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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

차용구 지음 | 푸른역사
영화 <로마 제국의 멸망>은 1950∼60년대 할리우드의 사극 붐에 편승하여 탄생한 작품으로 대작 <벤허>보다 무려 500만 달러나 많은 2,000만 달러의 파격적인 제작비를 들여 로마 제국의 번영과 몰락을 화면에 담아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복원한 전투 장면과 건물들은 압권이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역사가 윌 듀런트가 이 영화의 자문을 맡았는데, 감독 앤서니 만은 제국 멸망의 본질적 원인은 제국 시민들의 도덕적 타락과 전제주의적 통치 구조, 과도한 조세 징수, 인구 감소와 같은 내부 문제들이었다는 듀란트의 해석을 담았다.



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로마가 거대 제국으로 성장한 지 200년 정도 지난 서기 180년. 게르만 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아들 콤모두스 대신 리비우스 장군을 황제로 삼으려 하지만, 콤모두스 일파가 황제를 독살한다. 이후 폭정을 일삼던 콤모두스는 민심을 되찾기 위해 돈으로 사람들을 포섭하고, 시민들은 제국이 몰락해가는 줄도 모르고 축제를 즐긴다. 제국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리비우스는 검투사 경기에서 콤모두스와 대결을 벌여 승리한다. 이로써 로마라는 거대 제국은 내분으로 붕괴되고, 죽음과 광란에 휩싸인 로마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년(180)에서부터 콤모두스의 죽음(192)까지, 12년간의 로마 역사를 그리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 시기는 5현제 시대 - 네르바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명의 현제(賢帝) 때로 로마 제국의 영토가 최대로 확대되고, 사회·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황금기를 구가한 시대 - 에 이룩된 '팍스 로마나'의 위상에 점점 먹구름이 드리워질 때였다. 이 시기에 로마 인들은 콜로세움·판테온·개선문 등 웅장한 건축물과 공중 목욕탕과 도로·수도 설비 등 일반 토목·건축 분야에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서기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5현제 이후 군인 황제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50여 년간(235∼185) 내란이 계속되고 무려 26명의 황제가 교체되며 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오랜 전란으로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감소하고, 상공업과 도시 경제가 침체되어 중산시민층이 몰락했으며, 극심한 사치와 향락으로 제국을 지탱하던 도덕성마저 희미해졌다. 또 영화에 묘사된 대로 마르쿠스 황제의 재위 기간 동안 게르만 족의 침입이 잦아 황제는 도나우 접경지대에서 마르코만니·콰디 족을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 했고, 결국에는 180년 전선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로마 제국의 멸망>과 실제 역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콤모두스의 황제직 계승 부분이다. 실제로 콤모두스의 황위 계승은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일이었다. 마르쿠스 황제가 콤모두스 일파의 손에 암살되었다는 영화의 스토리는 극적 효과를 노린 허구적 설정이다. 영화에서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대비되는 악의 화신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콤모두스는 군사와 행정 경험이 없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어도, 제국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던 콰디·마르코만니 족과의 전쟁을 무리하게 지속하는 대신,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기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휴전 조약에 따라 두 부족을 제국 안으로 받아들여 다뉴브 강 유역에 수년간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콤모두스가 의심 많은 냉혈한이 된 것은 누이 루킬라의 역모 사건 이후이다. 콤모두스의 죽음과 관련해서, 영화는 그가 영웅적인 리비우스와 싸우다 패배해 죽은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버림받은 애첩 마르키아와 친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공모로 교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년 마지막 날, 격투기 후 피로에 지쳐 있던 콤모두스는 마르키아가 매수한 레슬링 선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서기 180년경, 라인-다뉴브 강 이북에 정주하고 있던 게르만 족의 움직임은 제국 국경에 불안감을 조성했다. 본래 발트 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게르만 족은 수렵과 농업·목축에 종사하던 이동 민족이었으나, 인구가 증가하여 기름진 땅을 찾아 남하하던 중 기원전 1세기 무렵 라인-다뉴브 강을 경계로 로마 인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 부족은 평화적으로 로마 영토 내로 이주하여 로마 용병이나 소작인이 되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대규모로 이동하며 로마 군과 무력 충돌했다. 특히 마르코만니 인과 콰디 인의 공격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영화를 보면 마르코만니와 콰디 족의 왕인 바로말리우스를 사로잡기 위해 콤모두스의 검투사 군단이 선봉에 서서 게르만 부족을 유인하다가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장면이 나온다. 전투가 끝난 후, 지휘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도망간 병사들을 높은 다리 위에 세워놓고 그중 몇 명을 떨어뜨려 살해한다. 이 장면은 로마의 '데키마레(decimare)'를 연상시킨다. 데키마레란 로마 군단이 시행한 군법 가운데 최고의 중벌로, 추첨으로 열 명 당 한 명씩 뽑아 그 사람을 나머지 아홉 사람이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형벌이다. 비록 영화에서 묘사한 것과 데키마레는 그 내용이 다르지만, 병사 살해 장면은 충성과 용맹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로마 군대의 일면을 보여 준다.



