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정대균 지음 | 도서출판 강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는 악당과 선인이 뒤섞여 있다. 이들 두 종류의 이미지는 필요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는 일 없이 한국인의 마음 속에 공존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양면성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나라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양면성을 공유하면서도 그 흔들림이 격심한 쪽은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다. 애초에 한국인이 느끼는 일본의 존재감이란 것은 일본인이 느끼는 한국의 존재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긍정적인 시각의 예를 찾아보자. 이것은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품으면 자조와 연결되고,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을 품으면 자존심이 유지된다는 양면성 콤플렉스와 연관된다. 경의와 예찬의 담론이 일종의 자기 부정으로 연결되고 또 반일주의라는 정치적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① 긍정적인 말투
일본을 찾은 한글 세대의 한국인이 종종 직면하게 되는 것은 문화적 우월성이란 감각이 흔들리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회의하게 되는 체험이다. 그러나 극적인 개심 체험을 하더라도 일본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또 그것은 새로운 심리적인 균형과 적응을 위한 통합의 시기로 이행하게 된다. 이문화 적응의 단계로 알려진 이런 변화는 당연히 한국인의 일본 체험과도 관계가 있다.
수필가 오선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본에 와서 처음 몇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이란 이문화의 틈새에 빠져 있었다. 나는 좀 특이한 경우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내 내부에서 한국과 일본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싸우는 나날 속에서 문화적인 정체성을 잃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 지금 나는 그 틈새에서 기어올라와 겨우 땅 위에 얼굴을 내밀고 한국과 일본의 땅에 손을 대고 버티면서 내 모습을 바로 세우려고 하고 있다."
일본을 제 2의 고향이라고 하는 오선화는 이미 반일주의와의 갈등이라는 단계에 있지 않다. 오선화는 자신과 일본을 연결하는 매우 드문 공감의 예로, 같은 세대의 여성으로서 앞서 소개한 전여옥의 그것과는 대조적인 일본과의 대면이다.
② 사랑의 일본론
'사랑의 일본론'이라고 하면 안이한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는데, 일본인이 한국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미덕이라면, 한국인이 일본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격받기 쉬운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김소운의 글 가운데 활극풍으로 씌어진 다음과 같은 사랑의 일본론도 있다.
"나는 부산 시내의 포장마차에서 일본어를 사용했다. 주인은 반평생을 만주에서 산 예순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 부인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일본인이었다. 피난민으로 뒤죽박죽인 동란 중에, 어느 날 두목이나 형님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위세당당한 남자 하나가 이 포장마차에서 내가 일본어를 쓰는 것을 듣고 시비를 걸어왔다. '불쾌한 모양이지?' 나는 부드럽게 그렇게 말했는데 그 남자는 눈을 부라리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죠. 일본에 원한이 있어요.' '멍청한 놈'이라고 나는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떤 원한이 있는지 말해봐. 네 얼굴에 씌어 있어. 일본이 욱일승천할 때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고. 어때, 내 점괘가 맞지.' 멍청해진 '애국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정말 화가 치밀면 오히려 편안하게 말할 수 있다. … 내가 일본 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런 간단한 방식으로 애국자가 만들어져가는 내 나라의 엉터리에 화가 났을 뿐이다. 나는 일본을 미워할 자격이 있는 정당한 이유를 가진 사람의 증오까지 이러쿵저러쿵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참으로 분노를 알고 원한을 아는 사람이라면 패전국인 일본을 상대로 과거의 책임을 묻는 데만 급급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도 한국의 양식은 있어야 한다."
반일주의를 사회규범으로 하는 사회에서 일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 자기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식민지 시대에 많은 한국인이 식민지 체제에 종속적으로 참가했던 사실과 동일한 이치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식민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가 오늘날 한국의 공식 사관이 말하는 만큼 단순히 가혹하고 비참한 것이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해방 이후 한국인이 전후의 일본인에게 과거사에 대한 집단적인 책임을 묻는 태도는 정당한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한국인이 식민지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까. 앞의 김소운이 묻고 있는 점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며 이것을 식민지 시대의 묘비명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해방 이후의 한일 관계를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 주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의 궤적을 개관해보자.
