위원회 부주임입니다." 중국 언론은 '혁명의 원로 동지들, 중남해에서 새로운 젊은이들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후진타오의 중남해 입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후야오방은 12기 당 대회에서 이미 10기 공청단 중앙 지도자 그룹의 대대적인 조정과 경질을 결정해놓고 있었다. 공청단은 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하부 활동 조직이자 예비 전략부대이기 때문에 조직을 누가 장악하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1982년 12월 천피시엔과 덩샤오핑이 추천한 왕자오궈가 공청단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