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리처드 솅크먼 지음 | 미래M&B
오늘날 미국의 생활환경은 도금시대에 흔했던 전셋집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당시, 가난한 8인 가족은 가로 10피트 세로 12피트의 거실과 가로 6피트 세로 8피트의 침실을 함께 썼다. 당시 가난이 너무나 만연하여 뉴욕 시민의 절반이 빈민가에서 살았다. 오늘날 사정은 그보다 훨씬 좋아져서 주택 문제는 많이 해결되었고, 뉴욕 시에 사는 2만 명 정도의 무주택자를 걱정하면 되는 정도가 되었다. 1백 년 전인 1884년, 뉴욕 시의 4만 3천 명 이상의 세대가 집세를 낼 수 없어 집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가난은 1920년대부터 격감했다. 각 시기에 정부가 내세운 최소 생계비를 감안한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빈곤율은 1940년의 33퍼센트에서 1950년의 27퍼센트, 1960년의 21퍼센트, 1970년의 11퍼센트로 떨어졌다. 이처럼 가난이라는 문제가 사라지면서 역설적이게도 가난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졌다. 달리 말하면 가난에 대한 미국인의 문제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증가되었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긍정적인 발전이었다.
미국이 여러 부문에서 발전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예전에 비해 악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가장 특징적인 문제인 높은 실업률, 불안정, 파산 등은 과거에도 흔한 문제들이었다. 대공황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1837년, 1873년, 1893년에 심각한 불황이 있었다. 이런 시기들은 1970년대에 겪은 위기만큼 심각했다. 1970년대의 국가적 어려움을 언급할 때 비관론자들은 에너지 위기를 자주 언급했다. 하지만 에너지 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석유는 다시 풍부해졌고 미국인은 절제할 줄 알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은 안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인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2.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민주주의도 평등도 믿지 않은 건국의 아버지들4. 성공 신화
자수성가한 기업가는 거의 없다미국의 이혼율은 세계 최악으로 영국의 4배이고 프랑스의 3배다. 하지만 이혼은 최근에 느닷없이 불거진 문제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이혼이 만연하자 연방정부는 그것을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1880년대에는 1년에 2만 5천 건의 이혼이 발생했는데, 그 어떤 선진국보다 높은 수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이미 미국인의 이혼율은 1960년대 초반 못지 않게 높았다. 역사가인 버나드 와이스버거는 이렇게 지적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게 되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과 이혼할 마음을 먹게 된다. 반면 남성은 위자료, 자녀 양육비를 감당할 수 있고 새로운 가정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벌 수 있으면 기꺼이 이혼할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환경이 열악했던 지난 시절에 남자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은 아내와 자식을 유기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가난한 남자의 이혼 방식'이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이혼 건수는 19세기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은 평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남자들도 아내가 내조를 제대로 해주지 않자 이혼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급증하는 이혼율에 놀란 미국인들은 그런 현상을 가리켜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혼율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 그 변화가 극심하여 현대의 급증하는 이혼율을 두고 도덕적 타락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비판자들은 이혼이 국가적 인격 파탄에서 온 것은 아닐지라도 전례 없는 편부모의 가정을 확산시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19세기에는 사망자의 평균 연령이 낮았기 때문에 편부모가 돌보는 가족의 비율은 현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미국인은 과거의 가족을 이상화하고 현재의 가족을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혼은 우리 시대에서만 유일한 것도 아니고 편부모 가정도 현대의 작품만은 아니다. 미국의 가족제도는 식민지 시대부터 변화를 거듭해 왔고 그리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미국의 기념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자유의 종이다.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을 때 자유의 종이 울렸다. 하지만 자유의 종과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을 파고들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설에 의하면, 백발의 노인이 푸른 눈을 가진 소년의 신호를 보고서 종을 쳤다고 한다. 소년은 의회 대표들이 독립선언에 찬성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얼른 노인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유의 종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애국 시민들이 앞장서서 자유의 종을 여러 개 복제하여 각 주에 보내주었다. 문제는 수백 만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유의 종 타종 이야기가 실은 허구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 이야기는 19세기의 젊은 필라델피아 사람인 조지 리퍼드가 날조한 것이었다. 1753년, 자유의 종은 독립기념관에 설치되었지만 독립이 선언되었을 때 종이 울렸다는 증거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7월 4일에는 축하의 종이 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 독립은 7월 4일이 아니라 7월 2일에 선언되었으니까. 어쩌면 의회가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7월 8일에 자유의 종이 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자유의 종에는 "전국 방방곡곡의 주민들에게 자유를 알려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 문구는 당초 1753년에 종을 만들 때 새겨넣은 것으로서 그보다 20여 년 뒤의 사건인 미국 독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록 이 종이 자유의 종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이 독립한 지 한참 뒤였다. 