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박용숙 지음 | 예경
출발을 위한 화두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고대인에게 하늘의 일은 아버지의 이름을 받드는 일이고 땅의 일은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란 이 두 이념이 어떻게 엎치락뒤치락 하는가를 기록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근대니 현대니 하면서 우리 미술의 역사를 서구미술의 척도에다 맞추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삶의 리듬이 문명이나 민족의 역사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미술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조선 시대 <미인탄생도>의 양자 간에는 그림의 양식으로 볼 때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있다. 저쪽은 사실화풍이고 우리 쪽은 평면화풍이다. 저쪽이 연극의 실제 무대를 그렸다면 우리 쪽은 그 연극의 선전 포스터를 그렸다는 느낌이다. 이 차이는 저쪽이 진행형이고 우리 쪽이 지나간 옛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중국은 서녘에 지는 달이 되고 일본은 떠오르는 태양이 된다. 일본은 그들을 위협했던 서양 세력과 화해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양선은 그들에게 천문지리·기하학·측량술·식물학·의학 등 신학문을 전했다. 이양선을 받아들였던 항만도시 나가사키는 화폐경제를 주도하는 어엿한 자본주의 도시로 변모해갔고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유한 시민들의 활기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이웃 나라에서 진행되는 이런 변화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조선 왕조에 알려졌다. 단원이나 혜원과 같은 화가들이 갑자기 풍속화를 그리게 되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단원 김홍도의 <길쌈도>나 <담배 썰기>를 보면 이 작품이 생산의 이념을 부각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이나 음영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선화(線畵)는 실제가 아니라 뜻만을 나타내므로 그림자를 그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원이 작두질하는 인물과 육중한 궤짝을 그리면서도 적극적으로 음영을 부각시키지 않은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1745년(영조 21년)이거나 1777년(정조 1년)에 태어나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분명치 않다. 그가 임금의 신임을 받았던 화가임을 고려하면 그의 생애가 미궁 속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가 일본에서 삽화가로 활동했다는 설이 있는데 정조와 단원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해보면 단원이 국왕의 밀명을 띠고 일본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나가사키는 이미 상공업의 중심지였으므로 현대라면 카메라로 처리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 화가를 파견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맹견도>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종이에 채색으로 그린 이 그림의 화법은 서양화풍인데 그림에 서명이 없는 것은 이 그림이 그려진 동기가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일본에서 본 서양화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고할 참이었던 것 같다. <맹견도>가 18세기 김두량이 그린 <흑구도>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면 실학정신이 회화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단원의 그림일지도 모르는 <맹견도>의 개는 육감적이며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중력을 지니면서 확실하게 존재하지만, 김두량의 <흑구도>에서 개는 전혀 무게를 느낄 수 없다. <맹견도>를 그린 화가는 개의 목덜미와 등허리를 그리면서 준법을 활용하지 않는 대신 비례나 양감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자를 넣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단지 개 한 마리를 사진 찍듯이 묘사한 것에 불과한 이 그림은, 그러나 18세기 동양문명권에서는 자연과학과 부국강병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어머니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문명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였던 것이다.
일본 유학과 최초의 서양화가들반세기나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개화 바람은 19세기를 마감할 때쯤 이 땅에 상륙했으나 결국 자주적인 근대화에는 실패하였고, 우리의 신미술도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문화의 중심지는 확실하게 서울에서 도쿄로 옮겨지게 되었다. 최초의 미술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고희동은 한일병합 조약이 조인되던 전해인 1909년에, 김관호는 1911년에, 이종우는 1918년에 각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최초의 여성화가로 기록되는 나혜석은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신미술 시대의 서막을 연다. 서화(書畵)니 문인화(文人畵)니 하던 낡은 이름이 '미술(art)'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고희동, 김관호, 이종우가 유학했던 1910년대의 도쿄미술학교는 일본 최초의 파리 유학생이었던 구로다 세이키의 독무대였다. 그는 파리 시절 외광파적 사실주의(外光派的 寫實主義)를 배웠으며 귀국 후에도 그 화풍을 지속해 갔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들이 구로다의 교실에서 낭만주의 시대의 외광파를 배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희동의 초기 작품 <자매>는 구로다의 <무희>와 주제가 같다. 구로다가 일본의 고유 풍속을 등장시켰듯이 고희동은 이에 대응하여 치마저고리를 등장시켰다. 고희동의 <자화상>은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볼 때 외광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자화상>을 그렸던 1915년에는 그가 구로다의 흉내를 낼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시민사회적인 기반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이런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의 고급스러운 아틀리에(사진관) 그림을 주문할 만한 고객(시민)이 당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우리 현실이 프랑스 혁명 때와는 달랐지만 양쪽이 서로 공통되는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를 위해 피 흘려야 했던 극적인 상황이 우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했던 것이 1907년이며, 고종황제가 강제로 양위한 것도 그때이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사건은 1909년의 일이며 그 다음해 1910년에는 치욕의 한일병합 조약이 조인된다. 시대는 온통 독립투사와 젊은 학도들의 수난 시대로 바뀌었고 우리 화가들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던 시기는 바로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관호의 <해질녘>은 여성의 나체를 그린 우리 나라 최초의 누드화라는 명예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것은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인 '문전(文展)'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는데 이는 식민지 출신 화가에게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나체라는 이유로 신문에 게재되지 못함으로써 그림이 현실과 충돌하는 최초의 사건이 되기도 했다. 김관호의 스승인 구로다도 <아침 화장>이라는 누드화를 발표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해질녘>을 보자. 인기척 없는 호젓한 냇가에서 두 여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벌거벗은 채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여체를 둘이나 등장시키면서도 화가가 뒷면만을 그렸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많은 돈을 주고 산 기생이라 하더라도 앞면을 노출시키는 일은 당대의 풍속으로는 용인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 그림에서 두 여체를 각기 따로 그려서 배경이 되는 자연 경관과 합성하거나 배경을 나중에 그려넣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누드를 그리는 일이 화가로서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이 낭만주의 시대의 정열적인 색채법에 근접해 있는 것도 그런 점을 웅변해주고 있다.
