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의 유럽 역사 기행
홍철의 지음 | 인물과사상사
격정의 유럽 역사 기행
홍철의 지음
인물과사상사/2003년 11월/305쪽/9,000원
제1부 세계를 삼킨 대륙의 명(明)과 암(暗)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태어난다
유럽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띄는데, 바로 모든 도시가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도시들은 하나 같이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교회와 시청, 그리고 각종 카페와 갤러리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광장에서는 사시사철 각종 이벤트가 벌어진다. 유럽을 찾는 관광객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순례 코스를 잡고, 길을 잃어버렸을 때도 가까이 있는 광장만 찾으면 된다. 결국 관광은 광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도상에서 왔다갔다하는 셈이 된다.
로마는 곳곳에 화려한 분수를 지닌 광장이 자리하고 있어, 지도를 보고 광장만 찾아다니면 매우 훌륭한 관광을 하게 된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스페인 광장의 조각배 분수, 바르베리니 광장의 트리토네의 분수가 대표적이다. 특히 좌우에 두 개의 분수를 배치한 로마의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 광장은 광장 안에 서 있는 인간을 압도하고 광장 중앙의 웅장한 산 피에트로 성당과 더불어 신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래서 실제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신과 인간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광장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룸에서 기원한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시대 민주정치는 바로 광장에서 탄생했다. 소피스트들에게 사사 받은 야심에 찬 정치 지망생이나 새로운 이상 사회를 꿈꾸는 혁명 인사들은 이 광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정견을 밝히곤 했다.
중세 도시에서도 광장은 생활의 중심 무대였다. 광장 주변에는 웅장한 교회가 자리잡고 있어 주일이면 시민들이 일주일의 생활을 회개했고, 또한 영주에게 사들인 자치권을 지키며 도시의 행정 일을 처리하는 시청도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중세의 광장이 담당했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시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많은 거래가 이들 광장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유럽에서는 도시 구조상 교통의 요지나 사람들이 자주 찾게 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광장이 들어섰다. 지금도 광장 주변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나,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서유럽에서 광장은 시민 중심의 도시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고, 중요한 정치적 행사는 물론 반정부 활동과 같은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유럽의 광장은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시민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냈다. 광장의 존재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 표시와 다양한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광장에는 젊음이 넘쳐흐르고, 서로 다른 다양성이 어울리고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창조성과 상상력이 분출되며, 시민들의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오랜 권위적인 정치와 폐쇄적인 문화 때문에 광장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시청 앞 광장과 서울역 앞 광장은 자동차들을 위한 장소로 시민들은 차들이 내뿜는 매연을 마셔가며 시계나 힐끗거리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지금 정부는 시민들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한다는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지금이 광장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할 적기가 아닌가 한다. 월드컵 이후 광화문을 광장으로 만들기 위해 도로를 축소하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었지만 이내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다. 월드컵과 촛불시위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을 계속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시민을 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시청 앞과 광화문을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오른쪽으로 기우는 정치
유럽은 전반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하다. 투표율이 50%를 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중부 유럽은 서유럽과는 달리 혹독한 공산당 집권 시절을 겪는 동안 위험한 정치보다는 개인의 삶에 탐닉할 것을 강요받았다. 지금도 이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인들을 모두 고급 사기꾼 정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다. 녹색당과 같은 첨단을 달리는 정당에서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이 공존하는 것처럼 언론도 이념 색깔에 따라 고루 잘 발달되어 국민들의 여론을 이끌어 준다. 여기에 오랜 기간에 걸친 지방자치의 역사가 주민들의 민주주의 학습장 구실을 해오면서 선거 때마다 상당히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는 편이다.
유럽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과 네덜란드, 벨기에, 에스파냐처럼 입헌군주국을 채택한 나라도 있지만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회가 있고, 정당의 구조나 색깔이 비슷하며, 좌우가 잘 어울려 있는데, 대체로 좌익의 사회민주당이 강세를 보인다.
유럽은 19세기 초부터 노동운동이 발전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이론이 등장하는 등 사회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해, 정치권의 주류로 행세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유로코뮤니즘으로 변화를 시도했고, 사회주의 역시 계급정당에서 대중적인 국민정당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유럽 사회는 근로자의 복지보다 국가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구하며 점차 오른쪽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 기존 좌우익의 경계를 희석시키는 ‘제3의 길’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나오며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더니, 21세기 벽두부터는 때아닌 극우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의 하이더나 프랑스의 르펜과 같은 극우파가 연정에 참여하거나 결선투표에 올라 국민들은 물론 유럽 사회를 놀라게 한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 좌익들에 대한 실망과 미국의 패권에 맞선 민족 감정의 자각, 신자유주의의 등장 등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그 동안 유럽이 쌓아 올린 정치 질서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아직도 시민사회의 건강한 정신과 연대의식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징후이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 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유럽 아니 세계의 시민들이 기존의 부패한 정치를 청소하기 위해 손을 맞잡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제2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왕의 영광과 비극
현재 유럽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이 있는데, 물론 군림은 하나 통치는 하지 않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여왕의 존재는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자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왕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주로 영국과 일찍부터 사회가 개방되고 시민자치가 발달된 네덜란드 및 북구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 등장한 최초의 여왕은 메리 1세이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 8세는 교황의 반대와 캐서린의 친척인 합스부르크 가의 황제 카를 5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 출신인 앤 불린과 재혼한 왕이다.
