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 사람들 1
서울문화사학회 지음 | 어진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시대에 외국어 구사 능력은 개인이 갖추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외국어 구사 능력은 조선시대에도 필요했다. 조선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상대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인력의 필요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외국어에 대한 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하였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일정한 시험을 거쳐 국가의 관리로 임용되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들을 역관이라 불렀다.
중앙의 사역원만으로는 역관의 수요를 충당하기 힘들어 정부에서는 지방관아로 외국어에 능통한 관리를 파견하여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부족한 인력을 양성하였다. 사역원과 지방 관아에서 가르친 외국어는 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어(女眞語, 후에 淸語)의 네 개 과목이었다. 이곳에서 교육 받은 학생들은 3년에 1회씩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할 때 잡과 시험의 하나인 역과를 통해서만 통역관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확인되는 조선시대의 역과 합격자의 총 수는 2,976명으로 전체 잡과 합격자 6,122명 가운데 약 50%에 육박하고 있다. 역관들은 제도상 교수(敎授)·훈도(訓導) 등 실직(實職)을 부여받는 사람들은 약 33명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실직이 아니라 정해진 기간에만 복무하도록 하여, 많은 인원에게 수직(受職)의 기회를 주고 국가의 재정적 부담도 덜려는 의도에서 마련된 체아직(遞兒職)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인원수도 43명에 불과했다.
16세기 초를 분수령으로 17세기 이후에는 역과의 모든 합격자들이 서울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청계천의 남쪽과 북쪽 일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을 중촌(中村)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중인들이 주로 몸담고 있던 관청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청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관은 중인 가운데서도 고급기술관으로서 전문직종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었다. 특히 역관과 의관이 다른 계층보다는 사회적 대우가 조금 나았다. 그들은 양반으로부터는 억압받는 계층이었지만 아래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역관은 최고 관직이 정3품 당하관(堂下官)까지만 올라갈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3품 이상 올라간 역관도 많다. 그러나 역관이 정2품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조정에서 잡류(雜類)로 대우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끼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사역원의 관리들이 대부분 사대부의 자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류(士類)에도 낄 수가 없었다. 결국 정치적 입지가 상승했다고 해도 그들에게 주어진 중인이라는 사회적 굴레는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지속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 경에 이르면 중인의 차별대우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역관들은 사행 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을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그 외에 그들에게 특별히 허용된 사무역의 기회를 통해 경제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조선에서 인삼을 가지고 가서 비싼 값을 받고 오는가 하면, 은을 가지고 가서 중국에서 경서·희귀한 약재·비단이나 모자(방한모)와 같은 사치품 등을 사 가지고 와서 국내의 양반가와 왕실에 비싼 값을 받고 팔거나, 혹은 백사(白絲)를 사들여 일본에 되파는 중개무역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역관들의 무역 행위는 18세기 초에 이르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자기 자본으로 국내 생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상대적으로 기반이 약한 역관들의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환경도 변화되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직교역을 하기 시작함에 따라 국내에 은이 부족하게 되었고, 자본의 침식을 당한 역관들은 효율적인 무역에 종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역관들은 역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수단을 찾아 떠났다.
조선 후기에도 중인들 특히 역관들을 중심으로 외래문화가 급격하게 국내에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중국에서 많은 책자를 수입하여 국내에 중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양반 가문의 부탁을 받고 희귀한 책자를 구해주기도 하는 등 문화전파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국내외를 드나들며 쌓은 역관들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행정 실무 능력은 문학적 분야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들은 외교사행에서 필요한 각종 문서와 거래에 관한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에 종종 뛰어난 시적(詩的) 재능을 국내외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에 상륙하기 시작한 천주교 문화가 조선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된 뒷면에는 이들 역관의 공이 크다. 조선이 1876년 개항을 시작으로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서양 열강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도 역관을 중심으로 한 외교적 막후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강화도조약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역관 오경석은 변화하던 세계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멀리서 들려오는 종루의 종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어젯밤에 수원에 거주하는 상전(上典)의 외방노(外方奴)인 태립이와 돌쇠가 신공(身貢)으로 보낸 땔감을 아침식사 전에 모두 정리해야 한다. 서울에서는 땔감을 직접 마련할 수가 없다. 도성 안은 일체의 벌목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원에는 상전댁의 전지가 있는데, 태립이와 돌쇠가 그 전지를 경작하고 있다. 상전인 유학 김세진은 많은 노비를 가지고 있다. 나와 무금이, 잉질단과 분이는 행랑채에 거주하면서 주인집의 온갖 잡일을 담당하고 있다. 주인집의 담장 밖에도 여러 명의 노비가 초가를 짓고 살고 있다. 사당과 재사(齋舍)의 관리는 물론 일체의 잡역을 담당하는 백룡이네 가족, 창고일을 맡아보는 막손이네, 정자 관리를 하고 있는 업생이 부자 등이 살고 있다.
