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자
아라이 도시아키 지음 | 푸른숲
반역자
아라이 도시아키 지음/양억관 지음
푸른숲/2003년 8월/242쪽/11,000원
머리말
반역이란 힘을 가진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반역자는 어느 시대에건 있었다. 이 책은 중국의 반역자 17명의 삶을 그린 것이다. 그 가운데는 반역자라기보다는 저항아, 이단자, 또는 혁명가라 불러 마땅할 사람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권력이나 권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니 반역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반역은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반역이 성공하면 반역자는 새로운 시대의 권력자로서 정통파가 되지만, 성공 확률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제부터 소개할 중국의 반역자들 대부분은 반역에 실패했다. 어떤 사람은 실의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또 어떤 이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권력자에게 살해당하거나 처형당하는 등 비참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패한 반역의 이상과 행동은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 즉, 반역의 성패에 관계없이 반역자는 세상을 움직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은 진의 시황제이다. 진 제국이 15년이란 짧은 역사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 진승과 오광이다. 이들의 농민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마침내 유방이 한 왕조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한 시대에 태어나 『사기』를 남긴 역사가 사마천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말함으로써 황제의 미움을 사 수치스러운 궁형을 당하였으나 이를 통해 사마천은 스스로 역사가임을 증명해 보였다. 역사가이기 위해서는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전한을 멸망시킨 반역자 왕망은 황제를 모시는 관료에서 섭정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새로운 왕조 ‘신’을 열었으나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신이 멸망한 뒤에 중국 대륙에는 후한 - 위․촉․오 - 진 - 남북조 - 수 - 당 왕조의 흥망성쇠가 이어지는데,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의 ‘장안의 봄’을 뒤집어버린 인물이 바로 이민족 출신인 안녹산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현종의 신뢰를 받았고, 양귀비의 양자이기까지 했던 안녹산을 반란으로 내몬 것일까?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분열의 시대가 계속되다가 송나라가 그 혼란을 잠재우고 중국을 통일한다. 그리고 원, 명으로 또다시 시대는 옮겨간다. 안녹산 다음으로 등장하는 반역자 해서는 명나라 때의 관료인데, 죽음을 각오하고 황제의 잘못을 비판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해서는 감금당했지만 다행히 황제의 죽음과 함께 석방되었다.
자신이 들어갈 관을 만들어두고 황제를 비판했던 해서를 찬양했지만 국방장관 펑더화이가 ‘제2의 해서’로 등장했을 때 그를 실각시킨 마오쩌둥. 명나라가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손에 망하자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운 정성공도 반역자 그룹에 속한다.
19세기 중반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지상 천국을 세우려 했던 홍수전,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는 변법파의 담사동 등 많은 개혁가와 혁명가가 나오는데, 변법이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실패한 후 청나라 타도를 외치다가 혁명 봉기에 실패하여 처형당한 여성 혁명가 추근도 있다. 그리고 봉기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쑨원은 청나라가 붕괴한 후에도 계속 혁명을 부르짖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혁명을 끝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일본에 저항하기보다 공산당군의 괴멸을 우선시하는 장제스를 연금하고 방향 전환을 요구한(병간) 장쉐량. 그는 반 세기가 넘도록 연금 생활을 하고,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장쉐량의 병간 덕분에 살아남아 국민당에게 승리를 거두고 중국을 통일했다. 마오쩌둥이 새로운 혁명 운동에 나선 것이 1966년부터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국방장관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가로 급부상했으나 서로의 정적이 제거되자 마오쩌둥과 린뱌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린뱌오 제거에 나서자 린뱌오는 마오쩌둥 암살을 꾀하지만 실패하고, 망명길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는다.
반역의 성패나 그 역사적 평가, 또는 우리의 취향에 관계없이 반역자의 인생은 자극적이다. 그것 하나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하여 그 자극적인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진승과 오광 - 진 제국을 무너뜨린 최초의 농민 반역자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 진나라의 시황제는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했다. 기원전 221년의 그날, 500년간이나 이어지던 춘추․전국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황제라는 칭호도 이때 처음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천하 통일 후 15년, 시황제가 죽은 뒤 4년 만에 망하고 만다. 그 멸망의 씨앗을 뿌린 것이 바로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다.
진승은 양성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다른 집의 머슴을 살았다. 이 시절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가 나중에 부귀한 신분이 되더라도 서로를 잊지 말기로 하세.”하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진승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리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높은 곳을 지향하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해주는 일화이다.
