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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조영복 지음 | 돌베개
임화 - 운명에 동화되어 버린 낭만주의자



다다이즘 시인으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냈고 광복 후 월북했다가 결국 처형당한 임화(林和)는 낭만적 성향의 시인이었고, 영화 <혼가>의 주연 배우였으며, 비평가이자 문학사가였다. 그는 방향 표지판 하나 없이 정치와 문학, 시인과 사상가라는 미로를 한국문학사 위에 세워놓았다. 이 미로는 많은 월북 작가나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길이지만, 임화의 경우에 그것은 더욱 드라마틱한 궤도를 그린다.

임화는 서울 동숭동 낙산 아래에서 1908년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그의 가정은 파산 상태에 있었다. 특히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정신적 상흔을 깊이 남긴다. 그는 보성고보를 2학년에 중퇴하면서 평생 망명가로, 정신의 유목민으로서 살아갈 계기를 얻는다. 눈물과 탄식, '불량성'과 '모던보이'적 기질은 그의 정치적·문학적 삶을 동시에 들어올렸다가 추락시킨, 천칭의 두 저울판이었다.

임화의 불량끼는 보성고보를 자퇴한 순간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외국 문예 이론서와 사상서들, 문학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그것을 전위적 사상으로 이해했을 때 잠재적인 힘을 얻었다. 그가 보성고보를 중퇴했던 1925, 26년경의 조선은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가 혼재된 사회주의사상이 지식 청년들을 '주의자'의 길로 내몰고 있었다. 그가 자퇴를 하던 1925년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곧 카프가 결성되었다. 사상가로서의 그의 운명을 재촉한 것은 1926년 12월에 카프 맹원이었던 윤기정의 추천으로 카프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임화의 경력에서 이채로운 것은, 그가 친구인 윤기정과 조선영화예술협회에 참가하면서 배우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제4의 점령'이라고 이름 붙인 영화예술에 대한 임화의 관심은 현대 전위예술에 대한 관심과 같이 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카프 가입과 더불어 카프 영화인들이 가졌던 마르크시즘적 세계관에 접목되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는 영화배우로 카프 영화사에 기록된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임화의 작품은 <유랑>과 <혼가>이다. 카프 시절 그의 문학 활동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비평과 시 분야였다. 무엇보다 임화를 임화로 존재하게 한 것은 시인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존재감, 정결성, 문학청년 기질, 낭만적 성향이었다.

임화는 광복이 되자마자 재빨리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해 좌파 문학단체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문학 이념은 박헌영의 남로당계 노선 안에 있었고, 진보성과 인민성이 이념의 중심이었다. 1947년 11월 임화는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서울에 다시 입성한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9월에 퇴각하자 그도 다시 북한으로 가게 된다.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에 실려 있는 그의 작품들은 격렬한 파토스(pathos : 열정)로 전장의 서정을 노래한다.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는 다른 시들에 비해서 이 작품들은 감정의 기복이 매우 크고 시인의 내면적인 목소리가 살아 있다. 시인 임화의 승승장구는 아마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얼마 뒤 그는 남로당 숙청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완숙한 금자탑적 작품"이라던 칭송은 휴전 후 어느덧 "염전사상을 전파시키는 가증스러운 작품"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시들은 비평가 엄호석에게 "종잇장처럼 얇아진 가슴을 조이며 애처로이 전선에 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그림으로써 패배주의 감정과 투항주의사상을 설교한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극악한 변절자이며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는 죄명은 이후 북한에서 임화의 이름 앞에 공식문구로 나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임화의 죽음 직전과 죽음 직후의 기록은 어떠한가? 한창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 그 파편으로 오른손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임화는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진다.

사상가의 망명이든 정치가의 망명이든 그 망명은 인간이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표정을 짓는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이 선택한 자살은 바로 그 운명을 예견한 자의 최후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임화의 운명을 쥐고 있었던 것은 김일성도 박헌영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념'이라 부르는, 인간이 결코 놓을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어떤 깊고 아득한 미망이었다. 그것을 그는 "애인처럼 그리운" 운명이라 불렀다. 임화는 "몸과 마음이 상할/자리를 비워주는 운명이/애인처럼 그립다."라고 썼다. '자기가 스스로 행한 선택이 전적으로 운명에 동화되어버린 자', 임화는 그렇게 죽어갔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백석 - 파란 혼불처럼 떠도는 문학사의 고아



1988년 정부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를 발표했을 때, 우리 문단사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문인 중의 하나가 백석(白石)이다. 시인 정지용·김기림의 이름에 낯익은 독자들도 '백석'의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그는 40여 년 간 잊혀졌던 '월북 시인'인 것이다. 백석은 1930년대에 문자 그대로 '혜성 같이 나타난 시인'이었다. 백석의 시는 우리말이 다양한 이미지의 스펙트럼을 통해 어떻게 맛깔지고 아름다운 울림들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백석은 1935년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이름을 얻게 된다. 그는 이미 1930년에 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백석은 1930년대 일제시대를 만주와 남해 등을 여행하면서 보낸다. 그러나 여행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가난과 병을 동시에 가져온 육체의 방기에 가까웠다. 그의 우울과 방랑벽은 거의 체질적인 것이었다. 몇 번의 결혼 실패와 연애담은 그의 이러한 체질과 습벽 때문이었다.