막손이는 인근 김충위 댁의 비인 춘이와 결혼했는데, 그 때문에 자신이 근근이 모아두었던 재산을 상전댁에 바쳐야 했다. 노비주(奴婢主)인 양반들은 자신의 여자종은 남자 양인과 결혼시키려 했으며, 남자종은 양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조선시대에는 부부 중 한 쪽이 천인이면, 그 자녀도 천인이 되었다. 그런데 다른 주인에게 속한 노와 비가 결혼할 경우 그 자녀는 비를 소유한 주인에게 그 권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종을 가진 노비주는 자신의 여자 종과 결혼시키던지, 아니면 양녀와의 결혼을 원했다. 다른 집의 비와 결혼한다면, 그 자녀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막손이 아저씨의 자식들은 모두 김충위 댁 노비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상전은 무척 화를 냈는데, 그 손해를 막손이 아저씨가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근근이 모은 몇 마지기의 땅을 상전댁에 바쳐야 했던 것이다.
주인집의 통제 하에 있던 솔거노비의 경우, 거의 모든 노동력을 상전에게 제공했지만, 주인집으로부터 제공되는 의식주가 너무나 열악했으므로 갖은 통제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의 재산을 마련하고자 했다. 남자종은 주인 몰래 다른 집에 품팔이를 하기도 하고, 텃밭에서 키운 야채를 내다 팔기도 했다. 여자종은 양잠이나 방직에 골몰했다. 노비가 아프거나 배고플 때마다 상전이 신경써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자기 자녀라도 노비신분에서 해방될 기회가 생기지 않겠는가?
나는 장작을 모두 패고 인근에 사는 포수 조남의 딸 귀례와 혼인할 생각에 피식피식 웃다가 늙은 비, 잉질단이 물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얼른 받아 부엌으로 옮겨주었다. 무금이가 버려져 있을 때 잉질단이 거두었다.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는 집에서는 그 아이를 노비로 삼아도 좋다는 문서를 국가에서 발급해주었다. 그렇게 해야만 어린 생명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잉질단 아줌마는 평소 식사준비와 세탁 등 일상적인 일은 물론 봄에는 누에치기, 여름에는 삼베, 가을에는 목면 등의 옷감을 얻기 위해 노역을 담당한다.
아침을 먹자마자, 나는 집사인 인손이 아저씨와 함께 연희방으로 갔다. 거기에는 상전댁의 농장이 있다. 연희방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인 천복이·작은년이가 살고 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주인댁 채소농장을 관리하는 마름이다. 나와 인손이 아저씨는 연희방에서 고추를 소달구지에 실어 이현(梨峴)의 도매상에게 넘겨주고 북촌으로 향했다. 북촌은 상전의 먼 친척뻘 되는 김승지 대감의 집이 있는 곳이다. 김승지는 상전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뇌물을 갖다 바쳤다. 오늘은 무슨 편지를 전해주러 가는 길인데, 아마 기생집에서 보자는 내용일 듯 싶다.
노비라고 해서 다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양반들은 우리 노비들은 둘로 구분해서 공노비·사노비로 크게 나눈다. 공노비는 소유주, 즉 상전 또는 주인이 국가, 또는 관청이 되는 경우이다. 공노비는 각사노비(各司奴婢)·내노비(內奴婢)·관노비(官奴婢)·역노비(驛奴婢)·교노비(校奴婢)처럼 구체적인 소속 관청의 명칭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각사노비는 중앙 각사 소속의 노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각사에 선상되어 입역하거나 신공을 납부한다. 내노비는 내수사(內需司)와 각 궁방 소속의 노비로 내수사에서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내노비라고 불린다. 관노비는 지방 각 군현이나 감영·병영에 소속된 노비로 각각 읍노비·영노비라고도 불린다. 역노비는 역참에 소속된 노비다. 교노비는 향교에 소속된 노비로서 토지와 함께 향교의 중요한 경제 기반의 하나다. 이들 공노비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모두 독립된 호를 구성하고 있다.
사노비는 개인 소유 노비를 가리키는데, 크게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된다. 솔거노비는 주인집 행랑채에 거주하거나 같은 마을에 있으면서 가내 사환, 농사와 길쌈, 상업 활동 등에 종사한다. 그밖에도 노비는 가마꾼, 편지 전달, 농기구 제작, 청소, 세탁 등 잡무도 담당한다. 특히 비의 경우 상전이나 그 족류의 첩이 되거나 단순 야합에 의한 자녀의 출산이 많았으나 이는 여러 형태로 은폐되었다. 외거노비는 독립호를 구성하고 있는 자들로 서울 안에 거주하는 경우, 말하자면 경거노비도 있지만 대부분 전국에 흩어져 있다. 이들은 상전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상전 소유의 정자·별장 또는 묘를 지키면서 생활한다.
