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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 그 자유분방함의 미학

최준식 지음 | 효형출판사
왜 지금 여기서 한국미인가



예술은 일종의 표현문화(expressive culture)다. 사람들이 지닌 성정은 문화적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므로 사람의 감각이나 감정을 다루는 예술에는 그 문화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예술은 그 나라 문화의 특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분야다. 우리 예술에 대해 아무리 기본 상식이 없는 사람도 우리의 살풀이춤과 일본의 가부키는 구별할 줄 안다. 더욱이 우리 예술은 동북아 삼국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하다. 가령 무용이나 음악 같은 것은 우리 나라의 그것이 삼국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말은 아끼더라도 그 독특함은 인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 이것은 사회문화나 종교문화, 가치관 등 모든 방면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예술분야만 언급하기로 한다. 어떤 문화든 핵심에는 예술이 있다. 물론 가장 핵심에는 종교와 철학 사상이 있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것이 예술을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예술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예술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담겨 있다.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공연이나 하고 풍류나 읊조리자는 게 아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국가의 이미지가 없다. '한국' 혹은 '코리아' 하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없다. 국가도 선명한 이미지가 있어야 외국에 물건을 잘 팔 수 있다. 예술문화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신을 바로 세운다는 면도 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 나라의 예술이 바로 서지 못하면 그 나라의 문화는 더 이상 볼 게 없다. 우리 예술문화를 바로 세우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끊어진 전통을 다시 이어야 한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그동안 단절되었던 우리 문화의 전통을 잇는 데 있다. 그게 후손들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예술을 이어야 할까?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 후기의 예술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면에서 조선 후기의 것을 계승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 후기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문화의 맥이 끊어져 버렸다. 따라서 이것을 이으려면 조선조 말의 예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목적에서 씌어졌다.

왜 조선 후기인가



조선 후기는 과연 어떤 시기일까?




조선 후기는 예술사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조망해 볼 때 매우 독특한 시기다. 문화사적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상층과 기층의 문화가 섞이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조선 후기가 우리 시대와 근접해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점도 있지만, 그 시대 자체로도 한국사 전체에서 충분히 유의미(有意味, significant)한 시기다. 그러면 이러한 문화적 특징, 즉 상층과 기층 문화의 융합 현상은 어떤 사회적 변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현대를 제외하고 기층민들이 조선 후기처럼 집단적으로 신분 상승하는 데 성공한 시기는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체 문화가 형성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층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 중기 이후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신분질서의 동요와 기층민들의 경제력 향상이다. 전자의 요인인 신분질서의 동요는 후자인 경제력의 향상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지만 우선 신분질서의 변화부터 보자.

조선 전기의 이러한 상황은 양란으로 피폐되었던 경제가 서서히 복구되면서, 다시 말해 이른바 진경시대[숙종대(1674∼1720)부터 영조대(1724∼1776)를 거쳐 정조대(1776∼1800)까지의 100여 년에 해당되는 시대를 말한다. 이때는 중국에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면서 자국의 자연과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성숙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분제도적으로 볼 때 이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양반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도시나 반촌보다 농촌에서의 변화가 심했다. 그래서 18세기 말엽이 되면 양반이 가장 많아지고 평민, 노비 순이 된다. 그런데 이런 신분상승이 아무런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없이도 가능했을까? 조선 후기의 이러한 변화는 분명 사회의 경제구조가 바뀌면서 일어난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하부구조가 바뀌니 상부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부구조의 변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 기층 민중들이 소유한 부의 절대량이 많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부를 이용해 신분을 산 것이다. 어떤 사회건 돈을 많이 가진 계층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게 된다. 물론 기층민들이 부를 많이 축적했다고 늘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이 변화의 조짐에는 조선이 임진란과 병자란을 겪으면서 사회가 해체되는 경향도 큰 몫을 했다.

