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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 세상을 바꾼 책

한상범 지음 | 이끌리오
금서, 세상을 바꾼 책

한상범 지음

이끌리오/2004년 1월/256쪽/15,000원



1부 혁명의 시대를 이끈 천재들

선지자와 금서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철학자는 『신에 대하여』란 저작에서 “신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또 그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려는 데에 장애가 많아 그것을 지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도 짧기 때문이다.”라고 해서 저서를 소각당했다. 1485년에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발표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이 이단 혐의를 받아 저자는 파문당하고 이탈리아에서 도망쳤다. 코페르니쿠스는 박해를 꺼려 1530년에 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지 못한 채 10여 년을 지내다가 사망하기 직전인 1543년에 발표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그가 사망한 후인 1559년 교황청 금서 목록에 올랐다.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은 출판 즉시 판매 금지되었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들 또한 이단자로 지목 당해 박해받은 비운아들이었다. 몽테스키외는 프랑스 사회를 풍자해 비판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국외에서 출판해야 했고, 볼테르는 왕정을 비판하는 풍자시를 써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루소는 『에밀』이 말썽이 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프로이센, 영국 등을 전전하였다.

사상적 선지자들은 대부분 당대의 기성 권위나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한다. 기성 세력은 권력과 부로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하려 한다. 천재의 이론이나 학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거나 이해할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박해의 주동자나 참여자 또는 동조자가 되기도 한다. 가장 나은 경우에도 그들은 흔히 방관자이다. 근대 시민 사회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하나는 기성 권위나 이론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과 자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오랜 역사 경험을 통해 의견이나 사상에 대해, 또는 신앙이나 세계관에 대해 폭력적 금압이나 강제로 대처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금서란 무엇인가?

금서란 발행 금지되거나 발매 금지된 책을 말한다. 발행 금지나 발매 금지 처분은 어떤 형태이건 검열 제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검열이 금서를 만든다. 베리(John Bagnell Buay)는 서양에서 검열 제도가 확립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로마 교회의 금서 목록은 사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인쇄술의 발명이 갖는 의의를 생각하게 한다. 그 발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상을 널리 보급시키는 것이 쉬워진 것이다. 당국은 재빠르게 그 위험을 알아차리고 이성의 강력한 협력자가 될 가망이 있는 이 새로운 발명을 탄압하는 대책을 세웠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무허가 인쇄를 금하는 교서를 냄으로써 인쇄물의 검열제를 창시했다(1501).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는 무허가 인쇄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독일에서는 1529년에 검열제가 채택되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때 서적의 무허가 인쇄가 금지되고, 런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외에는 인쇄기의 설치가 허가되지 않았다. 또 인쇄의 통제는 성실재판소(특별 법원의 이름)가 관할하였다. 19세기 이전에는 자유롭게 인쇄할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17세기 모라비아(체코)의 유명한 교육자인 코메니우스는 도덕의 순화와 종교의 고수(固守)를 들어 출판물의 검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밖에 특정 서적을 금서로 규정하고 출판물을 규제하는 이유는 국가와 사회의 권위에 도전해서 그 위엄을 해치고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당국은 직접적으로 금서 처분을 하기도 하고 간접적․암시적․음성적으로 처벌하는 위력도 발휘했다.

현대의 전체주의적 통치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정신 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교묘한 방법으로 간섭하고 통제했다. 스탈린주의는 개인의 인생관․세계관까지 특정 이데올로기에 맞추고자 방대한 금서 목록을 작성했다. 민주 사회의 어느 서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서적조차 금서가 되었고, 최고의 재능이 인정된 작가․예술인들이 창작의 자유를 억제당하고, 나아가서는 심한 박해를 당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서적이 지식․정보 산업의 상품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대중의 소비를 전제로 한다. 기업의 영리를 충족시키는 것이 생산의 제1차적인 존립 기반이 된다. 그래서 출판 기업은 대중의 기호를 좇아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려고 할 뿐만 아니라 영리상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상품의 제작을 꺼려 자체 검열을 강화한다. 당국이 지정한 금서 목록이 있지만, 또 기업이 작성하는 비공개의 금서 목록도 있게 되는 것이다.



2부 참 인간상을 찾아서 -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자유 의지와 인간의 존엄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출생한 피렌체의 15세기는 도시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귀족과 시민이 항쟁하던 시기였다. 부가 신분을 압도하고, 고전 문화가 교회 문화를 제압하는 사회였다. 피코는 부유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볼로냐 대학에서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 동양어 등을, 16세에는 페라라 대학에서 시학, 수사학을 배우고, 파도바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연구까지 손을 댔다. 20세에는 피렌체로 돌아와 메디치 가의 실력자 코시모가 창설한 ‘플라톤 아카데미’에 참여했다.

