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선택 룰라
브리뚜 알비스 지음 | 가산출판사
브라질의 선택 룰라
브리뚜 알비스 지음/박원복 옮김
가산출판사/2003년 11월/334쪽/12,000원
프롤로그
1960~70년대에 무장투쟁과 혁명이었던 것이 2002년에는 투표를 통한 선거와 진보로 바뀌었다. 룰라가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2002년 선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우리네 삶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보는 관점과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수집된 여러 정보와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들과 더불어 브라질 국내에서 출간된 수백 건의 인터뷰 내용과 기고문들 그리고 잡지 및 서적 등을 섭렵함으로써 보다 많은 생각을 함과 동시에 그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룰라가 취임하던 날, 취임식이 거행되던 자리엔 수많은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2003년 1월 1일, 장엄한 취임식장은 최근 들어 가장 자유분방했던 행사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그 모습은 일반 대중의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다. 한 여성이 접근을 차단하는 로프를 넘어 룰라에게 접근하자, 룰라는 그녀가 자신과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경호팀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최고 상징 가운데 하나인 대통령 취임식은 열광과 환희의 축제였고, 취임식장의 주인공은 일반 대중이었으며 그들은 브라질의 최고 엘리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룰라는 대통령 취임 전에 이미 전설로 통했다. 군정시대(1964년~84년) 때의 집권자들이 브라질 국민으로부터 주셀리누 쿠비체크(1960년 지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 건설을 이룩하는 등 '50년을 5년에'라는 개발지상주의 정책을 펴 브라질 현대화를 이끌었던 대통령으로 지금도 브라질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전 대통령이 심어준 활력과 이상 그리고 꿈을 빼앗아 가버렸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을 ‘지레따스 자 Diretas Ja(1984년 군정 말기에 브라질 전역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으로 이로 인해 군정이 종지부를 찍고 민간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와 룰라가 되돌려 주었다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알랭 투랜느는 “룰라의 당선으로 불가시성과 일반 대중의 침묵은 끝났다.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하면서도 단절이 없는 과정을 통해 선출된 룰라가 두 개의 브라질을 단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우리는 그의 말에 동감한다.
브라질 국민은 인플레이션, 조세 및 연금을 비롯한 사회복지 문제, 달러와 같은 강한 화폐의 부재, 노동 분야의 혼란, 부패, 일부 계층의 면책특권, 가부장주의, 항상 반대파들과도 동참을 서슴지 않으면서 사회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생리적으로 보수주의인 사람들 등 강력한 적들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바로 그 반대파들이 그 보수주의자들과 동침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룰라 정부가 과연 성공할 것인가? 그것을 알려면 4년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며, 당선된 후보가 취임하고, 그는 헌법이 정한 임기 동안 권좌에 머문다. 임기 첫 몇 개월은 많은 의심과 기대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시기이다. 2002년 선거 이후, 만일 포용정책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조정 정책을 우선적으로 실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은 이상 그들의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의 열망에 대한 회답으로 경제 발전과 국력 강화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어떤 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브라질을 성공적으로 통치하지 못할 것이다. 1. 살아 있는 전설, 룰라
북동부 오지에서 태어나다
가족들에 따르면 형제들 가운데 막내인 룰라(Lula)의 이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실바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형제들 사이의 혼란을 막기 위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룰라는 오늘날 그 별명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처음 호적에 등재된 그의 이름에는 룰라가 빠져 있었으며, 룰라라는 별명은 그 이후 세월이 흐른 뒤 상파울루에서 호적상 공식적으로 그의 이름으로 일부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날짜는 1945년 10월 6일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증명서에는 같은 해 10월 27일로 되어 있다. 룰라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출생일을 10월 6일이라고 등록을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두 개의 생일을 가졌다면서, 자신은 10월 27일에 태어났다고 말한 어머니의 기억을 더 믿는다고 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경우 룰라가 태어나기 전 이미 부인을 버리고 다른 여성과 딴살림을 차렸으며 룰라의 출생을 지켜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막내인 자신을 홀몸으로 낳아 끔찍이 사랑하며 길러주었던 어머니의 기억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룰라는 북동부 뻬르남부꾸 주의 까에떼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당시에는 가랑늉스 구역 가운데 하나인 바르젱 그란지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도(州都)인 헤시피에서 252km 떨어진 농촌으로 그의 가족은 집 한 채와 작은 창고 하나 그리고 한 개의 학교가 들어서 있는 연립주택에 살았으며 상수도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처럼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룰라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 가운데 하나는 배고픔과 먹을 것에 관한 것이었다. 2002년 4월 당시에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룰라는 친지들과 보좌관들을 대동하고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 역정이 시작된 옛집의 잔해들을 보고는 짙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1940~50년대에 브라질에서 가장 못사는 곳으로 알려진 북동부로부터 약 40여만 명의 주민들이 남동부의 대도시인 상파울루로 이주해갔다. 