우여곡절 끝에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메리 여왕은 뛰어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시대만 제대로 만났으면 훌륭한 여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 영국은 청교도와 성공회가 가톨릭과 다투던 종교전쟁의 시기였다. 메리 여왕은 수세에 몰린 가톨릭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청교도측의 반대를 무시하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펠리페2세와 결혼했다. 결국 이는 청교도 측의 반란을 불러왔고, 메리 여왕은 많은 수의 청교도들을 처형했는데, 그 중 300여 명을 화형에 처해 ‘피의 메리(Blood Mary)'라는 별호까지 얻게 된다. 메리 여왕은 남편의 나라 에스파냐를 따라 벌인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패해 프랑스에 남은 마지막 땅 칼레마저 잃고, 바라던 아기도 낳지 못한 상태에서 일찍 죽고 만다. 메리 1세 이외에도 영국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앤 여왕, 빅토리아 여왕 등이 등장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890년 오란예 가 빌렘 3세가 후사 없이 죽자 최초로 여왕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빌헬미나 여왕이다. 재임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시련을 맞지만 네덜란드가 중립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여 <라디오 오렌지> 방송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네덜란드 대독일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빌헬미나 여왕의 퇴위 이후 그 뒤를 그녀의 무남독녀인 율리아나 공주, 그리고 그녀의 맏딸 베아트릭스 공주가 잇게 되는데, 특히 베아트릭스 공주가 과거 ‘히틀러 유겐트’와 독일군 소속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독일의 외교관과 약혼한 일은 무정부주의적인 단체 프로보의 격렬한 반대 투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베아트릭스 공주는 1980년 율리아나의 뒤를 이어 여왕에 등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녀를 마지막으로 1세기 넘게 네덜란드를 다스린 여왕 시대는 머지않아 끝이 날 예정이다. 베아트릭스 여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나라를 가다
폴란드 땅을 기차나 버스로 지나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평야 지대를 볼 수 있다. 폴란드는 90% 이상이 평야 지대이다. 남쪽 체코와 국경 지대에 일부 산이 있을 뿐 대부분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좋은 환경이어서 인구가 과밀했던 독일과 혹독한 추위로 고생하던 러시아가 줄기차게 탐을 낸 땅이기도 하다. 여기에 헝가리와 체코와 마찬가지로 동서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해 동서 강대국들의 발굽에 오랫동안 시달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폴란드는 귀족들의 수가 전 유럽에서 가장 많은데, 귀족들은 의회 형식의 ‘세임(Sejm)'이라는 귀족 협의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강력히 유지해왔다. 귀족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 세임을 만장일치제의 의사결정 구조로 운영하였는데, 이는 국가 정책에 대한 합의 도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국정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하며 종종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하였다. 자기와 관련된 불리한 결정을 피하기 위해 한 명의 귀족만 매수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의 최초의 왕은 미에스코 1세로 알려졌다. 그의 사후 형제들의 왕권 다툼으로 정국은 한동안 혼란에 빠졌는데, 1034년 카지미에스 1세가 크라쿠프를 정치적 중심지로 정하고 국가 조직을 재건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내전과 왕들의 망명이 되풀이되다가 볼레스와프 3세가 다시 1인 통치 시대를 열고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만 네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해줌으로써 폴란드는 200년 동안 분할 공국 시대로 접어든다.
1333년 카지미에스 3세 때에 이르러 폴란드는 다시 통일되고 영토를 회복한다. 법과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국민개병제를 도입하며, 경제도 크게 발전시켜 놓은 카지미에스 대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피아스트 왕조는 막을 내리고 조약에 따라 왕위는 헝가리의 러요시 왕에게 넘어간다. 1384년 러요시의 둘째 딸 야드비가 러시아와 독일기사단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오 브와디스와프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제국이 탄생한다. 폴란드는 이후 북구의 강자로 부상한 스웨덴, 로마노프 왕조를 맞이해 러시아와 각축을 벌이다가 1700년 들어서 신흥 러시아의 표트르 1세 대제와의 세력 다툼에 말려들어 국세가 기울고,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게 된다.