피코는 1485년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을 연구하러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갔다. 여러 학자들과 교류한 피코는 로마로 돌아와 자기가 발표할 것을 900개의 논제로 정리하고 유럽 각지의 대학에 있는 학자들에게 토론을 위한 초대장을 보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가 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900개의 논제를 정리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을 이단으로 판정했다. 피코는 『변론서』를 출판해 파문당하고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488년, 메디치 가 로렌초의 호의로 그에게 의탁하고 파문의 취소를 청원하다 죽기 1년 전인 1493년에 소망을 이루었으나 다음해 열병으로 32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담이여, 나는 너를 창조하면서, 이것이라 이를 특별한 위치나 모습이나 특권도 부여치 않았다. 스스로 생각대로 선택하여 좋을 대로 그것을 갖도록 한 것이다. … 너는 자유 의지에 따르는 외에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다.

그는 한 우화를 얘기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여 각기 피조물을 제 위치에 놓은 후에, 신의 작품을 보고 찬미하는 존재자로서 인간을 만들려고 했으나 마땅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예컨대 새에게는 날개를,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를 주었지만 인간에게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인간이 있을 만한 특별한 장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는 ‘자유 의지’를 부여하여, 그로 하여금 세계의 중심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단으로 몰리게 된 명제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저지른 죄는 큰 죄라고 할지라도 영원한 책벌을 받을 것은 아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밖의 상(像)은 경배할 것이 아니다." 라는 것과 성찬식에 관한 해석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정통 교리의 벽을 뚫고 인간의 참모습을 추구하려는 대담한 시도 때문이었는데 그 자체가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물론 인간 중심적인 것이었고, 그 인간의 인간다움을 ’자유 의지‘에서 구한 것이었다.

인간이 존중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은 서양 사상에선 무엇보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고, 특히 다른 피조물과 달리 신의 모습과 가장 가깝다는 데에 있었다. 인간만이 신과 약속을 하고,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영혼을 가진다는 것이 이성 본위의 자연법 시대에도 천부 인권론의 근거가 되었다. 피코는 이를 좀더 특수한 관점에서 보아 ‘자유 의지’를 들었다. 근대 시민 사회의 정치론은 인간의 자연권, 즉 천부 인권에서 출발한다. 이성의 주체로서 자연권을 누린다고 본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근대법의 기본 이념을 인간 존엄의 존중에 두는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피코의 ‘자유 의지론’을 철학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는 논외로 한다 해도, 그가 ‘인간’을 찾으려 했던 대담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3부 근대 시민 혁명의 불씨 - 영국과 네덜란드의 시민 혁명

평화의 과학과 반란의 철학

토마스 홉스는 베이컨의 경험론을 기계적 유물론으로까지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대상은 각종 물체일 수밖에 없다. 신학이나 천사, 기타의 교설 그리고 권위에 의거할 뿐 과학적 계산에 의거하지 않는 정치사 등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신의 계시에서 연유하는 일체의 지식이나 점성술, 예언술 그 밖에 신에 대한 존경에 관한 교설도 철학의 전당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종교계가 홉스를 맹렬히 공격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철학의 전당 안에는 신학이 있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홉스는 과학의 목적은 단지 기술적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실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내란과 혁명의 시대에 추방과 망명이라는 불안한 생활을 했다. 왕권이 붕괴되고 공화제가 성립하는 것을 보았다. 1640년의 청교도 혁명 때에는 『법의 원리』에서 절대 왕권을 옹호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고, 프랑스에서는 황태자를 가르치면서 『시민론』을 써서 공화제에 기울어 귀족과 사제들의 지탄을 받고 도망하여 귀국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일관성이 없었으나 그가 추구한 한 가지는 강력한 정권 아래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리바이어던』은 왕정에서 공화제로 그의 입장이 기우는 시기에 집필한 것이다. 이 책은 왕권의 옹호론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옹호였기 때문에 왕당파에게 ‘반란의 책’이라고 지탄받았다. 그는 기정 사실이 된 시민적 질서의 고정화를 주장했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왕정에 향수를 느낀 영국인은 공화제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망명했던 찰스 2세는 1660년 5월 런던에 입성했다. 그러나 왕정 복고 후 찰스 2세, 제임스 2세가 신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부활시키려고 강권을 휘두르자 신교도는 다시 국교도와 손을 잡고 1688년에 제임스 2세를 추방하고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여왕을 국왕으로 맞아들였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로크는 『통치 이론』에서 명예혁명을 옹호한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필머의 왕권 신수설을 논박하고, 2부에서는 시민 정치의 기원과 범위, 목적을 논하면서 저항권에 대해 말했다. 로크의 경험론 철학과 시민 정치의 이론은 뉴턴의 물리학과 함께 18세기 계몽 사상의 산파 역할을 했고, 특히 그의 주권 재민과 천부 인권, 저항권 이론은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서 열매를 맺었다.

