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 이야기
임두빈 지음 | 가람기획
초기 기독교 미술은 기원후 5세기까지의 기독교 미술을 말하는데, 이 시기의 기독교 미술은 그리스· 로마 미술을 모방하고는 있으나 현저히 그 수준이 저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 미술이 당시의 이류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데다, 미술의 전반적인 수준이 저하된 데에도 원인이 있고, 기독교 미술이 자연스러운 가시적 현실상을 표현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타콤(catacomb)이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하묘지이자 예배장소에서 초기 기독교 미술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로마의 산티 피에트로 에 마르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나 프리스킬라 카타콤의 벽화는 초기 기독교 미술의 성격과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 벽화의 화법을 이어받아 그리고는 있으나 그 기법이 치졸하고 단순하다. 삼류 화가들이 그린 것이 분명한 이들 그림은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근본적으로 세련된 화법이나 기술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성서 이야기의 효과적인 전달이었던 것이다.르네상스(Renaissance)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ascita)에서, 그리고 더 소급해보면 라틴어 레나스키(Renasci)에서 유래한 말이다. 레나스키는 재생(再生)을 뜻한다. 즉,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의 싹은 중세 말기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 회화 : 미술에 있어서 최초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사람은 화가 지오토(1266∼1337)였다. 지오토의 작품으로 유명한 것은 파도바의 델아레나 성당 벽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를 주제로 한 벽화다. 지오토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발상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으리라. '죽은 예수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어떠했을까? 예수의 죽음이 있었던 당시의 현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오토의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중세의 화가들은 전해 내려오는 도상의 틀에 따라 성서의 이야기를 그리면 되었으나, 지오토는 그것을 파기하고 새로운 발상에 의해 그림을 그림으로써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연 선구자가 된 것이다. 이 새로운 회화법은 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초엽 마사치오(1401∼1428)라는 천재가 지오토의 전통을 계승하여 혁신적으로 발전시킨 새로운 미술이 대두했다. 마사치오는 지오토 회화의 풍부한 양감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짜임새 있는 구도에 훨씬 자연스러운 공간 구성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과학적 원근법을 활용하여 그림 전체에 공간적 생기를 불어넣었다. 과학적 원근법인 선원근법은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인 브루넬레스키(1377∼1446)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그림에 훌륭하게 활용한 최초의 화가가 마사치오였다.
· 조각 : 르네상스 조각의 진정한 첫 출발은 도나텔로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세의 조각상은 항상 배경의 건축 구조와 함께 붙어 있는 것이어서 건축적 배경이 없이는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도나텔로는 이러한 중세 조각의 한계를 과감하게 넘어섰다. 피렌체의 오르 산 미켈레 성당에 놓여진 도나텔로의 <성 마르코> 상이나 <성 조르지오> 상은 더 이상 건물에 예속된 조각상이 아니라 홀로 떼어놓아도 당당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는 독립된 조각상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독립적 성격이 도나텔로에 이르러 새롭게 부활했던 것이다. 도나텔로는 보기 좋은 구성에 신경 쓰기보다는 사건의 생생한 현실성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인물들의 뒤에 있는 반원형 아치와 기둥들의 원근법적 배치는 실내 공간을 보다 넓게 보이게 한다.