시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2대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기원전 209년) 여름 진승은 병사로 징발되어 뤄양의 수비대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가 속한 900명의 병사로 구성된 부대는 큰비로 길이 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는데, 진나라의 법은 정해진 날까지 주둔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침 오광도 그 일행에 포함되었는데 진승과 오광 둘 다 둔장이라는 분대장급에 속해 있었다. 제날짜에 주둔지에 갈 수 없게 되자 진승은 뤄양에 가든 도망치든 죽게 될 것임을 알고 ‘크게 한번 붙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오광도 거기에 찬성했다.
두 사람은 시황제가 숨을 거두면서 다음 황제로 지명한 부소와 초나라 장군 향연으로 변신하기로 했다. 시황제의 죽음 후 유서의 내용을 알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음모를 꾸며 부소에게 자결을 명하고, 막내 호해를 후계자로 지목한 가짜 유서를 만든 일이 있었다. 이 음모는 성공하여 부소는 자결했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부소는 아버지 시황제의 강권 정치를 비판한 적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황제의 자리를 동생에게 빼앗긴 부소를 동정하고 있었다.
초나라 장군과 초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의 황제 아들의 결합이었지만 민중은 분명 부소와 향연을 흠모하고 그리워했으며, 진승과 오광은 그런 민중의 심리를 이용하여 힘을 얻으려 했고, 이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진승을 앞세운 반란 집단은 초나라의 재건을 외치면서 점차 그 기세를 넓히며 진나라의 수도 센양이 있는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승과 오광은 부하들과 민중의 추대를 받아 각각 진왕과 가왕이 되었다. 이를 본 진나라는 토벌대를 조직하여 진승의 군대를 치게 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부하와 진나라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의 반란이 실패한 원인으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명령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은 가차없이 투옥해버리고, 자신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을 꼽았다. 게다가 진승에게는 그런 약점을 극복하고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할 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이다.
진승과 오광이 살해당하는 순간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반란을 계기로 곳곳에서 진 제국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만 보아도 진 제국의 체제와 통치 스타일이 민중들에게 깊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은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농민 반란이다. 지금 중국의 정권을 잡고 있는 공산당도 마오쩌둥의 혁명 이론에 따라 농촌을 기반으로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에 성공했다. 하지만 농촌을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은 현재 농민과 농촌과 농업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는 해가 갈수록 벌어지고, 농촌을 지배하는 공산당 간부의 부패 때문에 농민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이 WTO에 가입함으로써 중국의 농업은 세계 다른 나라와 경쟁을 벌여야 하는 심각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90년대 전반 농촌을 방문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 안리가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 농민이 ‘진승과 오광’이라고 대답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녹산 - 양귀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신자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안녹산은 무당이었던 어머니가 점을 쳐 얻은 약간의 수입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 어머니가 돌궐족의 장수와 재혼을 한 후 계부를 따라 다른 소수 민족과 어울리면서 아홉 가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뛰어난 어학실력을 바탕으로 안녹산은 유주 지역에서 소수 민족 간의 무역을 중개하는 ‘호시아랑’이 되면서 절도사에까지 올랐다.
그 자신이 소수 민족 출신이며, 그 지역의 지리에 밝고, 여러 소수 민족의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던 안녹산은 소수 민족의 동정을 재빨리 파악하여 토벌 작전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술판을 벌인 다음 그 술에 독을 타서 거란인들을 죽이기도 했다. 안녹산의 출세는 이처럼 소수 민족의 피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난관은 뇌물과 인맥으로 극복해나갔다.
안녹산은 출세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기 시작하여 랴오닝 성과 허베이 성, 산시 성, 베이징 일대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안녹산은 현종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다. 안녹산이 서서히 중앙 정계에서 떠오를 무렵, 장안의 궁정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재상 이임보는 반대파를 억제하기 위해 중앙 정계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안녹산과 같은 이민족 출신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안녹산도 안녹산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임보 사후 새로 재상이 된 양국충은 몇 번이나 현종에게 상소를 올려 안녹산이 야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말하거나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등 그가 가지고 있는 반란의 기미를 폭로하고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궁지에 몰린 안녹산은 755년 11월 마침내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안녹산은 한족 장수를 이민족 장수로 대체하는 것을 현조에게 허락받는 등 반란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왔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안녹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장안에 머물고 있던 안녹산의 아들을 죽였다. 한편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뤄양을 점령한 안녹산은 756년 1월, 스스로를 대연 황제라 칭했다. 장안이 함락되기 전 빠져나온 현종 일행 중 허기와 피로에 지친 호위 무사들의 불만에 의해 양국충과 양귀비는 죽임을 당했다.
