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문식 지음 | 김영사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교태전 : 넓은 구중궁궐에서 국왕과 왕비의 침전은 어디였을까? 바로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 -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의 희정당(熙政當) - 대조전(大造殿), 덕수궁의 함녕전(咸寧殿) 등이다. 강녕전과 희정당은 평상시 국왕의 거처이고, 교태전과 대조전은 왕비의 거처이다. 대조전은 희정당이 중전되기 전, 국왕과 왕비가 함께 침전으로 썼지만, 침실 내부는 나뉘어 있었다. 함녕전도 한 전각을 나누어 쓴 경우이다. 이와 같이 국왕과 왕비가 침전(침실)을 각각 쓴 이유는 '부부유별'이라는 유교적 윤리에 따른 것이었다. 국왕은 평소 자신의 침전에서 생활하다가, 합궁(合宮 : 동침)하는 날에는 왕비의 처소에 들었다.
궁궐에서 국왕과 왕비의 침전은 다른 전각들과 차이가 있다. 국왕과 왕비의 침전 지붕에는 용마루(지붕선을 따라 높이 쌓은 턱)가 없다. 교태전은 물론이고 그 앞의 강녕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덕궁의 통명전에도 용마루가 없다. 그런데 국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왜 용마루가 없을까? 그 이유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국왕과 왕비의 침전은 용이 자신의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그런 곳을 감히 다른 용이 위에서 내리 눌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용마루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는 약간 다르지만, 국왕과 왕비가 건실한 후예를 얻도록 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가로막는 용마루를 없앴다는 설도 있고, 왕비의 순산을 위해 무거운 용마루를 걷어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침실에서 국왕과 왕비는 아들이 들어설 길일(吉日)을 받아 합궁을 하였다. 길일은 대개 제조상궁이나 관상감(觀象監 : 천문을 관장하는 관청)에서 일진을 보아 뱀날이나 호랑이날을 피해서 택하여 올렸다. 그런데 이래저래 좋지 않은 날을 빼고 초하루·그믐·보름까지 피하여 그 전후의 날을 가리다 보면 길일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에 불과했다. 또한 길일을 정하였다 하더라도 당일에 비가 오고 천둥이 치거나, 안개가 끼었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일식 또는 월식이 있는 날이거나, 국왕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신경을 써야 할 중대사가 있거나, 병을 앓고 난 후일 때는 합궁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국왕과 왕비가 합궁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고작 한 번 꼴이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로 왕비나 후궁이 잉태를 하면 그것은 왕실을 넘어서 나라 전체의 크나큰 경사였다. 잉태 소식을 들은 국왕은 임신부의 공을 치하하고 그 처소의 내관, 상궁, 나인들에게까지 후한 상을 내렸다. 임신부를 잘 보좌해달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임신부는 왕실의 극진한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태교에 주력하였다. 이때 왕실의 바람은 왕자가 태어나는 것이었다. 임신부의 소망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일차적인 소임은 왕자를 생산하여 국왕의 자손을 번영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행해진 왕실의 태교는 본래의 교육적 의미보다 '기자신앙(祈子信仰 :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행하는 신앙)'에 가까웠다. 물론 왕실에서는 민간의 무속신앙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왕실의 법도도 그들의 아들에 대한 염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왕실의 태교에 대한 기록으로는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율곡이 선조에게 바친 '제왕학 교과서'로, 이후 국왕과 왕세자의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그는 태교와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제5장 세자시강원의 교육방법
왕세자의 일상생활왕실의 태교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임신부는 성현의 교훈을 새긴 옥판을 보고 그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아침을 맞았다. 옥판이 사용된 이유는 옥 자체의 성질이 몸에 이롭거니와, 그 빛깔도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해준다는 생각에서였다. 임신부의 처소는 늘 정숙을 유지하고 궁중악사들을 처소 주변에 배치하여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하였다. 다만 피리의 독주는 임신부의 감정을 격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어 피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 임신부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몸치장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동백기름·꿀·살구씨·계란 등으로 머리와 피부를 가꾸었고, 얼굴을 씻을 때에는 팥·녹두·콩을 만들어 비누 대신 사용하였다.
