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정대균 지음 | 도서출판 강
2. 변화하는 이미지3. 관심 형태4. 전후 이미지의 원형5. 독재 국가의 행방6. 닮았지만 닮지 않는 나라표 1은 구노스키가 1939년과 1949년에 실시한 '일본인 학생'의 '여러 민족'에 대한 호감 조사의 결과를 사회학자인 스즈키 지로가 정리한 것이다.
순위 1939년 1949년 인상적인 것은 1939년의 조사에서 한국은 비교적 호감도가 높 1 일본인 일본인 은 집단인 반면, 1949년의 조사에서는 가장 호감도가 낮은 집 2 독일인 미국인 단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인이 예전에 조선인과 공 3 이탈리아인 독일인 유하고 있었던 운명 공동체의 상실과 전후 일본 사회에서 이루 4 만주인 프랑스인 어진 조선인의 행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제3장 5 조선인 영국인 에서 다루겠지만 미군 점령 아래 있을 때, 재일조선인의 행위 6 몽골인 이탈리아인 는 많은 일본인에게 '무법', '악당'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7 인도인 만주인 것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의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이라는 8 미국인 인도인 말에서 연상한 이미지는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던 한반도의 조 9 프랑스인 중국인 선인에 대한 이미지라기보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미지였을 것 10 터키인 터키인 으로 생각된다.
11 흑인 유대인
12 영국인 러시아인 구노스키의 1949년 조사는 인류학자인 이즈미 세이이치가 1951 13 중국인 몽골인 년에 도교 도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민족'에 대한 태도 조사 14 유대인 흑인 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조사 대상 일본인들이 선택한 15 러시아인 조선인 조선인에 대한 어휘를 합성하면 '불결하다, 문화적으로 저급하
표1 일본인 학생의 여러 민족에 대한 다, 교활하다, 일본을 업신여긴다,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호감도 다, 일본을 증오한다, 추악하다' 등의 이미지로 압축된다.
일본인의 한국인 이미지에 대한 변화는 1960년대에 다소 나타났고, 1970년대에도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았지만, '근면'의 이미지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한국인 이미지에 확실한 전환이 일어난 것은 1980년대의 조사에서부터다. 1984년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가 실시한 공동 여론 조사의결과를 보자.
* 한국인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습니까?
- 단결력이 있다 : 32.4%
- 근면 : 14.8%
- 예의바름 : 7.2%
- 신용할 수 없다 : 6.4%
- 타산적이다 : 5.5%
이전 조사 결과와는 달리 긍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같은 조사에서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 또한 위의 내용과 비슷했다. 동일하게 이루어진 1988년, 1990년, 1995년의 조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차이점은 90년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1984년의 조사 결과가 기본적으로 유지되면서 과거사와 관련된 이미지가 부상했고, 혐한 감정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즉 여론 조사의 결과만 놓고 보면, 일본인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민속, 문화, 역사, 정치라는 잡다한 요소로 구성된 긍정성과 부정성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이웃나라에 대한 관심도의 변화 과정과 한일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일본인의 이웃나라에 대한 시각을 세 시기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첫 번째 시기 : 무관심과 관심 회피의 시기(1945∼1965년)
② 두 번째 시기 : 정치적 관심의 시기(전반기 : 1965∼1973년, 후반기 : 1973∼1984년)③ 세 번째 시기 : 문화적 관심의 시기(1984∼ )관심 형태란 "한 개인의 내면에 단독으로 존재하거나, 병존하여 서로 보강하는, 하나 또는 복수의 주관적인 가치 형태" 또는 "개인 생활에서 얻게 되는 '체험'과 '행동 근거'가 대상에 반응해서 나타나는 양식"으로 정의된다. 이 장에서는 일본에서 한국과 관련하여 화제가 된 책을 쓴 저자들을 포함하여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이웃나라에 대한 주요한 관심 형태들을 묘사해 보고자 한다.