오후에는 인손이 아저씨에게 잠시 말미를 얻어 동생 천복이를 만나 보기로 했다. 천복이는 서소문 밖 반석방에 위치한 칠패에서 어물전 일을 보고 있다. 물론 상전댁 소유의 어물전이다. 천복이는 요즘 꿈에 부풀어 있다. 솔거노들은 상전의 자본과 계획에 의해 상행위를 했지만 직접적인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자기 몫도 가질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생활수준의 향상이나 주인에게 재산을 상납하는 행위인 기상(記上)·납속 등을 통해 국가나 주인집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천복이를 보고 상전댁에 도착해보니 벌써 3시가 넘었다. 디딜방아가 있는 마당 한쪽으로 갔다. 오후부터는 벼를 많이 찧어야 한다. 며칠 있으면 상전댁 잔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밤에도 불을 켜놓고 일을 계속해야 한다. 셋이서 하루종일 일해야 겨우 반 가마니 정도 얻을 수 있었다.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는 개별적·사적 지배관계에 놓여져 있었다. 주인이 소유노비를 직접 다스렸으며, 노비의 의사와 상관없이 소유주의 자의로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하였다. 국가에서는 주인이 자신의 노비에게 사형(私刑)을 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노비의 직접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모반이나 모역·반역 행위를 제외하고는 주인의 불법 행위를 관청에 고할 수 없는 불고율(不告律)의 규정 때문에 만일 주인의 범법행위를 관청에 고발했을 때는 교수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따라서 노비는 주인이 자신의 부모형제를 죽이거나 자신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더라도 주인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다.
저녁 늦게까지 방아를 찧고 행랑채로 돌아와 보니 득일이가 아주 살갑게 나를 맞이한다. 득일이는 요즘 투전에 빠져 있는데, 아마 돈을 빌려달라고 할 모양이다. 득일이는 머슴(雇工 : 고공)이다. 머슴일로 번 돈으로 장가갈 생각은 하지 않고 투전판에서 한 몫 잡을 꿈을 꾸고 있다. 저 놈의 자식은 나와 하는 일은 비슷한데, 양민이다. 그래서 나는 상전댁에 얽매여 있지만, 저놈은 자유롭다. 도대체 이놈의 노비 신분에서 언제나 벗어나게 될까?기생이란 옛날 우리 전통사회에서 춤과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구기 위해 제도적으로 있었던 일종의 직업여성이다. 기녀 또는 말을 알아 듣는 꽃이라 해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하였다. 이들 기생은 그 업(業)에 따라 관기·민기·약방기생·상방기생 등으로 불리었다.
관기란 관청에 예속되어 춤과 노래, 가야금 따위를 타던 기생을 말한다. 고려 중기에는 궁중의 여악(女樂)을 맡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지방 관청으로 파급되어 수령의 위안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천인 계급으로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에도 당시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적(妓籍)에 등록되어 기생이 되었다. 민기란 대중을 상대하는 일반 기생을 말하며, 약방기생이란 삼남 지방의 관비 중 영리한 소녀를 뽑아올려 처음에는 제생원(濟生院)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혜민서(惠民署)에서 침구술(鍼灸術)을 배웠는데, 의녀(醫女)는 반드시 침통(鍼筒)을 차고 다니게 하였으며, 내의원에 소속되어 기업(妓業)을 겸했기 때문에 약방기생이라 불렀다. 상방기생이란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바느질을 하는 침비(針婢)를 선발한 다음 궁사(宮司)에 이름을 올린 후 침선비(針線婢)라 하였는데, 상의원의 소속이나 기업(妓業)도 했기 때문에 이들을 상방기생이라 불렀다. 당시 기녀 가운데는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이 일류였다고 한다. 기생을 크게 분류하면 재예가 뛰어난 기생과 그저 남성에게 육체만을 상대하던 유녀(遊女) 곧, 창기(娼妓)가 있다.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속량(贖良)이라 하여, 양반 또는 양민 부자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또 나이가 들어 퇴기가 되거나 병이 들 경우 그 딸이나 다른 여자를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 대비정속(代婢定屬)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사회에서는 사노비·승려·무당·백정·광대·상여꾼과 함께 팔반사천(八般私賤), 곧 팔천(八賤) 중의 하나였다. 다만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대부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과 노리개 등으로 치장할 수 있고, 사대부들과 연애를 할 수 있으며, 연애가 성공하여 고관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돌볼 수도 있었다.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상서예부시랑 이수가 자기 처가 죽은 뒤 처조카의 부인과 밀통하던 중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을 죽이려 한 일이 발각되자 그녀를 유녀의 적에 올렸으며, 그도 섬으로 유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육신의 처자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다. 이처럼 양반관료들도 역신이 되면 그 처자들은 관기가 되기도 하였다.
박제형의 『조선정감』에 의하면 관기는 가마에 태우고 폐백을 차고 장옷을 걸치는 등 몸가짐을 지극히 조심했지만 창녀는 가마에 태우지 않고 얼굴도 드러내 놓아 관기와 구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제도가 점차 문란하여 창녀도 가마를 타고 안경을 쓰고 실로 수놓은 신을 신어 기생과 창녀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뒤 그는 옛날의 법식대로 기생만이 가마를 타도록 하고, 기생의 신발도 검은색으로 정하고, 남자가 기생을 차지하는 돈도 120냥으로 정하였다. 또 얼굴이 아름다운 기생을 뽑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