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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리처드 솅크먼 지음 | 미래M&B
1. 탐험가와 발명가



콜럼버스의 항해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업적을 너무나 위대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그에 관한 것이라면 죄다 믿고 싶어한다. 콜럼버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최초로 설파한 사람이라는 소문도 그렇다. 196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출간에 앞서 이런 광고를 내보냈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전의 사람들은 수평선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는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이 진행되는 동안 지구의 둥근 그림자가 달을 가린다는 것을 지적했다. 플라톤도 그런 발견에 기여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콜럼버스 시절에 이르러서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콜럼버스가 지구를 둥글다고 말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신화를 꾸며서 퍼뜨린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 워싱턴 어빙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쓴 콜럼버스 전기에 들어 있다. 어빙의 콜럼버스 전기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인도 항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살라망카 대학교의 교수들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다. 그는 지구가 둥글고 동쪽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항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이론'을 교수들에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이다. 콜럼버스가 항해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살라망카 대학교 교수들을 만난 사실을 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은 아무런 이슈가 아니었다. 쟁점은 대양의 넓이였다. 교수들은 콜럼버스가 대양의 넓이를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당한 지적이었다.

2.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민주주의도 평등도 믿지 않은 건국의 아버지들




건국의 아버지들 시대에도 부정부패가 있었다. 하지만 부정부패보다 더 곤란한 문제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하나같이 민주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찰스 비어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대부분의 헌법기초위원들은 민주주의를 장려하기보다 오히려 우려할 어떤 것으로 보았다. 19세기에 들어서도 보수주의자들은 온갖 적들을 중상모략하기 위해 민주주의자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했다." '민주주의자'는 너무나 문제가 많은 말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탄생과 관련한 문서, 가령 독립선언서, 헌법, 주 정부의 법률 등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단어를 기피한 것은 영국의 크롬웰 혁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영국의 보수파들은 이 말을 폭도들(크롬웰파)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행동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상은 우드로 윌슨(미국의 28대 대통령)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정립되었다. 독일과의 전쟁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지칭하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던 만큼 평등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사회적·경제적으로 평등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또 평등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를 원치 않았다. 또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선거인단이 교착 상태에 빠져, 하원에게 대통령의 선출을 위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3. 미국의 대통령들



존 케네디




캐멀롯(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절의 매혹적인 시대)의 신화는 너무나 뿌리깊게 박혀 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존 케네디(미국의 35대 대통령)는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들 중 항상 2, 3위를 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구체적인 증거를 들이대더라도 케네디의 신화를 깨부술 수 없다. 케네디가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고, 또 아내 재클린 몰래 수백 명의 여성들과 섹스 행각을 벌였으며, 심지어 백악관에 밀회 장소를 만들어 놓고 섹스 파티를 벌여서 경호원들에게 굴욕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들이대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유명한 갱의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같이 해서 협박을 받았다. 이런 엄청난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케네디가 생존시에 그런 스캔들을 어떻게 피해갔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의 전쟁 기록조차도 과대포장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PT-109 초계 어뢰정이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두 동강났을 때 케네디는 그의 주장과 다르게 한 사람을 구출했을 뿐이었다. 또 케네디는 자신의 태만이 재난을 불러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사건의 전말을 왜곡했다. 케네디는 초계 어뢰정이 구축함의 공격으로 두 동강났다고 늘 주장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케네디와 다른 수병들은 방심하여 졸고 있었다. 초계 어뢰정의 기동성을 생각할 때 덩치 큰 구축함에게 허를 찔려 들이받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4. 성공 신화



자수성가한 기업가는 거의 없다




기업가들이 흔히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업가들은 원래 부자였는데 그 부에 더 많은 부를 축적하여 더 큰 부자가 되었을 뿐이다. 허버트 거트만은 20세기 초에 전국 상위 2백 명의 기업가들 중에서 95퍼센트가 중산층 또는 상류층 출신이라고 보고했다.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사례는 앤드루 카네기 단 한 명뿐이다. 19세기에 부유했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물론 부자로 태어났다. 페센의 연구에 의하면 잭슨 시대에 도시 엘리트의 2퍼센트만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중산층 출신은 6퍼센트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부자는 수적으로는 많았지만, 빈부의 불균형은 엄청났다. 1828년, 뉴욕 시 인구의 4퍼센트가 뉴욕 시 재산의 절반을 소유했다. 1845년 무렵엔 뉴욕 시민의 1퍼센트가 뉴욕 시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미국인은 완전 평등에 가깝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의 가장 큰 특징이 '조건의 평등'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의 평등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독립전쟁 이전뿐이었다. 정말로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있었다면 그것은 미국이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뿐이었다. 어떤 학자가 조사·연구했듯이 독립전쟁 전에 보스턴과 뉴욕, 필라델피아 엘리트 약 3분의 1은 가난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잭슨 시대에 들어와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시대는 거의 끝나버렸다.