① 식민지 체험형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 거주하며 생활했거나 유년기를 조선에서 보냈거나 또는 여행자로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을 방문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이 관심 형태에 공통되는 것은 조선에 대한 향수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 향수와 체험은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다. 식민지 체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향수의 감정으로 남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회한의 감정으로 살아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과거를 말하려 하지 않는 태도이다. 즉 스스로 향수에 젖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태도가 공통적이다. 그러나 향수와의 갈등 양식에는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전후 반세기가 흐르면서 식민지 체험자 대부분은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새로운 상호 작용이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예전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진행되었던 상호 작용의 당사자인 식민지 체험자의 체험은 좀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도식화된 식민지사 이외의 역사를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② 속죄형
이 유형은 식민지 통치에 대한 속죄 의식을 계기로 일본인의 민족적 책임을 묻는 도덕적 관심 형태다. 속죄형은 다음에 볼 이데올로기형과 종종 연대하여 진보파를 형성하는데, 이데올로기형과 다른 점은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단지 정치 지도자나 국가의 죄로 환원하지 않고, 일본인이 집단으로 이웃나라에 대해 저지른 죄를 스스로 확인하고 집단 자체의 인간과 사회 변혁을 통해 이웃나라와의 연대를 확인하려 한다는 점이다.
③ 이데올로기형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웃나라에 관여하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유형이다. 이 관심 형태는 우호, 친선의 상대가 북인지 남인지에 따라 진보파와 보수파라는 하위 유형으로 나뉘는데,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담론의 세계를 지배해온 것은 진보파였다. 따라서 진보파에 초점을 맞추면, 이데올로기형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쟁점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그들의 관심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둘째, 진보파는 한국보다는 북한에 대해서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진보파가 북한에 대해 적극적인 동참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진보파의 관심과 태도가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대중매체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한국을 기괴하고 정치적으로 암울한 국가로 꾸며내는 데 공헌했다. 1970년대 말 여론 조사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독재적이며 자유가 없다는 식의 이미지는 이러한 진보파의 선전이 만들어낸 소산이었다.
④ 고대사형
고대사형은 한국과 일본 등 근대적인 국가 판도가 성립되기 훨씬 이전의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애호가, 연구자, 작가의 무리로, 그 저변은 넓다. 고대사형이 이제까지 살펴본 범주들과 구별되는 것은 정치적인 색채를 띠지 않았다는 사실로 이들의 이웃나라에 대한 관심은 정치적 선전 행위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미지의 창출이라는 면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눈에 띄지 않지만, 이웃나라에 대한 무관심과 관심 회피가 일반적이던 시대에 친근감 형성에 공헌한 것은 큰소리로 이야기한 비판자들보다 애호가에 속하는 고대사형의 사람들이었다.
⑤ 이문화형
이문화형의 분명한 점은 이들이 정치적 한국론에서 문화적 한국론의 담당자로 변신해서 1980년대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전환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의 이웃나라에 대한 정치적 관심의 고양은 그것에 대한 동조나 반발과 상관없이 이웃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이 시기는 이웃나라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정보나 기회가 막 정비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이문화형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과 관계를 맺었고, 한국이 어떤 나라이며 한국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이전의 한국론자들보다 명쾌한 언어로 표현해냈던 것이다. 이문화형의 관심은 주로 이웃나라의 생활 문화와 대중 문화, 문화와 행동 양식 등에 집중된다. 이문화형의 선구자는 도자기 애호가나 한국 가요를 좋아하는 사람 등의 형태로 일찍부터 존재했지만 여러 매체들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새로운 한국론자들이 등장한 한국 붐 이후의 일이다. 오늘날 이문화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은 그 이후 속하게 된, 전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인데, 이전의 관심형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여성도 적지 않다.
위의 다섯 가지 유형은 종종 다른 유형과 겹친다는 점을 상기하자.애초에 일본인과 이웃나라가 친해지게 된 때는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오랜 문화 교류의 역사가 있고, 오늘날 우리가 '일본적'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는 해협 너머에서 그 원형과 매개형을 찾을 수 있는 예가 무수히 많다. 이리하여 일본인 중에는 자신의 먼 조상이 해협을 건너서 왔다거나 일본 문화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한국은 근대 이후 일본이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가장 왕성하게 발휘한 지역이라는 의미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는 한일 관계와 맞먹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그 상호 작용의 농도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것과 비교가 안 된다는 것도 특별하다. 전후 미일관계도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후의 한일 관계보다 원활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역사적 관계의 장구함이라는 면에서는 한국과 견주지 못한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다양한 유대와 인연과 이력으로 맺어진 관계가 있고, 또 일본인에게는 단편적이고 모호하기는 해도 한국에 대해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한 기억과 지식의 편린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관계가 한일 관계가 가장 소원했던 첫 번째 시기, 즉 전후에는 어떤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① '악당'의 이미지
연합군 총사령부의 담당관으로 종전 직후 일본에 거주했던 에드워드 와그너는 「일본의 조선 소수 민족」(1951)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후 조선인 소수 민족은 일본에서 언제나 자극적인 세력이었다. 조선인은 수적으로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까다롭고 감정적이며 도당적인 집단이다. … 전승 국민 쪽에 가담하려고 한 그들은 일본의 법률, 미국 점령군의 지령에 대해서도 거의 개의치 않았고 그 때문에 일본 국내에 많은 혼돈을 일으켰다."
