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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죽음의 비밀

문국진 지음 | 예담
Part 1 반 고흐는 왜 귀를 잘랐는가



1. 깊어가는 불안과 고독



빈센트야, 빈센트야!이렇듯 반 고흐는 '별나라 여행', 즉 '죽음의 여행'을 생각하고 밤하늘의 별과 실편백나무를 그리곤 했던 것이다. 앞서 편지에 언급했듯이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가의 죽음'과 '별나라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3. 찬란한 노란색을 찾기 위하여해바라기는 여름 꽃이다. 아를에서도 여름이면 해바라기 밭에 꽃이 만발한다. 고갱이 아를에 온 것은 10월말이기 때문에 해바라기 꽃은 다 져버렸을 무렵이었다. 12월에 고갱은 그림 한 점을 반 고흐에게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갱이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당시 그가 반 고흐에게 강조하던 것, 즉 그림이란 기억에 의존할 때 더 우월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이 미술 전문가들의 평이다. 고갱은 이 그림이 자신과 반 고흐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라 했다. 하지만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반 고흐가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한 적도 없었다.



꽃잎이 다 떨어진 해바라기는 커다란 눈처럼 보인다. 반 고흐의 눈은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알 수 없고 또 눈 주변의 처리 때문에 멍한 표정으로 보인다. 반 고흐가 들고 있는 붓은 너무 가늘어서 붓이 아니라 바늘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이젤 뒤의 벽에는 <푸른 나무>와 비슷한 고갱의 대형 풍경화가 보이는데 이 그림의 소실점이 반 고흐의 위에 놓여있어 그림이 사람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이 그림에는 미묘하게 반 고흐를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는 고갱의 의도가 숨어 있다.

반 고흐는 이에 대해 고갱이 자기의 재능을 이용하여 가혹하게 장난을 쳤으며 자신에게 도전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예술적 표현은 자유롭다고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농락당한 것이다.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모델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림에는 표현하는 사람의 주관이 담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반 고흐로서는 더 이상 불만을 나타낼 수 없었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한두 번도 아니고 고갱의 표현이 가혹하다는 생각은 반 고흐의 굴욕감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반 고흐는 고갱과 같이 카페에 가서 압생트를 마시다가 술잔을 고갱에게 던지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아를에 와서 주량이 줄었던 반 고흐가 고갱이 온 후로는 다시 예전처럼 술을, 그것도 독한 압생트를 많이 마시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갱의 그림이 화근이 되었다고 보인다.거만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고갱과 인간적이고 고독에 찌든 반 고흐는 2개월 간 같이 생활하면서 여러 모로 부딪쳤다. 그러다가 11월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서 실내에서만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두 화가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고갱은 주로 기억과 상상력으로 불완전한 현실을 수정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 고흐에게 강요하였다. 반 고흐는 익숙하지 않은 그런 태도를 불편해하면서도 고갱의 생각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으나 그로서는 현실을 무시하고 상상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차이가 곧 갈등으로 번지게 되었다.



고갱이 '상상하며'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보고 반 고흐는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났다. '미쳤다'는 것은 반 고흐가 가장 싫어하면서 두려워하는 말이었다. 결국 반 고흐가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반 고흐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며 사과했지만 이 사태를 비관적으로 생각한 고갱은 자기가 아를을 떠날 것이라고 고흐의 남동생인 테오에게 편지로 알리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기분이 상한 고갱을 겨우 달래 12월 중순경에 함께 몽펠리에로 여행을 떠났지만 현지에서 다시 싸우고 말았다. 고갱은 자신이 숭배하는 화가 라파엘로, 앵그르, 드가를 반 고흐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반 고흐는 자기가 숭배하는 화가 밀레, 도비니를 고갱이 그리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서로에게 불만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불만이 쌓인 속에서도 한 달을 같이 지내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아질 줄 모르고 점점 멀어져만 갔다.