① 첫 번째 시기(1945∼1965년)
첫 번째 시기는 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종언을 고한 1945년부터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된 1965년까지 20년 간으로, 이 시기에 두 나라 사이에는 국교 관계가 없었다. 한일 관계가 단절되어 있던 이 시기, 이웃나라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에서 특징적인 것은 무관심과 관심 회피의 조합에 의한 망각이라는 상황이었다. 잘 알고 있듯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간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였고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있었으며, 또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착취와 차별의 관계와 더불어 우정과 협력의 관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한반도와의 이처럼 다양한 유대는 일본의 패전을 기화로 한순간에 쓸모 없어져버렸고, 이웃나라의 존재 역시 빠른 속도로 일본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한편 한국인에게 식민지 지배에서의 해방은 인생과 역사, 민족이 지니는 의미의 큰 전환을 뜻했다. 그러나 변화는 과거의 깨끗한 청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해방 이후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진보라는 실질적인 감각을 국민들이 공유할 수 없었던 점도 이 청산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반일과 향수, 증오와 애착은 많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식민지 시대나 일본에 대한 두 가지 형태의 시각이며, 그것은 오늘날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의 원형이 되었다.
1948년 마침내 이 땅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반공'과 '반일'을 국시로 하는 이승만 정권시대가 시작된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등장한 박정희 군사 정권은 18년 동안 한국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지만 반일과 향수, 증오와 애착의 경합이라는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② 두 번째 시기(1965∼1982년)
두 번째 시기는 1965년 국교 정상화에서부터 '교과서 문제'가 발생한 1982년까지 17년 간이다. 이 시기의 일본은 한국에 대해 정치적 관심은 높았지만, 두 번째 시기 전반만 본다면 무관심과 관심 회피하는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김대중 사건(1973) 이후다. 사건이 일어나자 대중매체들이 한국의 독재 정권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 문제'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을 동반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명감이란 한국을 조종 가능한 지역으로 보는 사고, 즉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주도한 이들은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이 두 번째 시기의 후반부는 세 번째 시기를 기다리는 변화의 준비 기간이기도 했다. 학교 교과서에 한국·조선에 관한 서술이 없다는 문제가 지적되고 재일한국인·조선인의 제도적 차별에 대한 이의 제기 운동이 시작된 때가 이 시기다. 또한 국제화론과 공생론의 형태로 일본식의 다문화주의를 말하게 된 때도 이 시기다. 한편 이 시기 한국에서 특징적인 점은 새로운 한일 관계의 전개와 함께 나타난 이끌림과 반발, 관심과 반(反)관심, 모방과 적의가 경합하는 상황이다. 새로운 한일 관계의 특징은 일방통행이란 관계였다. 일방 통행의 관계란 국교 정상화와 더불어 사람과 물자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일방적으로 흘러드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런 상황은 한국 지식인들이 '경제 침략'이나 '문화 침략'에 대해 소리 높여 비판하게 만들었고 박정희는 '친일파',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후의 역사는 1979년 박정희의 암살로 끝나고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거친 뒤 전두환 정권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와 다른 점은 그들이 일본에게 요구한 내용을 통해, 일본인이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이들이 종래의 한국인과는 이질적인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③ 세 번째 시기(1982∼현재)
세 번째 시기의 기점이 된 '교과서 문제'는 전두환 정권이 요구한 차관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 도중에 발생했다.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각 신문들은 1983년도 사용예정인 고교용 교과서의 검정 내용에 대해 다루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이라는 서술 내용이 검정 후에 '진출'로 바뀌었다고 보도했고, 이것이 한국 신문에 실리면서 3주일 정도 한국 신문의 1면 톱 기사는 교과서 문제로 채워졌고 광복절이 다가오자 반일 캠페인은 '극일 운동'이라는 형태로 궤도가 수정되었다. 나아가서는 독립기념관 건설을 위한 모금 운동이라는 국민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실은 단순한 오보였다. 문제가 된 부분은 한국이 아닌 중국이 대상이었고, 이를 한국 신문이 오보를 냈고 그 오보를 일본의 신문들이 그대로 호응하여 보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고, 그것은 이후 한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 수상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관례가 되었다. 한국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를 구가했다. 이 시기의 신문과 잡지에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약진하는 한국', '선진국 대열에 참가', '한국의 저력' 등의 문구가 춤추고, 역사학자는 고조선의 판도를 확대했다. 반미가 나타나기도 했으나 가장 전형적인 민족주의의 표현법은 반일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1990년대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일본은 없다』 등의 선동적인 반일 서적이 차례로 출판되었다. 이 시기는 한글 세대가 사회의 중견이 된 시기이자 민족주의가 상품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활성화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미약했다.
