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화가와 모델

이주헌 지음 | 예담
오늘날 대중적인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화가의 한 사람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특히 관능적인 여성 그림으로 유명하다. 클림트에게 모델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델들이 충분한 영감과 자극을 주지 못했다면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뜻대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걸작들은 그의 예술적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모델들이 던져준 영감과 자극에 힘입은 바 큰 것이었다 하겠다.



클림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느끼고 이를 실천한 대상은 지체가 높은 사교계 여성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보았다. 클림트는 이들과 대부분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았다. 오로지 '플라토닉 러브'만을 추구했다. 이렇듯 사랑의 대상을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여성을 대했다는 점에서 클림트는 분명히 분열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클림트의 여성들 가운데 이 같은 이분법의 어느 한쪽으로도 명쾌히 분류되지 않는 여성이 있다. 바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1881년경∼1925)이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또 그와 정신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나눴다. 아델레 바우어는 1881년경 매우 부유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다.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열여덟 살 많은, 역시 유대계의 부유한 설탕 제조업자이자 금융업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했다.



명문가의 여인으로서 아델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 교육을 피하고 이른바 '독학'으로 교양을 닦았다. 살롱을 열어 문학인들과 예술인들, 정치가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런 '독학'의 한 방편이었다. 당시 그녀의 살롱에 드나들던 명사로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문인 슈테판 츠바이크, 후일 오스트리아공화국의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정치가 카를레너 같은 이가 있었다. 아델레와 클림트 사이에서 특별한 관계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 주문을 맡은 1899년부터이다. 화가와 모델로 만나면서 급속히 가까워졌는데, 이때 아델레의 나이가 열여덟, 클림트의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유딧」의 에로티시즘은 단지 그 표정뿐 아니라 풀어헤친 젖가슴과 속이 비치는 옷, 그리고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인 얼굴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제스처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클림트는 「유딧」이야기에서 그녀의 애국심보다는 남자를 유혹하여 파멸에 빠뜨릴 수 있는 여성의 성적 매력, 그 부정적인 마력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아델레를 선택했다. 아델레에게서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에로티시즘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인상을 내포하고 있다. 가시가 있는 장미처럼 눈길이 가기는 하지만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물론 클림트가 아델레를 그리면서 이 같은 요소를 다소 과장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런 요소와 관계가 없는 여인을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아델레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앞서의 평자는 이런 측면을 특별히 유념해 보았던 것 같다.



*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 교외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른스트 클림트는 금 세공사였다. 일찍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클림트는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해 아카데미적인 회화 교육뿐 아니라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응용미술학교를 졸업한 클림트는 동료 프란츠마치,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함께 미술가 그룹을 결성하고 공동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 스튜디오를 통해 빈 국립극장과 빈 미술사 박물관 계단 장식 작업 등 여러 건축 미술 공사를 수주한 클림트는 이후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클림트는 당시 유행하던 상징주의 미술, 아르 누보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순수와 응용의 구분, 혹은 장르 간의 구분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한 빈 분리파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관능적인 여성 모티프와 유려한 선, 화사한 색채가 특징인 그의 그림은 성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대중을 매혹시켰다.'빛과 그림자는 공존한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있다' 흔히 "빛의 화파"라고 불리는 인상파는 단순히 빛의 표정만을 잘 묘사한 화파가 아니다. 그림자의 인상 또한 훌륭히 담아낸 화파이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인상파적인 화가로 꼽히는 클로드 모네(1840∼1926)는 미술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이다. 그의 찬란한 빛과 짙은 그림자는 인생이 당당히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삶의 두 본질적인 측면을 잘 보여준다. 모네가 자신의 영원한 모델이자 첫 번째 부인인 카미유 동시외(1847∼79)와 만나고 헤어진 것도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마술사인 그로서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드라마였다.



