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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무원록

왕여 지음 | 사계절
『신주무원록』의 간행과 구성『신주무원록』의 검시 방법『무원록』이 법의학 지침서라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그 내용의 대부분이 검시, 즉 시체 관찰 기술이라는 점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검시의 핵심이 바로 시체의 안색을 관찰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20세기 서양의학의 검시, 즉 시체를 해부하여 사인(死因)을 분석하는 데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시체의 상태를 중시한 『무원록』의 검시 방법은 매우 색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검시가 안색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안색을 위장하여 타살의 흔적을 없애는 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에 상흔의 위장을 찾아내는 방법 또한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무원록』이 법의학 책이라고 해서 내용 전체가 검시 의학에만 맞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집행상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마련하고 있었으니, 그 철학은 바로 정확성과 엄격함이었다. 『무원록』이 강조하는 정확한 용어 및 서술 정신은 이를 활용하려는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정확한 번역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해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법의학 지식 혹은 행형상(行刑上)의 절차가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역사 이래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어 죽음에 이르는 일이 빈번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본 조선 시대의 살인사건은 상당수에 이르며 그 방법과 원인 또한 매우 다양하다. 죽음의 원인과 범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절차가 복잡하고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법률과 규칙이 모두 지켜진 것은 아니어서, 조선 초기에도 살인사건의 발생과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첫째, 검시와 살인사건을 담당하는 해당 관리들이 조사를 철저하게 하지 않고 검시 또한 직접 하지 않았다. 둘째, 검시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셋째, 범인을 확정하는 데 과학적인 방법과 엄밀한 심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지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냈다.고려 시대에 이미, 1059년 중국에서 간행된 법의학 참고서 『의옥집』 등이 출판되었던 사실로 보아, 송대의 『세원록』, 『평원록』과 같은 법의학 서적도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의 저작인 『무원록』은 1301년(혹은 1335년)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일본 등지에 전해지면서 법의학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었다. 『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 년이 지난 1435년(세종 17), 조선의 조정에서도 법의학 지침서로 『무원록』의 활용이 거론되었다. 세종은 최치운 등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에게 주석을 달도록 명했다. 이에 최치운 등은 『무원록』뿐만 아니라 다른 참고서도 고찰하여 주석을 달고 음훈을 병기하여 『신주무원록』을 완성했다.



『무원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상권은 논변과 격례 부분이고 하권은 사체 검험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상권의 격례가 총론에 해당한다면 이에 따르는 각론이 하권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조선판 『신주무원록』의 경우에는 조선의 학자들이 붙인 서문과 발문이 첨가되어 있으며, 본문에 조선의 학자들이 붙인 주석이 본문보다 작은 활자인 세주 형태로 들어가 있다.해제 : 『신주무원록』과 조선 전기의 검시(檢屍)

머리말현장 검시 절차와 보고 과정병사(病死)한 죄수『무원록』이 조선 전기의 행형 실정에 미친 영향력은 컸는데, 특히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어떻게 검시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절차를 밟아 보고할 것인지에 대한 '표준 지침'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조선 시대 검시는 바로 20세기 초 근대적 검시와 형법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신주무원록』과 이를 수정·보완한 조선 후기의 『증수무원록』 지침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무원록』 이 종합 검시 참고서라면 「검(시장)식」은 현장에서 작성하는 문건이 아니었다. 『무원록』을 『신주무원록』으로 간행하였다면 원(元)의 「검시법식」에 해당하는 문서도 따로 인쇄하여 조사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1439년 별도로 인쇄되었던 「검시장식」이었다. 이후 형조에서는 「검시장식」을 인쇄하여 한성부와 5부 등에 나누어 비치하게 해, 인명사건이 발생하면 「검시장식」 인쇄면에 검험 사항을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조선 전기에는 사건이 발생한 지역, 해당 군현의 수령이 초검을 하고, 이어 관문을 보내어 인근 군현의 수령에게 복검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조사된 사건의 결안은 해당 도(道)에 올려 보내진다. 도에서는 다시 이를 잘 검토한 후 형조에 보고하였고, 형조에서 자세히 추심한 후, 왕의 최종적인 재가를 받아 처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인명사건의 경우 신중하게 처리한다는 차원에서 삼복(三覆)의 절차를 밟았다.맺음말신주무원록 권상(券上) - 논변(論辯)



중독의 경우절서도(折西道 : 현재 중국의 절강성이다. 당시 절강행성 소속이었다) 선위사(宣慰司)에서 보내온 검안이 1268년 6월 초사흘에 도착하였는데, 중서성 우삼부에서 널리 각 노(路)에 내려 보낸 부문(符文)에 첨부되어 보내진 「검시체식(檢屍體式)」을 준수하여 시행하였다.