'무법', '악당'이라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미지가 일본인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반감과 적의가 실린 신문이나 단행본 등의 다양한 담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권력 관계가 허물어진 시기에 재일조선인이 행한 행위에 대한 인상은 모두 부정적이다. 이 시기에 재일조선인의 행위가 일본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 몇몇 논고에서 가토 하루코는 "스스로를 '해방민족'이라고 주장하고, 그 명분 아래에서 그들이 행한 다양한 언동은 결국 '해방'을 안겨준 연합국, 점령군의 위광을 등에 업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패전으로 패배감에 젖어 있던 당시 많은 일본인의 신경을 자극했으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소수이며 가토의 논문에 대해서는 몇몇 비판이 가해진다. 고난 대학 교수인 다키자와 히데키는 '조선인=폭도'는 공안 당국의 논리를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가나가와 대학 교수였던 가지무라 히데키는 "사실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불법' 또는 무원칙·무궤도라고 단순하게 결정할 수 없었으며 해방 인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키자와와 가지무라의 비판에서 공통적인 것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부정적인 관점을 일본인 자신의 부정성, 즉 편견과 경시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벌어진 조선인의 행위에 대한 - 그것이 사실이든 과장이든 - 일본인의 적의와 분노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는 근대 이후 조선인에 대한 멸시감을 강화시킨 결과를 낳았다.
② '이승만 라인'에 대한 시각
첫 번째 시기에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이승만 라인'(한국에서는 '평화선')의 설정에 따른 일본 어선의 나포와 억류 사건이었다. 이승만 라인이란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의 선언」을 바탕으로 설정된 것으로 한국의 해안선에서 최고 190해리에 이르는 주변 수역에 선을 긋고 그 구역 내에서 수산물과 어업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어업을 봉쇄하기 위해 연합군총사령부가 취한 조치, 즉 맥아더 라인이 대일강화조약 체결에 따라 철폐된다는 사실에 따라 이승만이 그 대처를 위해 설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 해 9월 7일부터 10월 30일 사이에 나포된 일본 어선과 선원의 수는 42척, 508명이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해상보안청의 순시선 제2교마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한일 회담이 재개되었으나 결렬되었고 그 후 한국 정부는 어선 나포를 강화하는 한편 억류 일본인 어부를 송환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승만 라인은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고 휴전협정에 이르는 기간에도 종종 일본과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앞에서 말한 재일조선인의 행위가 일본인의 마음에 조선인은 '악당', '무법자'라는 인상을 남겨놓았다면, 전후 이승만 대통령과 그 정부의 태도는 한국은 '불법', '부당'하다는 인상을 남겨 놓았다.
③ 또 하나의 시각
그렇지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은 한일 관계가 가장 소원하고 험악했던 시기에도 부정적인 면으로만 흐르지는 않았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은 첫 번째 시기에도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있었는데, 호감과 혐오, 공감과 반감, 친근감과 위화감, 칭찬과 멸시라는 상반된 두 감정과 태도 중에 확실히 부정적으로 두드러지게 기울었지만, 다른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고 둘은 일본인의 마음 속에 공존했던 것이다.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하는 상황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두 번째 시기부터다.① 독재국가와 '천리마'의 나라
전후 일본인이 본 다양한 한국의 모습 가운데에서 특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게 새겨져 있는 것은 아마 '독재 국가'라는 이미지일 것이다. 이런 이미지를 일본인이 널리 공유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즉 박정희 정권(1961년∼1979년)때다. 두 번째 시기의 독재국가론은 한국의 독재자들에게 군국주의 복장을 입혀 '악당'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과감히 도전하는 선인을 상정한 다음 남북 둘 다가 아니라 남쪽만 '악당'으로 한정하면 완성된다. 이러한 선인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일본에 알려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