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박용숙 지음 | 예경
1980년대는 국내외 상황으로 보아 혼돈이라고 해야 할 만큼 복잡한 시기이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민중의 시대가 실감되면서 노동운동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대학가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군사독재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에 횡사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 비극은 군부파쇼 세력을 한층 더 자극함으로써 결국 군부는 광주에서 양민학살의 만행을 저지른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현실과 발언', '두렁', '임술년'과 같은 소그룹이 탄력을 받게 되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민중미술이 기성 화단으로부터 싸늘한 대우를 받았던 것은 사회 전체의 상황 인식이 결코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1980년대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면서 미술의 국제교류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역사를 네 개의 장으로 구분했다. 전고전 시대, 고전 시대, 현(근)대, 그리고 동시대가 그것이다. 이를 그들의 미술사에 대입하면 중세 기독교미술 시대, 르네상스, 인상주의, 구조주의 담론이 진행되던 1960년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구분법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보자. 도쿄 유학 시대(192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선전 시대까지를 그들의 고전과 근대를 한꺼번에 베끼던 시대라고 하고, 195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를 현대와 구조주의 담론을 동시적으로 베끼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1980년대는 서구미술이 지나온 4백 년의 경험이 피카소가 그린 입체파처럼 마구 구겨진 모양으로 뒤엉켜 공존하는 시기가 된 셈이다.
1980년 10월,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이라는 이름으로 결성한 미술 그룹은 당시 정부 산하에 있었던 미술관(문예진흥원)에서 창립전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그들의 작품을 두고 비(非)미술적이라느니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있다느니 하는 이유로 전시장 문을 폐쇄시켰다. 민중미술 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현발의 창립 멤버로는 이론을 담당했던 성완경을 필두로 임옥상, 오윤, 김정헌, 최민, 원동석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17, 18세기에 실학이 문제를 제기한 후 우리 미술사에서 한 번도 있어보지 못한 현실 공간의 문제를 당당히 제기했다. 현발은 미술가의 의식과 현실의 만남 문제를 제기하고, 그 만남은 전반적으로 화가가 살고 있는 이웃과 시대와 장소에 대한 통찰과 비판을 통해 소외된 인간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하며 미래의 긍정적 대안을 촉구했다. 또 발언자와 수신자라는 개념 자체가 특별한 관심을 유발하고 발언의 내용이 당대의 현실에 뿌리를 두게 했다. 발언의 양식은 다르지만 정황이나 증거에 관해서라면 1960년대의 전위미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에서 정황은 치밀하게 조작되고 드러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자는 모습을 감추었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운동에서는 작업실보다는 거리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정복수와 같은 화가는 주로 작업실에서 현실을 고민하는 화가였다. <무제>에서 줄기차게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인체를 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체는 결코 상업적이지 않다. 발상적으로 보면 그가 제시한 인체는 도교의 인체 만다라나 침술용 해부도에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에 그린 <신체>는 그의 발언전략이 한층 더 세련되고 구체화되어서, 몸체를 완전히 생략하면서 욕망의 논리와 메카니즘을 마치 만다라 그림처럼 간단한 도식으로 처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체는 입에서부터 식도와 창자가 한 줄로 연결되면서 기의 흐름이 항문으로 빠지게 되어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인체의 기본 텍스트를 무시하고 창자를 엉뚱하게 성기에다 연결시켜 놓았다. 그것은 자연법칙에 대한 왜곡이고 그가 발언하고자 하는 강력한 메시지의 골자인 것이다. 입과 성기의 연결은 욕망의 증식을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삶의 고통스러운 표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정복수는 이중섭이 <십우도>를 자신의 시대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언덕으로 삼았듯이 인체 만다라를 발언의 책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출발을 위한 화두일본 유학과 최초의 서양화가들모더니즘 신화와 1950년대의 기념비적 미술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고대인에게 하늘의 일은 아버지의 이름을 받드는 일이고 땅의 일은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란 이 두 이념이 어떻게 엎치락뒤치락 하는가를 기록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근대니 현대니 하면서 우리 미술의 역사를 서구미술의 척도에다 맞추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삶의 리듬이 문명이나 민족의 역사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대미술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조선 시대 <미인탄생도>의 양자 간에는 그림의 양식으로 볼 때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고 있다. 