영화에서는 페스트의 만연, 과중한 세금 징수, 기독교의 전파, 로마 시민들의 타락상 등을 곳곳에 배치하여 직·간접적으로 멸망의 내부 원인들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서기 2세기 중기에서 말기에 로마 제국은 혹독한 전염병이 시달렸다. 이 시기는 동방과 서방의 국경 수비 문제와 경제적 활력의 쇠퇴, 권력의 중앙 집권화와 지방 정부의 자발성 위축, 점증적인 군국화 같은 위기들이 확대되어간 시기이다. 따라서 제국의 번영은 2세기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렇게 볼 때 영화 <로마 제국의 멸망>은 허구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 쇠퇴기를 적절히 짚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 "로마는 타살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중세사가 자크 르 고프의 말을 되새기게 된다. 영국의 문명평론가 아널드 토인비 역시 '게르만 족의 침입이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외부의 적은 단지 숨을 거두어가는 자살자에게 마지막 칼을 꽂는 구실을 했을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영화가 제작된 1964년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시작된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광이 잠시 주춤하던 시기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2차 대전의 패전국이던 독일과 일본, 또 유럽 국가의 경제적 부흥이 진전되어 미국 경제의 압도적 지배력이 서서히 약화되었고, 1958년부터는 미국의 국제 수지가 적자로 전락했다. 또한 1963년에는 미·소 간의 해빙 무드를 조성하고, 중국과의 재수교를 추진하는 등 냉전체제를 완화시키고 있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점에서 영화 제작 당시 미국의 상황은 영화가 보여주는 2세기 말의 로마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미국적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애국심 강한 가상의 인물 리비우스를 등장시켜 로마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황제를 죽이고 로마의 영광을 재현함으로써, 미국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미국인들의 희망을 투사했다.영화 <장미의 이름>은 이탈리아의 중세사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동명소설을 프랑스의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영화화하여 화제가 된 작품이다. 14세기 초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통해 중세 말기의 교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에는 중세의 생활상과 세계관이 녹아 있으며, 종교적 독선과 편견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던 14세기 유럽의 암울한 모습이 담겨 있다.



1327년 겨울, 아드소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수도사 윌리엄을 따라 북부 이탈리아 벽지의 수도원에 도착한다. 베네딕투스 수도회에 속하는 이 수도원에서 당시 청빈의 이상을 기치로 내걸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이를 반박하는 교황청 및 다른 교단 대표자들 간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한 토론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과 아드소는 도착하자마자 살인 사건을 접하게 되고 이 사건을 해결해낸다. 윌리엄은 죽은 수사마다 혀와 손가락 끝에 검은 잉크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젊은 수도사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이론과 같은 새로운 사조에 물들어가자, 이제까지 내려오던 전통적인 성서 해석을 고수하기 위해 고민하던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문제의 금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호르헤는 수도사들이 웃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웃음은 죄악이다. 인간이 웃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을 잊어버린다. 두려움을 잃게 되면 더 이상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에 독을 묻혀놓았던 것이다. 이 때 당대 최고의 이단 재판관인 베르나르 기가 등장하여 살인 사건은 이단 문제로 비화된다. 결국 수도원에 화재가 발생하여 도서관은 잿더미로 변하고, 윌리엄과 아르소는 다시 길을 떠난다. 이때 그들은 마녀로 몰렸던 소녀를 만나는데, 아드소는 이름 모를 그 소녀를 '장미'라 부른다.

기독교는 베드로나 바울로 같은 사도들의 적극적인 전도 활동에 힘입어 로마 제국의 교역로를 따라 빠르게 확산되었다.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했고, 이어 392년에는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중세 교회는 세속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봉건 사회에서 정치권력의 시녀 역할을 수행했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위해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놓고 벌인 첨예한 대립에서 승리하면서 교황권이 황제권으로 대표되는 세속 권력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096년부터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 인노켄티우스 3세와 4세 때 절정에 달했던 교황권은 점차 약화된다. 아비뇽 유수 기간에 교황권은 크게 약화되어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게 되는데, 이후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교회의 대분열' 사태가 빚어지며 교황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프랑스 왕의 대변자 노릇을 해온 교황 요한네스 22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4세와 알력 다툼을 벌였다.



프란체스코 교단은 자신들만이 절대적인 청빈 이상을 실천하며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며 다른 수도회 교단들을 비난했는데 다른 교단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스스로 그리스도보다 더 완전하다고 자처하며 신성모독을 행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교황이 이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1322년 11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루트비히는 '작센 하우젠 선언'을 공포하여 요한네스 22세를 이단으로 몰았다.



