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의 역사
리사 자딘 지음 | 영림카디널
제7장 천체의 지도제8장 과시적 소비우르비노 공작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는 1460∼70년대에 걸쳐 직업군인과 권력자, 그리고 외교가로서 모은 재산을 자신의 궁과 유명한 도서관 등에 기증하여 전시토록 했다. 그는 당시에 가장 성공한 귀족 용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문화'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일반인들로 하여금 자신과 우르비노의 공작 궁에 존경심을 갖도록 했다. 값지고 고귀한 예술품과 수집품으로 장식하여 자신을 '졸부'가 아닌 진정한 귀족으로 인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페데리고가 르네상스기의 고전학문의 시조로 선정한 인물 중 한 사람은 베사리온 추기경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 함락 당하자 서유럽에 망명해 정착한 15세기 그리스 피난민이었다. 베사리온 추기경은 자신의 방대한 서적 컬렉션을 1468년 페데리고의 도서관에 기증하였다. 그는 비잔틴의 오래된 학문세계와 이탈리아의 새로운 학문세계와의 가교 역할을 하여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저작들을 방대하게 수집하는 한편,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고 번역하도록 격려했다.
15세기 후반에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복구되면서 르네상스가 촉발되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도서수집가와 그들의 전문적인 조언자들이 맺고 있던 관계, 그리고 도서수집 열기 덕분이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과 초기 인쇄업자의 서적수집 조언자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덕분에 인쇄본 발행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쇄본의 탄생으로 학자들은 마침내 여러 도서관을 전전하지 않고도 한 장소에서 같은 저작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6세기 들어서 국가와 국가가 지정한 인쇄업자 간의 밀접한 유착관계는 유럽 어디에서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영주들과 합세하여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정치동맹을 협상하고 있을 때, 프랑스 정부 관리였던 로베르 에스티엔은 독일 영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프랑수아의 입장을 설명하는 내용의 책을 내기도 했다. 1536년에는 프랑수아가 오스만 술탄 술래이만과의 협정에 조인한 후, 로베르 에스티엔이 이슬람에 대한 유럽의 편견을 일소하기 위해 투르크의 관습에 대한 일련의 책을 발간하였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인쇄업자 버슬릿이 국왕의 정책과 교리상의 입장, 특히 왕의 이혼과 같은 일을 옹호하는 일련의 책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에는 상업적인 압력과 함께 정치적 압력도 인쇄업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인쇄업자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학문적인 목적으로 책을 발행하는 경우에도 실제로 그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메흐메드 2세는 1461년 봄, 이스탄불에 주재하는 베네치아인 명반교역 대리인을 통해 리미니의 영주 말라테스타에게 서한을 보내 화가이며 건축가이자 초상 메달 제작자인 메테오 데 파스티를 오스만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메흐메드는 정복을 통해 동방에서 서방에 걸쳐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새로운 궁전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며, 메흐메드가 데 파스티를 보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것은 뛰어난 화가이자 건축 감독으로서 메테오 데 파스티의 명성이 오스만 제국에까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흐메드의 초청을 받은 데 파스티는 1461년 10월 이스탄불을 향해 떠났다. 1500년경 귀족 고용주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예술가들은 창의적이고도 미적 재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와 공학, 그리고 건축학적 재능까지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1506년 메흐메드 2세의 아들 바야지트는 미켈란젤로에게 이스탄불의 골든 혼 곳의 다리를 설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켈란젤로에겐 호화로운 궁전에서 고귀한 후원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자긍심이었다. 그가 돈을 지불받지 않고 연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예술가·기술자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이렇게 호화로운 궁전과 명문가문에 고용된다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장인에서 봉직된 신사계급으로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의 후원자가 작업에 손을 댔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은 후원자의 작품으로 인정되었고, 그 작품은 자자손손 내려가거나 유통되는 동안 늘 그 후원자의 이름이 알려졌다.
1440년대에 안토니오 피사넬로가 레오넬로 데스테와 마리아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청동제 메달의 앞면에는 '페라라 후작 레오넬로 데스테'라는 명각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화가 피사넬로의 작품'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예술품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후원자들은 좀처럼 예술가의 이름을 남기는 특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전예술과 문헌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들은 비서직과 필생 기술도 함께 갖추어야 했다. 그들이 귀족 가문에 고용된 이유는 우아한 라틴어 편지를 작성하고 여러 행사에 사용되는 축사를 짓거나, 중요한 축일에 사용될 적당한 고전을 찾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테오 데 파스티로 하여금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예술품을 설계·제작케 하거나, 로베르토 발투리오로 하여금 전문적인 군사논문과 우아한 라틴어 편지를 쓰게끔 하는 것과 같았다.