자유의 종이 강조한 '자유'는 백인의 자유가 아니라 흑인의 자유를 뜻했다. 그 종의 이름은 1839년에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의 모습을 상당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초상화는 여러 가지가 나와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콜럼버스 생존시에 제작된 초상화는 단 한 점도 없다. 하버드 대학의 창립자 존 하버드의 모습도 신비에 싸여 있다. 하버드 구내에 있는 유명한 하버드 좌상은 완전 창작품이다. 퀘이커 교의 지도자이며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여 펜실베니아 주를 창립한 윌리엄 펜의 초상화는 화가가 아니라 약제사가 그린 것이었다. 그나마 펜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이다. 사후에 그려진 그림이니 그만큼 신빙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독립선언문 서명자의 얼굴을 모두 보여주는 작은 책자가 19세기에 발간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그림들 중 12명의 초상화(이중 네 명의 초상화가 독립기념관에 걸려 있다)는 꾸며낸 것이다. 아무도 그들의 실제 얼굴을 알지 못한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 링컨은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링컨이 최초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명사들이 그 전에 두 번 이상 사용한 적이 있었다. 유일신교 목사이자 노예제도 폐지주의자인 시어도어 파커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점점 더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정부가 되고 있다." 또 다니엘 웹스터(미국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의 말은 이렇다. "국민의 정부는 국민에 의해, 국민을 위해 만들어지고, 국민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
무르익은 과일처럼 우리 손에 떨어진다(Fall Like an Overripe Fruit into Our Hands). : 이것은 레닌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레닌이 "미국은 언젠가 무르익은 과일처럼 우리 손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그 출처도 불분명하다. 게다가 의회 도서관에 따르면 소련 전문가들은 레닌이 과연 그런 진술을 했는지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레닌은 온통 유럽의 공산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11. 교육
20세기 초, 실패한 미국의 학교 교육12. 기념일과 기념물
자유의 종은 미국 독립과는 아무 상관 없다변경에 관련된 신화 중에 인디언 신화보다 더 극단적인 것은 없다. 인디언 신화 중 대표적인 것은 그들이 몹시 야만적이라는 것이다. 인디언이 머릿가죽 벗기는 관습을 만들어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유럽인은 그 풍습을 비난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유럽인들은 인디언의 풍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디언에게 돈을 주어 다른 인디언과 다른 유럽인의 머릿가죽을 벗기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인들은 직접 다른 유럽인의 머릿가죽을 벗겼다.
백인은 살인개를 변경의 전쟁 도구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선보였다. 인디언을 죽이는 특별한 목적으로 영국의 마스티프 종 맹견을 길렀는데 이 개는 몸무게가 150 파운드, 우뚝 서면 키가 2피트 반이었으며 사람을 간단하게 갈가리 찢어 죽일 수 있었다. 영국의 여러 식민지에서 마스티프를 풀어 놓아 곰과 황소를 물어뜯게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인디언을 물어뜯게 하는 것은 합법이었고 도덕적이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등의 도덕적 사상가들도 인디언 물어뜯기를 지지했다.
유럽인은 개를 전쟁 무기로 사용한 것 이외에도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를 전염시켰다. 말하자면 역사상 최초로 세균전을 벌였던 것이다. 제프리 애머스트 영국 장군은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오염된 담요를, 아무것도 모르는 인디언들 손에 슬쩍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인디언은 병에 걸렸다.건국의 아버지들 시대에도 부정부패가 있었다. 하지만 부정부패보다 더 곤란한 문제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하나같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찰스 비어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부분의 헌법기초위원들은 민주주의를 장려하기보다 오히려 우려할 어떤 것으로 보았다. 19세기에 들어서도 보수주의자들은 온갖 적들을 중상모략하기 위해 민주주의자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했다." '민주주의자'는 너무나 문제가 많은 말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탄생과 관련한 문서, 가령 독립선언서, 헌법, 주 정부의 법률 등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단어를 기피한 것은 영국의 크롬웰 혁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국의 보수파들은 이 말을 폭도들(크롬웰파)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행동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상은 우드로 윌슨(미국의 28대 대통령)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정립되었다. 독일과의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지칭하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던 만큼 평등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사회적·경제적으로 평등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또 평등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를 원치 않았다. 또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선거인단이 교착 상태에 빠져, 하원에게 대통령의 선출을 위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미국인들은 해마다 7월 4일이 되면 '혁명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 그들은 혁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혁명(미국 독립전쟁)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미국 혁명이 실제로는 혁명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혁명은 소동 - 보스턴 차 사건 - 에 더 가깝다고 믿고 있다. 독립전쟁도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서 벌어진 위대한 혁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크레인 브린튼이 논평했듯이 "미국 혁명에도 공포정치의 흔적이 분명 있었다."
