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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역사

리사 자딘 지음 | 영림카디널
제1장 변화의 조건 : 수많은 상품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가 15세기 세계 무역 항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대단했다. 전략적 요충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동방에서 서방으로, 또 서방에서 동방으로 상품이 흘러들어가는 밸브와도 같았다. 또한 이슬람교의 오스만 술탄과 기독교의 교황이 벌이는 점유권 다툼에서도 상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1453년 5월 28일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당한 후,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협상하여 오스만 제국 내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통과하는 사치품들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그리고 서방에서 동방으로 수송되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역업을 하던 베네치아 상인의 장부에는 이탈리아에서 도착하여 동쪽으로 가는 벨벳, 비단, 새틴 등의 상품과 또 서쪽으로 가는 비단, 향료 등이 잔뜩 기입되어 있었다.

그 당시 서유럽인들의 입맛은 급속도로 생강, 후추, 정향 그리고 육두구에 길들여져 동방과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신장시켰다. 특히 후추는 상인들에게는 '검은 황금'이었다. 그것은 가치가 가장 안정적이어서 수송하여 판매하기만 하면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15세기 초 이탈리아, 특히 번성하고 있는 해상도시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와 그 너머에서 향료를 싣고 돌아오는 배들의 첫 번째 기항지였다. 거기서부터 향료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늘고 있는 독일까지는 강을 통해 화물이 운반되었다.

그런데 세기가 바뀌면서 점차로 아프리카 북부 해안, 인도와 중국, 기니와 러시아 같은 외국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찾는 고객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구매 수요로 인해 기업화된 상인과 대금업자들이 유럽 내에 그들 상품을 제작할 수 있는 생산기지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생겨나는 난민들 중에는 그러한 분야에 숙련된 장인들이 많이 끼어 있어서 그들을 통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루카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은 일부의 노련한 견직공들이 피렌체로 흘러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피렌체는 화려한 능라와 비단 벨벳 생산의 주요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다변화된 소비자의 수요 욕구와 그로 인한 상업적 동기, 또한 시장 확대라는 시대적 요구가 그때까지 구축되어 있던 안전하고도 확실한 통상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모험을 유발했다. 부유한 고객들은 특별히 희귀하여 구하기 힘든 상품들은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기꺼이 사고 싶어했다. 또한 항해기술과 선박 성능의 개선에 따라 이 모험의 성공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 가자 새로운 통상기지와 새로운 항구를 찾는 모험적인 여행은 15세기 중엽과 말에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그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포르투갈 정부는 오스만의 통상로를 이용할 때 드는 이런저런 관세나 상품에 붙는 세금 등 높은 운송비를 피하기 위해 동양의 금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하고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8년 희망봉을 돌았으며, 디아스가 성공하자 바스코 다 가마는 향료와 보석시장으로 직접 가는 통로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마침내 1497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항해하는 데 성공하자, 에스파냐도 인도에서 오스만을 거쳐 서유럽으로 오는 대륙횡단 루트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일었는데, 콜럼버스가 그 모험을 준비했다. 오늘날 우리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인도의 향료시장에 가까운 곳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이렇듯 교역로 확보에 대한 절실함과 동방 상품에 대한 욕구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2장 위엄의 대가



15세기 초, 부자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소유물이 집안에 쌓이는 만큼 빚도 늘어갔다. '위엄'을 갖춘다는 것은 교역이 확대됨으로써 소유할 수 있게 된 모든 욕심나는 물건들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의상과 장신구를 대중에게 과시함으로써 위엄을 드러내었다. 이와 동시에, 값비싼 상품을 구매한 만큼 그들의 빚은 늘어만 갔다.