5. 전쟁



미국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해마다 7월 4일이 되면 '혁명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 그들은 혁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혁명(미국 독립전쟁)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미국 혁명이 실제로는 혁명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혁명은 소동 - 보스턴 차 사건 - 에 더 가깝다고 믿고 있다. 독립전쟁도 프랑스, 러시아, 중국에서 벌어진 위대한 혁명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크레인 브린튼이 논평했듯이 "미국 혁명에도 공포정치의 흔적이 분명 있었다."

대륙군이 영국 왕에게 충성을 바친 미국인(왕당파)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수많은 왕당파들은 온몸에 타르를 바르고 새털을 뒤집어썼다. 수천 명의 왕당파가 몇 백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8천 명 이상의 왕당파가 캐나다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왕당파는 패배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소외된다. 미국 역사는 대단한 반대파가 되지 못했던 패자를 몹시 싫어한다. 민간전승에서는 왕당파를 아주 무익한 반대파로 치부한다.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서 미국 혁명을 배우면서 대륙군이 전형적인 자위권을 위해 싸운 것으로 배우고 있다. 이것은 독립전쟁에 관한 넌센스 중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다. 독립전쟁은 사실 미국인이 미국인과 싸운 것이었고 당시 소수의 사람들만이 독립전쟁을 지지했다. 왕당파가 하찮은 세력이었다는 속설도 사실과 다르다. 왕당파는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영국을 위해 싸운 미국인은 영국을 반대하여 싸운 미국인만큼 많았다. 1780년, 워싱턴의 군대에 9천 명의 민병이 지원했을 때, 영국군에는 8천 명의 왕당파가 복무했다.

6. 개척시대의 변경



인디언은 잔인하게 죽어갔다




변경에 관련된 신화 중에 인디언 신화보다 더 극단적인 것은 없다. 인디언 신화 중 대표적인 것은 그들이 몹시 야만적이라는 것이다. 인디언이 머릿가죽 벗기는 관습을 만들어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유럽인은 그 풍습을 비난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유럽인들은 인디언의 풍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디언에게 돈을 주어 다른 인디언과 다른 유럽인의 머릿가죽을 벗기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인들은 직접 다른 유럽인의 머릿가죽을 벗겼다.

백인은 살인개를 변경의 전쟁 도구로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선보였다. 인디언을 죽이는 특별한 목적으로 영국의 마스티프 종 맹견을 길렀는데 이 개는 몸무게가 150 파운드, 우뚝 서면 키가 2피트 반이었으며 사람을 간단하게 갈가리 찢어 죽일 수 있었다. 영국의 여러 식민지에서 마스티프를 풀어 놓아 곰과 황소를 물어뜯게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인디언을 물어뜯게 하는 것은 합법이었고 도덕적이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등의 도덕적 사상가들도 인디언 물어뜯기를 지지했다.

유럽인은 개를 전쟁 무기로 사용한 것 이외에도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를 전염시켰다. 말하자면 역사상 최초로 세균전을 벌였던 것이다. 제프리 애머스트 영국 장군은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오염된 담요를, 아무것도 모르는 인디언들 손에 슬쩍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인디언은 병에 걸렸다.

7. 노예와 자유



노예제도 폐지는 노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을 듣고서 감동한다. 하지만 링컨의 선언은 최초가 아니었다. 최초의 선언은 1775년 버지니아 던모어 경이 발표했다. 영국 왕이 주지사로 파견한 던모어는 버지니아 애국자들(미국 식민지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한 약삭빠른 조치로 영국 정부에 귀속하여 군 복무하는 흑인들을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버지니아 애국자들 중 상당수는 노예 소유주였기 때문에 던모어의 조치는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몇 주만에 8백 명의 흑인들이 던모어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던모어는 런던 당국의 압력을 받아 노예해방 제안을 곧 철회했다. 런던 당국이 쓸데없이 남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고 생각하여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결국 식민지를 되찾을 만큼의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던 던모어는 달아났고 워싱턴과 반란군이 그 흑인들을 접수했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자유(독립)를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흑인들을 억압하는 노예제도를 강화했다. 이것은 어느 모로 봐도 이율배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전쟁에서 이긴 뒤 노예제도를 축소하는 조치를 거듭 취했다.