7개월에 접어들면 육선(肉饍 : 고기반찬)을 피하고 아침 식전에 순두부를 먹었다. 콩으로 된 음식이 태아의 두뇌 발달에 좋다는 정설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각종 채소와 김·미역·새우·흰살 생선 등 해산물이 상에 올랐다. 이때 게와 문어는 피해야 하는 음식이었다. 게는 옆으로 걷는 습성 때문이었고, 문어는 '뼈 없는 생물'이라는 선입견 때문인 듯하다. 임신부의 특별 영양식으로는 용봉탕(잉어, 오골계, 쇠고기, 전복, 해삼이 주재료)이 올랐다고 한다. 특히 '임금의 물고기'라 불리는 잉어는 왕자를 생산하려는 임신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영양식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태교가 항상 기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태교방식 외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태교법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 이유는 왕비와 후궁은 애초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회자되던 태교법으로 '칠태도(七胎道)'라는 것이 있다. 그 칠태도의 금기사항이 왕실의 태교에도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해산달에 머리를 감거나 발을 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나 '모로 눕거나 엎드려서는 안 된다', '서러운 울음소리나 떠들썩한 소리, 애처로운 벌레소리, 잡스러운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이런 금기사항들은 비록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산물이라 해도 현실과 맞지 않는 과도한 구석이 많았다. 태교의 본질은 임신부의 바른 행동과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다.조선시대에는 왕세자의 경호를 담당하는 기관이 별도로 있었는데, 이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혹은 '계방(桂坊)'이라 불렀다. 대상자가 왕세손일 경우에는 '세자익위사'와 구분하여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라 하였다. 세자익위사의 주임무는 왕세자를 호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세자가 행차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수행하였다. 세자익위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1418년(태종 18)이었다. 세자익위사는 병조에 소속되어 주로 왕세자의 호위를 담당했으므로, 익위사의 관리는 무예에 능하고 활과 화살, 혹은 칼로 무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세자익위사나 세손위종사의 관리는 무신이 다수였지만 문신이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호위가 주된 임무일지라도, 익위사나 위종사의 관리는 세자나 세손을 항상 수행하는 관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왕세자를 바르게 이끌 만한 학문적 소양을 요구했던 것이다.산월(産月)이 다가오면 대신들이 '산실청(産室廳 : 왕실의 출산을 전담하는 기관)'을 설치할 때가 되었음을 아뢰고 윤허를 청하였다. 실록에서 산실청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03년(선조 36)인데, 당시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출산을 위해 설치되었다. 그런데 왕실의 출산에서 왕비와 후궁의 대우는 엄연히 달랐다. 궁궐 안에서 해산할 수 있는 사람은 국왕과 세자의 정실(正室)로 제한되었고, '산실청'이란 이름도 중전과 세자빈의 출산에만 붙여졌다. 후궁 이하 부실(副室)들의 출산기관은 '호산청(護産廳)'이라 불렀다. 호산청이 생기기 전에는 후궁 이하 부실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 친정에서 해산을 하였다. 산실청의 설치 문제는 조정 대신들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왕손이 탄생하는 나라의 경사인데다 왕자가 탄생하면 조정의 세력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고, 만일 출산 중에 새로운 생명이 위험에 처하면 추궁이 뒤따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산실청의 설치 시기는 중전의 경우 3개월 전, 빈궁의 경우 1개월 전이었다. 