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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프리드먼 지음 | 창해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프리드먼 지음/장병옥 ․ 이윤섭 옮김

창해/2003년 11월/416쪽/18,000원



머리말 - 미니애폴리스에서 베이루트까지

1979년 6월, 나는 아내 앤과 함께 중동 항공사의 707기를 타고 제네바에서 베이루트로 향했다. 베이루트 공항에 도착해 보니 부서진 유리창, 총알이 훑고 지나간 자국, 무장한 공항 수비대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는 중동 특파원이 되어 베이루트에 가보겠노라고 수년 간 다짐하고 준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로 무릎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중동의 각 지역을 순화하면서 목격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동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레바논 내전의 기원은 레바논 건국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레바논 내에서 다수를 이루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와 마론파 기독교도간의 연합으로 레바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국가가 경제적으로 번성하기 위해서는 레바논 산 지역(기독교 80퍼센트, 드루즈파 20퍼센트) 외에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인 해안 도시들(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페)과 시아파가 다수를 이루는 남쪽 지역(아카르, 베카 계곡)을 레바논에 포함시켜야 했다. 이렇게 해서 ‘대 레바논(Greater Lebanon)’이 성립되었는데, 1932년 통계에 의하면 마론파를 포함한 기독교도는 전체 인구의 51퍼센트였다.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이 국민협약National Pact(성문 조약은 아님)은 기독교 세력의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은 항상 마론파에서 선출될 것과 국회의원 비율은 6 대 5로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레바논의 아랍적이고 이슬람적인 성향을 보장하기 위해 총리는 수니파에서, 국회의장은 시아파에서 선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이슬람교도가 급속하게 증가해서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기독교도는 3분의 1을 조금 넘어서는 등 주민의 구성 비율이 바뀌었으며, 시아파는 레바논 내에서 최대의 단일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슬람교도는 총리의 권한 강화 등 보다 강력한 권한을 요구했으나, 마론파는 이를 거부한 채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했다.

1970년대 초 레바논에서는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의 태생적인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중동의 또 다른 분쟁,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분쟁도 격화되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시오니즘으로 알려진 근대 유대 민족주의 사상에 고취된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구약성서의 옛 고향인 팔레스타인 땅으로 몰려들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발표하고 UN에 이 지역의 통치권 문제를 떠넘겼다. 그 결과 1947년 11월 29일 UN총회는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표로 팔레스타인 서부 지역을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로 양분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모두가 성지로 여기는 예루살렘은 UN의 신탁통치 하에 두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과 이웃 아랍 국가들은 이 분할 안을 거부했다.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가 자신들의 것이며 유대인을 추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5월 14일에 국가 수립을 선포했고, 다음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서부 지역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1948년의 건국 전쟁 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와 개별적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964년에 아랍연맹은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조직했다. 당시 PLO는 아랍 정부들이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69년 무명의 팔레스타인 게릴라 아라파트(알파타는 아랍어로 ‘승리’를 뜻한다)가 PLO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9월, 갈등은 절정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 급진 게릴라들이 여객기 세 대를 납치해 요르단에 착륙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르단 군이 접근해 승객은 일단 구조했으나, 요르단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후세인 국왕은 아라파트 세력을 요르단에서 축출할 것을 명했다. PLO는 곧 레바논 남부와 수도 베이루트 부근에 난민촌을 건설하면서 또 하나의 국가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레바논 내전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과 교차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PLO와 이슬람교도는 서 베이루트와 레바논 남부를 차지했고, 기독교도는 동 베이루트와 레바논 산의 북쪽과 동쪽 지방을 차지했다. 아랍 각 국의 정부들은 수많은 무장 단체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레바논은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달러가 풍부해 화폐 가치가 안정되었다. 이제부터 메르세데스-벤츠와 칼라슈니코프 소총이 공존하는 기괴한 도시 베이루트에서의 내 여정은 시작된다.



제1부 베이루트

지금 식사할까요,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요

베이루트는 언제나 그곳에 사는 거주자든 아니든 모두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다름 아닌 “14년의 내전 기간 동안 폭력 사태로 10만 명이 죽거나 다친 도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생존하고 대처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베이루트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의 유연함이다. 공항이나 동네에 있는 식료품점으로 가는 짧은 기간에도 지금껏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하고 상상도 못했던 일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베이루트에서 맞닥뜨리는 놀라운 일들에 익숙해지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베이루트에서 살다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놀랄 일이 없어진다. 베이루트의 경험은 감정에 방탄 조끼를 착용하는 것을 뜻한다. 나 역시 그곳에 살면서 감정에 방탄 조끼를 입게 되었다.