'북방인' 한설야는 백석을 그와 교유한 몇 안 되는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 함흥이 고향인 한설야는 1938년에 낙향해서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이때 백석은 영생고보에서 영어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1936년에서부터 1938년경의 함흥 영생고보에는 '파초의 시인' 김동명이 있었고, 책방을 경영하던 김송, 함흥방송국의 이석훈, 함흥 농업학교의 조익준이 있었다. 그 시절 백석은 이들과 어울리며 월급의 대부분을 술값으로 날렸다. 유락과 방랑 속에 미칠 듯한 삶의 혼향이 북국의 찬 거리를 휘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백석에 대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언급은 화가 정현웅의 것이다. 백석은 영생고보 교사직을 사임한 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재입사해 「여성」지 편집자로 근무하게 된다. 정현웅은 「조선일보」출판부에서 발행하던 잡지 「소년」, 「여성」, 「조광」 등의 표지 장정이나 삽화 등을 그리고 있었고, 책 장정가로서도 만만찮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백석과 정현웅이 편집자와 삽화가로서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이때가 둘 사이의 호흡이 가장 잘 맞았을 때였을 것이다. 당시 「여성」지가 매호 매진되는 기록을 세운 것은 백석의 모던한 감각과 편집자로서의 기량 덕분이기도 했지만, 여성지의 성격상 삽화의 볼거리가 판매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1940년경 백석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만주 신징(新京 : 지금의 창춘) 등지와 북만주의 오지를 여행한다. 1944년경에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로 가 광산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광복이 되어 시인은 다시 그의 고향 정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즈음에서 그의 방랑벽은 종말을 고해야 옳았다. 백석은 광복이 되었을 때 34세의 청년이었지만, 오랜 방랑 생활과 생활고로 인해 초로의 초라한 중년 사내가 되어 있었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했던 그는, 잠깐 동안 고당(古堂) 조만식의 통역비서직을 수행한다. 김일성이 정권 초창기에 북한 문학예술계의 판을 다시 짜면서 남한 출신의 문학예술가들과 공고한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이때는, 성향이나 정치성이 아직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백석 역시 그의 시가 가진 서정성과 낭만성에도 불구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시인으로서 그의 삶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최소한 시인으로서의 존귀함을 잃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결벽증 환자처럼 손 씻기를 반복했던 그의 성격은 시인으로서의 존재감을 결정지었고, 그것은 생존의 운명을 쥐고 있던 북한 체제와 억압적 현실에서도 별로 굽혀들지 못했다. 다른 장르에 비해 계급적·이념적 성향이 희석될 수 있는 번역 작업과 동화 창작에 마지막 혼을 불사르고자 했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하는 내면적 욕망 말이다.

1950년 중반 이후 김일성이 권력 강화를 위해 당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백석의 낭만적·부르주아적 감각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계속 문제가 되어 백석은 급기야 집필 금지를 당하고, 결국 평양 밖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의 사망 시기도 그에 준해서 1963년경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한 자료는 그가 1996년 1월까지 북한에 생존해 있었다고 전했다.

유족들은 백석이 남긴 번역 원고와 창작 노트 등을 휴지로 써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물자가 부족한 북한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가장 낮은 단계의 '생활' 차원에서도 존속되기 어려웠던 것일까? 예술이 삶보다 우월하거나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한다는 예술가적 자존심은 정신적·물질적 여유가 없는 북한 체제에서는 지나친 호사일 것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백석의 행적은 밝혀졌으나 그의 문학 자서전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의 유고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이 비극적인 현실이 월북 문인들의 미완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쾌대 - 장엄한 역사의 서막을 알려준 화가의 손