출산이 임박하여 산모에게 산기(産氣)가 있으면 산실청에서 산실을 꾸몄다. 이때 산실청의 경우를 보면, 출산 준비물을 배치할 때도 길일을 택하여 왕에게 보고한 후 허락을 받았고, 필요한 물품은 산실청에서 관련 관청에 공문을 발송해 충당하였다. 다음은 1871년(고종 8) 11월, 명성황후가 출산할 때 설치한 산실 물품이다. 맨 먼저 고초(藁草 : 볏집), 고석(藁席 : 가마니), 백문석(白紋席 : 돗자리), 양모전(羊毛氈 : 양털로 짠 자리), 유둔(油芚 : 기름종이), 백마피(白馬皮), 세고석(細藁席 : 고운 짚자리)을 순서대로 깐다. 백마피가 사용된 이유는 백마는 양기를 상징하고, 흰색도 상서로운 색으로 출산의 안전과 신속함을 기원하는 의미에서였다. 이때 백마피는 양 귀가 온전하게 달린 것을 썼다. 그리고 백마 가죽의 머리 밑에는 삼실을 깔고, 그 위에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의미로 쥐 가죽이나 족제비 가죽을 깔았다. 산 자리를 깐 후에는 태의(胎衣 : 태를 받아놓을 옷)를 둘 방향에 주사로 쓴 부적을 붙였다. 그 다음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말고삐를 방 벽에 걸어 분만 중의 산모가 힘을 쓸 때 붙잡도록 하였다. 산실 밖 대청의 추녀 끝에는 구리 종을 걸어두고 위급한 상황에서 의관을 부를 때 사용했고, 출산 후에는 국왕이 직접 이 종을 울려서 출산 소식을 알렸다. 종을 건 다음에는 의관들이 산실 문 밖에 세 치 길이의 못을 3개 박고, 그 못에 붉은색 끈을 묶어서 늘어뜨려 두었다. 못을 박아두는 이유는 출산 후 현초(懸草 : 해산할 때 깔았던 자리를 말아서 걸어두는 것)를 하기 위해서였다.마침내 임신부에게 산기가 있으면 산실에 삼신상을 차려놓고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빌었다. 삼신상에는 해산쌀(産米 : 산모가 먹을 밥을 지을 쌀)과 미역을 꺾지 않고 그대로 놓고 깨끗한 물도 함께 놓는다.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상의 해산쌀로 밥을 지어 세 그릇을 담고 미역국도 끓여서 세 그릇을 담은 다음 삼신에게 감사하고 산모에게 첫 국밥을 먹였다. 특이한 것은 출산을 돕는 도구로 해마(海馬)와 석연(石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해마는 말 모양으로 생긴 흰색 물건으로 손바닥보다 크며, 석연은 제비 모양으로 생긴 청색 물건으로 밥톨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진통이 시작되면 해마와 석연 1쌍을 붉은 끈으로 묶어서 산모가 손에 쥐고 힘을 주다가 분만하는 즉시 놓았다. 이때 만일 늦게 놓으면 산모가 불편을 겪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궁중에서는 '阿只'라 쓰고 '아기'로 읽었다. 거기다가 '氏'를 붙여 '왕자 아기씨, 공주 아기씨'라고 불렀다. '아기씨(阿只氏)'란 호칭은 결혼하기 전의 왕자와 공주를 부르는 범칭이었다. 그런데 '阿只'는 아기씨들이 보모상궁이나 유모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때는 문자 그대로 '아지'로 불렀다. 출산 직후에는 산실청에서 권초(捲草 : 현초)를 하고 벽에 붙여둔 최생부를 떼어 불사르는데, 이때 최생부의 재가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태웠다. 그리고 그 재는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따뜻한 물에 타서 산모에게 먹였다. 그 이유는 다음 번 출산에서도 순산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였다. 왕비나 세자빈이 원자나 원손을 출산하면 이것은 온 나라의 경사로 즉시 전국에 탄생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원자(원손)를 출산한 산모나, 이를 관리한 산실청 관원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특전을 베풀었다.
복을 기원하는 개복신초례 : 조선 개국 초기의 출산 풍속으로 출산 즉시 행하는 '현초(懸草)'와 탄생한 지 3일째에 올리는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가 있었다. 현초는 '산 자리를 건다'는 의미로 아기의 순산을 알리는 의식이다. 즉, 산실에 깔았던 짚자리를 붉은색 끈으로 묶어서 문 위의 못에 매다는 의식으로, 민간에서 행하는 금줄과 같은 것이다. 민간에서는 왼쪽으로 꼰 새끼줄에 아들이면 숯과 고추를 끼우고, 딸이면 숯과 소나무 가지를 끼워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지만 궁궐은 임금이 계신 곳으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은 용인되지 않았으므로 다만 순산의 표시로 짚자리를 매달았다.