세 번째 시기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사람과 정보의 상호 교류와 상호 침투가 시작된 시기로 1990년대 후반인 오늘날 두 나라 사이에는 연간 300만 명을 헤아리는 여행자가 왕래하며 유학생이나 주재원 등 상대 지역에서 장기 체류하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한일 관계는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상호 인식의 풍요로움을 안겨주기보다는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상의 차이를 찾아내 갈등의 기회를 증가시키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국은 지금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는데 이런 시대에는 모순된 감정이나 태도가 서로 접근하여 자기 주장을 시작한다. 해외 여행 자유화 이후 많은 한국인이 일본을 찾았고 한글 세대 가운데서도 한일 관계의 운명 공동체적인 성격을 알아차린 사람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회의주의와 대항 의식이라는 습성이 건재하고 있고 한일 관계에서 '마음의 습성'을 바꾸어야 하는 쪽은 일본이라는 믿음도 여전히 강하다.① 문화적 우월 의식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말할 때 인상적인 점 가운데 하나는 문화적 우월 의식의 왕성한 표출이다. 이 문화적 우월 의식의 원형은 조선시대의 청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청이 명을 멸하고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취했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객관적 현실로 존재하는 청에 대한 굴복과 심리적인 현실인 청에 대한 정신적인 우월감이라는 일종의 자기 분열이 나타났다. 겉으로는 복종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품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문화적 우월 의식은 이와 같은 청에 대한 정신적인 우월감을 일본에다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오늘날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문화적 우월 의식은 이런 전통적인 청에 대한 시각과 왜에 대한 시각을 계승한 것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원한과 그밖의 요소를 더해서 현대적으로 재편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일본인의 인색함을 지적한 사람은 한국 문단의 중진인 박경리다. 박경리는 '일본인에게는 문화가 없기 때문에 주는 것을 모른다'고 말했다. 이 인색함이란 이미지는 한국인에게 상당히 넓게 공유되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고정관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왜소함이라는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로 문화의 은인인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했다고 하는 '배은망덕'의 이미지가 결합된 것이다. 문화적 우월 의식은 다양한 형태로 자존심을 규정하는데 1980년대에 특징적이었던 문화적 우월 의식은 민족주의와 결합한 것으로, 이 시기의 대중매체에는 대항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담론이 적지 않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이어령은 그 책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공감이나 경의와 함께 대항 의식이나 문화적 우월 의식을 보일 듯 말듯 감추어놨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시인 길버트는 다실 뜰에 꼬불꼬불 박아놓은 징검돌을 보고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자연미를 사랑하는 심미적 국민이라고 칭찬한 일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눈에는 (일본인이) '도비이시(구불구불한 비기능적인 길)'라는 인공적 길을 만들어놓은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밖에도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은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난다. 일본인의 치열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 담론도 있고, 성과 폭력에 주목한 부분도 많다.
② 회의의 눈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말할 때 또 하나 인상 깊은 것은 습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심과 불신의 표출이다. 현재는 과거의 반영이기 때문에 한국인은 오늘날의 일본에게서 '야망, 음모, 획책, 가면, 정체'를 감지하고 염려와 의심을 표명하며 경계를 환기시킨다. 회의주의에 노골적인 요구가 결합된 예도 있다. 가장 활동적인 반일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서울대학교 교수 신용하가 쓴 글을 보자.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하여 구태여 일본 영화와 대중 문화의 수입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크게 비약할 싹이 보이는 한국인의 민족 의식, 민족적 자부심, 미래에의 웅대한 설계 의욕을 마비시키는 마약의 복용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 한국에 유해·유독한 문화 항목의 교류를 온갖 통로를 통하여 집요하게 요구해 온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문화 침략'을 시도하는 것이다. … 이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할 것이다."
회의주의에는 그것이 작용하기 쉬운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자주 지적되는 것은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룰 때 무섭다는 논의다. 이런 종류의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개인과 집단 간의 행동 양식이 구별되어야만 하며, 또 집단의 다양성이나 가변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 문제다. 한국인이 이문화인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접하고 위화감을 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작 큰 문제는 공감하면서 이해하려는 태도인데, 회의주의는 그 자체로 이미 공감과 이해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6. 경의와 예찬7. 반일주의의 해방① 어떤 심포지엄
1974년 3월 '한국에게 일본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종합 심포지엄이 열렸다. 그 기록은 3년 뒤 도쿄에서 간행되었는데 '문학·예술편'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토론은 멸시나 회의와는 이질적인 또 하나의 시각이 있음을 알려준다.
* 최순우(한국중앙박물관장, 1916년생) : "한국의 전통 문화에 비해 일본의 그것은 보잘 것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