12월 23일은 고갱이 아를에 온 지 두 달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이것은 고갱이 떠난다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 동시에 고갱이 떠남으로써 '화가의 공동체' 실현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데에 대한 실망의 표시였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4일에서 다음해 1월 7일까지 2주 동안 아를 시립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했다. 우선 그는 자기의 병보다도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에 대해 신경 썼다. 그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은 괜찮다며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고 전한다. 이것은 아마도 동생에게 전적으로 경제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병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심리적 작용이 더 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반 고흐는 자기 병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고 이제는 다 나았다고 낙관했다.반 고흐는 1887년 5월, 생레미 요양원에 정식으로 입원하고 그 다음달부터 실편백나무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과 <수확하는 사람>에 이어 '해바라기'와 '실편백나무'를 통해 생(生)과 사(死)를 대비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실편백나무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예전부터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묘 근처에 이 나무를 심어왔다. 이것이 죽음의 상징이 된 이유는, 그 잎이 어두운 빛깔이며 나무를 한번 자르면 그 뿌리에서 다시는 싹이 돋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를에서는 원대한 희망에 불타서 밝게 빛나는 '생명의 꽃' 해바라기에 열중했던 반 고흐였지만 '화가 공동체'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자 급속히 죽음 쪽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반 고흐의 실편백나무는 하늘을 향해 불타는 듯이 치솟고 있는 것이 단지 어두운 죽음의 세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반짝이는 밤>에서 그가 그린, 하늘을 향하여 불타는 듯한 실편백나무는 분명 하늘을 향한 울부짖는 그의 절규이다. 반 고흐는 주로 종교에 대해 "무서우리만큼의 욕구"를 느낄 때 밤하늘의 별을 그렸다. 별은 언제나 고독에 고민하는 자의 친구이며 희망의 상징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별은 중요한 상징적인 역할을 하지만 반 고흐가 그린 밤하늘의 별은 특히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를 잘 나타낸 구절이 있다.…화가들이 죽어 매장된 후,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게 작품으로 말한다. 아마 도 화가의 생애에서 죽음의 문제가 가장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별을 바라보면 지도상의 도시나 마을을 표시하는 검은 점을 볼 때와 같은 몽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밤하늘에 빛나는 점이 프랑스 지도상의 검은 점 이상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것일까?' 하고 자문해 본다. 타라송이나 루망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면, 별나라 에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타고 가면 된다. 이 생각에서의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은,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 별나라에 갈 수는 없고 또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증기선이나 마차 그리고 기차가 이 지상의 교통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핵 이나 암은 별나라로 가는 교통 수단이다.압생트에 취한 반 고흐반 고흐의 병명Part 2 반 고흐는 스스로 총을 쏘았는가

4. 영혼의 안식을 찾아서



내 영혼의 안식처, 불타는 황금 물결의 밀밭슬픔은 영원히 계속된다반 고흐가 진술한 발작시의 증상들과 압생트에 관한 많은 의학 정보를 감안하면 그의 발작에 압생트가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압생트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파리 몽마르트 아베스 가에 있는 바타이유 카페에서였는데 당시 코르몽 아틀리에에서 만난 틀루즈 로트레크가 그를 데리고 술을 마시러 다니곤 했다. 아를에 온 초기에는 기후 탓에서인지 반 고흐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노란 집'을 수리하는 동안 지누 카페에서 지내며 <아를 밤의 카페>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안과 의사 마모와 라빈은 그림의 전등 주위의 운륜과 이상한 노란 빛깔이 반 고흐가 황시증에 걸려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하였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매일 룰랭과 압생트를 마셨다. 또 고갱이 온 다음에는 그와도 같이 마셨으며 특히 귀 자르기 사건 전에는 그 양도 늘었다.



아를 시립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레이 의사가 반 고흐의 과도한 음주를 나무라자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노란 높은 음(音)에 도달하기 위해서라오. … 올 여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나로서는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오." 이것은 하나의 고백이다. 그는 아를에서 찬란한 노란색을 얻기 위해 여름 내내 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를에서 그린 <해바라기> 그림과 집의 빛깔에 노란색을, 그것도 불타는 듯한 노란색을 많이 썼다.



그가 노란색을 얻기 위해 압생트를 마셨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압생트라는 술은 색맹이라는 색채 이상을 초래하는데 황시증도 그 부작용 중 하나이다. 압생트에는 시신경을 손상시키는 테레벤 유도체가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이 술을 많이 마시면 시각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반 고흐는 아를에서 그림을 그릴 때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기기묘묘한 노랑과 파랑의 색깔을 얻기 위해 고심했고 그래서 압생트를 자주 마셨다고 한다.



무경련성 착란 상태의 압생트 중독자는 내면적인 지표를 잃고 괴상한 행동과 조리에 닿지 않는 말을 하며 멍한 상태로 고통받는다. 생레미에서 반 고흐도 이러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다. 또 압생트 중독자는 성격이 혼란해진다. 성마름, 흥분, 권위적 태도, 분노 등이 나타나 본래 성격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은 아를에서 두 달 동안 같이 생활한 고갱의 회상록에 잘 나타나 있다. 압생트로 인한 발작이 일어나면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이 공포에서 탈피하기 위해 거칠고 격렬한 공격적 충동을 느껴 남을 해치고 심한 경우에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서슴치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살인적 공격성이 스스로에게 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반 고흐가 고갱을 공격하는 대신 자기 귀를 자른 것도 압생트의 급성 중독으로 인한 발작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반 고흐가 아를과 생레미의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의 일이다. 당시의 의학 수준은 오늘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낙후해서 검사 기능, 즉 뇌파, CT, MRI 등의 다각적인 검사에 의한 진단 방법은 전혀 없었고 단지 의사와의 대화를 통한 문진, 시진, 촉진, 타진 등 의사의 감각에 의한 진단 방법밖에 없었다. 아를 시립 병원의 레이 의사나 생레미의 페롱 박사는 반 고흐의 병명이 '조울성 간질'이라고 판단했다. 오베르의 가셰 박사도 반 고흐의 병을 심각한 증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의학적인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에 반 고흐의 병명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문제는 그의 발작이 내인(內因)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외인(外因)에 의한 것이었냐이며 이로 인한 행위와 생각이 그의 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어느 정도 미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병명을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선 그의 발작의 경과와 작품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음에 병명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 첫 번째 발작 - 1888년 12월 23일