모네와 만나기 전 카미유는 직업 모델로 일하고 있었다. 1865년, 그녀가 18세이고 모네가 25세 때, 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로 만났다. 모네가 미루고 미루던 결혼식을 거행한 것은 1870년의 일이다. 모네가 그린 카미유의 모습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1875)이다. 언덕에 올라서서 화가를 내려다보는 카미유의 모습은 마치 선녀 같다. 구름이 끼었지만 청명한 하늘은 빛을 가리기 위해 파라솔을 든 여인의 실루엣과 함께 신선하고도 상쾌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거칠고 빠른 붓놀림은 하늘과 여인,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이룬다. 사실 이 세상에 찰나가 아닌 것이 어디 있고, 순간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빛도 찰나이고 인생도 찰나이다. 어쩌면 모네는 화가와 모델로서 두 사람의 관계도 찰나로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 카미유를 모델로 해서 많은 수의 그림을 그렸지만, 왠지 이 그림 속의 카미유는 그의 곁을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같이 보인다. 하나의 환영처럼 대기 속으로 분해되려는 카미유. 그리고 마치 그녀를 송별하듯 고즈넉이 올려다보는 화가의 시선, 이렇듯 이 그림에서는 예술도 사랑도 자꾸 하나의 순간으로, 찰나로 기화하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된 지 4년이 지나 카미유는 자궁암으로 죽었다.



모네에게 카미유의 죽음은 엄청난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강지처의 죽음 앞에서도 타고난 예술가였다. 「영면하는 카미유 모네」(1879)를 보면, 죽은 부인까지 모델로 삼는 그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이다. 비평가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이렇게 썼다.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인의 주검 앞에서도 색채의 변화, 곧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추적했던 모네는 카미유와의 사별 이후 인물화에 대한 관심을 점차 줄이고 풍경화를 더 많이 그리게 된다.



* 클로드 모네(1840∼1926)

모네의 예술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우리의 삶에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다. 모네는 그 긍정적인 힘을 빛과 그림자의 드라마에서 얻었다. 그가 1874년에 선보인 「인상, 해돋이」는 이 위대한 드라마의 출발점이자 인상파라는 유파의 이름을 낳게 한 동기였다.



모네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북부의 항구 도시 르 아브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릴 적 바다에서 자란 경험이 그에게 빛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키워주었던 것 같다. 파리의 아틀리에 쉬스와 글레르 문하에서 공부한 뒤 용킨트, 부댕과 함께 옹플뢰르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이 무렵부터 대기의 효과를 의식적으로 표현했는데, 점차 풍부해진 톤의 변화는 세잔으로 하여금 "모네는 하나의 눈이다. 그러나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하는 감탄을 낳게 했다. 1860년대 후반에는 르누아르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최초의 순수한 인상파 회화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여덟 번 열린 인상파전에는 모두 다섯 번 참가했으며, 그때마다 대중의 몰이해로 고생을 했다. 지베르니의 연못과 정원에서 착상을 얻어 제작한 「수련」연작은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죽음보다 어두움이 더 두렵다."던 그는 그러나 끝내 장님이 되어 죽었다.19세기 신고전주의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가 그린 「테르모필라이의 레오니다스」(1814)는 멋진 남성 누드로 유명한 작품이다. 용맹한 군인들의 벌거벗은 몸이 마치 단단한 암석들이 어우러진 것 같다. 이들 누드 가운데 제일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 좌정한 레오니다스의 누드이다.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의 왕으로서, 페르시아 전쟁 당시 300명의 장갑 보병을 이끌고 막강한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 싸웠던 사람이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다비드는 레오니다스의 위대함과 덕을 이상적인 남성 누드를 통해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구도와 연출 못지 않게 모델 선택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모델이 바로 '모델의 왕' 카다무르(카다모로)였다. 카다무르는 그 별명처럼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탁월한 모델로 통하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완벽한 몸매와 생동감 넘치는 포즈는 이처럼 다비드의 붓을 통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미지로 남았다.



카다무르(?∼1846)는 이탈리아인이었다.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불확실하다. 프랑스에서는 디종에서 댄서로 일하다가 파리로 올라와 모델 일을 시작했다. 1830년께부터 '모델의 왕'이라 불렸으며, 그 스스로 명함에 그렇게 적어놓고 다녔다. 카다무르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한 까닭에 다른 직종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모델 일로 평생 먹고 살았다.



모델 하면 흔히 젊고 아리따운 여성을 떠올리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모델의 왕'이라 불린 카다무르의 이런 활약상과 직업적 열정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아카데미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18∼19세기 중반 유럽의 아카데미 화가들은 주로 남성 모델을 대상으로 인체 소묘를 했다. 이 무렵 유럽의 아카데미들은 대부분 여성 모델을 정식으로 고용하지 않았다. 여성 누드를 그리려면 공식적인 미술교육 기관인 아카데미가 아니라 화가들의 개인 아틀리에 등지를 찾아가 따로 배워야 했다.



