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약의 세계사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음 | 가람기획
1677년 9월 21일, 파리의 생 탕투안 가의 교회에서 수상쩍은 익명의 편지가 발견되어 경찰에 압수되었다. 왕과 황태자가 가까운 장래에 독살당할 것이라는 매우 불온한 내용이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독살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경찰은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마담(루이 14세의 제수)이 물약을 먹고 기괴한 죽임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범인은 결국 검거되지 않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 무렵 경찰은 흑미사(기독교의 성찬식을 왜곡되게 각색한 의식)에 빠져있거나 독약을 팔던 몇몇 용의자들을 잇따라 체포했다. 그런데 수사선상에 떠오른 용의자 중에 루이 14세의 애인으로 알려진 몽테스팡 후작부인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의 밀정은 도처에서 암약하고 있었는데 1679년 1월, 어느 파티에서 마리 보스라는 여자 점쟁이가 술에 취해 독살에 대한 단서를 남겼고 밀정 페랑은 이것을 경찰에 보고했다. 2개월 뒤 마리 보스의 자백으로 유명한 여자 독약기술자 라 부아쟁이 체포되었다.
그녀는 귀족이나 재계 인사, 정치가 등을 집으로 초대하여 품위 있는 이브닝 파티나 음악회를 개최하고, 교수들과 점성학에 대해 논의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고상하게 꾸민 거실 뒤에는 무시무시한 독약 실험실과 화장품, 최음제, 낙태약 등을 제조하는 방이 감추어져 있었다. 약제사나 산파도 그녀에게 고용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악마예배 의식에 사용하기 위한, 인체의 지방으로 만든 초도 준비되어 있었다. 베일을 쓴 귀부인이 조심스런 차림으로 최음제나 낙태약, 비소를 재료로 한 독약 등을 사러 그녀의 저택을 찾아오곤 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막대한 수입원이었다.
독약사건을 계기로 일망타진된 무리의 대부분은 독약 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최초로 소환된 피의자 수는 4백 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1679년 4월 10일에 그 유명한 화형법정이 열리고, 그 뒤 3년 여에 걸쳐 심리를 계속한 결과 1682년 7월 21일에 확정판결이 내려졌을 때는 극형을 받은 사람이 36명에 불과했다. 그밖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관계나 왕가와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교묘하게 형을 면제받은 뒤 국외 추방되거나 보석으로 풀려났다.
독약사건의 주범인 라 부아쟁은, 무수히 많은 살인을 저지른 사실을 인정하고 1680년 3월 처형되었다. 라 부아쟁이 화염보다 더 무서운 시역죄(弑逆罪)의 벌이 가해질까 두려워 마지막까지 그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던 공범자가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루이 14세와의 사이에 일곱 명의 사생아를 낳은 몽테스팡 후작부인이었다. 하지만 라 부아쟁의 측근은 그녀만큼 입이 무겁지 못했기 때문에 재판소에서 몽테스팡 부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놀란 루이 왕은 즉시 재판조서에 대한 증거인멸을 명령했다.
몽테스팡 부인은 야심만만한 부인으로, 루이 왕이 총애하는 라 발리에르를 몰아내고 그녀의 후계자로 들어앉았다. 그녀는 왕에게 먹이기 위한 최음제를 사기도 하고, 라 발리에르를 주문으로 죽이기 위한 흑미사 의식을 실행하기도 하였다. 왕은 이미 38세가 된 여자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몽테스팡 부인은 왕의 총애를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틀렸다는 것을 알고는, 왕의 새로운 애인 퐁탕주와 왕의 목숨을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살인청부업자들을 구했지만 오히려 살인청부업자 쪽에서 무거운 죄가 두려워 도망쳤다. 후작부인이 이러한 사실을 라 부아쟁에게 의논하자, 라 부아쟁은 성공을 거두고 난 후에 10만 에큐의 사례금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경찰이 출동하여 라 부아쟁을 체포해버렸다.
