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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최근에 친미와 반미가 중요한 논의거리로 떠오르면서, 우리 친미의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120여 년 전 주일중국공사관의 참찬관이었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880년 황준헌이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에게 건네준 이 책에는 미국에 대한 긍정 일변도의 묘사가 담겨져 있고,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려고 노리는 러시아를 막으려면 반드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대원군 시기 조선 조정의 의식을 바꾸는 데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고종과 그 측근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접했고, 그들이 세운 배재학당 등 여러 미션스쿨에서 이승만·신흥우·오긍선 등 각계의 친미적, 개신교적 지도자들이 배출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국을 이상적인 문명의 모델로 설정했습니다. 『조선책략』은 미국이 굳게 잠겨 있던 조선의 문을 열고 종교적·문화적으로 침투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외국의 침략 위협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느냐고 묻는 김홍집에게 황준헌은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던지라, 자강의 방도로서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어 서양 언어와 조선 기술, 서구적 무기 제작 등을 익히는 방안부터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아울러 서양인들을 초대해서 군사학과 천문학·광학·화학 등을 익힐 수 있는 학교를 조선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황준헌은 보호관세 개념을 조선 관료들에게 최초로 설명해 준 사람인 듯합니다. 관세 장벽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오늘날에도 개도국들에게 꼭 맞는 말로 들리지만, 흉년 때 조선이 방곡령을 선포하여 미곡 수출을 금지해도 일본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황준헌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습니다.



당시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이던 '호랑이 나라' 러시아를 조선이 막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힌 황준헌은, 러시아를 가장 위험한 국가로 설정합니다. 중국이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에서 러시아의 최대 경쟁국이었던 영국 쪽에 가까웠던 중국의 온건 개화파 인사들의 상당수도 러시아를 '현대판 진(秦)나라'로 생각했지요. 『조선책략』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과 화친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중국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만약 일본이 침략한다 해도 중국이 언제나 조선을 구해줄 것이라고 확신한 황준헌의 태도는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 위협적이라니요.



당시 중국의 외교 책임자였던 이홍장은 중국과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던 러시아를 자신들의 속국인 조선을 침략하려는 나라로 지목하였고, 이에 대응할 가장 좋은 대책으로 조선의 대미조약 체결을 내놓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황준헌은 조선의 보수적인 지도층에게 대미 수교의 장점을 설득력 있게 납득시킬 의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조선책략』에서 미국을 선하게 그린 것은 상부의 지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외국통이었던 황준헌은 극동에서 상리(商利)만을 추구했던 미국의 궤변적이고 형식적인 약속을 진정한 것으로 오해하였으며, 하와이 병탄·필리핀 침략 등 태평양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꿈꾸던 미국을 순진하게도 영토적 야욕이 없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트 외교관의 대미의식 수준이 이 정도였으니 청나라가 끝내 무너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지요.

결국 이 무지와 오해가 『조선책략』과 같은 책자를 통해서 조선에 옮겨와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고종과 그의 대신들을 신미(信美)주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1905년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가 고종의 애원을 무시하고 일본이 한국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후에야, 황준헌이 심어준 신미주의의 뿌리는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조선책략』은 우리에게 외국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중요하고, 강대국에 대해 순진한 꿈을 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한 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캄캄해진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저는 『조선책략』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게 침략의 길을 열어준 '트로이 목마'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에게 정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준, 판도라 상자 속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봅니다. 『조선책략』이 제기한 두 가지 생존 전략, 곧 주변 열강들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만들고(대외적 균세론), 부국강병을 도모하라(대내적 자강론)는 전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1880년대 이전 러시아는 중앙 아시아와 발칸 반도에 몰두하였으며, 새로 개척한 극동 지역 쪽으로는 육로 교통망도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려 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치에 눈에 띄는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갑신정변(1884)의 결과 조선의 대내외 정치에 대한 중국의 간섭이 심해진 후부터이며, 조선을 둘러싼 각축전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괄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다음부터입니다. 한 마디로 1860년 북경 함락 이후 중국이나 조선은 자력만으로는 적대 세력을 막을 수도, '힘의 균형'을 도모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통적 외교 술책에 의존하는 '책략의 균형'을 꾀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가 1876년 개항 이래 국권을 빼앗긴 1905년까지 30여 년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열강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도모한 책략이 유효했기 때문 아닐까요.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최강대국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진짜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에 큰 욕심이 없었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미국은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전략적·경제적 동기만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제국주의라고 할 수도 없는 부차적 제국주의 국가인 청·일 양국은 조선에 매우 절실한 이해가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을 이용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지금 미국이 동아시아 지배를 위해 한국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동기가 그때 미국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을 짝사랑한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오늘의 우리가 『조선책략』에서 얻을 교훈은 자력 없이 남의 힘을 이용하는 책략만으로는 다시 돌아온 열강 각축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현명한 책략과 견실한 자강, 이것이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들의 다툼에서 우리의 번영과 양심을 지켜줄 방패일 겁니다.