농업 기술의 빠른 발전



농업과 관련해서 조선 후기가 되면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 중에서도 우선 꼽아야 하는 것은 경작 면적의 확대다. 가경 면적이 늘어났다는 것은 토지에서 산출해낼 수 있는 농작물의 절대량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만큼 부가 축적될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앙법과 견종법 등과 같은 농업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토지생산성은 유례없이 높아졌으며 노동력을 대폭 절감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농민 한 사람이 넓은 땅을 광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농사법도 개발된다. 어떻든 이런 과정을 통해 부를 축적한 농민들은 평민지주가 되었고 이들은 그 부를 이용해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관직수여증인 공명첩(空名帖)을 사서 양반신분으로 상승하기도 했다. 양반이 많이 늘어나게 된 사정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더불어 발전하는 상업



조선 후기가 되면 농업의 발전과 더불어 수공업이나 광공업 등의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보이는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상업의 발전이다. 이것은 예술의 발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16세기까지 중부 이남 지역에서만 발달되었던 장시(場市)가 18세기 중엽이 되면 전국에 1,000개 이상으로 늘어난다. 시장이 이렇게 많이 생기다 보니 전국은 시장들로 전부 연결되었다. 이러한 장터에서는 바로 판소리나 탈춤과 같은 민중예술이 연행된다. 일단 손님을 끌기 위함이다. 당시 사람들은 풍악 소리에 이끌려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고, 들뜬 분위기를 함께 즐기려고 시장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판소리나 탈춤과 같은 민중예술이 지역 시장에서만 연행된 것은 아니다.

민중예술이 소통되는 데 지역장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강 어구에서 항구 역할을 하는 포구였다. 탈춤이나 남사당패와 같은 민중예술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데는 전국적으로 형성된 시장이나 포구가 그 교량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제교역도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국제교역은 물론 청나라와의 교역이 중심이 되었다. 이 교역 역시 장시나 포구에서 관청과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상업을 하는 사상(私商)들이 18세기 중엽 이후에 장악하게 된다. 이 사상들도 우리 나라 예술사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이들이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단원 김홍도를 후원했던 당시 장안 제일의 갑부 소금장사 김한태를 예로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의 문화 융합 양상에 대해 보았다. 그 양상이란 상층문화와 기층문화가 중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치고 올라온 기층문화가 어느 정도 하향 조정된 상층문화와 융합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새로운 문화에는 기층의 세계관이 강하게 반영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러면 조선 후기 기층민들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샤머니즘이 중심이 된 민간신앙이었다. 따라서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이 조선 후기 예술에 짙게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 민중 예술의 대표격인 판소리가 시작된 곳도 굿판 아니었던가?

조선 후기의 예술정신 : 샤머니즘적 자유분방성 한국인들의 무질서에 대한 동경



무교(巫敎)는 한국인의 영원한 종교다. 우리 민족은 무교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무교와 함께 역사를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무교는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절멸되지 않고 기층 민중의 신앙 속에서 살아 있었다. 우리 민족이 무교와 더불어 살았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무당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단군이 무당이었다는 것은 거의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당시는 제정일치의 사회였으니 정치적 우두머리인 단군이 종교적 수장자인 무당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무교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뿌리를 이루어 왔던 불교나 유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두 '고등' 종교는 무교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인의 예술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그 영향이 표층적인 데 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품을 만들 때 외부의 틀, 다시 말해 양식은 유교나 불교의 것을 취하지만 내용은 무교적인 것으로 채웠던 것이다. 아울러 영향을 미쳤던 시기도 다르다. 무교의 영향은 시대를 불문하고 지속적이었음에 비해 유교와 불교는 시대를 달리 하면서 그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무교는 어떤 종교일까?



무교는 무당과 함께 시작한다. 무당은 일반 신도(단골)들이 혼자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신령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게끔 도와주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무당은 하늘(신령계)과 땅(인간계)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자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巫)라는 글자를 분석해야 한다. 원래 '巫'자는 중국 고대 샤먼들이 점을 칠 때 쓰던 무구(巫具)를 상형화하여 만든 글자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당이 하늘(신령계)과 땅(인간계)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늘상 굿에서 보듯이 무당은 춤과 노래를 통해 엑스타시, 즉 망아경 속으로 들어간다. 망아경 속에서 무당이 탈혼 상태가 되면 신이 무당의 몸으로 내려와 말을 전한다. 그러니까 무교의 핵심은 바로 이 망아경 속에 들어가는 데 있다고 하겠다. 망아경 속에서 사람은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종교학적으로 멋있게 표현해서 이른바 '원초적 혼돈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말이 멋있어서 태초의 혼연일치적인 상태지 쉽게 이야기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상태를 말한다. 이는 무질서의 극치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질서상태 하면 굿을 빼놓을 수 없다. 굿은 시작할 때는 젯상을 화려하게 차려놓고 판을 정화하기 위해 부정을 치는 등 근엄하게 시작한다. 그러나 곧 그 근엄은 사라지고 난장판 - 난장판이라는 용어가 다소 과격하면 '흐트러진다'고 표현하자 - 이 되어버린다. 굿판이 무르익어 가면 굿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게 난장판이다. 굿하는 무당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모시는 신령도 어디다 두었는지 전부 다 잊어버린다. 전체가 한 덩어리, 즉 혼연일체가 되어 춤판을 벌이는 것이다. 물론 굿은 잡귀들을 불러 먹이는 조용한 뒷전마당으로 끝나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질서하고 너무 자유분방하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의 무교와 역사를 같이 했다. 그래서 어느새 우리는 굿에서 보이는 것처럼 질서를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무교적 예술정신에 배어 있는 자유분방성