그 가운데 6만 2천여 명이 룰라처럼 뻬르남부꾸 주 출신이었으며 그들 대다수는 이른바 ‘빠우-지-아라라'라고 불리는, 지붕이 없는 닭장차 모양의 트럭을 타고 등받이도 없는 나무 의자에 짐처럼 쪼그리고 앉아 수십 일 동안 수만 리를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 대다수는 룰라의 가족처럼 가뭄과 기아, 그리고 움막 같은 집에서 도망을 쳐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도 모두 버린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하여, 꿈과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의 엑소더스에 비하면 오늘날 북동부 지방에서 북부와 남부로 이주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다. 북동부 지방의 이주 현상은 보다 큰 차원의 문제들을 야기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주로 농촌이 황폐화되어 갔으며 대신 중소도시들에 그 인구가 집중되면서 빈민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도심으로 몰려드는 노동력을 흡수할 산업화와 경제 발전 그리고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먼저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농촌에서는 자연이 제공하는 소비용 식료품 생산과 어업, 수렵 그리고 간단한 추출 활동(고무나무에서 송진 추출 등)으로 그나마 가난을 견딜 수 있었지만, 그런 시기는 혹독한 가뭄으로 끝나버렸고 과도하게 제약이 많은 노동법으로 오래가지도 못했다. 이주민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받은 자들이었다.
길거리에서 배운 생존의 법칙
룰라가 초등학교를 마친 것은 1956년이었다. 그는 열두 살 때 글을 깨우쳤으며, 18세가 되던 1963년에 국립직업훈련소의 일종인 세나이에서 수도공 직업훈련 과정을 마쳤다. 그때 그의 어머니 린두 여사는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는 ‘원하는 자는 할 수 있으며 할 줄 알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린 것은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둘씩 역경을 극복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독학은 계속되었다. 활발한 행동과 영리함이 첫 번째 생존법칙인 길거리 생활은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의사소통 문제와 인간관계의 문제, 그리고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행상인 생활은 어린 그에게 인생의 스승이요, 학교였다. 남의 얘기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그는 대화라는 오래된 인간의 전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인간관계 속에 기업인들을 비롯하여 종교인들 그리고 색깔이 분명한 행동하는 지식인들을 끌어 모을 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그의 개인 교사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보좌관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으며 노조 및 정치활동에 있어서도 훌륭한 협상가가 될 수 있었다.
공화국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정치적인 것이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정부란 학력을 뛰어넘는 개인적 자질을 요구하는 지도력과 지도부 그리고 팀이라는 3박자와도 같다. 룰라가 항상 팀을 중시하며 일할 줄 알았다는 것을 고려할 경우, 적극적인 참여 그룹 형태로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되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그로 하여금 권력과 일방적 지시를 혼동하지 못하게 하는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된 핵심 부서를 설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도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보좌관들과 고문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경력이 화려하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자체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닌 만큼, 임기 초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신임은 보좌진들과 고문들의 능력과 책임의식에 좌우된다. 사실 브라질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학벌이 우수한 많은 대통령들이 오히려 부정적인 유산을 많이 남겼다. 그런데 우리는 그 원인이 나쁜 통치행위 때문인지 아니면 사기성이 농후한 의도적인 통치행위인지 알지 못한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아마 두 가지 다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그 빚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빚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회적 부채라는 것이다.
신념이 강하고 결단력이 있는 룰라
투쟁을 잘하고 연설을 잘하지만, 말수가 많은 그는 이따금 불안한 기질을 지닌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솔직하며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 또한 의지력과 개성 그리고 신념이 강한 자로 자신의 주장을 집요하게 주장하여 관철하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니셔티브와 지도력, 창의력이 풍부하며 매사에 윤리를 강조함과 동시에 적극적이다. 아울러 자신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회계층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룰라는 7년간의 노력과 투쟁 끝에 브라질 최대 노조 가운데 하나인 금속노조 위원장직에 올랐다. 브라질 시사 주간지인 「이스뚜 에」에 실린 1970~80년대 정치 지도자들의 다섯 가지 증언들도 룰라가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할 줄 아는 사람, 친절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 저돌적이면서도 협상에 있어서는 융통성이 있으며 현실주의적인 사람 그리고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참을성이 많고 의리 있는 친구 같은 사람임을 보여 준다.