고희동이나 김관호와 마찬가지로 도쿄 유학에서 신미술에 대한 이렇다 할 확신을 가지지 못한 이종우는 귀국 후 잠시 미술학원에서 일하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최초의 파리 유학생인 그는 고전적인 사실주의 화가였던 한 러시아인의 아틀리에에서 데셍 수업을 받았다. 그의 <응시>는 파리 시대의 작품이며 화가가 사진관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던 시대의 사실주의 화풍이다. <모 여인상>도 그의 작품인데 이들 그림에서 그는 인물의 윤곽을 확실하게 그렸으며 고객의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 표정을 개성적으로 표현했다. 귀국 후에는 이런 화법에서 후퇴하여 어딘가 동양화적인 느낌이 풍기는 그림으로 바뀐다.
나혜석은 사회참여 성향이 농후한 여성이었다. 이미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바 있었고, 당대의 저명한 소설가 이광수의 영향을 받아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서구적인 인문학에 눈을 뜨기도 했다. 초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중국인 촌>은 만주 여행 때 그린 것이다. 그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약 5년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이 작품은 만주국(봉천)에 머물렀을 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리얼리즘의 입장이 확실히 드러난다. <나부>는 여체의 관능적인 생동감과는 반대로 도리어 색조가 어둡게 칠해졌고, 주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등을 부각시켰다.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가 쿠르베의 영향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의 안목이 거기에 미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더니즘 신화와 1950년대의 기념비적 미술이 땅에 '모던' 혹은 '모던 보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도쿄 유학생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모더니즘은 우리에게 신화로서만 존재했다. 넓은 시야로 보자면 '모더니즘'은 일단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표면으로 떠올랐던 것은 19세기 말로서, 가톨릭 교회가 교리를 개혁하려는 신학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이런 논의를 그들이 모더니즘이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19세기 부르주아 이상주의가 파산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예술을 구하기 위해 모더니즘이 발생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들이 바라는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회화의 일차적인 주제가 "건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회화가 건축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관념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난 것, 즉 캔버스가 옷을 벗었다는 의미이고, 실제로 평면회화는 액자화가 되어 혁명에서 승리한 시민의 응접실 벽을 차지하면서 모더니즘이 시민 시대의 미의 청사진이 되었음을 입증했다. 그림이 평면이 된다는 것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옷을 벗고 캔버스로 들어와 나체가 된다는 뜻이다. 벗는다는 것, 제거한다는 것, 비운다는 행위는 모든 인위적인 것을 떨쳐버리며 무관심으로 간다는 뜻이고, '절대 불변하는 본질로 환원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화두는 진정한 의미의 모더니스트라고 할 만한 우리의 천재가 누구이며 실제로 그런 인물이 우리에게 있는가에 모아진다. 오지호는 어떨까. 김환기나 장욱진, 이중섭은 어떨까. 이들 모두는 '평면 양식의' 실천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후보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마지막 후보자 이중섭에 주목하자. 이중섭은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하였으며 학교를 졸업하던 1940년에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화가가 된다.