1982년 6월 11일 금요일 저녁, 로이터통신 건물에서 「뉴욕타임스」에 텔렉스로 기사를 송고한 직후였다. 갑자기 정전이 되어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팔레스타인 기자 이산히좌지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톰, 톰, 자네인가?” “맞아. 날세.” “다행이야. 살아 있었군. 압둘이 방금 전화했네. 자네가 사는 아파트가 폭파되었다고 하네.”

누가 아파트 건물을 폭파했을까? 경찰에 따르면 아파트를 점거하는 문제로 팔레스타인 난민 가족들이 다투었다고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PLO 분파와 연계되어 있었는데, 아파트를 차지하지 못한 난민 가족들이 그들의 PLO 그룹에 호소했다는 것이다. 이 폭발로 팔레스타인 난민, 네덜란드 은행가 등 모두 19명이 사망했다. 이것이 바로 어처구니없는 베이루트 식 죽음이다. 베이루트에서 사는 것이 두려운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언제 어떤 타당한 이유도 없이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일단 거리에서 교전이 벌어지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댄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동차에 폭탄을 실어 터뜨리는 일이 많았다. 거리를 걷다가 자신을 지나쳐 가는 자동차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곳, 그곳이 베이루트다.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에 다니는 젊은 심리학자 하나 아부 살만은 동료 학생들을 상대로 고민거리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 베이루트에서 죽게 될 경우 관심을 보일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 아부 살만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게 되면 최소한 사망자의 이름이라도 불러줍니다. 그러나 베이루트에서는 ‘30명이 죽었다’고만 말합니다. 학생들은 죽은 사람이 단지 시체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존재였다고 느끼고 싶은 겁니다.”

레바논의 한 여성 사회학자는 이런 베이루트의 상황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었다. 1983년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친구와 함께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저녁 무렵까지 기독교와 이슬람 민병대는 야포와 기관총을 동원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집주인은 저녁 준비를 멈추고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다음과 같이 정중히 물었다. “지금 식사할까요,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요?”

“전투가 벌어지면 모두들 빵, 생수, 통조림 등과 같이 금방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구입합니다. 집에 틀어박혀 사탕과 땅콩을 즐겨 먹기도 하구요. 그리고 사태가 진정되면 부자들이 돌아와서 캐비아(철갑상어의 알)와 훈제 연어를 삽니다.” 베이루트의 최고 부유층은 구디 슈퍼마켓을 즐겨 찾는다. 슈퍼마켓 주차장에는 항상 메르세데스-벤츠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머리가 텁수룩한 젊은이가 구디 슈퍼마켓에 총을 들고 들어와 계산대에 있는 직원을 위협하자, 고객들 가운데 3명의 여성이 구찌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내 강도를 쏘고 계속 쇼핑을 했다.

베이루트 주민들은 시가전을 날씨 이야기하듯 말한다. “밖은 어때요?”라는 말은 “비가 오느냐?”는 뜻이 아니라 거리 상황이 어떤가를 묻는 것이다. 레바논 방송국은 도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동 베이루트와 서 베이루트를 잇는 도로가 택시 기사들의 총격전으로 오후 5시부터 폐쇄되었습니다. 다른 도로를 이용해 주십시오.”

대 혼돈에 대응하면서 많은 베이루트 주민은 이전에는 몰랐던 자신들의 미덕을 발견하게 되었다. 레바논인은 국민으로서가 아닌 가족, 이웃, 종교 공동체에서 정체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베이루트의 상황은 인류 문명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동의 스위스라고 불리던 곳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베이루트 체험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이 확연히 달라졌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베이루트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나는 유대인이 국가를 건설한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럽에 거주했던 유대인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문화권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성공과 실패, 말과 행동의 차이를 이해하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아랍 세계에서 삶의 리듬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아랍인의 삶은 애매한 반원형이며 결코 각을 이루지 않는다. 서양에서 종교적 상징은 십자가와 유대의 별로, 둘 다 날카로운 각이 있다. 반면에 이슬람의 종교적 상징은 초승달로 넓고 부드러운 활 모양이다. 아랍 사회에서는 실패를 변명하는 수사법이 발달했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와도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심지어는 꽃다발을 보내기까지 한다.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목적을 세우면 이를 이루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유럽 시오니스트의 성실함을 가장 잘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는 단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레바논을 침공했다. 그러나 레바논은 들어가기는 쉬워도 빠져 나오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나는 그들이 오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정말 이상한 침입자들이었다. 그들은 순진한 외국인의 모습으로 베이루트에 와서는 3년 후 현지인에 사기당해 모든 것을 빼앗겨 화가 난 여행객처럼 떠났다.