- 개나리와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재식민화 과정에서 이라크 국민이 보이는 태도는 조금 뜻밖입니다. 30여 년 동안 후세인의 압제에 시달려온 그들이 미군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력을 다해 '본격적인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된 후인 지금까지도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후세인 정권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대다수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의 투사가 되어 게릴라전에 적극 참여하고 대미 부역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후세인의 최대 정적인 지하 공산당을 포함한 거의 전 이라크 국민이 후세인의 반미 항전을 지지하는 상황, 후세인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집단 가운데 하나인 시아 파마저도 점차 적극적인 반미 저항으로 돌아서는 상황을 애국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과거 우리가 경험한 개발독재와 후세인 정권의 성격을 비교해볼까 합니다. 박정희의 선(先)개발·후(後)분배 정책에 의해 일주일에 70∼80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고도 쥐꼬리만한 월급에 만족해야 했던 노동자들이 박정희 사망 소식에 애통해했던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면, 이라크의 현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68년 무력정변으로 집권한 후세인의 바트 정당이 내건 목표는 박정희나 장제스가 내세운 목표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 곧 군사주의적 국가 주도의 개발이었지요. 석유를 가진 후세인은 자원이 없는 한국이나 대만에 비해 수월하게 개발의 꿈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1972년 외국 자본이 소유했던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후세인은, 프랑스와 서독·소련의 기술을 빌려 제철소와 비료·트랙터 공장 등 현대식 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아랍 세계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무기 연구와 군수공업에 과감하게 투자한 후세인의 정책은 박정희 시대 자주 국방을 연상시키고, 유일 정당 중심의 정치체제라는 점에서 상당히 흡사한 이라크와 대만은 모두 기간(基幹)공업을 국유화했습니다. 또 후세인의 최측근과 대자본가들의 유착관계는 한국의 재벌자본주의를 보는 듯 합니다.



두 독재자는 문화정책상으로도 눈에 띌 정도로 유사합니다. 한국과 이라크 사회 모두 유학생 출신들이 기술관료 집단의 핵심을 이루는 등 서구화 지향적인 신엘리트들이 사회 분위기를 이끌며, 이를 통해 세계체제에 편입하려고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국민' 만들기와 통합, 정권의 정통성 부여와 권위 유지 차원에서 양쪽 사회 모두 기존 전통들을 정치적 세뇌 자료로 이용했습니다. 이라크에서 개발독재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물론 후세인의 지도부와 당, 군 간부 등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대만의 경우처럼 이라크 일반 민중의 교육·의료·복지 수준이 어느 정도 동반 상승했습니다. 또 한 가지 후세인과 박정희의 공통점은, 후세인의 출신 지역(티크리트)과 박정희의 출신 지역(영남) 인사들에게 출세 과정에서 수많은 특혜를 준 지역주의 구조의 조장입니다.



지금 이라크 투사들에게 후세인은 어떤 존재일까요? 두렵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위대하기도 한 조국 근대화의 지도자일 겁니다. 그들은 순수한 애국심에서 미국에 적개심을 느끼는 한편, 최소한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보유한 후세인의 개발독재가 식량배급제도와 학교·병원을 그나마 돌아가게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약탈을 당하는 국립박물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석유와 관련된 정부 부서만을 집중적으로 보호했던 바그다드 점령 직후의 미국의 태도는, 자원 약탈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오늘의 미국 극우파 통치자의 기본 자세를 잘 보여줍니다. 추악한 형태이긴 하나, 후세인 정권은 야수적인 제국주의 세계에서 이라크 주민들의 집단적 생존을 담보하는 국민국가였던 것입니다.