뤄양에 머물던 안녹산이 건강상에 문제가 생기고 아무 이유 없이 측근 장수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등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모의하여 757년 그를 살해했다. 안녹산이 황제로 칭한 기간은 고작 1년에 지나지 않았다.
안녹산이 죽은 뒤 당나라를 숙종을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서서히 반란군을 압박해 들어가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현종도 1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안녹산의 맹우였던 사사명이 다시 반란군을 일으켜 스스로 응천 황제라 칭하고 759년에 뤄양을 탈환했으나 죽임을 당하고 7년이나 계속된 안녹산의 난은 평정된다.
해서 - 죽음을 각오하고 황제를 비판한 청백리
해서는 명나라 때의 청백리인데, 청렴결백한 관리라 하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다. 몇 십 년 전 해서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극 각본에 대한 비판이 유명한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 각본은 1569년 쉰여섯의 해서가 난징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의 쌍수 성, 안후이 성 일대를 관할하는 지방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의 일을 소재로 한 것이다. 해서가 응천 순무(성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지는 관리)로 있으면서 가난한 농민에게서 부당하게 토지를 빼앗은 지방의 권력자를 응징하고, 그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게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이 경극은 마오쩌둥 뿐만 아니라 서민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았는데, 그로부터 4년 후 사인방의 야오원위안이 이 경극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야오원위안은 해서라는 청백리를 농민의 구원자로 묘사함으로써 계급적 관점을 모호하게 하고, 혁명이 필요 없다는 ‘계급 조화론’을 고무하는 것이라 하여 우한의 각본을 비판했다. 해서가 청백리여서 농민에게 관리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여 계급의식을 흐리게 만든다는 논리였다. 우한과 그가 쓴 경극 각본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중국 대륙을 문화대혁명의 폭풍 속으로 휘몰아갔으며, 원작자와 그에게 각본을 청탁한 사람들은 박해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해서는 만학이었는데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 서른이 넘어서였다. 마흔을 넘긴 해서는 진사 시험을 포기하고 지방 관리로서는 최하위직인 교유가 되었다. 해서는 검소한 생활 태도와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고 올바르게 일을 처리하는 자세를 보여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는 다른 임지에서도 소박한 생활 태도 및 정의로운 통치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하지만 해서의 그런 행적은 중앙에까지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는 중앙 관직인 호주부사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절 해서는 정무를 소홀히 하는 황제 가정제를 엄하게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를 반역자의 한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상소를 올린 해서는 스스로 관을 마련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뒤처리를 부탁해두었다고 한다.
이 상소문을 보고 격노한 가정제는 해서를 감옥에 가두었으나 재상 서계의 옹호와 관을 준비하고 상소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해서가 감옥에 갇힌 지 1년도 채 안 되어 가정제가 세상을 떠났다. 그후 융경제가 즉위하자 해서는 무죄 석방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서계파와 그 반대파 사이에서 격렬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서계는 그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황제의 신뢰를 잃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해서도 중앙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고관의 뜻에 따라 인생이 마구 흔들렸다. 그는 마침내 응천 순무에서 물러나 고향 해남도로 돌아갔다. 한동안 고향에서 은거하는 해서에게 재기용의 통보는 날아오지 않았다.
1585년 일흔 살이 넘은 해서 앞으로 다시 관계로 나오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해서에게는 너무도 오랜 은거 생활 후의 재등장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시간은 거의 없었다. 1587년, 해서는 청백리의 삶을 조용히 마감했다. 일흔넷의 생애였다.
린뱌오 -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한 후계자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받았으나 권력 이양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마오쩌둥 암살을 꾀하다 실패한 뒤, 도망치던 중 몽골 초원에 추락하여 죽은 권력자. 이것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린뱌오(林彪)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린뱌오의 실상일까?
린뱌오는 전후의 국공내전 등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건국 후 그의 지위는 공산당 정치국원, 부수상, 최연소 원수였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정치의 표면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1959년 루산 회의 이후이다. 이 회의에서 국방장관 퍼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고 실각했는데, 린뱌오는 도중에 회의장으로 달려와 펑더화이 비판에 가담하고 그가 실각하자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다.
린뱌오는 그 이후 마오쩌둥이 위기에 처했을 때조차도 마오쩌둥에게 지극히 충실한 태도를 취하면서 마오쩌둥 개인 숭배를 주도했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린뱌오는 서로 손을 잡고 중국 전역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마오쩌둥이 다시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린뱌오도 당내 제2인자의 지위를 손에 넣고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