조선 후기의 예술을 관통하는 미의식은 자유분방성이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다른 시대의 예술에도 이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 우선 선학들이 지금까지 한국적인 미의식으로 제시한 개념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그것과 '자유분방성'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한 연구라면 우선 고유섭 선생을 꼽아야 한다. 고유섭 선생의 한국미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작위(무기교)의 작위(기교)'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예술품들은 너무 천연스러워 인위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그가 제시한 개념에는 무계획성, 무관심성, 비균제성(asymmetry), 구수한 큰 맛, 질박함 등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나라 예술품에는 인위적인 것을 가능한 한 피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위적인 것을 피하다 보니 우리 예술품들은 무계획적으로 보인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세부적인 데는 관심이 없으니까 큰 맛으로 구수하게 다가온다. 자로 잰 듯한 빈틈없는 모습이 아니니 대칭적인 모습이 나올 수가 없다. 따라서 비균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런 모습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개념은 역시 '자연주의' 혹은 '자연스러움'이다. 이것은 타계하신 김원룡 교수 이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개념이다. 한국 예술은 자연스럽고 천진하고 천연스럽다는 것인데, 여기에 익살 혹은 해학미가 추가되기도 한다. 또 '곡선의 미'도 한국적인 미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 안에 넣을 수 있다. 자연은 대부분 둥글게 나타나지 직선적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기야 직선도 곡선의 일부 아닌가? '곡선의 미'와 같은 개념은 굳이 독립적인 한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과 같은 큰 개념에 속하는 하위 개념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백의 미'라는 개념도 자연주의 미론에 넣을 수 있다. 무엇이든 꽉 채워 넣으면 인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고 싶은 개념은 소박미 혹은 소박주의다. 이 개념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권영필 교수다. 권 교수에 의하면 외래 사조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 우리 예술가들은 세부적인 것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아주 단순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예술은 질박하고 더 나아가서는 투박하고 거칠게 된다. 우리는 아기자기하거나 화사하게 꾸미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저 크게 보고 세부적인 것은 툭툭 쳐버리고 전체적인 모습만 유지한다는 것이다.

우리 예술 각 장르에 나타나는 자유분방함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미감을 더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인들의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러운 미의식은 또 다른, 그러나 매우 재미있는 미의식과 관계되는 것 같다. 이를 용어화하면 익살(해학)미, 파격(일탈)미 등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예술에서 나타나는 파격적·일탈적 익살은 실로 많은 곳에서 보인다. 특히 민간 예술에서 많이 보이는데, 조선 후기에 유행한 민화나 장승, 돌미륵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파격이나 익살, 일탈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일삼을 수 있는 민족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이 정도면 한국인의 미의식이라 할 수 있는 자유분방함에 대해 충분히 살펴본 것 같다. 하지만 이 개념이 한국 예술미의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조선 후기의 예술만을 집중해서 볼 때 이 개념을 적용시키겠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예술에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모습



자유분방한 조선 후기 음악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은 대체로 크게 정악과 속악으로 나뉜다. 정악은 왕실이나 귀족들이 즐기던 음악이고 속악은 일반 민중들이 가까이하던 음악이다. 우선 정악에는 궁중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례악이 있다. 정악에는 또 양반들이 즐기던 영산회상과 같은 풍류음악이나 시조, 가곡, 가사와 같은 성악곡이 있다. 또한 정가(正歌)라 불리는 성악곡들 가운데 가곡과 시조는 기존의 시조에 곡을 부쳐 부르는 노래로, 긴 사설에 노래를 부쳐 부르면 가사라고 한다. 이 중에 가곡과 시조만이 조금 남아 있는데, 시조는 우리 나라 사람이면 아무리 관심이 없더라도 한두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태 사안-이 이히이히 높다 아아아 하아 되-." 이렇게 시작하는 시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게다. 속악은 아직도 우리가 즐기는 음악이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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