저쪽은 사실화풍이고 우리 쪽은 평면화풍이다. 저쪽이 연극의 실제 무대를 그렸다면 우리 쪽은 그 연극의 선전 포스터를 그렸다는 느낌이다. 이 차이는 저쪽이 진행형이고 우리 쪽이 지나간 옛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중국은 서녘에 지는 달이 되고 일본은 떠오르는 태양이 된다. 일본은 그들을 위협했던 서양 세력과 화해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양선은 그들에게 천문지리·기하학·측량술·식물학·의학 등 신학문을 전했다. 이양선을 받아들였던 항만도시 나가사키는 화폐경제를 주도하는 어엿한 자본주의 도시로 변모해갔고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유한 시민들의 활기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이웃 나라에서 진행되는 이런 변화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조선 왕조에 알려졌다. 단원이나 혜원과 같은 화가들이 갑자기 풍속화를 그리게 되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단원 김홍도의 <길쌈도>나 <담배 썰기>를 보면 이 작품이 생산의 이념을 부각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이나 음영법은 나타나지 않는다. 선화(線畵)는 실제가 아니라 뜻만을 나타내므로 그림자를 그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원이 작두질하는 인물과 육중한 궤짝을 그리면서도 적극적으로 음영을 부각시키지 않은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1745년(영조 21년)이거나 1777년(정조 1년)에 태어나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분명치 않다. 그가 임금의 신임을 받았던 화가임을 고려하면 그의 생애가 미궁 속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가 일본에서 삽화가로 활동했다는 설이 있는데 정조와 단원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해보면 단원이 국왕의 밀명을 띠고 일본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나가사키는 이미 상공업의 중심지였으므로 현대라면 카메라로 처리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 화가를 파견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맹견도>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종이에 채색으로 그린 이 그림의 화법은 서양화풍인데 그림에 서명이 없는 것은 이 그림이 그려진 동기가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일본에서 본 서양화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고할 참이었던 것 같다. <맹견도>가 18세기 김두량이 그린 <흑구도>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면 실학정신이 회화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다. 단원의 그림일지도 모르는 <맹견도>의 개는 육감적이며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중력을 지니면서 확실하게 존재하지만, 김두량의 <흑구도>에서 개는 전혀 무게를 느낄 수 없다. <맹견도>를 그린 화가는 개의 목덜미와 등허리를 그리면서 준법을 활용하지 않는 대신 비례나 양감을 염두에 두면서 그림자를 넣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단지 개 한 마리를 사진 찍듯이 묘사한 것에 불과한 이 그림은, 그러나 18세기 동양문명권에서는 자연과학과 부국강병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어머니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문명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였던 것이다.이 땅에 '모던' 혹은 '모던 보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도쿄 유학생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모더니즘은 우리에게 신화로서만 존재했다. 넓은 시야로 보자면 '모더니즘'은 일단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표면으로 떠올랐던 것은 19세기 말로서, 가톨릭 교회가 교리를 개혁하려는 신학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이런 논의를 그들이 모더니즘이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19세기 부르주아 이상주의가 파산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예술을 구하기 위해 모더니즘이 발생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들이 바라는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회화의 일차적인 주제가 "건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회화가 건축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관념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난 것, 즉 캔버스가 옷을 벗었다는 의미이고, 실제로 평면회화는 액자화가 되어 혁명에서 승리한 시민의 응접실 벽을 차지하면서 모더니즘이 시민 시대의 미의 청사진이 되었음을 입증했다. 그림이 평면이 된다는 것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옷을 벗고 캔버스로 들어와 나체가 된다는 뜻이다. 벗는다는 것, 제거한다는 것, 비운다는 행위는 모든 인위적인 것을 떨쳐버리며 무관심으로 간다는 뜻이고, '절대 불변하는 본질로 환원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화두는 진정한 의미의 모더니스트라고 할 만한 우리의 천재가 누구이며 실제로 그런 인물이 우리에게 있는가에 모아진다. 오지호는 어떨까. 김환기나 장욱진, 이중섭은 어떨까. 이들 모두는 '평면 양식의' 실천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후보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마지막 후보자 이중섭에 주목하자. 이중섭은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하였으며 학교를 졸업하던 1940년에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화가가 된다.
