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리포트
손광주 지음 | 바다출판사
김정일 리포트
손광주 지음
바다출판사/2003년 9월/431쪽/15,000원
프롤로그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3일 동안 전 세계 매스컴의 관심은 온통 한반도에 쏠려 있었다. 남북 분단 이후 55년 만에 처음 열린 정상회담 기간 동안 김정일은 그의 표현처럼 '미스터리의 은둔자'에서 갑자기 '세계적 주목을 받는 인물'로 떠오른다. 정상회담 기간은 김정일이 남한을 비롯하여 서방세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하는 최초의 무대였다. 그는 남한을 비롯한 세계인들에게 '여유 있고 당당하며 솔직담백한 인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 동안 우리는 김정일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또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왔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는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해왔고,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의 유일 지도자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인’ 김정일에 대해 평가한다면, 그는 ‘영리하고’ 동시에 ‘교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다큐멘터리
특별한 ‘수상님의 자제분’ - 출생과 성장(1941~1964)
김정일은 1941년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하바로프스크 근교에서 태어났다. 북한은 1984년부터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항일 유격대 밀영으로 못박고 있다.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자신의 출생지를 언급한 배경은 두 가지로 추측된다. 1980년대는 김정일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상당수 세상을 떠난 시기다. 또 1980년대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권력기반을 완전히 구축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이른바 ‘항일혁명 역사’를 신비화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오래 유지하려는 ‘정치적 상징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어릴 때 이름은 ‘유라’로, ‘유라’는 ‘유리’라는 러시아 이름의 애칭이다. 그는 1960년부터 ‘정일’이 되는데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 사망 후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서방국가들과의 평화공존을 내걸었다. 이는 김일성의 대내외 정책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김일성은 '주체'를 내세우며 중․소 이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아들 이름이 소련식의 '유라'라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정일이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正一'로 썼다가 뒤에 '正日'로 바꿨다. '正日'은 어머니인 김정숙의 '정(正)'과 김일성의 '일(日)'을 합성해서 김정일이 직접 만든 것으로 자신이 김일성의 유일한 적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김정일이 8살 때 어머니 김정숙이 세상을 떠나자 빨치산 1세대 가족들이 그를 돌봐주었고, 그가 인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계모 김성애와 함께 살게 된다. 김일성은 김성애에게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얻었다. 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고학년이 되면서 당 대회와 정치위원회, 내각회의 등 국가 전반의 주요회의에 참석해서 현장수업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대학시절 김정일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영화였는데 이 취미가 훗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주기도 한다. 바로 그 영화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후계자 낙점을 위한 권력 투쟁 - 정치 입문과 초고속 성장(1964~1973)
1964년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이 첫발을 내디딘 곳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이다. 당시 중앙당 조직지부장이었던 숙부 김영주는 김정일을 당 중앙위원회 내부사업에 참여시키는 등 당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시켜준다. 1년 동안 당에서 근무한 김정일은 내각 제1부수상(당시 김일) 참사실로 자리를 옮겼다. 김정일은 여기에서 정부 행정의 전반적인 업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66년에 김정일은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 지도과 책임지도원’의 직책을 맡게 된다. 이 무렵부터 ‘책임지도원 동지 김정일’은 자기 밑에 수 명의 지도원들을 거느리며 중앙기관과 평양시 당 조직을 틀어쥐기 시작한다.
1967년 3월, ‘갑산파 사건’이 일어난다.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을 반대한 갑산파는 빨치산파에 의해 모두 제거당했다. 이때 인텔리 역할론에 대해 중앙당학교 이론가들과 김일성대학 철학부 교수들의 이론 투쟁이 전개되는데, 김일성이 1967년 5월 25일 ‘가장 올바른 이론’으로 정리한다. 이것이 ‘5․25 교시’이다. 김정일은 갑산파에 맹공을 퍼붓는 한편, 정적이 되는 삼촌 김영주와 황장엽의 이론 대립을 이용해 김일성의 이론적 권위를 높여주면서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해보자는 계산을 한다. 김정일은 삼촌 김영주의 사상이 낡았다고 주장했고, 김일성 직계 빨치산파에 대해서는 항일무장투쟁을 과대선전하는 ‘불멸의 혁명가극’과 영화들을 제작하여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새롭게 떠오르는 김성애파를 쳐내는 데 성공한다.