그리고 17세기 중엽부터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폴란드 내정에 관여하게 되고, 1772년에 이르면 삼국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며, 1795년에 이르면 제3차 분할로 폴란드는 1918년 독립할 때까지 123년 동안 세계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다가 1830년에 일어난 7월혁명의 영향으로 러시아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정치적 탄압은 더욱 심해진다.
1863년 다시 봉기를 일으키지만 진압되고, 이후에는 강력한 러시아와 정책도 뒤따라 이제 폴란드인은 무력 저항에 한계를 느끼고 교육, 문화 활동을 통해 민족의 고유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1923년에 이르면 폴란드의 국경이 어느 정도 확정되지만 정국이 불안하고, 인플레이션도 계속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히틀러는 스탈린과 비밀협상을 맺고 또다시 폴란드 분할을 약속하지만 독일이 패망한 후 폴란드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가고, 폴란드 정부는 공산당이 장악한다. 1956년 포즈난의 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자유화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1970년대 서방의 차관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지만, 1973년 세계 에너지 위기와 그에 뒤따른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좌초하고, 1980년대에 들어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졌다.
1980년대 파업은 이전의 파업 실패에 대한 반성으로 전국적 규모로 조직을 확대하고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러한 자유노조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8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지만 국민들의 저항으로 계엄은 철회되고, 1990년 민주적인 보통선거로 바웬사는 폴란드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오른다.
폴란드의 역사는 귀족과 왕의 갈등, 귀족들 간의 대립, 저항세력들의 분열로 점철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자체도 수 차례 분열과 통일을 거듭해왔다. 1993년 총선을 대비하여 등록한 정당은 무려 135개였다. 폴란드 역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정권을 잡은 자유노조의 분열로 구공산당 세력에게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구공산당의 승리는 우파의 분열 덕도 있지만 오랜 정치 경험과 발빠른 체질 변화도 한몫 했다.제3부 자유와 다양성을 향한 여정
다 같은 것은 싫다
햇빛 따사로운 어느 날, 체코의 프라하 중심가에 자리 잡은 바츨라프 광장의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큰 즐거움일 것이다. 서로 다른 피부 색깔에 다양한 머리 모양, 자유분방한 복장과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정말 유럽의 대도시에서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보노라면 감탄사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머리 모양과 옷차림을 실제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머리 모양과 복장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상상력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 나라라면 그러한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할 경우 부모와의 충돌, 지역사회와의 갈등은 물론 심지어 고인이 된 조상들의 명예까지 들먹이게 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이나 파리와 같은 국제 도시에서는 시끄럽고 까무잡잡한 라틴계와 심각한 털북숭이 게르만계, 이 유럽의 두 주역 사이에서 방황하는 슬라브계의 백인들, 터번과 차도르의 이슬람인, 흐느적거리며 활보하는 흑인, 그리고 왜소해 보이는 아시안 등이 어울려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주의의 건물들 역시 제각기 다른 스타일을 뽐낸다. 중세풍의 고딕식 호텔, 화려한 바로크풍의 쇼핑센터, 현대식 재료로 건설된 기하학적 형태의 갖가지 첨단 빌딩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츨라프 광장을 중심으로 다양성을 추구하고 획일을 혐오하는 길거리의 풍광을 이야기했지만 유럽 사회는 겉모습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아들과 딸은 체코 프라하의 브리티시 스쿨에 다녔는데, 학기말에 나오는 성적표에는 부모의 가슴에 절망을 안겨주는 이야기 대신 우리 아이들에 대한 칭찬뿐이다. 그 덕분인지 우리 아이들은 외국 생활에 자신감을 갖고, 자기는 노래를 잘 하며 무슨 악기를 잘 다루는데, 짝꿍 미셸은 춤과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말한다.
이렇듯 학교나 학생들의 분위기를 보면 자기 파괴로 나아가는 학내의 치열한 경쟁이나 그 경쟁 과정의 부산물인 극단적인 자아 도취나 자기 비하가 없다. 서로 다른 능력을 인정하고 찾아서 계발해주려는 선생님의 노고 때문일 것이다. 남과 다른 점을 발굴해 이를 계발시켜주려는 유럽의 교육 풍토는 남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면 문제아로 치부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체코에서는 해마다 돌아오는 5월 1일 노동절에 특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시내 중심가 바츨라프 광장에서 일단의 네오 나치스트와 아나키스트들이 스키 마스크를 두르고 패싸움을 연례행사처럼 벌인다. 상상이 되는가? 극우와 극좌가 시내 중심 대로상에서 자기의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현장을! 여기에는 옛 공산당원들도 집회를 열어 국가에 그들의 요구 사항을 토로하고, 또 그 한편에서는 공산당에 반대하는 시위도 펼쳐진다. 나라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공산당, 사회당, 기독교당, 민족당, 민족전선 등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당 명패를 걸고 자기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은 인류가 창안해낸 다양한 사상의 스펙트럼이 공존하고 정치권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