독약사건의 결말이 애매한 탓에 갖가지 의혹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정부는 지휘권을 발동하여 경찰에 사건의 추궁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보냈다.고대 페르가몬의 마지막 제왕 아탈로스 3세(기원전 133년 사망)나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기원전 163년 사망) 등이 왕궁의 정원에 독초원을 조성하고, 많은 학자를 모아 독물연구를 하게 했다는 에피소드에는 우리의 범죄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서양에는 독초원이라는 곳의 퇴폐적이고도 감미로운 이미지를 주제로 이용한 작품들도 여럿 보인다.
19세기 이후에는 독을 이용한 살인 방법도 범죄학적으로 세련되어지고, 서민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민들도 비소나 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미 독초원 등의 중세적인 로맨티시즘은 그림자를 감추고, 범죄가 근대과학과 손을 잡고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독약의 분류도 예전처럼 단순히 동물, 식물, 광물 등 3종류로 나누는 방식으로는 맞지 않게 되었다. 그런 중세적 약제사의 관념으로는 너무나 복잡해진 화학식이나 구조식을 다룰 수가 없었다. 17세기의 약제사 그라제르의 뒤를 이어 세레, 헤이루스, 라부아지에 등의 화학자들이 약학 분야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에 독약의 종류도 매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근대의 법의학 발달로 독물 검출 방법도 눈부시게 진보했지만 그와 동시에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복잡하고 치밀한 독살 사건과 함께 독물 자체의 종류도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의 진보와 독살기술의 진보는 병행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836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마슈가 비소의 양을 측정하는 장치를 발명했다. 1840년에는 프레제니우스와 버보가 광물 독의 검출을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1850년에는 벨기에의 권위 있는 독물학자 슈타스가 알칼로이드 검출법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내장 안의 니코틴 검색을 위한 것이었다. 1863년에는 타르디외와 루산이 처음으로 독물학에 생리학적 실험을 도입했다. 1906년에는 베르토로의 『독성 가스 분석론』이 나왔는데, 이것은 지금까지도 독성 가스 및 증기의 독물학적 실험의 기초를 이루는 문헌이다. 이런 식으로 19세기 동안 독물학 검사 방법에 눈부신 진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들은 과학이나 법의학의 무기 앞에 두 손을 완전히 들지는 않았다.
검출 방법이 아무리 완벽에 가까워도 범죄자들이 가진 일종의 독물에 대한 기호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소나 스트리키니네 등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맹독은 검출 방법 여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범죄자들로부터 편애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이러한 독물을 사용하는 경향이 많았다(남성들은 새로운 약물학의 지식을 가지고 비교적 잘 검출되지 않는 니코틴이나 모르핀, 디기탈린 등을 이용하는 용의주도한 독살범이었다).동양과 이집트에서 서구 사회로 전래된 독약은 로마 궁정에서 비로소 대대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난다. 궁정뿐만 아니라 로마 도시의 광장이나 거리에는 수상쩍은 최음제를 파는 야바위꾼 같은 약장수와 돌팔이 의사, 꿈을 풀어주는 데사리아의 마술사들이 가뜩이나 미신에 발목이 잡혀 있는 민중을 홀리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의하면, 로마의 전설적인 초대 왕인 로물루스가 만든 최초의 법률은 '독을 넣거나 남의 아이를 몰래 데려오는 아내, 또한 열쇠 위조나 간통을 하는 아내를 쫓아낼 권리를 남편에게 부여하는 법률'이었다. 그 후 '12동판법'이라는 법률(기원전 454년)이 만들어져 독약이나 마술에 손을 대는 자에게 더욱 혹독한 벌을 주게 되었다. 