새 세기의 첫해인 2000년 6월 13일, 남북한 정상들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처음 손을 맞잡을 때, 우리는 문득 잊혀졌던 한 월북 화가의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역동적인 힘과 생명 의지로 번득이는 조선 민중들의 나신상. <군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그림들은 위대한 화가의 손이 아니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대작들이다. 서구적인 지성과 동양적인 감수성이 잘 조화된 이 그림들은 1991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 월북 화가 이쾌대(李快大)의 작품들이다. 그의 화풍은 관학풍의 보수주의적 입장도, 이념 중심의 좌파 경향도 아니었다. 그는 주체적인 자기 인식으로 근대미술사에서 리얼리즘 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이쾌대는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미술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미학 이념을 만들어낸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월북 화가'라는 이력 때문에 남한에서는 40여 년 동안 잊혀져 왔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칭에 어울리듯 장엄함의 미학을 보여주는 대작 <군상> 시리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쾌대의 안목은 미술사·복식사를 연구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형 이여성(李如星)으로부터 온 것이 많다. 이여성과 이쾌대,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일제시대 서양화 수용사와 그것의 반성적 성찰 속에서 서양 화단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여성은 이쾌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신미술가협회(1941년)의 결성과 그들의 화풍 및 채색기법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가는 윤곽선을 설정하고 그 안을 색깔로 채우는 방식은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초상화법인데, 이쾌대는 유화를 그리면서도 독특하게 이와 같은 민족적 자산을 끌어들이곤 했다.

이쾌대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해방공간에 와서 민족과 운명을 어떻게 화폭에 재현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해방공간의 시대 정신이 각 화가들에게 개인과 사회의 관계 정립을 새롭게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 미술계의 여러 조직체가 생겨나고 좌·우익 진영으로 분할되어 이념 및 조직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이쾌대도 조선미술동맹, 독립미술가협회, 전조선미술가협회 등에 참여하면서 좌·우를 넘나드는 내면적 갈등을 보여 준다. 이쾌대는 당시 이념논쟁을 일삼던 화가들과는 달리 이념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가장 선명하고 민감하게 당대 현실을 그려냈다.

이쾌대의 선택은 역사가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과 위악을 보여준다. '이념의 친구들'을 따라 북한을 선택했던 좌파 지식인들과는 달리, 이쾌대의 월북에는 의문점이 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뚜렷한 사상의 궤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그의 월북이 사상적 선택이 아닌, 우연적이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은 실제 좌파 여부에 관계없이 좌익 소탕작전을 벌인다. 이쾌대의 이념적 성향은 중도파에 가까웠지만, 불가피하게 보도연맹에 가입해 '반공포스터전'에 참가하는 등 정치 활동을 강요당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모친의 병환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조선미술동맹에 재가입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린다. 인민군 점령에 이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다시 수복되자, 미술동맹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은 다시 인민군 치하의 전과를 씻어야만 했다. 서울을 지배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들은 일방적인 사상 선택과 전향을 강요받았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치 보복과 생존 위협이었다.

수복 후 부역자 심사시 이쾌대는 좌익으로 몰린다. 남한에서 '좌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천형과 같은 것임을 짐작한 탓인지, 이쾌대는 서울이 수복되기 일주일 전쯤 북한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나 길에서 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부산 100포로수용소 제3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전운이 걷히면 곧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 맘은 지금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아껴둔 색채,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을 처분해 아이들을 주리지 않게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그는 포로 송환시 북쪽을 선택한다. 그가 왜 북쪽을 택했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는 잠깐 동안의 체류라 생각하고 북한을 선택했겠지만, 서울에 있던 가족들과는 그 길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의 월북이 다소 의외였듯이, 월북 이후 북한에서 이쾌대의 행적도 그다지 뚜렷한 점을 찾기 어렵다. 그것은 그가 대체로 정치 활동에 직접 나서지 않았던 이유에서 설명된다. 그는 해방공간에서도 미술동맹을 탈퇴해 순수미술 성향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비정치적인 성향과 늦은 월북이 역설적이게도 북한에서 이쾌대의 삶을 안전하게 지탱해주지 않았을까? 그는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좇아 북한을 선택한 사람들과 달리 권력쟁투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다. 이쾌대의 월북 동기는 극적이지 않고 우연적이고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그 '평범함'이 바로 그의 비극이었다. 그 속에는 한 개인의, 혹은 한 가족의 통한의 분단사가 오롯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의 역사는 굴절과 파란을 거듭한다. 이 위대한 해방을 알려주던 예언자의 손을 그린 화가의 손, 그 흔적은 분단의 역사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김순남 - 민족의 미래를 노래한 정결한 혼의 음악가



해방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도적 같이 찾아왔다. 아무도 그렇게 빨리 해방이 될지 몰랐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로 이어지는 <해방의 노래>는 해방공간에서 가장 많이 불린 해방가요 중의 하나였다. 이 노래에는 민중들이 해방의 감격을 말하고 노래하고 외치는, 바로 그 소리의 축제가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대중들은 '말굽 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해방된 조국의 미래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는 희망에 불타올랐다. 이 어렴풋한 희망이 노래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감되었다면, 그 공적은 월북 음악가 김순남(金順男)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김순남은 <해방의 노래>를 비롯해 <건국행진곡>, <우리의 노래>, <농민가> 등을 통해 이 미래의 시간을 앞당기고자 했고, 그것이 서울 토박이인 그가 월북 음악인으로 음악사에 남은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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