대륙군이 영국 왕에게 충성을 바친 미국인(왕당파)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수많은 왕당파들은 온몸에 타르를 바르고 새털을 뒤집어썼다. 수천 명의 왕당파가 몇 백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8천 명 이상의 왕당파가 캐나다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왕당파는 패배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소외된다. 미국 역사는 대단한 반대파가 되지 못했던 패자를 몹시 싫어한다. 민간전승에서는 왕당파를 아주 무익한 반대파로 치부한다.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서 미국 혁명을 배우면서 대륙군이 전형적인 자위권을 위해 싸운 것으로 배우고 있다. 이것은 독립전쟁에 관한 넌센스 중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다. 독립전쟁은 사실 미국인이 미국인과 싸운 것이었고 당시 소수의 사람들만이 독립전쟁을 지지했다. 왕당파가 하찮은 세력이었다는 속설도 사실과 다르다. 왕당파는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영국을 위해 싸운 미국인은 영국을 반대하여 싸운 미국인만큼 많았다. 1780년, 워싱턴의 군대에 9천 명의 민병이 지원했을 때, 영국군에는 8천 명의 왕당파가 복무했다.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을 듣고서 감동한다. 하지만 링컨의 선언은 최초가 아니었다. 최초의 선언은 1775년 버지니아 던모어 경이 발표했다. 영국 왕이 주지사로 파견한 던모어는 버지니아 애국자들(미국 식민지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한 약삭빠른 조치로 영국 정부에 귀속하여 군 복무하는 흑인들을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버지니아 애국자들 중 상당수는 노예 소유주였기 때문에 던모어의 조치는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몇 주만에 8백 명의 흑인들이 던모어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던모어는 런던 당국의 압력을 받아 노예해방 제안을 곧 철회했다. 런던 당국이 쓸데없이 남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고 생각하여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결국 식민지를 되찾을 만큼의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던 던모어는 달아났고 워싱턴과 반란군이 그 흑인들을 접수했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자유(독립)를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흑인들을 억압하는 노예제도를 강화했다. 이것은 어느 모로 봐도 이율배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전쟁에서 이긴 뒤 노예제도를 축소하는 조치를 거듭 취했다.미국이 이민자들을 좋아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은 특별한 계층의 이민자에게만 진정한 애정을 쏟았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미국에 이민온 사람들만 편애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 19세기 초에 건너왔을 때, 개신교 신자들은 필라델피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아일랜드 계 일부 지역에 불을 질렀다. 그 과정에서 30여 채의 집이 불탔고 14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나중에 남유럽 및 동유럽 사람들이 이민왔을 때도 보수적인 미국인들은 마치 범죄자 무리가 미국을 침범한 것처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더 문명화된' 시대에도 새로 이민온 사람들은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10년대에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이민온 사람들도 대거 불임 수술을 당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대접을 받을 뻔했다. 1924년, 급증하는 이탈리아, 중국, 유대인 이민자를 혐오하던 연방정부는 이민자 숫자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인은 매년 4천 명, 러시아인은 2천 명, 중국과 팔레스타인은 각각 1백 명으로 제한되었다(반면, 영국인은 3만 4천 명, 독일인은 5만 1천 명까지 허용되었다). 아주 최근에는 동남아 이민자에 대한 적의와 차별이 심하다.사람들은 혼전 섹스가 20세기의 현상이라고 굳게 믿지만 사실 미국은 호색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인은 식민지 시대에도 건전한 성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섹스는 겉으로는 자식을 낳기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지만, 이때에도 섹스를 위한 섹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청교도가 섹스를 억제했다고 비난해왔다. 그래서 미국인이 오랫동안 섹스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청교도는 부도덕을 멀리하고 쾌락을 억압했지만 결혼한 부부의 성관계를 선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얘기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청교도 가족은 현대의 미국 가족보다 섹스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당시 부모와 자녀들은 대부분 한 방에서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