1950년대의 작품 <도원>에서 그는 벌거벗은 동자들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이가 낙원의 상징인 복숭아를 따기도 하고 기를 쓰고 나무에 매달리기도 한다. 화가는 낙원의 이미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구려 시대의 고분 벽화 <수렵도>에서 산을 그리는 법을 원용하기도 하며 바다나 호수를 그리기 위해서 산수화를 원용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의 꿈을 쫓고 있다. 작품 <흰 소>에는 미쳐날뛰는 성난 모습의 수소 한 마리가 부각되지만 캔버스에서 원근법(배경)은 무시되어 있다. 대상을 섬처럼 고립시킨다는 모더니즘 회화의 전략을 훌륭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누운 소>는 유명한 스키타이 동물 장식에서처럼 황소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가는 소의 얼굴에 인간인 자신의 표정을 숨기면서 "소는 소이면서 사람이다."하고 외친다. 그는 소의 눈에서 '순수'와 '무관심'을 조준한다. <흉상>에서는 서슬이 퍼런 눈을 가진 소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정황을 볼 수 있다. <흉상>은 당당해 보이고 싶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해야 한다. <누운 소>에서는 '평상심'의 세계를 보여주며, 외광파 시대의 초상화처럼 당당하게 그린 <흉상>에서는 시대 상황에 대한 그의 실존적인 반응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중섭의 소가 초현실주의 공간에서부터 역사적 감성의 지평으로 내려오게 되는 시기는 1950년대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1950년대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작품을 접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이중섭의 허무와 피카소의 실존이 같으면서도 양쪽이 주제상으로나 표현 양식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피카소의 수소가 파시스트의 상징이고 이중섭의 소가 민족의 자화상이 된다는 점도 서로 다른 점이다. 양자 사이의 기표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표들에 숨어 있는 기의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1980년대의 미술Ⅰ - 민중미술운동과 현실 공간의 탄생반세기나 이전에 이미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개화 바람은 19세기를 마감할 때쯤 이 땅에 상륙했으나 결국 자주적인 근대화에는 실패하였고, 우리의 신미술도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문화의 중심지는 확실하게 서울에서 도쿄로 옮겨지게 되었다. 최초의 미술 유학생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고희동은 한일병합 조약이 조인되던 전해인 1909년에, 김관호는 1911년에, 이종우는 1918년에 각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최초의 여성화가로 기록되는 나혜석은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신미술 시대의 서막을 연다. 서화(書畵)니 문인화(文人畵)니 하던 낡은 이름이 '미술(art)'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고희동, 김관호, 이종우가 유학했던 1910년대의 도쿄미술학교는 일본 최초의 파리 유학생이었던 구로다 세이키의 독무대였다. 그는 파리 시절 외광파적 사실주의(外光派的 寫實主義)를 배웠으며 귀국 후에도 그 화풍을 지속해 갔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들이 구로다의 교실에서 낭만주의 시대의 외광파를 배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희동의 초기 작품 <자매>는 구로다의 <무희>와 주제가 같다. 구로다가 일본의 고유 풍속을 등장시켰듯이 고희동은 이에 대응하여 치마저고리를 등장시켰다. 고희동의 <자화상>은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볼 때 외광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자화상>을 그렸던 1915년에는 그가 구로다의 흉내를 낼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시민사회적인 기반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이런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의 고급스러운 아틀리에(사진관) 그림을 주문할 만한 고객(시민)이 당대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우리 현실이 프랑스 혁명 때와는 달랐지만 양쪽이 서로 공통되는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를 위해 피 흘려야 했던 극적인 상황이 우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분사했던 것이 1907년이며, 고종황제가 강제로 양위한 것도 그때이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사건은 1909년의 일이며 그 다음해 1910년에는 치욕의 한일병합 조약이 조인된다. 시대는 온통 독립투사와 젊은 학도들의 수난 시대로 바뀌었고 우리 화가들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던 시기는 바로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관호의 <해질녘>은 여성의 나체를 그린 우리 나라 최초의 누드화라는 명예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것은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공모전인 '문전(文展)'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는데 이는 식민지 출신 화가에게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나체라는 이유로 신문에 게재되지 못함으로써 그림이 현실과 충돌하는 최초의 사건이 되기도 했다. 김관호의 스승인 구로다도 <아침 화장>이라는 누드화를 발표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해질녘>을 보자. 인기척 없는 호젓한 냇가에서 두 여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벌거벗은 채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여체를 둘이나 등장시키면서도 화가가 뒷면만을 그렸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많은 돈을 주고 산 기생이라 하더라도 앞면을 노출시키는 일은 당대의 풍속으로는 용인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 그림에서 두 여체를 각기 따로 그려서 배경이 되는 자연 경관과 합성하거나 배경을 나중에 그려넣는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누드를 그리는 일이 화가로서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이 낭만주의 시대의 정열적인 색채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