1950년대의 작품 <도원>에서 그는 벌거벗은 동자들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이가 낙원의 상징인 복숭아를 따기도 하고 기를 쓰고 나무에 매달리기도 한다. 화가는 낙원의 이미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구려 시대의 고분 벽화 <수렵도>에서 산을 그리는 법을 원용하기도 하며 바다나 호수를 그리기 위해서 산수화를 원용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의 꿈을 쫓고 있다. 작품 <흰 소>에는 미쳐날뛰는 성난 모습의 수소 한 마리가 부각되지만 캔버스에서 원근법(배경)은 무시되어 있다. 대상을 섬처럼 고립시킨다는 모더니즘 회화의 전략을 훌륭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누운 소>는 유명한 스키타이 동물 장식에서처럼 황소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가는 소의 얼굴에 인간인 자신의 표정을 숨기면서 "소는 소이면서 사람이다."하고 외친다. 그는 소의 눈에서 '순수'와 '무관심'을 조준한다. <흉상>에서는 서슬이 퍼런 눈을 가진 소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정황을 볼 수 있다. <흉상>은 당당해 보이고 싶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해야 한다. <누운 소>에서는 '평상심'의 세계를 보여주며, 외광파 시대의 초상화처럼 당당하게 그린 <흉상>에서는 시대 상황에 대한 그의 실존적인 반응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중섭의 소가 초현실주의 공간에서부터 역사적 감성의 지평으로 내려오게 되는 시기는 1950년대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1950년대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을 접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이중섭의 허무와 피카소의 실존이 같으면서도 양쪽이 주제상으로나 표현 양식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피카소의 수소가 파시스트의 상징이고 이중섭의 소가 민족의 자화상이 된다는 점도 서로 다른 점이다. 양자 사이의 기표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표들에 숨어 있는 기의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민족적 구성양식의 개척자들우리에게 바람직한 현대미술의 좌표는 무엇일까. '자유'와 '시민적 이상사회'가 20세기를 맞는 우리로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좌표였다면, 우리는 모더니즘의 제사를 어떤 방식으로든 받들어야 했다.
1930년대, 오지호는 처음으로 '민족미술'이라는 개념을 표면화시켰다. 그러면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일방적으로 복창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제물로 그 제사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고유의 색채를 통해 우리 나름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의 기준을 쾌적한 감각이나 감정이라고 규정하면서 화가는 마땅히 조선인의 생리(체질)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오지호에 이어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은 윤희순이다. 그는 8.15 광복과 함께 선전의 기능이 정지되자 우리 미술의 정체론을 거론하고 나섰다. 표현방식은 달랐지만 윤희순도 민족미술은 그 민족의 관습이나 생활감정이 발효되면서 나타나는 민족적 체취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더니즘을 우리답게 뿌리내리게 하려고 시도한다는 관점에서 1960년대에 나타났던 박수근, 최영림, 권진규와 같은 작가의 작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작품에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오지호나 윤희순의 영향이 나타난다.
박수근은 1930년대 초, 봄의 농가 풍경을 그린 <봄이 오다>와 <일하는 여인>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화단에 등단하였다. 초기의 그림에는 평면양식을 소화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인물 그리기에 있어서는 루오를 연상케 하는 굵은 선을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인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일하는 아낙이나 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박수근에게는 이들이 다름 아닌 조국의 현실이자 자신의 실존적인 상황이었다. 그는 부권(父權)의 몰락에서 본능적으로 식민지 상황을 유추해냈다.
1940년대 <맷돌질하는 여인>이라는 그림에는 꾸부정한 모습을 한 채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인 여인이 등장한다. 이것은 흰 옷을 걸친 한국인의 소박함이고 동시에 운명에 순응하는 자연주의적인 삶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가 밀레에서 차용한 성스러운 인고(忍苦)의 은유인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 표면의 요철 만들기가 더욱 심화되고 인물의 특징은 1940년대나 1950년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소외가 아니라 시간의 정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의 허울 만들기가 기념비적인 인물들로 굳어진다는 뜻이다. 인물의 성격이 한결같이 '평안'과 '소박함'과 '여유'로 나타나는 것도 그의 조준하는 바가 모더니즘이 아니라 기념비적인 인간상을 표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최영림은 1950년대 전쟁의 암울한 상황을 심정적으로 표현했던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지양하면서 차츰 정체성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모더니즘을 창의적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의 <심청전>과 <불심>의 주제는 모두 우리의 인문학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그림은 장식적인 요인을 크게 부상시키면서 그가 연극의 진행보다는 무대장치나 배우의 의상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캔버스에 흙(분토)를 끌어들여 이를 작품의 주조색으로 삼았던 것도 우리다운 색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한다는 전략으로 읽을 수 있다. 최영림이 설화적인 소재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민화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의 작품이 양식면에서 초현실주의와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화의 세계가 그 자체로서 이미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조형적으로 세련미가 떨어지고 기법상의 착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허울을 사연의 뿌리에다 단단히 매는 조형의지는 이중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을 이탈하지 않으려는 진지한 노력이라 해야 옳다. 박수근이 그의 주제를 동시대적인 것에서 이끌어냈다면 최영림은 과거에서 주제를 이끌어내어 그가 원하는 건물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이 두 작가의 작업은 다같이 모성적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