나아가 기원전 82년, 당시 집정관 술라가 제정한 '코르넬리우스 법'에는 독인삼, 사라만드라(도룡뇽의 일종), 투구국화, 만드라골라, 칸타리스(딱정벌레류를 건조시켜 만든 최음제의 일종) 등을 사용할 경우 국외추방 및 재산몰수의 처벌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카이사르 이후 풍속의 퇴폐가 극심해져서 역대 황제가 독을 정치상의 무기로 이용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권좌에 앉자마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조카 게르마니쿠스를 제거해버렸다.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메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34세의 젊은 나이에 안티오키아의 진지 안에서 '독살의 의혹이 있는 쇠약사'로 사망했다. 일설에 의하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칼리굴라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독을 티베리우스에게 계속 먹였는데, 결국은 그 효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카프리 섬으로 은퇴한 황제를 이불로 질식시켜 죽였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역시 그의 둘째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의 독버섯 요리를 먹고 죽는다. 아그리피나의 아들, 네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그는 이복형제인 브리탄니쿠스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껴 그를 죽였다. 브리탄니쿠스는 간질이라는 지병 때문에 이따금 의식을 잃고 쓰러지곤 했으므로 그가 독을 마시고 몸부림을 쳐도 사람들은 간질 발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이 사건과 관련된 네로의 총신들이 잇따라 죽었다. 아그리피나도 네로가 보낸 자객의 칼에 찔려 죽었다. 이런 독살 사건 뒤에는 독약 전문가인 로쿠스타가 있었다. 그녀는 네로의 궁정에서 권위를 갖게 되어 제자들을 모아 비법도 가르쳤으나, 갈바 황제의 시대가 되자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그녀가 죽자 그토록 빈번하던 연속 살인사건도 자취를 감추었다.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권모술수형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체사레 보르자(1475∼1707년)는 역사와 문화의 퇴폐기에 곧잘 나타나는 광기의 황제, 예술 애호가로서의 전제군주, 탐미적인 독재자이다. 권력욕과 배신, 암살로 채워져 있던 그의 생애는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군주론』을 쓰게 만들었다. 체사레의 아버지는 스페인 출신의 로드리고 보르자, 권력욕이 강하고 탐욕스러운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체사레는 그의 서자였다.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는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 2세의 동생 젬을 독살했다. 형의 미움을 받고 있던 젬은 유럽으로 건너와 여러 곳을 전전했는데,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꿈꾸던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젬의 신병을 인수하겠다고 교황에게 제의했다. 교황은 프랑스 왕에게 돈만 받고는 젬을 프랑스 왕에게 넘기기 전에 바예지드 2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효과가 완만한 독약을 음료에 넣어 젬에게 주었다. 젬은 나폴리에 도착하여 프랑스 군의 손에 넘어가자마자 곧 숨을 거두었다(1495년). 그 후 교황은 아들 체사레와 손을 잡고 로마의 추기경을 몇 명이나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잇따라 빼앗는다.
체사레의 형인 간디아 공(조반니 보르자)이 로마 시내의 테베레 강에서 아홉 군데나 칼에 찔린 채 죽었을 때 세간에서는 동생 체사레의 소행이 틀림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동생 루크레치아를 둘러싼 오빠들끼리의 불륜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루크레치아와 가까운 남성들은 대부분 살해당했다.