장수를 기원하는 권초례 : 조선 후기의 권초례(捲草禮)는 문 위에 매어둔 산 자리를 걷는 의식으로서, 권초관이 산실 대청에 은(돈)·쌀·명주·실 등을 진열해놓고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 제사는 아기씨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제물의 이름에도 '목숨 명(命)'자를 붙여 쌀을 명백미(命白米), 은을 명정은(命正銀)이라 하였다. 권초관이었던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에 의하면 출산 당일에 쑥으로 꼰 새끼줄을 산실 문 위에 걸어놓고, 이어서 권초관은 사흘간 초제(醮祭)를 지내게 하였다. 초제는 노자상(老子像) 앞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신생아의 만복을 빌었다.
태를 씻고 안치하는 의식, 세태와 안태 : 궁중에서는 산후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행하는 '세태(洗胎)' 의식이 있었다. 세태란 말 그대로 태를 깨끗이 씻는 의식이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태의에 싸서 백자 항아리에 넣어 산실 안에 두었다가 세태의식을 거행하였다. 세태하는 날이 되면 의녀가 산실의 태항아리를 들고 나와서 질자배기에 옮겨 담고, 월덕(月德) 방향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100번 씻은 다음 술로 다시 씻어서 태항아리에 넣었다. 태를 넣을 때는 먼저 작은 백자 항아리의 바닥에 동전 한 닢을 글자 면이 밑으로 향하게 놓고, 그 위에 태를 놓은 다음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묶어서 밀봉하였다. 다음으로 이 항아리를 더 큰 항아리에 담고 흔들리지 않도록 빈 공간을 솜으로 채우고 엿을 녹여서 밀봉하였다. 이 태항아리는 5개월 이내에 태실(胎室)을 선정하여 정중하게 봉안하였다. 태를 매장하는 관습은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실의 독특한 풍습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태를 '생명선'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를 함부로 처리하지 않고 동물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땅속 깊이 파묻거나 태웠던 것이다.
초유보다 먼저 먹인 황연감초탕 : 산모가 출산 후에 처음으로 먹는 음식은 삼신상에 차렸던 미역국과 밥이다. 머리맡에 미역국과 쌀밥을 세 그릇씩 놓고 먼저 삼신께 감사드린 후에 산모가 먹었다. 원자의 탄생과 더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젖을 먹일 '유모'를 선발하는 일이었다. 유모를 고르는 기준에는 건강뿐 아니라 마음씨도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심사숙고하여 선발된 유모에게는 특별한 음식을 제공했는데, 미역국은 물론이고 콩죽·콩떡·두부 등 주로 콩으로 된 음식을 먹게 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유모에게 돼지족을 고아서 먹였던 것과 달리 궁중에서는 노루·사슴의 다리를 고아서 먹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물론 젖먹이 원자의 건강을 고려해서였다. 생후 3일간은 우선 황연감초탕(황연꽃과 감초를 달인 물)이나 밀주사(蜜朱砂 : 꿀과 주사를 섞은 것)로 아기씨의 입안을 닦아내고, 부드러운 천을 따뜻한 물에 적셔서 온몸을 닦아주었다. 3일째 되는 날, 산모는 쑥탕 목욕을 했고, 아기씨는 복숭아 씨앗, 매화 뿌리, 호두 껍질 1부를 함께 끓인 물에다 돼지쓸개즙 1부를 섞어 목욕을 시켰다. 산모의 쑥탕 목욕은 백마 꼬리로 만든 채로 약쑥 달인 물을 쳐 올려 온몸을 살살 두드려주는 방식이었다.원자의 결정,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 : '원자(元子)'라는 칭호는 국왕과 왕비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맏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정비의 소생이 없을 경우 후궁의 소생이 원자가 되기도 하였다. 원자에 대한 왕실의 첫째 기대는 아무런 변고 없이 잘 자라서 왕권을 계승하는 것이다. 장자가 왕권을 계승하는 것은 종묘사직의 안정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길이자 역대 국왕들의 한결 같은 소망이었지만, 저간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부왕(父王)보다 단명했던 세자도 7명이나 되었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적통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지명'된 경우이고, 중종과 인조는 반정을 통해 등극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대신들의 '옹립'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였다. 이처럼 왕실의 승계 구도가 안정되지 못하면 이는 바로 국정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반정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