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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 사람들 1

서울문화사학회 지음 | 어진이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 1



조선시대의 사회는 철저한 남성 위주의 사회로, 정식으로 혼인하여 맞은 아내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와 데리고 사는 첩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의 차별이 엄격하였는데, 이는 왕실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즉, 국왕의 자녀들도 아들이냐 딸이냐 그리고 적자냐 서자냐에 따라 국가적인 예우가 달랐다. 국왕의 정실 부인인 왕비가 출산한 자녀들은 적자로서, 아들이면 대군(大君), 딸이면 공주(公主)에 봉해졌다. 반면 후궁이 출산한 자녀들은 서자로서, 아들인 경우 군(君), 딸인 경우 옹주(翁主)가 되었다. 왕자와 공주 등에게 그 칭호를 책봉하여 주는 봉작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대군·공주·옹주의 경우는 연령의 제한이 없고, 왕자군은 보통 7세, 세자의 장자를 제외한 적실의 왕손과 왕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 그리고 왕세자의 서녀인 현주(縣主)는 10세에 봉작하게 되어 있었다.

아들을 낳으려는 노력은 왕실과 민간 어디에서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한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면 국왕이 합방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왕실 생활의 경험이 많은 상궁이나 천문과 역수에 정통한 관상감이 잡아주는 길일에만 합방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왕비가 임신을 하고, 왕비의 출산 예정일이 서너 달 앞으로 다가오면 출산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되고 왕실 소속 내의원 어의들이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누구였건 간에 국왕의 자녀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궁궐 밖 사가(私家)에 나가 살았다. 다만 세자만은 궁궐 안의 국왕이 거처하는 대전(大殿) 동쪽의 건물, 즉 동궁(東宮)에서 살아야 했다.

국왕의 본부인인 중전이 낳은 큰아들 즉, 적장자가 다음 왕이 되는 것이 조선시대 왕위 계승상의 원칙이자 가장 바람직한 것이었다. 세자는 대략 8세 전후하여 공식적으로는 세자 책봉례를 거침으로써 후계자로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세자는 서연(書筵)이라 하여 국왕이 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신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웃어른들께 밤새 문안을 여쭙고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조강(朝講)이라 하여 세자의 공부를 담당하는 기관인 세자 시강원의 관리들과 함께 아침 공부를 마친 뒤에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낮 공부인 주강(晝講)과 저녁 공부인 석강(夕講)을 했다.

세자의 공부를 담당했던 기관이 바로 세자 시강원이었다. 세자 시강원의 고위직은 삼정승과 좌찬성·우찬성 등이 겸임하였고 실질적인 교육의 실무는 이들 아래의 젊은 관리들이 담당하였다. 교재는 유교 경전 해설서나 역사 해설서 등이었는데 세자가 경서의 본문을 읽고 관리는 글자의 음과 뜻을 거들어 알게 한 뒤 모두 읽고 나면 전체의 의미를 설명해서 새겨주었다. 다음 수업 때에는 먼저 공부한 내용을 암송하게 하고 다시 진도를 나갔다.

세종대왕 때 왕족 교육을 담당하는 종학(宗學)을 세웠는데, 경복궁의 동쪽문인 건춘문 밖에 건립되었고 교육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관원들이 겸임토록 하였다. 하지만 대군과 군 등의 왕자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할 현실적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승진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옥의 규모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대군이 60간(間 :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리키며 흔히 칸이라 통용된다), 왕자군과 공주는 50간, 옹주와 종친 문무관 2품 이상은 40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문무관 3품 이하는 30간, 민간인들은 10간이었음과 비교하면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를 넘어서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국왕의 여러 자손이 기거하는 각 궁방(宮房)에는 살림살이를 위해 지급된 토지인 궁방전(宮房田)이 있었는데, 이들은 부역과 조세를 일체 면제받았다. 세자의 생가 부모인 사친궁(私親宮)에는 300결을 그리고 세자위에 있을 때는 800결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 외의 왕자와 공주 등의 경우, 생존하고 있을 때에 한정하여 대군·공주는 850결, 왕자·옹주는 800결, 군주는 400결을 받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망 후에 이것을 일체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왕자와 공주 등의 녹과(祿科), 즉 국가로부터 받는 미포(米包) 등의 지급을 보면, 공주·옹주는 시집가기 이전에는 녹봉을 하사받지만 시집간 후에는 부마(駙馬)의 녹만을 지급 받았다. 공주나 옹주에게 내려주는 노비는 혹 부마의 첩 자식이 제사를 모시거나 혹은 족친(族親)이 제사를 모시다가 그 대사(代數)가 다하여 제사 모시는 것이 끊어지게 되면 그 노비는 궁중에서 쓰는 물건과 노비를 관리하던 내수사(內需司)로 돌려보내 속하게 되었다.