보르자 가의 독약은 어떤 조합법으로 만들어졌을까. 예로부터 프토마인은 오로지 두꺼비의 폐에서만 채취했는데, 그들이 원료로 사용한 것은 거꾸로 매단 뒤 때려서 죽인 돼지의 내장에 아비산(亞砒酸)을 첨가한 것인 듯하다. 이것을 부패시켜 건조하거나 액체로 해서 정제한 것이 이른바 '칸타렐라'라는 이름의 독약이다. 이 독약은 아주 서서히 장기간에 걸쳐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합법에 따라서는 신속하게 생명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1503년 8월, 교황과 체사레는 아드리아노 다 코르네트라는 추기경의 초대를 받아 그의 저택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이때 교황의 하인이 추기경을 죽이기 위해 은밀히 준비해둔 독약을 그들의 컵에 넣었다. 교황과 체사레가 마신 독은 닷새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칸타렐라였다. 교황은 죽었고 해독법을 행한 체사레는 목숨을 건졌다. 체사레는 머리칼이 하나도 남지 않고 얼굴도 추하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그 후 적이 연합하여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 체사레는 세력을 잃고 잡혀서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나바르로 도망친 체사레는 비아나의 포위전에서 적의 칼에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았다.후에 브랭빌리에 후작부인이 되는 마리 마들렌 도브레는 1630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 사법관의 딸로 태어났다. 미모에다 재기가 뛰어난 그녀는 바람기가 있고 뭔가에 쉽게 몰두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1651년 앙투안 고블랭 드 브랭빌리에라는 후작과 결혼했는데, 이 남자는 부자에다 놀기를 좋아하고, 더구나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외도를 시작했는데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딸의 이런 행위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법관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도덕한 딸의 연인 생트 크루아를 감옥에 넣어버렸다. 생트 크루아는 원래 화학이나 약물학에 흥미가 많았는데, 때마침 바스티유 감옥에 먼저 들어와 있던 에그딜리라는 남자에게서 독약 조합의 비법을 배웠다. 생트 크루아는 감옥에서 나온 뒤 후작부인과 협력하여 그녀의 아버지를 독살한다. 아버지의 음식에 독약을 매일 조금씩 집어넣어 8개월 만에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부인은 이번에는 두 오빠를 없애고 유산을 몽땅 독차지한다. 또 그녀는 옛 연인 브리앙크르와 머리 나쁜 큰딸을 노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트 크루아 역시 브랭빌리에 부인의 행태가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트 크루아는 독약이 든 작은 병과 그녀로부터 받은 연애편지를 보관하는 상자를 갖고 있었다. 그가 우연히 죽어버리자 집안을 수사하던 경관은 그 상자를 발견했다.
브랭빌리에 부인은 사법경관을 매수하고 담당관리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강구했지만 노력한 보람 없이 상자는 열리고 말았다. 독약 거래 혐의를 받게 되자 부인은 시골로 숨어서 상자 안의 편지는 위조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하인이 체포되었고 고문을 받던 하인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고 사지가 찢기는 형을 받았다. 런던으로 도망쳐 있던 후작부인은 결석재판에서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정부가 그녀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자 부인은 네덜란드로 도망쳤다가 이어서 피카르티, 발랑시엔, 리에주 등으로 피해다녔다. 그녀는 결국 1767년에 데카리에르라는 사람의 손에 잡혔다. 감옥에 들어간 그녀는 여러 고문을 받으면서도 당당했으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37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다.고대인은 알고 있었다『리트레 대사전』에 의하면, 독이란 "피부나 호흡, 또는 소화기관을 통해 동물의 체내로 들어가 기관조직에 유해한 작용을 일으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고 급격한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물질의 총칭"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리스의 디오스코리데스나 로마의 플리니우스 이래, 각 시대의 독물학자들은 각각 나름대로 독에 대한 정의를 시도하고 있다.
성서에는 독에 대한 기술이 매우 적다. 유목민인 유대민족은 독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구약의 신명기에는 "너희 중에 독초와 쑥을 생기게 하는 뿌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온다. 묵시록 제8장에도 "횃불처럼 타오르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강의 3분의 1과 물의 원천 위에 떨어졌다. 이 별의 이름은 쑥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물의 3분의 1은 쑥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쓴 물을 마시고 죽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그들 사이에서는 이 쓴맛이 있는 어떤 식물을 독이라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페르시아 인은 독약이 든 요리를 만드는 데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테시아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파리사티스는 미운 며느리 스타테이라를 죽이기 위해 닭을 반으로 가른 뒤 그 한 쪽은 자신이 먹고 다른 한 쪽은 스타테이라가 먹게 하여 감쪽같이 독살했다고 한다. 파리사티스는 칼날의 한쪽에만 독을 바른 뒤 닭을 잘랐던 것이다.
오리엔트 국가들 중에서 독물학이 가장 발달한 곳은 뭐니뭐니해도 연금술의 발상지인 이집트였다. 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