· 전성기 르네상스 : 이탈리아어로 '500년대'를 뜻하는 친퀘첸토의 초기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이 시대를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예술 분야의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라파엘로, 티치아노(1488∼1524) 등 불멸의 거장들이 수많은 걸작을 창조했다. 예술가를 단순한 기술자나 장인이 아니라 천재로 여기는 르네상스인들의 생각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에게 더욱 큰 도전정신과 힘을 불어넣어 새롭고 놀라운 작품을 만들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완성된 그의 그림은 몇 점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숙고하는 성격과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바의 심오한 회화적 효과가 여의치 않을 때는 더 이상 그리지 않고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그냥 놔두고 보는 그의 창작태도 때문에 완성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에 의해 '최후의 반찬'이 그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격이 다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는 사건의 실재성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그는 이 정경에 기념비적인 영적 생명의 영원성을 부여했다. 현실성과 초월성의 조화, 영원한 이상미의 시각적 현실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또 하나의 걸작은 <모나리자>다. 이 그림은 신비스러운 생명감을 경탄할 만한 표현 기법으로 현실화시킨 놀라운 작품이다. 그는 형상이란 그늘의 제 관계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에 의해 인물을 표현했다.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을 빛낸 미술가로서 또 한 사람의 위대한 거장 미켈란젤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보다 스물세 살 아래다. 그는 레오나르도만큼 다방면에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조각과 회화에 있어서만큼은 그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양식은 곧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조각양식이 되었다. 그가 <다비드> 조각상 이후 제작한 <모세>나 <반항하는 노예>, <죽어가는 노예> 등에는 미켈란젤로의 개성을 통해 되살아난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의 숨결이 느껴진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전성기 르네상스가 남긴 기념할 만한 회화다. <아담의 창조>는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순간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미켈란젤로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겨, 훗날 수많은 사람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1525년에서 1600년 사이 서양 미술은 혼돈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1520년경에 들어서면서 미술은 이제 더 이상 발전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완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새로운 천재들에게는 어찌 보면 불행한 것이기도 했다.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여러 모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다른 성격을 지닌 그림이다. 틴토레토는 여기서 매우 동적인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아니라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 시기 최고 화가로서 이 시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이다. 엘 그레코는 상당한 수준의 지적 열망을 지녔던 다독가였다. 철학과 역사, 종교, 정치, 수학, 문학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독서량은 그의 예술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은 엘 그레코의 대담한 화법이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 호소력 있게 표현된 작품이다.로코코(Rococo)는 로카유(rocaille) 장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용어도 원래는 경멸의 뜻으로 쓰였던 것인데, 이제는 프랑스 혁명 전의 유럽 미술양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로코코 미술은 바로크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 바로크가 지닌 장중함이나 위엄과는 달리, 작고 섬세하고 우아한 경쾌함을 추구했던 미술이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를 시작으로 해서 프라고나르와 부셰, 약간 다른 성격의 샤르댕에 의해 전개되어 갔다. 와토(1684∼1721)의 그림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여 원화를 감상하지 않고는 그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섬세한 붓놀림 속에서 색채는 미묘한 조화를 이루며 빛의 떨림을 만들고,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은 우아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샤르댕(1699∼1779)은 로코코의 일반적인 화풍과는 달리 세련된 우아함보다는 깊이 있는 색채에 인간미 어린 표현을 보여준 화가였다. 풍속화와 정물화를 주로 그렸는데 그가 그린 풍속화는 서민이나 중류층의 생활상이 주 대상이었다. 샤르댕의 치밀한 구도 감각은 정물화에서 특히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데, 그의 정물화들은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들처럼 화면 가득 넘치듯 사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간소하게 정돈된 물상들이 계획적인 구성에 의해 배치되어 있다. 당시 정물화의 구도에 관한 한 샤르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그린 <담배상자가 있는 정물>이나 <점심준비>, <살구를 저장해둔 병> 등은 오늘날까지 구도를 공부하려는 미술인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고 있다.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사실주의와 인상주의20세기의 새로운 미술낭만주의(Romanticism)라는 말은 중세 유럽의 모험담을 가리키는 로망스(romance)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유럽의 정신사에 있어서 가장 정의하기 힘든 사조의 하나다. 낭만주의라는 말 자체가 특정한 양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채로운 정신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대가 배출한 다양한 화풍의 하나로 몽환적인 세계를 표현한 그림들이 있다.