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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조영복 지음 | 돌베개
해방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도적 같이 찾아왔다. 아무도 그렇게 빨리 해방이 될지 몰랐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로 이어지는 <해방의 노래>는 해방공간에서 가장 많이 불린 해방가요 중의 하나였다. 이 노래에는 민중들이 해방의 감격을 말하고 노래하고 외치는, 바로 그 소리의 축제가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대중들은 '말굽 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해방된 조국의 미래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는 희망에 불타올랐다. 이 어렴풋한 희망이 노래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감되었다면, 그 공적은 월북 음악가 김순남(金順男)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김순남은 <해방의 노래>를 비롯해 <건국행진곡>, <우리의 노래>, <농민가> 등을 통해 이 미래의 시간을 앞당기고자 했고, 그것이 서울 토박이인 그가 월북 음악인으로 음악사에 남은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노래 잘하고 피아노 잘 치기로 소문난 낙원동 '화장품 집 아이'인 김순남은 운명적으로 임화의 이념적 동지이자 창작의 친구가 되었다. 같은 서울 출신이었고, 모던 보이면서 작은 키에 술 잘하기로 소문난 이들은 음악과 문학의 재능을 서로 떠받쳐주면서 해방공간의 나라 만들기 이념을 정서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세 번쩍'(금테 안경, 금 이빨, 금 지팡이)이라 불릴 정도로 기질적으로 한량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낭만적 성향을 타고 태어났지만, 일본 유학 시절에 눈떴던 프롤레타리아 음악 운동과 이념에 영향을 받아 혁명적 낭만성이 그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이념적으로 투철하고자 했던 흔적은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일제시대에 성연회를 조직한다든가 해방공간에서 조선음악건설본부(작곡부 위원), 조선음악가동맹(작곡부장 겸 중앙집행위원) 등을 조직해 노래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일련의 활동은 그가 음악의 혼을 현실의 운동성과 조화하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김순남의 월북 동기는 무엇일까? 1947년 좌익운동이 완전히 비합법화 되자, <인민항쟁가>로 대중을 선도했고, 남로당원이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위원·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 등을 맡아 활동했던 김순남에게 좌익 활동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진다. 김순남의 월북은, 단단한 사상적 신념이 내면화되어 결행한 것이라기보다는 잠깐 외출하듯 떠났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 김순남은 박헌영을 따라 1948년 여름 해주에 정착한다. 그 후 평양음악학교 교수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헌법위원, 역사연구보존위원이 되었다. 작곡가로서 김순남의 이상은 민족음악을 현대음악의 보편성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성악을 전공하면서 작곡도 겸했던 채동선, 홍난파, 안기영 등의 1세대에 비해 김순남, 이건우, 윤이상 등의 2세대는 전업 작곡가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민족음악의 뿌리 찾기에 있었고, 그 선두에 김순남이 있었다. 김순남이 월북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계기는 소련 유학이었다. 그의 소련 유학은, 민족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조화 속에서 현대음악을 이끌던 하차투리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을 만나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확인하고 더욱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순남의 유학 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직후 사상문예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북한 음악계도 숙청의 폭풍을 예감하고 있었다. 김순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음악가로서의 자신을 포기하는 길이었다. 1954년경부터 당 조직의 사상투쟁 강화와 주체확립을 위한 반종파투쟁이 강화되면서 남로당계 예술가들, 특히 김순남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김순남 비판에 앞장선 평론가 리히림은 <인민항쟁가>가 베토벤처럼 6도 이상의 비약을 쓰고 있어서 부르주아적 방법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김순남의 모든 공적 직함과 창작 권리는 박탈당한다. 그의 복권은 신포조선소 현장에서의 노동 체험 이후인 1966년경에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김순남의 말년은 무척 고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복권된 이후 1960년대 말경 폐병을 얻었고, 이것이 전염성 폐결핵으로 악화되면서 이후 창작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던 듯하다. 요양과 귀향이 되풀이되었고, 만년에는 문예창작 지침과 개인의 창작 생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많은 내적 고통을 얻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작곡가로서 공식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그는 1980년 초 신포조선소에서 삶을 마감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순남의 월북은 분명 그의 음악가로서의 이상과 사상가로서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 체제 모순과 보수적인 제도권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음악 혼은 현실과 민중, 민족의 이름 위에서 불타올랐다. 그래서 민족음악사의 한 장을 연 이 걸출한 천재의 개인적 선택, 곧 월북이 불행했다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심지어 인터넷 세대를 막론하고 선술집 분위기의 주가(酒街)에서 무장 해제한 듯 불러 제끼는 노래의 0순위는 <홍도야 우지 마라>일 것이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로 시작되는 홍도의 신화는 너무나 신파적이어서 비극일 수 없으며, '의젓한 오빠와 연약한 누이'의 상투적 구도가 유행가가 될 수 없게 한다. 낡은 풍속화가 어떻게 유행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행가가 아니어서 이 노래는 생명력을 갖는다. 이것이, 노래 가사를 정확하게 몰라도 이 구투 나는 신파조 가락을 흥얼거리는 이유가 아닐까? 이 해방구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홍도야 우지 마라>의 원작자이자 월북 극작가인 임선규(林宣奎)이다.