왕자·옹주 등이 죽게 되면 상(喪)에 드는 비용과 소용되는 모든 도구를 국가에서 공급했다. 뿐만 아니라 장례비도 국가에서 차등을 두어 지급하였는데, 대군과 공주는 왕비의 부모와 같은 1등급으로 예우하여 2,500냥, 왕자와 옹주는 2등급으로 2,240냥을 각각 받았다. 이런 대우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과 1등 공신이 3등급으로서 1,650냥을 지급받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며, 그만큼 국왕의 자식들로서 우대를 받은 것이었다. 한편 왕족이 아니면서 왕족과 혼인한 부마, 즉 국왕의 사위인 의빈이 상을 당하면 공주·옹주가 그 녹을 지급받지만, 공주·옹주가 사망하고 없는데 부마가 상을 당하면 녹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었다. 또한 공주·옹주의 남편이 사망하면 남편의 관직에 따라 녹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역시 국왕의 자식인 공주와 옹주 위주로 제도가 마련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궁녀들 어떻게 살았을까?



궁녀는 강제로 징발되지는 않았다. 부모들과 때에 따라서는 여성 본인의 의사에 의해 입궁하였다. 궁녀의 보수는 고정적으로 아기 나인이 한 달에 백미 너말이고, 옷감이 1년에 명주와 무명 각 1필, 여름에는 베·모시도 하사품으로 내려 충분히 쓰고 남을 정도였으며, 식생활은 궁중에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보수는 친가 부모·형제들에게 보탬이 되었다. 민족항일기에 접어들어서는 월급제가 실시되었는데, 상궁들은 고등관 대우를 받았고, 제조상궁쯤이면 장관급의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궁중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받았기 때문에 급료의 대부분을 자신의 친정에 보냈다. 궁녀들은 어린 나이에 궁중에 들어와 일생을 갇혀서 보내는 답답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왕의 후궁이 된다면 친정도 살리고 자신의 인생도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행은 5∼6백 명이나 되는 궁녀 중에 한 세대에 고작 다섯 손가락에 꼽힐까 말까였다.

궁녀들은 자신들의 교육과 노동의 품으로 궁의 규칙과 기술을 전수하여 왕궁의 살림을 살아냈다. 고려·조선시대 부인들의 관직으로 내명부와 외명부가 있다. 내명부는 궁인의 관직으로 왕·왕세자의 궁인 내관직과 궁중의 잡무를 담당하는 궁관(宮官 : 궁녀)직으로 구분되었고, 외명부는 공주·옹주, 왕비의 어머니, 종친의 부인, 문무관의 부인 등의 봉작이었다. 내명부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봉직한 빈(嬪), 귀인(貴人)·소의(昭儀) 등을 통틀어 일컫는 여관(女官)의 명칭이다.

궁관은 정5품의 상궁(尙宮)에서 종9품인 주변관(奏變官)에 이르는 궁녀로서, 종4품 이상의 품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이들은 일정한 직임·품계를 가지고 국가로부터 녹을 받고 궁중의 살림살이를 도맡은 핵심계층으로서 위로는 왕비와 내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품계가 없이 궁중의 잡역에 종사하는 하층 궁녀를 지배하였다. 왕족의 살림을 위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의·식·주를 맡은 각 독립 처소이다. 왕궁에는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의 네 부설 부서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 외 무수리가 따로 있어 하역은 이들이 했다.

지위가 가장 높은 궁녀인 지밀은 왕실과 왕비의 신변 보호, 일체의 시중과 내전의 물품관리, 궁중 안 여러 기관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궁녀의 수는 약 300여 명 정도였다. 궁녀는 왕의 법궁(法宮)뿐만 아니라 별궁이나 제사궁(祭祀宮)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본궁의 궁녀들은 별궁나인을 '궁것'이라 하고 경멸하였다. 본궁의 경우, 왕을 비롯하여 모두 독립 세대로 영위되며 왕·왕비·왕대비 등은 같은 규모의 궁녀 수를 갖는다. 궁녀가 90명이라 할 때 왕·왕비·대비전의 처소별 궁녀 수는 대개 지밀 20∼27명, 그밖에는 15∼20명 정도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외국 사신 접대 때 여악(女樂)을 사용하는 풍속이 기녀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기녀는 사대부나 변경 지방 군사들을 위한 매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기생은 창기(娼妓)의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의녀 제도는 태종 6월 3월 한성윤 지제생원 허도의 상언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내외의 구별이 심하고 엄한 때라 부녀자들이 병에 걸리면 남자의원들에게 진찰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그 병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창고(倉庫)·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인을 뽑아 맥경과 침구의법을 가르쳤다.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기녀나 의녀이기에 그들에게 합당한 교육을 국가에서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원래 천류(賤流)에서 뽑았기 때문에 양녀(良女)로서 종사하는 이가 없고, 다시 연산군 때에 와서 이들을 화장시켜 기생으로서 중앙관아의 향연에 참가시켜 왕조 말기까지 내려왔다. 의녀는 약방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의 별칭이며, 의녀가 이곳에 소속되어 있지만 연산군 이후 기생 역할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종 때 의녀의 수는 80명이나 되었으나, 양의사(洋醫師)가 궁중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의녀 제도가 없어졌다. 궁녀들은 궁중음식과 예절 등 궁중 문화를 생산하고 전수한 주체자들이었다. 15세기 한글 계승, 한글문화 발전 전수, 궁체·한글소설·궁중문학·궁중요리의 전수자들 역시 궁녀들이었다. 궁궐에 들어온 아기 나인들은 미리 소속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 부서의 선배 상궁이 맡아 양육하였다. 가장 어린 나이인 지밀의 경우 4∼5세에 불과했으므로 선배 상궁에 의해 딸처럼 길러지다가 7∼8세 무렵에 기초적인 교양교육을 받아 익혔다. 궁녀로서의 몸가짐과 궁중용어 등을 배웠고 글공부도 하였다. 우선 동몽선습·소학·내훈·열녀점에서 시작하여 글씨 연습까지 다양하게 교육받았다. 궁녀들은 일반 가정의 침모나 식모와 달리 왕실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그들의 기술은 당시로써 최고의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왕실의 의복이나 음식을 책임진 이들의 역할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상궁은 노후에 근력이 없어져서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병이 나면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늙고 병든 궁녀는 본가의 동생이나 조카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거나 사찰로 갔다. 궁녀가 죽었을 때 대궐에서는 제수품을 내렸다. 그것으로 본가의 식구들이 궁녀의 말년과 죽음을 치상하거나 기증하였다.