1971년 말부터 휴전 후 최초로 남북대화가 시작돼, 그 해 9월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고, 이듬해인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김일성은 이 화해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가지 조치를 결심하게 되는데 바로 헌법개정과 권력 승계 준비작업이다. 김일성은 1973년 2월, 김정일에게 ‘3대혁명소조운동’을 전국적으로 발기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을 계기로 당에 대한 김정일의 통제력이 강화되었고, 당 전반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73년 9월, 김정일은 당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선전담당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김정일에 대한 공식적인 후계자 지명은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발표되었다.
수령의 분신이 된 ‘당 중앙’ -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1974~1985)
1974년 2월, 김정일은 당의 인사권, 감찰권과 사상사업을 한손에 거머쥔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김정일은 실권을 장악하자마자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수준을 높이는 작업에 열중했다. 김정일은 ‘10대 원칙’을 통해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를 강조하면서, 이는 오로지 ‘당 중앙의 유일적 지도’에 의해 구현됨을 특히 강조했다. 여기서 ‘당 중앙’이란 곧 김정일을 지칭한다. 그는 33살의 나이에 이미 자신이 김일성의 대를 잇는 확고부동한 2인자임을 천명한 것이다. 김정일이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강조한 것은 지휘계통의 확립을 요구한 것인데, 당은 김일성-김정일 지휘라인을 통해서만 지도된다는 의미였다.
1960년대 말까지는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구축에 방해가 되는 대상들을 제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김정일 후계세습체제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인물들을 숙청한다. 1974년 2월 공식 후계자 지명 뒤에도 김정일의 권력구축이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당내에는 김정일의 후계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들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30만 명의 당원이 당에서 추방되었고 60만 명의 젊은 당원들이 새로 보충되었다. 1978년 무렵에 이르면 당 중앙위원회 부장급과 당 비서, 정치국 후보위원까지 김정일의 추천권이 행사된다. 김일성은 정치위원회 위원 등 최고위층 몇몇 정도만 관리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통치자 - 김정일 ‘통치’, 김일성 ‘군림’(1985~1994)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 공인 후 6년간 수령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1980년 10월, 김정일은 당 중앙위원회 6기 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당의 3대 권력 핵심을 장악한 것이다. 이로써 김정일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대체로 이 시기부터 김일성은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하고 김정일이 김일성의 ‘직무대리’를 맡게 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김일성은 ‘군림’하고 김정일은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로 특별한 경우 외에는 문서보고를 금지시켰다. 대신 보고내용을 녹음하여 김일성이 보고받을 수 있도록 하여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이 역시 김일성을 교묘히 속이기 위한 김정일의 노림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문서보고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지만 녹음보고는 아무래도 정보의 양이 적게 들어갈 수밖에 없고, 보고 횟수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김정일이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할수록 김일성은 국정 현안에서 계속 멀어져간 것이다. 1987년 무렵에 이르면 김정일로의 권력중심 이동이 확실히 나타난다. 이 무렵 김정일은 군통수권을 제외하고 당․군․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직을 아들 김정일에게 물려준 김일성은 이 무렵부터 중요한 대외관계 일이나 옆에서 조언해줄 뿐 모든 사업은 김정일이 주관하게 된다.
북한의 경제는 1975년 무렵부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여 1980년대 들어서는 식량사정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1985년경에 이르면 북한의 경제는 급격히 악화된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각종 통계를 허위로 보고하고 대외발표 통계는 왜곡하여 내보냈다. 김정일은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졸업했지만,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김정일의 관심은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고 큰 경제전력과 치밀한 정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권력기관을 장악하는 데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신임을 얻는 데 급급하다보니 눈앞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무리한 건설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는 급변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추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경제 실무자들이 걱정하는 태도를 ‘패배주의’로 비난했다.
절박한 체제, 급박한 생존 - 김일성 사후 생존 전략(1994~현재)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것은 남북분단과 6․25 전쟁 이후 최대의 뉴스였다. 1994년 한 해 동안 북한은 두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김정일이 미국과 핵 협상게임을 벌이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경제문제와 식량난이었다. 김일성 사망 방송이 나가자 북한 전역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 앞에 놓인 최대의 과제는 ‘체제 생존’이었다. 동구처럼 무너지지 않는 것이 김정일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여기에 거덜난 경제를 수습하고 화급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우선주의 노선을 버리고 중국식 개혁 개방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반대방향으로 나갔다.