군사정권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룰라는 파업을 주도하고 권좌에 있던 군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군정의 철권통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과거나 지금이나 군중을 리드하고 동맹을 맺으며 친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남겨놓았다. 그는 작은 기쁨이 있는 일에도 항상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룰라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성공과 비극이 교차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룰라는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또는 노조에서나 정치에서도 실패 이후에 놀라운 재기력을 보여주었다. 룰라 대통령은 이제 국민의 공복이다. 개인에서 공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 노동운동을 하다
군사정권과의 충돌
1975년과 1978년 사이에 브라질 노동운동은 중요한 방향 전환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기에 이른다. 룰라는 브라질 공산당 지도부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연고 지역에서의 노조운동도 줄여나갔다. 이것은 그의 인생역정뿐만 아니라 노조운동에서도 중요한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그는 분명한 어조와 행동으로 자신을 어떤 사상적인 틀 속에 가두는 것을 거부하였다. 사실 그는 정치성이 없는 단순한 노동자였으며 사상적으로는 보수주의자였다. 그 당시 한 신문기자가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라고 묻자, 그는 “아니요, 나는 수도공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79년 3월 14일 약 8천 명의 금속노조원들이 성 베르나르두 두깡뿌의 빌라 에우끌리지스 스타디움에 모여 파업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정부가 개입하였고 노조 지도부는 직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파업의 영웅으로 떠올라 15일 뒤 다시 노조위원장직에 복직한다. 1980년 임금투쟁은 룰라가 위원장으로 있던 성 베르나르두 두깡뿌․지아데마 금속노조와 성 베르나르두 두 깡뿌 교구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어 놓았다. 군사정권은 파업의 정치적 여파를 우려해 강경한 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노조에 개입하여 지도부의 직위를 박탈하였다. 교회의 뒷마당에는 ‘파업 기금’이라는 조직이 운영되었다. 성 베르나르두 두 깡뿌는 육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때의 파업은 41일간 지속되었다.
1981년 구속된 룰라는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 군사재판소에서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20일 최고군사법원에 의해 형 집행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정치사회질서국 DOPS에서 31일간 구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아들 룰라는 감옥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였다. 어쨌든 노조의 지도부가 구속되자 16인으로 구성된 노조원들이 임시 지도부를 구성하여 파업을 계속 이끌었다. 룰라는 감옥에서도 노조원들에게 메모를 건네며 파업을 지휘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자신이 얼마만큼의 끈기와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소외계층의 대변자
1964년 군정이 출범하면서 구입대체 산업이 육성되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국가 기간산업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으며 브라질은 내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국제 경쟁력을 상실해 갔으며, 재원의 효율적인 배치 면에서 내적인 비효율성이 크게 증가하였다. 바로 그 무렵, 노동자들이 하나의 몸체를 이루며 무시할 수 없는 사회의 한 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룰라는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거대한 경제적 변화의 시기에 노조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 시대는 일부 극소수의 농촌 대지주들에 의존하던 구 경제 모델의 무기력함을 타파하려고 한 변화의 시대였다. 어쨌든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가 브라질 노동계의 핵심 지역에서 이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현재까지의 각종 언론 인터뷰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가난을 몸소 겪었기에 사회의 소외 계층이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고, 또 그 가난을 통해 생존하는 법을 배웠으며, 아울러 노조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초등교육 과정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지식의 한계를 극복해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타고난 직선적인 성격과 솔직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지도자로서 큰 신뢰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가 많은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편안하게 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성격 덕분에 노조에 들어가서도 유일하게 반대파들과도 상당한 친분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그들로부터도 많은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셋째, 노조원들에게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각종 정책을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넷째, 무슨 일이든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 정공법을 택하였는데 그래도 필요할 경우엔 후퇴도 할 줄 알고 양보도 하면서 절대 대화와 타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위해 노조내의 폭력은 물론 파업에서의 폭력 행위도 일체 금지하였으며, 사주와 한번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노조원들의 반발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냈다. 그래서 그를 아는 많은 기업인들은 여러 노조 위원장들 가운데서도 룰라가 가장 합리적인 협상가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3. 노동자당을 창당하다
1970년대 상파울루 위성 도시들인 ABCD(ABC 지역에 '지아데마(Diadema) 시'를 합친 약어이다) 지역의 정치운동은 다음 여건으로부터 탄생한다.
첫째 노조운동으로부터, 둘째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참여로부터, 셋째 해방신학에 심취한 종교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넷째 모든 이데올로기의 범주를 포괄하는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들로부터, 다섯째 그러한 움직임의 건설적인 발전을 수용하는 기존의 사회 분위기로부터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