1982년 6월 13일 오후 10시경, 동 베이루트 팔랑헤 민병대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침공 소식을 알렸다. 침공이 시작된 지 일주일 후 이스라엘 탱크와 장갑차들이 베이루트 중심가에서 5마일 떨어져 있는 레바논 대통령 관저에 일렬로 정차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고 처음 몇 주 동안은 신나는 날들이었다. 이스라엘 군인은 레바논의 기독교도 주민과 인사를 나누었고 그들로부터 선물까지 받았다. 이스라엘 군은 세계 최대의 면세점이라고 하는 레바논에서 물건을 가득 사서 트럭으로 이스라엘에 반입했다. 누가 전쟁을 지옥이라고 했던가! 곧바로 미국 유대인들이 찾아왔다. 이스라엘에 거액을 기부해온 이들은 이스라엘 군의 호위를 받으며 동 베이루트를 둘러보았으며, 쌍안경으로 이스라엘 군이 ‘테러리스트’를 포격하는 것을 보았다. 일 년에 10만 달러 이상 기부한 이들은 이스라엘 정보장교의 전황 브리핑까지 받았다. 이스라엘 교육단이 병사들에게 배포한 14쪽짜리 팸플릿에는 레바논 침공의 정치적 목적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레바논 기독교도의 안전을 확보하여 그들이 주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정치 구조를 정돈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기독교도가 우위를 점한 상태였지만 이를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것이다. 레바논은 서구와 아랍 세계와의 중계무역으로 부유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쿠웨이트는 물론 저 멀리 오만까지 레바논의 중계무역에 의존했다. 레바논의 교육은 서구식이었고, 이런 교육을 받은 국민들은 합리적으로 비즈니스를 했다. 따라서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두 번째로 평화조약을 체결할 아랍 국가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체결할 국가였다.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을 침공하자마자 아라파트의 착각도 무너졌다. 그 첫 번째가 PLO는 여전히 아랍 민족주의 부활의 전위대이며 아랍 세계의 양심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랍의 부유한 산유국들은 PLO의 혁명을 내세우는 수사법, 엉거주춤한 태도, 실패를 거듭하는 무력투쟁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또한 1979년의 이란 혁명은 이스라엘의 존재보다 군사적․이데올로기적으로 아랍 산유국에 더 큰 위협을 주었다. 서 베이루트 포위가 한 달 간 계속되자 이슬람 지도자들은 1982년 7월 3일 아라파트에게 레바논을 떠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나는 아라파트를 인터뷰했다. 이스라엘 침공에 대한 아랍 세계의 대응에 실망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아랍이 얼마 동안이나 침묵하겠소?”라고 응대했다. 진실로 비극적인 것은 그들의 오산이 성실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난민, PLO 관리의 희망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1982년 8월 21일부터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베이루트식 포커 게임

PLO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할 무렵 이스라엘은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라파트와 PLO 대원들은 독자적인 마지막 작전 기지에서 뿌리가 뽑혀 중동 각국으로 흩어졌고, 각 아랍 정권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더 이상 이스라엘에 직접적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베이루트는 포커판 같은 곳이었다. 포커는 마지막 한 방에 대역전이 일어날 수 있는 게임이다. 역사란 뜻하지 않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때가 많다. 샤론은 베이루트로 쳐들어가 아라파트를 몰아냄으로써 서안과 가자지구를 영구히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바논 시아파는 처음에 이스라엘 군이 자신들의 촌락을 전쟁터로 만든 PLO 게릴라들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이들에게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82년 8월, 아라파트를 몰아내고 승리한 이후에도 이스라엘 군이 계속 주둔하겠다는 의도를 알아채고는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군이 기독교 민병대를 통해 치안을 유지하려 하고 시아파의 종교적 감정에 무관심하자 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시아파의 대 이스라엘 공격은 매우 다양했다. 당나귀에 폭발물을 실어 공격하고, 매복 공격, 차량을 이용한 자살 폭탄 공격, 도로변에 폭탄 설치하기, 저격수 동원, 폭약을 가득 적재한 적십자 앰뷸런스 등 수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시리아와 이란은 뒤에서 기꺼이 이들을 도왔다. 이스라엘 군은 지금껏 아랍의 적들로부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시아파의 무자비함을 몸소 겪어야 했다. 이들은 적을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각기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어도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성과를 즐길 뿐이었다. 이스라엘 군은 공포에 질려 기지 밖으로 나오기를 꺼렸다.

1982년 여름 이전의 PLO와 아랍 세계가 그 이후의 PLO와 아랍 세계와 절대 같을 수 없듯이, 이스라엘과 유대인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레바논 청소’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명성을 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바논 침공이 대 실패로 귀결된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이 아니라 레바논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정책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의 레바논 주둔이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의 레바논에 대한 선입견이 대단히 피상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레바논이 자신들을 미워하는 비이성적 국가라는 선입견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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