김일성이 사망한 후 곧바로 닥친 식량난으로 인해 사회불안 현상이 더욱 많아졌다. 절도나 강도를 근절시킨다고 하면서 번번이 공개총살을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1995년부터 3년간 300만 명 정도가 굶어 죽었다. 1997년 식량난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에는 국가에서 지급되는 배급도 완전히 끊겼다. 지방에는 먹을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산으로 바다로 흩어지면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당국은 주민 통제불능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무렵 당 내에서 금강산 관광개발안이 등장하였다. 북한의 경제는 이미 중병이 들어 회복불능인 만큼 투자를 안 해도 되는 관광사업으로 돈을 벌자는 것이었다. 금강산 개발문제는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미 1992년에 북측에 제기해둔 안건이었다. 김정일은 ‘관광은 개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안 된다’며 계속 미루어왔지만 이대로 가면 모두 굶어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외부와 철저히 차단한다’는 원칙 하에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이 성사되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이른바 ‘유훈통치’와 ‘고난의 행군’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체제유지를 군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버텨나갔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김정일은 핵문제 등 미국과의 관계, 심각한 경제난 등을 헤쳐나갈 방법으로 ‘어버이 김일성 수령님은 죽지 않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고 선전하면서 ‘우리는 계속 김일성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유훈통치 전략과 군사우선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선군정치’, 즉 군사우선주의 노선이 김정일의 생존전략이었다.
김정일은 미국에 의한 체제보장에 기대를 걸었다. 사실상 어려운 문제였다. 북한은 1996년, 쌀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김영삼 정부가 제의한 2+2(남․북한 + 미․중) 방식의 4자 회담을 받아들이지만 그해 9월, 강릉에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된다. 김영삼 정부는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대북 경제협력은 전면 중단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햇볕정책’이 실시되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김정일로서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 협력, 북한 체제의 본격적인 개혁 개방으로의 전환에는 애초부터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김정일이 노렸던 것은 ‘남한의 민주화를 이끈 인물’이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가진 김대중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자신을 ‘상봉’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대내외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 남한을 끌어들여 미국 등 서방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지렛대로 삼고 한반도에 평화무드를 조성하여 남한 및 일본, 중국 등으로부터 식량 등 안정적인 경제지원을 확보하며 각종 경협을 통해 들어오는 달러로 자신의 통치자금 조달 및 군사력을 유지하고 남한 내에 민족공조 분위기를 조성하여 ‘남남 갈등’ 유발 및 한-미 동맹을 이간시키는 전략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정일은 6․15 공동선언을 통해 이른바 ‘민족공조’를 키워드로 하여 남한의 지속적인 경제지원을 확보해두는 데 성공했다. 대유럽 관계에서도 북한은 큰 성공을 거둔다. 2000~2001년 사이 북한은 아일랜드와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국가와 수교 및 복교를 하게 되고, 호주․필리핀 등과도 관계개선에 성공한다. 이로써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후 ‘고난의 행군’에서 빠져나와 고립화에서 탈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은 2000년 중국․남한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일본과는 1999년 말부터 수교 예비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이제 남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김정일은 미국과의 최종 관개개선을 ‘먹고는 싶은데 먹은 후가 문제’라는 두려움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2000년 12월 미국 대통령 선거결과, 부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에 따라 남북관계, 미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또 하나의 세계안보질서에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오는 대형사건이 터진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계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가 미국 여객기를 탈취,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미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을 강타한 것이다. 이 테러로 미국의 세계안보전략은 급변했다. 과거의 억제와 봉쇄 위주의 안보전략에서 탈피하여 테러조직(국가)에 대한 적극적 선제공격, 예방적 개입, 핵무기 사용 불사, ‘불량국가’들의 정권교체를 도모하는 전략적 틀로 전환했다.
Ⅱ부 김정일 군대와 핵 전략
북한 '핵 게임'의 진실 - 북 핵무장의 역사와 현재
김일성․김정일 정권은 오래 전부터 ‘핵 보유국’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1993~94년에 이미 일차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지하 핵실험 등을 통해 외부 세계에 ‘핵 보유국 선언’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김정일의 목표는 핵을 매개로 하여 미국과 협상을 벌여 최종적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려는 데 있다. 미국과 관계개선을 하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풀리게 되고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식민지 배상금(50~100억 달러)을 받아낼 수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 전개과정에서 김정일은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듯한 제스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수준이 자신의 독재체제 유지에 장애가 된다면 또다시 거두어들일 것이다. 또 개혁개방으로 나가고 싶지만 미국 때문에 그렇게 못한다는 ‘쇼’를 보여줄 수도 있다. 김정일은 남한과 중국으로 하여금 ‘김정일이 진짜로 개혁개방으로 나가고 있으니 북한과 관계개선을 하라’고 미국의 등을 떼밀어주기를 바라고 있고, 또 이를 악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