학자나 비서들을 고용해서 자신들의 명성을 외국에까지 드높일 수 있는 우아한 시나 문장을 짓게 하는 것들은 그들 군주들에게는 국제적인 사건들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그 문장에 대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다. 구도비코 스포르차는 궁정의 인문학자이자 시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짓게 하기도 했다.
학자로서 봉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라틴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논쟁하고 흥정하고 질문하는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라틴어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외교문서에는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주요한 지방어로 된 주요한 서한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를 비롯한 많은 르네상스 시대의 외교관들은 모두 당시에도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불멸의 저서들을 저작한 장본인인 동시에 아주 훌륭한 라틴어 학자이기도 했다.1515년 막시밀리안 황제는 손녀 마리아와 손자 페르디난트를 헝가리 왕의 아들과 딸에게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는 합스부르크 가를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막시밀리안은 재위 25년간 여러 가지 정략을 구사하여 성공적으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러한 정략들과 마찬가지로 계약서에 유리한 내용을 넣기 위해 상대방을 돈으로 매수하는 것에서부터 비준의식을 화려하게 치르는 것까지, 계약의 각 단계마다 엄청난 금액을 들여 늘 대담하고도 유리한 정치적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크스부르크에 있는 야콥 푸거에게서 대규모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야콥 푸거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주요한 광물의 채굴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는 은의 교역이 금지되어 있었고, 채굴된 은은 전량 주조에만 사용되고 있었는데, 막시밀리안은 푸거에게 대출받는 조건으로 은 광산 독점 채굴권을 내주었으며, 생산된 은으로 주조한 마르크화 중 50%를 푸거의 몫으로 지급했다. 이런 유리한 계약조건 덕분에 1508년경 야콥 푸거의 재력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어 은과 구리뿐 아니라 섬유, 후추, 그리고 부동산에도 투자하게 되었다.
은 채굴로 인해 푸거 가문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그 부를 공고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략적 광물인 구리였다. 구리는 대포의 포신과 소총을 만드는 청동의 주요 성분이었다. 구리는 향료교역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베네치아와 오스만은 모두 향료 대금을 구리로 지불하였다. 아시아 향료를 유럽으로 수입하기 위한 교역에서는 그에 상응하여 어떤 형태로든 만족할 만한 대가가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야만 했는데, 이때 가장 일반적인 지불수단 가운데 하나가 구리였다.
교회의 눈에는 무역이나 상업적 모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죄악에 빠지기 쉬운 것으로 비쳐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상인들은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야콥 푸거는 카를 5세에게 서한을 보내어, 그가 신성로마 황제가 될 때 빌려간 거액을 상환하지 않으려는 처사에 대해 비난하면서 자신은 개인적으로 치부하기 위해 행동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건전한 이윤을 내면서도 교회의 눈에 도덕적으로 보이기 위한 상업의 딜레마를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대금업, 즉 대부금에 대한 이자의 문제였다. 정통적 견해는 명백했다. 대부자는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잉여화폐를 만드는 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자가 이자를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1515년 독일의 요한 에크는 대부금에 대한 이자의 취득이 도덕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공개논쟁을 벌였다. 당시의 상거래 관행을 지지하는 그의 과감한 논쟁은 폭넓은 호응을 얻었으며, 이자 취득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론을 확산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에크는 또한 교회가 부를 확보하기 위한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시키는 일련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2년 뒤 마르틴 루터는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구원을 '판매한다'며 비난하고 나서 신학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결과적으로 루터의 주장은 교회를 기업과 상업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즉 상거래에서 도덕적 가책의 마지막 속박을 제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상거래는 세속적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개신교회는 상인들에게 영적 구원을 위해 엄격한 경건생활과 계명의 준수만을 요구하게 되었다.요한 쇠너는 유명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 그는 빌리발트 피르카이머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었는데, 그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과학기구 가운데는 마젤란의 항해로 발견된 사항들이 담긴 금속 지구의 세 개가 있었다. 그의 인쇄소에서는 과학과 천문학, 그리고 고대 기하학자들과 레기오몬타누스의 저작도 들어있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저작물은 천문학자뿐만 아니라 항해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 책에는 그리스 기하학자인 유클리드와 파푸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을 토대로 한, 구면삼각법에서 중요한 일련의 공리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 구면삼각법 덕분에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의 운동에 관한 자신의 이론의 정당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지구도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공전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고 태양이라고 주장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완성판이 발행되었다. 태양은 태양계의 중심에 있고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 같이 그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주장이 마침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공포에 질린 교회는 즉각 이를 이단이라 선언했다.