임선규의 본명은 임승복(林勝福)이며,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원봉리이다. 가난한 소작인이었던 그의 부친은 임선규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명석한 머리를 가진 임선규는 당시 3대 명문 상업학교였던 강경상고를 다녔지만, 1930년, 3학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퇴한다. 강경상고 시절 이미 「개벽」지 현상 문예에 「수풍령」(愁風嶺)으로 당선되었다는 설도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글재주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비사교적이었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멋을 부릴 줄 알았던 임선규가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유명한 배우 강홍식이 소속된 조선연극사가 강경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임선규는 강홍식에 매료돼 그 길로 강경을 떠난다. 서울에 올라와 조선연극사에 연구생으로 입단한 임선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문예봉(文藝峰)과의 만남이다. 임선규의 월북과 그 이후의 생은 그의 아내인 문예봉의 행적과 분리하기 어렵다.



문예봉은 일제시대 공히 '3천만의 연인'으로 군림한 은막계의 스타였다. 문예봉은 1932년 16세의 나이로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해 일약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다. 문예봉은 나운규의 눈에 띄어 배우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이 인연은 후일 북한에서 그가 숙청을 당하는 한 계기로 작용한다. 아무튼 이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임선규와 결혼한 것은 17세 되던 1933년 4월이었다. 당시 극단 내에서의 연애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결혼과 동시에 조선연극사를 떠나야만 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양쪽 부모들이 모두 결혼을 반대해 문예봉은 심적인 고통을 겪고 있었다. 더욱이 임선규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요양 중이였고, 문예봉은 경성촬영소에서 아이와 함께 숙식을 해결하는 불안정한 이중 살림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모로코>,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악>, <처녀호>와 같은 영화를 좋아하고, 게리 쿠퍼를 좋아했던 문예봉이 가장 희망한 것은 '좀더 공부해서 영화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무학이었던 문예봉에게 임선규가 글과 문학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사비수와 낙화암> 같은 연극에서 임선규는 극작가로서뿐 아니라 문예봉과 함께 나란히 주연 배우로도 활동했다. 임선규와 문예봉 두 스타의 삶은 한편 화려해 보이지만 일제시대를 살았던 만큼 친일은 형벌처럼 그들의 운명을 낚아챘다. 일제시대 지식인들, 문화예술인들에게 이 친일과 월북이라는 문제는 많은 부분에서 하나의 사슬처럼 존재한다. 광복 이후 절필 상태로 지내던 그는, 다만 친일이라는 무거운 형벌에서 면죄부를 받기 위해 1846년 남로당 창당대회장에서 선동적 내용으로 가득 찬 낭송 형식의 연극인 슈프레히코어 작품 <긴급동의>를 발표한다. 그러나 정부 수립 이후 좌익단체가 불법화되고 검거령이 내려지면서 이때의 경력이 점차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오고, 그도 결국 1948년 경 월북을 하게 된다. 문예봉의 고향이 함흥이었던 점도 북한을 향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프로 연극계 작가들뿐만 아니라, 대부분 서민 대중극 배우나 영화인들이 북한을 선택했다. 일본 유학파들이 아마추어 연극 활동을 하면서 잡지나 신문의 지면을 독점하고 연극계를 독점하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 서민 대중극 작가나 배우들은 많은 부분 이들로부터 소외당했다. 이것이 이들의 월북을 부추긴 한 요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북한에서 임선규의 삶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아내였던 문예봉의 행적만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져 있다. 월북 이듬해(1949년) 문예봉은 북한의 첫 예술극 영화 <내 고향>(김승구 극본, 강홍식 연출)에서 혁명가의 아내 역으로 출연했다. 북한 당국은 이 영화를 북한 영화의 효시로 삼을 만큼 고평했고, 1952년에는 북한 최초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한때 북한에서 영화는 문예봉, 무용은 최승희, 연극은 김선초란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문예봉은 영화계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문예봉도 '피바다 예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면서 소용 가치가 떨어져 북한 무대예술계에서 한동안 모습을 감춘다. 그 무렵 임선규는 서울에서부터 앓았던 폐결핵이 악화되고, 당 방침에 맞는 작품을 써내지 못하여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다. 임선규는 문예봉과 별거 상태로 주을 온천 부근의 결핵환자 요양소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0년 봄에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문예봉은 1980년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복귀하면서 복권되었다.