1480년대에 포르투갈과 그라나다와의 전쟁 결과 에스파냐의 페르난도와 이사벨라가 재정위기에 빠지고, 베네치아 역시 이웃한 이탈리아 국가들과의 분쟁으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것은 15세기 말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병장기와 군사적 작전의 비용은 점점 증가하여 나중에는 15세기 제후들의 가장 높은 지출 항목이었던 사치스런 상품의 구입비와 맞먹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모든 것에는 일종의 상징성이 있었다. 즉, 군사적 침공과 사치품에 대한 과시적 지출이 둘 다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사치품을 위한 것이든 전쟁을 위한 것이든 돈을 빌리는 관습 때문에 15세기에는 국제교역과 상업에 필요한 정교한 계약서가 자연스럽게 개발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금융상의 지불에 대한 환어음 거래가 증대함에 따라 대규모 차입에 따르는 '가공의' 지불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환어음으로 인해 서로 다른 통화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는 성가신 업무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상업계에서는 상품 교환의 규모가 계속 커져감에 따라 정교한 금융 계약서들이 개발되었다. 이는 어음의 지불과 같은 새로운 상거래 시스템이 등장함에 따라 상인들이 구매의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는 금전적 손익과 세금, 지불불능 가능성 및 이자 등이 이윤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한 계약서들 덕분에 가장 초보적인 거래에서부터 보석과 같이 아주 값비싼 물품의 거래, 소금과 같이 대량으로 구매하는 상품들도 현금으로 직접 지불하지 않고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신용은 15세기 소비상품 세계의 대들보가 되었다. 상인가문은 대부업자로 발전하여 제조업이나 수출입 기업을 지원하거나 대부해 주었다. 그리하여 상인가문은 무역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는 유럽의 새로운 귀족계급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듯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통치자나 예술 후원자, 그리고 각종 제조업과 학문의 배경에는 바로 그들의 위엄성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신용제도와 장기 대부가 있었던 것이다.

제3장 인쇄본의 승리



활판인쇄가 생기기 전에 필사본은 소중한 세공품의 일종이었다. 즉, 화가와 장인이 합작하여 부유한 수집가들의 눈을 끌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호화롭게 장정하고 채식된 사본은 값진 물건이어서 보석이나 걸개 태피스트리, 고급 도자기와 똑같이 수집가들이 즐겨 찾는 대상이었다. 사본들은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인사에게 주는 선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필사본들이 더 이상 주목받지 않게 된 시점을 정확히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인쇄본들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상업상의 혁신을 몰고 온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저자와 인쇄업자, 구매자 그리고 후원자로 연결되는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어떤 저작물을 활판인쇄로 대량생산할 것인지는 특별한 교육적 혹은 교의상의 목적과 부합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예를 들면 아직 덜 알려진 고전문헌의 경우 널리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고 논쟁거리가 되는 종교저술의 경우에는 그것을 읽어보려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인쇄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인쇄업은 개인이 조달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초기 투자액을 필요로 했다. 초창기에는 저자의 비용으로 발행하거나 이익분배 조건으로 제3자에게서 재정지원을 받아 발행함으로써 인쇄업자들은 가능한 한 재정적 위험을 피하려고 하였다. 때로는 종교당국이 재정지원을 하여 특정 인쇄본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렇듯 인쇄업자들은 재정위험을 줄이고 판매를 보장받기 위한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대개 책 1종류 당 1천 부 정도를 발행했는데, 그러한 발행규모는 인쇄, 발행인이 상당한 정도의 보장된 서적구매층이 존재하고 또한 그들이 책을 계속 살 것이라고 믿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초기 인쇄업자들이 구매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한 것은 잠재적이고 검증받지 않은 시장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 물건을 바꾸고 있는 확실한 독자층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16세기 내내 인쇄소 간의 격렬한 경쟁에 따라 생산속도는 점차 인쇄업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인쇄본의 특성도 바뀌게 되었다. 인쇄업자들은 더 이상 시장의 상층부를 위해 고급 사본처럼 보이는 판본을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대신 비용 절감과 발행 속도를 위해 작고 간단한 서체와 판형을 개발하는 한편, 인쇄된 면의 요란한 장식도 포기하고 정교한 활자의 개발에 몰두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자 인쇄는 유럽 전역에서 편리한 문명기술로 여겨지게 되어 인쇄업자들은 해마다 수많은 책을 발행하게 되었고, 인기 있는 작가와 판로가 확실한 작가들의 저작을 둘러싸고 인쇄업자들 간의 격렬한 경쟁도 일상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인쇄본은 출판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최초이자 최고의 상품이 되었다. 심지어 알두스 마누티우스나 구뱅의 티에리 마르텐스와 같은 학자이자 지식인 같은 사람들도 출판인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마디로 16세기에 있었던 책 생산의 폭발적인 증가는 상업적 목적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으나, 결국에는 르네상스의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책을 인쇄할 것인가와 그 배포는 바로 인쇄업자와 그 후원자가 산정한 시장 수요에 의해 결정되었다.

제4장 개화되는 학문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는 1460∼70년대에 걸쳐 직업군인과 권력자, 그리고 외교가로서 모은 재산을 자신의 궁과 유명한 도서관 등에 기증하여 전시토록 했다. 그는 당시에 가장 성공한 귀족 용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문화'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일반인들로 하여금 자신과 우르비노의 공작 궁에 존경심을 갖도록 했다. 값지고 고귀한 예술품과 수집품으로 장식하여 자신을 '졸부'가 아닌 진정한 귀족으로 인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페데리고가 르네상스기의 고전학문의 시조로 선정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베사리온 추기경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 함락 당하자 서유럽에 망명해 정착한 15세기 그리스 피난민이었다. 베사리온 추기경은 자신의 방대한 서적 컬렉션을 1468년 페데리고의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그는 비잔틴의 오래된 학문세계와 이탈리아의 새로운 학문세계와의 가교 역할을 하여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저작들을 방대하게 수집하는 한편,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고 번역하도록 격려했다.