뉘른베르크의 피르카이머 주위에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 서로 간에 정보와 전문지식을 교환한 것은 북유럽의 화가, 지도 제작자, 과학서적 발행인 그리고 과학기구 제작자들이 서로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기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상업중심지로 모여들었고, 모두들 새롭게 불기 시작하는 북유럽의 개혁 바람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연락하면서 책과 전문기구들을 교환하였다. 그들은 직업상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동서의 새로운 통상로를 따라 멀리 여행하는 사람들과 접촉했는데, 이 특별한 집단의 사람들이 그들의 직업적 활동을 잘 해낼 수 있도록 해준 전문기구 가운데 으뜸은 바로 인쇄본(책)이었다. 피르카이머의 친구들 중 거의 대다수는 인쇄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들은 인쇄본의 저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쇄소 주인, 서적상, 편집인, 그리고 교정인으로서 일을 했으며 그들이 만든 인쇄본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파하였다.1532년 3월 베네치아인 마리노 사누토는 베네치아 리알토의 보석 상점가에서 눈부신 황금투구를 보았다고 일기에 기록하였다. 투구는 정교한 초승달 모양이며, 꼭대기에 깃털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루비, 다이아몬드, 진주와 에메랄드 등 총 174개의 보석에 둘러싸인 거대한 투르크산 옥이 있었다. 사누토의 감정에 의하면 그 투구는 벨벳을 두른 금박과 흑단 상자까지 포함하여 144,400두카트에 달한다고 했다. 이 투구는 오스만 술탄 술래이만의 총리인 이브라힘 파사가 주문한 것으로 술탄이 유럽의 정적들에게 술래이만의 힘과 황제로서의 지위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튀니스 승전으로 명성을 드높이게 됨에 따라 카를 5세는 전투와 군대의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도록 얀 베르메옌에게 지시하였는데, 이는 전장의 생생한 시각자료를 활판인쇄라는 신기술에 의해 목판화로 제작하여 전 유럽에 배포함으로써 승자의 힘과 패자의 굴욕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튀니스에서 승전한 카를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장엄한 작품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튀니스 정복> 태피스트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 장면에 나타나 있는 군사작전만큼이나 치밀한 계획 하에 완성되었다.
<튀니스 정복> 태피스트리는 문자 그대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갔다. 합스부르크의 모든 거래와 마찬가지로 그 비용은 절친한 은행가들이 제공했다. 이 태피스트리의 제작에 필요한 재료의 구입에는 상인인 야콥 벨저가 개입하여 꼼꼼하게 지휘했으며, 그의 청구서에는 엄청난 금액이 기록되어 있었다. 푸거 은행이 임금과 재료비를 포함해서 태피스트리의 디자인과 제작에 드는 모든 비용을 지불하였으며, 이를 카를 5세에게 파는 형식을 취했다. 카를 5세는 약속어음을 발행하고 그 작품을 사들였다.
항해와 탐험에서의 특출한 성공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었던 포르투갈 국왕은 <지구의>와 같은 태피스트리 시리즈를 자신의 영토 확장을 알리는 동시에 포르투갈의 위엄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선전도구로 이용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와 카브랄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무사히 도착하자 포르투갈 국왕은 즉시 26장짜리 기념 태피스트리 시리즈를 만들어 그 사건을 기념하라고 명령했다.
태피스트리는 오늘날엔 더 이상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15∼16세기에는 당시의 부유한 고객들의 과시욕구에 꼭 들어맞는 예술형식이었다. 그것은 섬세한 디자인과 장인정신을 극도의 노동집약적 기술과 결합시킨 것이어서 값도 그만큼 비쌌다. 그것을 내걸기만 하면 그 방은 즉시 호사스럽게 변했다. 또한 태피스트리가 문학적인 소재를 갖고 있다면 그 소유자는 박식함을, 전원풍경이 그려져 있다면 우아한 취미를, 혹은 자신과 가문의 역사가 담겨 있다면 개인의 명예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과시용의 건축물은 그 주인의 명성과 지위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통상활동으로 갑자기 부유해진 가문들은 재빨리 이 경쟁 속에 합류하였다. 교황의 주요한 금융인이었고 교황의 광산을 경영하고 있던 아고스티노 키기는 로마 바로 외곽에 웅장한 저택을 건축했다. 그 내부를 고전문헌의 에로틱한 장면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람들은 건축가이기도 한 발다사레 페루치,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그리고 라파엘이었다. 키기는 대담하게도 자신의 침실에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를 그리게 했다. 교황도 키기의 저택에 가서 지내면서 그의 사치스러움을 즐겼다.
이스탄불의 토프카피 사라이는 정치적으로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 건물이었다. 그 명성과 화려함으로 기독교 유럽의 바로 이웃에서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오스만 제국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이다. 메흐메드의 새 궁전 건축은 중세 기독교 세계의 오랜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 세력이 함락하고 나서 10년 되던 해인 1453년에 시작되었다. 그 궁전은 은은한 빛을 발하는 거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