- 이라크 민중의 고통이 끝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박노자 드림.박 선생님 지적처럼 만일 유신정권 아래에서 일본이 독재 타도와 민주 회복을 명분으로 침략해 들어왔다면,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던 운동권 학생들까지도 대일 저항의 총을 높이 들었을 것입니다. 일본이 내건 명분을 그대로 믿기에는 역사 속 일본의 모습이 너무도 추악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후세인의 철권정치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미국의 사탕발림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이라크 사람들이 지금까지 외세로 인해 겪은 살육과 착취의 역사가 너무도 참혹합니다.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써먹은 전략은, 지난 1920년 식민모국 영국의 착취와 폭정에 격분하여 일어난 '아랍민족무장운동'을 진압할 때 영국이 이미 써먹은 방법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후세인은 "서방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이라크 건설"을 모토로 내걸고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석유를 노린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보다 후세인의 개발독재가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주기에 이라크 사람들이 미국에 저항한다고 보시는 선생님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외세의 지배보다 개발독재가 이라크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까요? 둘 다 똑같은 중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후세인과 박정희 두 사람 모두 빈농 출신으로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고, 일본의 군국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세례를 받았으며,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해 군부와 재벌에 기댄 메이지 일본식 부국강병형 개발독재를 추진했다는 점이 같더군요. 또한 둘 다 한때 마르크시즘을 추종했고, 스탈린 류의 공포정치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사한 점은 미국과의 관계입니다. 두 사람 다 한때 자신의 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주는 보루로 총애를 받았지요. 이들의 몰락도 미국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추진하던 핵무기 개발 계획이 박정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CIA 음모설)이 제기된 적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를 명분으로 내세운 미국의 후세인 제거 계획은, 이라크 국민과 아랍 사람들에게 후세인이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아랍의 영웅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진정한 영웅일까요? 군부의 힘에 기댄 개발독재는 어떤 형태로든 국민을 전장으로 내몰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이란·이라크전도 개발독재의 후원자 미국을 위한 대리전이었지요. 저는 박정희 신드롬이나 이라크 사람들이 후세인을 '반미 항전의 지도자'로 추종하는 것 모두 개발독재가 사람들에게 걸어놓은 우민화의 최면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나아가 생각을 달리 해보면, 1970년대 '한강의 기적'과 1980년대 초 이라크가 누린 풍요는 모두 외세와의 타협이 가져다 준 산물이었습니다. 이라크와 한국 두 나라는 외세 침략과 개발독재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라크를 보면서 우리는 외세에 기생해서 얻은 부강은 그것이 그들의 이익과 충돌할 때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후세인과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라크와 한국에서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이바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의 개발독재가 실은 두 나라 사람들의 미래를 가불한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박정희나 후세인을 산업화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군부독재의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나오면서 한국인들이 얻은 교훈 하나는 자유와 인권은 남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자신의 힘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이라크 사람들의 인권과 자유도 시민들의 자각과 각성이 따를 때에만 얻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끝으로 이라크 전쟁 참전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들끓던 때, 저는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옛말을 떠올렸습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 마냥 내릴 수도 그냥 타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 반전과 참전 어떤 쪽도 선뜻 지지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자유로 포장되었건 신의 이름을 빌리건,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앗아가고 정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의 경험칙(經驗則)이 아닐까 합니다.

- 이라크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날이 어서 오길 바라며…. 허동현 드림.100년 전의 잡지나 신문을 보면 한 세기 이전의 문제가 아닌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대해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역사는 물론 그대로 반복되지 않습니다만,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해나갈 때 이전의 발전 패턴들이 구조적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100년 전 서구 열강과 청·일 두 나라가 국가 존립을 위협했다면, 이제는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으며, 근대의 길목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던 우리 선조들처럼 오늘날 우리도 나아갈 바를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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