15세기 후반에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복구되면서 르네상스가 촉발되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도서수집가와 그들의 전문적인 조언자들이 맺고 있던 관계, 그리고 도서수집 열기 덕분이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과 초기 인쇄업자의 서적수집 조언자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덕분에 인쇄본 발행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쇄본의 탄생으로 학자들은 마침내 여러 도서관을 전전하지 않고도 한 장소에서 같은 저작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6세기 들어서 국가와 국가가 지정한 인쇄업자 간의 밀접한 유착관계는 유럽 어디에서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영주들과 합세하여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정치동맹을 협상하고 있을 때, 프랑스 정부 관리였던 로베르 에스티엔은 독일 영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수아의 입장을 설명하는 내용의 책을 내기도 했다. 1536년에는 프랑수아가 오스만 술탄 술래이만과의 협정에 조인한 후, 로베르 에스티엔이 이슬람에 대한 유럽의 편견을 일소하기 위해 투르크의 관습에 대한 일련의 책을 발간하였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인쇄업자 버슬릿이 국왕의 정책과 교리상의 입장, 특히 왕의 이혼과 같은 일을 옹호하는 일련의 책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에는 상업적인 압력과 함께 정치적 압력도 인쇄업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인쇄업자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학문적인 목적으로 책을 발행하는 경우에도 실제로 그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제5장 상업화되는 새로운 지식



메흐메드 2세는 1461년 봄, 이스탄불에 주재하는 베네치아인 명반교역 대리인을 통해 리미니의 영주 말라테스타에게 서한을 보내 화가이며 건축가이자 초상 메달 제작자인 메테오 데 파스티를 오스만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메흐메드는 정복을 통해 동방에서 서방에 걸쳐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새로운 궁전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며, 메흐메드가 데 파스티를 보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것은 뛰어난 화가이자 건축 감독으로서 메테오 데 파스티의 명성이 오스만 제국에까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흐메드의 초청을 받은 데 파스티는 1461년 10월 이스탄불을 향해 떠났다. 1500년경 귀족 고용주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예술가들은 창의적이고도 미적 재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와 공학, 그리고 건축학적 재능까지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1506년 메흐메드 2세의 아들 바야지트는 미켈란젤로에게 이스탄불의 골든 혼 곳의 다리를 설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켈란젤로에겐 호화로운 궁전에서 고귀한 후원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자긍심이었다. 그가 돈을 지불받지 않고 연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예술가·기술자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이렇게 호화로운 궁전과 명문가문에 고용된다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장인에서 봉직된 신사계급으로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의 후원자가 작업에 손을 댔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은 후원자의 작품으로 인정되었고, 그 작품은 자자손손 내려가거나 유통되는 동안 늘 그 후원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1440년대에 안토니오 피사넬로가 레오넬로 데스테와 마리아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청동제 메달의 앞면에는 '페라라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라는 명각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화가 피사넬로의 작품'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예술품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후원자들은 좀처럼 예술가의 이름을 남기는 특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전예술과 문헌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들은 비서직과 필생 기술도 함께 갖추어야 했다. 그들이 귀족 가문에 고용된 이유는 우아한 라틴어 편지를 작성하고 여러 행사에 사용되는 축사를 짓거나, 중요한 축일에 사용될 적당한 고전을 찾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테오 데 파스티로 하여금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예술품을 설계·제작케 하거나, 로베르토 발투리오로 하여금 전문적인 군사논문과 우아한 라틴어 편지를 쓰게끔 하는 것과 같았다.

학자나 비서들을 고용해서 자신들의 명성을 외국에까지 드높일 수 있는 우아한 시나 문장을 짓게 하는 것들은 그들 군주들에게는 국제적인 사건들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그 문장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다. 구도비코 스포르차는 궁정의 인문학자이자 시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게 하기도 했다.

학자로서 봉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라틴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논쟁하고 흥정하고 질문하는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라틴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외교문서에는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주요한 지방어로 된 주요한 서한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를 비롯한 많은 르네상스 시대의 외교관들은 모두 당시에도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불멸의 저서들을 저작한 장본인인 동시에 아주 훌륭한 라틴어 학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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