문예봉의 말년의 삶은 북으로 간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예봉은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맞아 배우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인민배우'가 되었고, 국가훈장 제1급을 받았다. 김정일 총비서가 1997년 1월, 그녀의 80회 생일을 맞아 '생일상'을 전달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4남매와 13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던 문예봉은 북한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 1999년 3월 26일 사망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명의로 된 부고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직하였으며, 우리 당의 문예정책 관철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였다."고 그를 기렸다. 문예봉의 다복한 말년의 모습만이 부각되었을 뿐 남편 임선규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슬프고 메말랐던 감정에 노출되었던 대중들에게 정화의 눈물과 주술적인 감동을 선물했던 극작술의 천재, 가장 뛰어난 대중극 작가였던 임선규의 존재는 우리 무대예술계에서 그렇게 스러져갔다.구보 박태원(朴泰遠). 대모테 안경에 갑빠 머리를 한 모던 보이. 이상을 거의 전적으로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었던 이상의 몇 안 되는 친구. 실명을 소설 속에 드러내고, 대학 노트를 들고 경성 시내를 돌아다닌 하루 동안의 기록을 소설이라 우기는 참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내. '거만한 사내'라는 뜻의 구보(仇甫)라는 호를 즐겨 썼고, 친구들이 일부러 '구보'(九甫)라고 낮추어 부르자 기어코 '구보'(丘甫)임을 주장한 사내. 소설 하나에 자기 이름과 전 생애를 걸었던 이 득의만만한 사내. 그가 박태원이다. 그는 월북 작가 중 만년까지 창작 활동을 했고, 최고의 역사소설가로 북한문학사에 이름을 남긴다. 박태원은 죽기 직전까지 3부작 대하역사 소설인 『갑오농민전쟁』을 탈고함으로써, 북한에서 작가로서 자기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월북 문인이다.



박태원은 어린 시절의 개화적 환경 덕분에 비교적 자유스러운 문화 예술적 취향을 배양할 수 있었다. 또한 조부 밑에서 탄탄하게 수업을 받았던 탓에 한문 소양이 성숙되어 있었고, 이는 후일 박태원이 역사물 번역이나 역사소설 창작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박태원은 1923년 경성 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과 공부보다는 문학 창작 활동에 더 깊은 애착을 보였고, 세계 명작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문학청년 기질 때문에 그의 학교 성적은 겨우 중간 정도를 유지했다. 학교 공부에 더 이상 흥미를 잃은 탓인지, 그는 1927년에 휴학을 하기도 했다. 문학병에 걸려 신경쇠약이 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일본 유학은 문학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의 일본에서의 문학 수업은 일본 신감각파나 신심리주의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듯하며, 그것이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등과 관계가 있지 않나 추측된다. 문학·영화·음악·미술 등 서구 예술 전반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들떠 있던 박태원의 도쿄 유학 생활 체험은 자전적 소설인 「반년간」에 잘 나타나 있다.

박태원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귀국 후 일 년 뒤쯤 구인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박태원은 1930년대 이상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모던 보이로, '장거리 문장'을 쓰는 최고의 기교파로 불리며, 이태준·김기림·김유정 등과 함께 1933년에 결성된 구인회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 '순문학적·몰이념적' 문학단체인 구인회에 대해 카프는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는 월북 이후에 20년도 더 지난 구인회 이력이 문제가 되어 숙청의 바람을 맞기도 하였다.



그는 1934년, 숙명여학교를 나와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던 김정애와 결혼한다. 결혼 5년째의 생활에서 그가 그토록 절감한 것은 '가난'과 '돈의 귀함' 이었다. 박태원은 일제 말기에 생계가 어려워지자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 협회(후일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고 「아세아의 여명」, 「군국의 어머니」 같은 친일 작품을 썼다. 광복이 되자 그는 임화가 조직한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나, 뚜렷한 활동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때의 활동이 빌미가 되어 김기림·정지용·설정식 등과 함께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한국전쟁이 나자 종전하기까지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그 후 서울에 내려온 이태준을 비롯 정인택·오장환·이용악 등과 함께 패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태원의 월북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북한 출신이면서 김일성의 신망을 받던 한설야는 역설적이게도 비운의 죽음을 맞았지만, 남한 출신이면서 이념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박태원은 오히려 말년까지 소설가로서 자기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역사소설로 방향을 잡으면서 글쟁이로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는 평양에서 이태준의 후원 아래 국립고전예술극장의 전속 작가로 활동했고, 평양문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조국의 깃발』(1952), 『리순신 장군』(1952)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월북 시조시인 조운과 함께『조선 창극집』(1953)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태원이 북한에서 내내 작가로서의 삶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를 위조하라는 당국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죄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고, 시골 소학교 교장으로 좌천당해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특히 그의 시련은 남한에서의 부르주아적 문인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박태원은 "21년 전의 일을 들추자는 당의 의도를 생각하면 월북한 것이 슬프다. 자의든 타의든 월북한 이상의 당의 문학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고, 노력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을 믿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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