'모델의 왕'으로서 카다무르는 새로운 미술 운동과 미적 취향의 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모델 관념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무척 예민했던 것 같다.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가 유명한 「메두사 호의 뗏목」을 그릴 때 그는 이 그림의 모델을 서다가 흑인 모델 하나가 더 고용되자 상당히 분개했다고 한다. 제아무리 흑인 등장인물을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고전적인 모델 일은 무엇보다 '백인 남성'의 영역인데, 이렇듯 마구잡이로 모델을 고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스스로 그리스 이래 유럽 문명이 추구해 온 미적 이상과 취향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선천적으로 자질을 갖추지 못한' 타 인종모델이나 여성 모델이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류는 거스를 수 없어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마침내 여성 누드는 누드 미술 일반을 압도하는 장르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여성 누드 모델이 본격적으로 고용되고 모델 일은 여성의 영역으로 빠르게 자리잡아 갔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다비드를 비롯해 제리코, 그로, 들라로슈, 들라크루아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위해 모델을 섰던 카다무르는 서양 고전주의 미술이 추구한 남성미의 표본으로서 그 이름을 미술사에 영원히 남겼다.



*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운동의 핵심적인 지도자이자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한 시대를 주름잡은 거인이다. 다비드는 1775년부터 6년간 로마에 수학하면서 신고전주의 화풍을 정립했다. 고전주의의 갈래 가운데 가장 엄격하고 규범성이 강한 신고전주의의 특성에 따라 색채는 윤기가 있으면서도 차분하게, 형태는 강하면서도 단순하게 표현하는 양상을 보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 진영, 그 중에서도 급진적인 자코뱅 당에 적극 가담한 다비드는 1792년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때 그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화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렇게 열혈 혁명가가 되어 기존의 가치를 해체하는 데 적극 나선 다비드는 그로 인해 부인과 이혼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실상 프랑스 미술계의 최고 권력이 된다. 이런 그에게 '예술 독재자' 혹은 '붓을 든 로베스 피에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는 브뤼셀로 망명을 갔고 거기서 죽었다.기다란 인물상으로 유명한 화가 모딜리아니와 그녀의 아내이자 모델이었던 잔 에뷔테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연시의 하나이다. 3년여의 세월 동안 모딜리아니와 잔은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크게 기뻐하고 아파했으며, 20여 점에 이르는 잔의 초상화를 함께 만들며 고결하고도 순수한 미적 승화를 이뤄냈다. 비록 이른 죽음으로 짧은 사랑의 궤적을 그렸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까지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계 유태인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가 상큼하고 아리따운 미술학도 잔 에뷔테른(1898∼1920)을 처음 만난 것은 1917년 7월의 일이다. 당시 잔은 그랑드 쇼미에르에 있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는데, 모딜리아니가 살던 누추한 아틀리에 역시 그랑드 쇼미에르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잔은 자유분방한 학교 친구들 덕에 라 로통드라는 카페에 다소 수동적으로 끌려 들어가곤 했다. 보헤미안들로 시끌벅적한 그곳에서 잔은 늘 다소곳한 웃음과 신비스러운 침묵으로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그녀가 모딜리아니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깊은 사랑의 심연으로 빠져든 것은 그저 운명이었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잔은 '누아 드 코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야자나무 열매(코코넛)라는 뜻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듯 그녀의 머리 모양이 코코넛을 닮은 데다가, 그녀의 피부마저 코코넛 속살처럼 하얗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파란색이었고,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다. 조각가 자크 립시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고딕적인 외모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고딕 성당이 주는 고고하고 순결한, 또 신비로운 인상을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딜리아니와 잔은 서로를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신접살림을 차렸다. 연인에서 부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말이 부부이지 그들의 결혼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잔의 부모가 워낙 심하게 결혼을 반대해 이들은 합법적인 예식을 치를 수 없었다. 어느 부모인들 소중하게 기른 딸을 술주정뱅이에다 마약 복용자, 게다가 결핵으로 몸마저 엉망진창인 열네 살 연상의 무명 화가에게 내주겠는가.

결핵으로 고생하던 모딜리아니는 1920년 11월 25일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잔은 침대로 뛰어들어 모딜리아니의 주검을 으스러질 듯 껴안았다. 임신 8개월의 그녀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주검에 들러붙자 사람들은 강제로 그녀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녀는 먹이를 문 맹수처럼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통곡 소리는 끝없는 비명으로 메아리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