첫 번째 발작으로 자기의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2주간 병원에 수용되었다. 퇴원 후 집에서 두 점의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세 점의 <해바라기>, <파이프가 있는 빈센트의 의자> 등을 그렸다.



· 두 번째 발작 - 1889년 2월 7일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환청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자 가정부의 신고로 2월 7일에 다시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 시기에 자기가 그렸던 그림을 복제한 <룰랭 부인>(다섯 번째), <아를 시립 병원의 정원> 등을 그렸고 <해바라기> 연작 다섯 점을 테오에게 보낸 후 5월에 생레미의 요양원으로 이동하였다.

· 세 번째 발작 - 1889년 7월

페롱 박사가 간호인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그림의 제작을 허용해 주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발작이 일어났다. 환청, 환각으로 그림 물감의 튜브를 짜서 먹는 등 자살을 시도하였으며 발작은 9월에 가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이후 주로 자기 작품을 복제하거나 자화상을 그렸고 11월에는 지누 부인의 문병차 다시 아를로 갔다.



· 네 번째 발작 - 1889년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그림 물감을 먹으려 했다. 발작은 1주일 정도 지속되다가 회복되는 듯 했는데 이번에는 등유를 마시려고 했다.



· 다섯 번째 발작 - 1890년 1월

1월 하순에 다시 아를의 지누 부인을 문병 갔다 돌아왔다. 이틀 뒤 발작이 일어났다. 2월에는 고갱이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의 모작을 그렸다.



· 여섯 번째 발작 - 1890년 2월 22일

<지누 부인의 초상>을 가지고 아를에 갔다가 발작을 일으켰는데 2개월간 지속되었다. 이 발작 기간 사이사이에 그의 초기 작품들인 '북방(北方)의 추억'이라는 주제의 작품군에 속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이상과 같이 발작은 일단 6회로 정리되었지만 실은 경미한 발작도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횟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여러 번 발작을 일으킨 반 고흐의 질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그 중 주요한 것만 정리해 보면 조울병, 간질, 정신분열병, 게슈빈트 증후군, 메니에르 씨 병, 급성 간결성 폴피린증, 매독성 뇌염(진행 마비) 등이다. 근래에 와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반 고흐의 진단명은 측두엽(側頭葉) 간질이다. 간질의 주요 증상은 의식 장애와 경련인데 그 발작의 증상은 일률적이지 않으며 병인(病因)도 불명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반 고흐의 병을 간질로 본다면 발작을 유발한 요인은 압생트, 과로, 스트레스 등을 들 수 있다.가셰 박사가 보낸 인편으로 형이 부상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테오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형이 있는 오베르로 달려왔다. 사태의 심각성을 예견했던 테오는 형을 보자 설움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테오를 본 반 고흐의 첫 마디는 이랬다.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꼭 죽고 싶었는데…." 그는 자해와 자살을 시도했지만 늘 실패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동생을 볼 면목이 없어진 그는 "또 실패했다."고 한탄했고 울부짖는 테오를 오히려 위로했다. "울지 말거라. 나는 모두를 위해서 한 짓이야!"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밀밭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반 고흐는 동생에게 가셰 박사가 뭐라고 하던가 물었다. "괜찮다고 해요. 꼭 회복될 것이라 했어요."라는 테오의 대답에 반 고흐는 체념한 듯 말했다. "그것은 무리한 바람이다. 슬픔은 영원히 계속된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반 고흐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꼭 가고 싶다!"는 등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기운차게 타오르던 모닥불이 점점 사그라들다가 맥없이 꺼지듯이 그의 생명도 운명의 시간을 맞이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실과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시청에 사망계를 내야 하기 때문에 테오와 라부 씨가 반 고흐의 사망 신고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5. 그림에 숨겨진 비밀



그림으로 입증하는 반 고흐의 자살6. 고독한 영혼,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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