조선시대는 자기가 속한 영역 외부로의 출타 자유는 일반 여성 거의 모두가 없었던 시절이다. 궁녀들에게 성적인 자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절대군주국가의 한계로 인정한다면, 궁에서의 여성의 직업생활은 재능 있는 여성에게 여타의 기회를 주지 않아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능력이 있는 여성들의 자아실현 활동의 한 장(場)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관들의 생활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시대에 외국어 구사 능력은 개인이 갖추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외국어 구사 능력은 조선시대에도 필요했다. 조선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상대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인력의 필요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외국어에 대한 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하였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정한 시험을 거쳐 국가의 관리로 임용되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들을 역관이라 불렀다.

중앙의 사역원만으로는 역관의 수요를 충당하기 힘들어 정부에서는 지방관아로 외국어에 능통한 관리를 파견하여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부족한 인력을 양성하였다. 사역원과 지방 관아에서 가르친 외국어는 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어(女眞語, 후에 淸語)의 네 개 과목이었다. 이곳에서 교육 받은 학생들은 3년에 1회씩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할 때 잡과 시험의 하나인 역과를 통해서만 통역관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확인되는 조선시대의 역과 합격자의 총 수는 2,976명으로 전체 잡과 합격자 6,122명 가운데 약 50%에 육박하고 있다. 역관들은 제도상 교수(敎授)·훈도(訓導) 등 실직(實職)을 부여받는 사람들은 약 33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실직이 아니라 정해진 기간에만 복무하도록 하여, 많은 인원에게 수직(受職)의 기회를 주고 국가의 재정적 부담도 덜려는 의도에서 마련된 체아직(遞兒職)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인원수도 43명에 불과했다.

16세기 초를 분수령으로 17세기 이후에는 역과의 모든 합격자들이 서울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청계천의 남쪽과 북쪽 일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을 중촌(中村)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중인들이 주로 몸담고 있던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청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관은 중인 가운데서도 고급기술관으로서 전문직종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었다. 특히 역관과 의관이 다른 계층보다는 사회적 대우가 조금 나았다. 그들은 양반으로부터는 억압받는 계층이었지만 아래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역관은 최고 관직이 정3품 당하관(堂下官)까지만 올라갈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3품 이상 올라간 역관도 많다. 그러나 역관이 정2품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조정에서 잡류(雜類)로 대우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끼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사역원의 관리들이 대부분 사대부의 자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류(士類)에도 낄 수가 없었다. 결국 정치적 입지가 상승했다고 해도 그들에게 주어진 중인이라는 사회적 굴레는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지속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 경에 이르면 중인의 차별대우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역관들은 사행 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을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 외에 그들에게 특별히 허용된 사무역의 기회를 통해 경제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조선에서 인삼을 가지고 가서 비싼 값을 받고 오는가 하면, 은을 가지고 가서 중국에서 경서·희귀한 약재·비단이나 모자(방한모)와 같은 사치품 등을 사 가지고 와서 국내의 양반가와 왕실에 비싼 값을 받고 팔거나, 혹은 백사(白絲)를 사들여 일본에 되파는 중개무역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역관들의 무역 행위는 18세기 초에 이르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자기 자본으로 국내 생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상대적으로 기반이 약한 역관들의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환경도 변화되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직교역을 하기 시작함에 따라 국내에 은이 부족하게 되었고, 자본의 침식을 당한 역관들은 효율적인 무역에 종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역관들은 역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수단을 찾아 떠났다.

조선 후기에도 중인들 특히 역관들을 중심으로 외래문화가 급격하게 국내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중국에서 많은 책자를 수입하여 국내에 중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양반 가문의 부탁을 받고 희귀한 책자를 구해주기도 하는 등 문화전파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국내외를 드나들며 쌓은 역관들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행정 실무 능력은 문학적 분야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들은 외교사행에서 필요한 각종 문서와 거래에 관한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에 종종 뛰어난 시적(詩的) 재능을 국내외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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