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로는 스페인의 고야(1746∼1828)와 영국의 블레이크(1757∼1827), 퓨슬리(1741∼1825) 등이 있는데, 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가시적인 현상세계의 이면에 광포한 힘과 열정과 수수께끼로 가득 찬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 불가사의한 세계를 회화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낭만주의 정신이 느낀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떠오르는 불안과 공포를 회화적으로 대변한 화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야의 생애는 외형적으로는 궁정화가로서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고야의 내면에는 타인이 보지 못했던 깊은 공포와 불안이 잠재해 있었다. 어두운 환상의 세계를 그린 그의 많은 그림들은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근원적인 불안과 거역할 수 없는 근원적인 힘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다. 블레이크도 고야 못지 않게 환상의 세계를 즐겨 그린 사람이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신비적인 환상 속에서 살았던 블레이크를 그 당시 사람들은 기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인 미술을 거부하고 그 자신의 환상세계를 자유롭게 그리고자 했다. 블레이크의 <천지창조주>를 보면 신이 빛의 구체 속에 하나가 되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천지창조주로서의 신을 '우리첸(Urizen)'이라고 부르면서 악한 영혼의 존재로 보았다. 이처럼 그는 독특한 신학사상을 지닌 고독한 예술가였다. 그의 관심은 외면세계가 아닌 내면세계에 있었고, 그로 인해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상력과 주관적 비전을 중요시하고 표현하는 환상적인 그림이 되었다. 터너는 컨스터블과 더불어 영국 최대의 풍경화가다. 그는 수채물감으로 매혹적인 풍경화를 그려 영국 화단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끊임없는 도전 정신으로 사실적인 풍경화에서부터 추상적인 분위기의 색채회화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양식의 실험을 거듭했던 화가였다. 그의 <컬러 비기닝>은 색채추상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컨스터블(1776∼1837)은 터너와는 다른 시각으로 자연을 표현한 화가였다. 터너의 그림이 환상적이고 역동적이며 빛으로 충만한 주관적인 풍경화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데 비해, 컨스터블은 아늑하고 때로는 장엄한 자연의 모습과 시골 정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충실히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그린 대상들은 우리에게 아늑하고 따뜻한 인간적 정취를 주는가 하면, 때로는 시적 정취를 느끼게도 하고, 대자연의 광활한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들라크루아(1798∼1863)는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최대 화가다. 들라크루아의 천재성은 모든 낭만주의 화가들을 능가한다. 그는 문학과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들라크루아는 근대 색채학의 선구자로서 보색대비에 의해 색의 선명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원리를 효과적으로 그림에 적용한 화가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풍물 그림에서도 보색대비 효과를 사용함으로써 화면에 심리적인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빨강과 녹색, 노랑과 보라색 등의 대비효과에 의한 색채표현 방법은 훗날 인상파 회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이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을 열광시키고 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보수파들의 중심이 되었던 화가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였던 앵그르(1780∼1867)였다. 앵그르는 그리스·로마의 고전미술을 숭배하여, 절제된 구도와 색채, 명확하고 안정감 있는 형태로 신고전주의 회화의 이상을 실현했다. <샘>, <목욕하는 여인들 - 하렘의 내부>, <오달리스크> 등의 작품에서 앵그르는 정적이면서 차가운 명료함으로 빛나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회화미를 창조해냈다. 제리코(1791∼1824)는 들라크루아보다 앞서서 낭만주의 회화세계를 연 화가다. <말을 탄 근위사관>에서 보이는 형태의 활력과 절묘한 색의 빛남은 낭만주의 회화세계로 들어선 제리코의 의욕을 엿보게 한다. 그가 지닌 낭만주의적 이념이 최고도로 발휘된 작품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이다. 극한 상황에서 죽음을 마주 보고 사투를 벌이는 인간 의지의 몸부림은 낭만주의 미술의 훌륭한 소재였던 것이다.
낭만주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그 끝에, 낭만주의 파도의 흔적을 얼마간 지니고 있었던 독특한 개성의 화가들이 있다. 바르비종의 시골마을과 농민들을 그린 밀레(1814∼1875)와 풍경화가 코로(1796∼1875)는 개성적인 관점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들이다. 밀레는 대지와 농촌 생활을 사랑했고, 농민들의 모습을 깊은 종교적 감정으로 응시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만종>이나 <씨 뿌리는 사람>, <양치는 소녀>, <이삭줍기>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에는 대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따뜻한 경건함이 배어 있다. 자연과 더불어 존재함에 감사드리는 시정 어린 경건함이 이들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사실주의(Le Realisme)라는 명칭은 화가 쿠르베(1819∼1877)가 자신의 개인전에 붙인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쿠르베는 당시 「리얼리즘 선언」이란 책자를 사람들에게 배포하면서 "내가 속한 시대의 풍속, 관념, 현실을 본 대로 그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돌을 깨는 사람> 과 <오르낭의 매장>, <폭풍 후의 에트르타 절벽> 등의 작품으로 격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비난을 받은 이들 작품은 쿠르베가 지닌 사실주의 정신의 선명한 회화적 발언이었다.
1863년 프랑스 파리의 살롱은 유례 없이 화가들의 비난으로 들끓었다. 이 해의 살롱에 너무 많은 수의 작품이 낙선되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급기야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가 낙선 작품들을 모아 따로 '낙선 전람회'를 열어 주기로 했다. 낙선 전람회는 대성황이었다. 여기에 인상주의 회화의 문을 연 마네(1832∼1883)의 작품도 전시되었다. 그의 <풀밭 위의 점심>은 전시회 첫날부터 경악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림의 내용이나 기법 등 모든 면에서 마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마네는 화면에서 전통적인 명암법을 파괴하고 강렬한 명암대비에 의한 평면적인 대상표현을 함으로써 인상주의 혁명의 중요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네와 더불어 인상주의 미술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모네(1840∼1926)는, 대상을 직접 마주 대하지 않고는 절대로 화면에 붓을 대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