8. 이민



미국인들은 이민자를 환영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민자들을 좋아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국은 특별한 계층의 이민자에게만 진정한 애정을 쏟았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미국에 이민온 사람들만 편애했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 19세기 초에 건너왔을 때, 개신교 신자들은 필라델피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아일랜드 계 일부 지역에 불을 질렀다. 그 과정에서 30여 채의 집이 불탔고 14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나중에 남유럽 및 동유럽 사람들이 이민왔을 때도 보수적인 미국인들은 마치 범죄자 무리가 미국을 침범한 것처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더 문명화된' 시대에도 새로 이민온 사람들은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1910년대에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이민온 사람들도 대거 불임 수술을 당하거나 그보다 더 나쁜 대접을 받을 뻔했다. 1924년, 급증하는 이탈리아, 중국, 유대인 이민자를 혐오하던 연방정부는 이민자 숫자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인은 매년 4천 명, 러시아인은 2천 명, 중국과 팔레스타인은 각각 1백 명으로 제한되었다(반면, 영국인은 3만 4천 명, 독일인은 5만 1천 명까지 허용되었다). 아주 최근에는 동남아 이민자에 대한 적의와 차별이 심하다.

9. 섹스



섹스에 관대했던 청교도




사람들은 혼전 섹스가 20세기의 현상이라고 굳게 믿지만 사실 미국은 호색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인은 식민지 시대에도 건전한 성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섹스는 겉으로는 자식을 낳기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지만, 이때에도 섹스를 위한 섹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청교도가 섹스를 억제했다고 비난해왔다. 그래서 미국인이 오랫동안 섹스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청교도는 부도덕을 멀리하고 쾌락을 억압했지만 결혼한 부부의 성관계를 선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얘기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청교도 가족은 현대의 미국 가족보다 섹스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당시 부모와 자녀들은 대부분 한 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섹스라는 기본적 사실을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실제로 청교도는 섹스로부터 자녀를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진보적인 부모들도 10대 딸이 미래를 약속한 남자친구와 함께 잠자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청교도는 두 사람이 옷을 입고 같이 잠자는 경우는 허락했다. 번들링(bundling : 약혼 중인 남녀가 옷을 입은 채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라고 알려진 이 관습은 종종 성관계로 이어졌고, 원치 않는 아기를 낳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습은 널리 퍼져 있었다.

청교도를 겨냥한 가장 강력한 비난 - 그들이 성범죄자를 엄벌했다 - 은 과장된 것이다. 간통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대부분 매질과 벌금으로 끝났다. 청교도는 죄질이 나쁜 성범죄자들은 추방했지만, 대개는 공동체에 계속 머물면서 역할을 맡도록 했다. 심지어 간음을 시인한 사람이 교회의 임원으로 계속 활동할 수도 있었다. 물론 중벌에 처해진 사람도 있었지만, 나사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헤스터 프린이 겪었던 것처럼 A 문자(Adultery : 간통)를 달고 다녀야 하는 시련은 많지 않았다. 청교도는 현대의 미국인만큼 성적 부도덕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폐쇄적이지도 않았다. 1600년대에 미국에 정착했던 다른 종교 그룹에 비해 도덕적 엄격함만 내세우는 편협한 종교집단은 아니었다. 청교도만을 따로 뽑아 특별 취급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불공평하다.

10. 가족



이혼은 19세기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이혼율은 세계 최악으로 영국의 4배이고 프랑스의 3배다. 하지만 이혼은 최근에 느닷없이 불거진 문제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이혼이 만연하자 연방정부는 그것을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1880년대에는 1년에 2만 5천 건의 이혼이 발생했는데, 그 어떤 선진국보다 높은 수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이미 미국인의 이혼율은 1960년대 초반 못지 않게 높았다. 역사가인 버나드 와이스버거는 이렇게 지적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게 되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과 이혼할 마음을 먹게 된다. 반면 남성은 위자료, 자녀 양육비를 감당할 수 있고 새로운 가정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벌 수 있으면 기꺼이 이혼할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환경이 열악했던 지난 시절에 남자가 취할 수 있는 대안은 아내와 자식을 유기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가난한 남자의 이혼 방식'이었다."

법원 기록에 따르면 이혼 건수는 19세기에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은 평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남자들도 아내가 내조를 제대로 해주지 않자 이혼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급증하는 이혼율에 놀란 미국인들은 그런 현상을 가리켜 전통적 가치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이 가져온 도덕적 타락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혼율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 그 변화가 극심하여 현대의 급증하는 이혼율을 두고 도덕적 타락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비판자들은 이혼이 국가적 인격 파탄에서 온 것은 아닐지라도 전례 없는 편부모의 가정을 확산시켰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19세기에는 사망자의 평균 연령이 낮았기 때문에 편부모가 돌보는 가족의 비율은 현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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