예루살렘 탈환을 시도한 십자군 원정과 에스파냐(스페인은 영어명) 반도에서 벌인 재정복 전쟁으로 유럽 사회는 이슬람 문화를 본격적으로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1087년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던 에스파냐 반도를 재정복한 뒤 서구의 라틴 기독교 세계 학자들은 이슬람에게 점령되었던 기독교 집단인 모자라브, 유대교 학자들, 심지어 이슬람 교도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랍 문헌에 대한 집중적인 번역을 시작한다. 이로 인해 서유럽 인들은 고대 세계의 문화적 전통을 새롭게 계승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서유럽 도서관의 장서 목록에는 논리학과 자연철학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서서히 추가되었다. 이슬람 세계와의 조우는 상업의 활성화와 과학기술의 전파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서양 기독교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플라톤 철학에 밀려났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은 이렇듯 전반적인 사상의 흐름이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계시와 선험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계시와 이성의 상호 보완을 추구한 토마스 아퀴나스로, 신비주의에서 이성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시대적 갈등을 담고 있다.



서양의 중세 봉건 사회는 삼위계(三位階) 사회로 불린다. 중세인들은 세계가 신의 질서에 의해 성직자 계층(Oratores), 세속 귀족 계층(Bellatores), 농민 계층(Laboratores)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장미의 이름>은 제1신분인 성직자와 수도사들의 세계를 묘사한 작품으로, 각 교단의 다양한 세계관과 이단 논쟁, 종교재판 등 중세 교회의 다양한 측면들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장엄한 중세 수도원과 신비스런 도서관 구석에서 일어난, 역사 개설서에서는 접할 수 없는 사건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숀 코너리가 소화한 수도사 배스커빌의 윌리엄은 물론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의 캐릭터는 셜록 홈즈와 윌리엄 오컴, 로저 베이컨을 섞어놓은 듯 하고, 윌리엄과 아드소의 관계는 셜록 홈즈와 왓슨의 관계를 모델로 삼았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이단 심문관으로 등장하는 베르나르 기는 실존 인물이다. 14세기의 악명 높은 심문관으로 알려진 그는 도미니쿠스 교단 소속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는데 실제로 1317∼1318년에 북부 이탈리아를 이단 심문관 자격으로 방문했다. 영화에서는 분노한 대중들이 무자비한 심문관인 베르나르 기가 탄 마차를 전복시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며, 영화에서처럼 1327년에 그가 북이탈리아를 방문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13세기에 대학이라는 새로운 교육과 학문의 중심지가 등장하기 이전에 수도원은 기독교 사회를 학문적으로 지배하며 지식을 독점하였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들이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것도 중세 수도원의 도서관 덕택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묘사한 대로, 일부 고전들은 기독교 정서를 저해할 수 있는 금서로 분류되어 중세 말까지 철저하게 숨겨져 왔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결정론적 우주관을 제시하고 있어서, 기독교의 창조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포함되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1300년 당시의 유럽 사회 모습을 잘 살리고 있다. 기존 교회 세력(교황청·베네딕투스 수도회)과 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프란체스코 교단) 간의 갈등, 실재론과 명목론의 대립, 황제권과 교황권의 싸움, 수도원과 성직자들의 세속화와 타락상, 지식의 독점화 현상, 불합리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그리고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상 등등. 영화에 등장하는 굶주림에 지친 군중들,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는 돌치노 파의 수도사들을 가난한 농민들이 구하는 장면, 마차를 공격하는 농민들은 1300년경의 경제 위기와 경작지 부족 현상, 농업 팽창의 한계, 인구 과밀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하층계급의 반란을 암시하고 있다. 극심한 빈곤이 계기가 된 자크리 난(1358), 영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하층계급 반란으로 평가되는 1381년의 농민 반란, 프롤레타리아 반란의 성격을 띠었던 치옴피의 난(1378)과 같은 하층민 반란은 봉건귀족의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 봉기였다. 이 같은 당시의 무거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의 색조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살인 사건이 발생한 수도원의 스산한 분위기 역시 14세기 유럽의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영화 <엘 시드>는 <로마 제국의 멸망>의 앤서니 만 감독이 할리우드의 스펙터클 영화 제작 붐을 타고 만들어낸 또 한 편의 서사극 형식의 영화이다. <엘 시드>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유럽에 이슬람 제국을 세우려는 북아프리카 알모라비드 왕족의 통치자 유사프를 클로즈업하면서 시작된다. 때는 1080년경의 이베리아 반도,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와 이슬람 왕궁의 싸움으로 일종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전투가 한창이던 무렵, 카스타야 왕국의 귀족 가문 청년 기사 로드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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