신앙과 정신의 자유

네덜란드는 1568년부터 80년간을 스페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침략과 지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1648년에 마침내 승리를 거둔다. 영국이 청교도 혁명을 이루어 공화제를 선포하기 이전에 네덜란드의 시민 혁명은 완수되었다. 네덜란드는 봉건적․가톨릭적인 스페인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달성하고 유럽에서 최초로 시민 혁명을 이룬 나라가 되었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단지 경제적 번영만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 나라에는 정치적․종교적․학문적 자유가 있었다. 청교도의 비밀 출판물이 인쇄된 곳이 네덜란드였고, 로크가 반왕파로 지하 생활을 한 망명지도 네덜란드였다. 다른 나라에서 금서가 된 학자․사상가의 저서는 다투어서 네덜란드로 흘러들어왔다.

스피노자는 포르투갈에서 종교적 탄압을 피해 도망 온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콜라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편력하고 자유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 과학과 데카르트를 연구했다. 그는 익명으로 출판한 『신학정치론』에서 종교와 이성(철학)은 각기 다른 길을 가는 별개의 것이고, 정치에서 정신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최대 의무라고 했다. 왜냐하면 국가가 계약에 따라 성립했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자유로이 생각하는 권리까지 국가에 위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출판된 지 4년 후인 1674년, 네덜란드 법원에 의해 인쇄와 판매를 금지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와 기독교 양쪽에서 이단시되고 ‘무신론자’의 혐의를 받아 온갖 탄압을 당했다. 그는 안경알을 닦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1673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그를 교수로 초빙할 때도 응하지 않았다. 국왕의 신하로서 대학 교수의 지위에 있으면 자신의 철학의 자유가 제약당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677년 그가 44세로 세상을 뜬 해에 출판한 그의 저서 『에티카』는 다음 해에 발행 금지 처분을 당했다. 그는 이 책에서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성서의 과학적 비판의 길을 더 넓혀 놓았고,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여 사상의 자유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다졌다. 또 계약에 의한 국가 성립과 인민의 복지 원칙을 제시했다.





4부 진보와 변혁, 이성의 소리 - 프랑스의 계몽 사상

법의 정신에 관한 변론

몽테스키외는 프랑스 보르도의 법조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708년 보르도 법원의 변호사가 된 몽테스키외는 1년 후에 파리로 갔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참석하여 계몽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716년 큰아버지가 별세하자 그는 보르도 고등법원장의 지위를 상속받았다. 1721년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두 명의 페르시아 여행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편지 형식으로 날카롭게 풍자한 사회 비평서였다. 이를 계기로 많은 문인들과 친분을 쌓게 되지만 1725년과 1727년에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될 때 이 책 때문에 말썽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선거를 연장하면서까지 반대파에 대해 설득해 그를 회원으로 당선시켰다.

20년 동안 집필한 『법의 정신』에서 그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법제와 풍습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연구하여 각국의 법률 제도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것의 지리적․사회적 관계를 해명하려 했다. 그는 각국의 정치 체제를 세 종류로 보았다. 그것은 공화제, 군주제, 전제제였다.

공화제는 인민 또는 그 일부가 주권을 갖는 정체이고, 군주제는 오로지 한 사람이 제정된 법에 따라 통치하는 정체이며, 전제제는 한 사람이 법이나 규칙도 없이 자기의 의사와 자의에 의해 지배하는 정체다. 공화제의 원리는 ‘덕’이고, 군주제는 ‘명예’이며. 전제제는 ‘공포’이다. 어느 정체이든 부패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영국의 삼권 분립주의라는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이 같은 생각은 당시의 영국 정치를 삼권 분립의 조화라고 잘못 관찰하고 이론을 전개한 면도 있다. 하지만 『법의 정신』은 저작으로서는 일단 성공이었다.

예수회파와 장세니스트(Jansenist,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학자 코르넬리스 얀세니우스가 주창한 교의인 얀세니즘을 따르는 교파로 얀세니스트라고도 한다) 등이 이 책을 ‘반종교적’이라며 맹렬히 공격했다. 공격의 초점은 법이 “사물의 성질에서 생기는 필연적 관계”라고 한 점이었다. 그것은 스피노자적인 숙명론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교를 이교와 동격에 두고 다루었다는 데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에 대해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 관한 변론』으로 답했다. 그의 저서가 금서 처분에서 해제된 것은 1750년 말이었으나, 로마에서는 1752년에 『법의 정신』과 함께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금서처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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