봄 석 달에는 시체가 2∼3일 지나면 변하여 입·코·뱃가죽·양 겨드랑이·앞가슴의 살빛이 약간 푸르게 된다. 만약 열흘 정도 지나면 코와 귀 안에서 악즙(惡汁)이 심하게 흘러나오고 뱃가죽이 팽창하게 되니, 이는 곧 비대(肥大)한 사람이요, 만일 오랫동안 병을 앓았거나 형체가 마르고 약한 사람은 반 달은 지낸 이후라야 비로소 이와 같이 변하게 될 것이다.



여름 석 달은 시체가 1∼2일이 경과하면 먼저 얼굴을 따라 뱃가죽·양 겨드랑이·앞가슴 살색이 차례로 변한다. 사흘이 지나면 입과 코 안에서 악즙이 심하게 흐르고 구더기가 나오고 전신이 팽창하고 입술이 뒤집어지고 피부와 살이 벗겨지고 문드러지고 피부가 엷게 들뜨게 된다. 4∼5일이 지나면 두 발이 탈락하게 된다.



가을 석 달에는 시체가 2∼3일이 지나면서 또한 얼굴부터 뱃가죽·양 겨드랑이·앞가슴의 살색이 변하고, 4∼5일이 지나면 콧구멍과 입 안에서 악즙이 심하게 흐르고 구더기가 나오며 온몸이 팽창하고 입술이 뒤집어지고 피부가 들뜨게 되고, 6∼7일이 지나면 비로소 두발이 탈락한다.



겨울 석 달에는 시체가 4∼5일이 지나면 살색이 황색으로 변하면서 쪼그라들며 약간 변한다. 반 달이 지난 후에는 먼저 얼굴부터 뱃가죽·양 겨드랑이·앞가슴이 변하는데, 만일 습지(濕地)에 놓고 거적으로 시체를 싸서 묻었다면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이니, 다시 월초인지 월말인지를 살피고 춘(春)·추(秋)의 절기를 자세히 살핀 후 결정해야 한다.



매우 더울 때는 시체가 하루만 지나도 곧 피육이 부패하여 청암색이 되고 냄새가 나며, 3∼4일이 지나면 피육이 점차 문드러지고 시체가 팽창하며 구더기가 나오고 입과 코에서 악즙이 흐르고 두발이 점차 탈락하게 된다. 매우 추울 때의 닷새가 매우 더울 때의 하루와 같으며, 반 달이 여름 더울 때의 사흘 내지 닷새와 같다.목졸려 죽은 경우, 시체는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뜨며, 목 위에 졸린 흔적이 검은색이고 둘레는 몇 촌이 되며, 깊이와 너비는 몇 푼이 된다. 식기상이 꺼지고 목에 액흔(목졸린 상흔)이 감돌아 교차되어 있으면 이는 목졸려 살해된 것이 틀림없다.



질병으로 인해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한 경우, 시체는 두 눈을 감고 입술이 벌어져 이가 드러나고 혀를 깨물었으니 1푼 내지 2푼 가량 나와 있고, 살빛이 누렇고 형체(形體)가 수척하여 파리하고, 두 손은 주먹을 쥐고 둔부에는 대변이 나와 있다. 좌우의 손 안에는 대개 스스로 목을 맨 물건을 쥐고 있는데, 끈을 세게 잡아당겼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곧바로 구출해 끈을 풀어낸 경우는 흔히 혀를 빼물지 아니한 것이 많고 둔부에 대변이 없다.



남에게 목졸려 죽은 시체는 목 아래 끈이 감돌아 교차하고, 손가락과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 있다. 시체가 입을 벌리고 눈을 뜨고, 두 주먹을 쥐지 아니하며, 머리의 상투가 늘어지고, 숨통 아래 검은 액흔의 둘레가 1척 정도 된다. 구타 당하고 목을 졸려 피살된 것을 자액으로 위장한 경우는 숨통 아래에 혈맥이 통하지 아니하므로 액흔이 얇고 흐려서 피맺힌 자국이 없다. 혀가 나오지 아니하고 이에 닿지도 않았다. 몸의 급소에 치명적인 상처가 있다.



죽은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끈이나 줄로 손발이나 목이 결박된 경우, 그 사람은 이미 죽었으므로 기혈이 통하지 않아, 비록 결박당하였지만 그 액흔이 검붉거나 붉지 아니하고 단지 흰색이므로 증험할 수 있다. 대꼬챙이를 불에 달구어 액흔을 만들었으면, 다만 홍색이거나 혹 불에 데인 붉은색을 띠는데 축축하여 말라있지 않다. 아직 살아 있어 죽기 전에 목을 매달고 자액으로 위장하면 이는 매우 판별하기 어렵다.본 시체의 경우, 목이 오그라들고 발을 구부렸으며, 두 손은 가슴을 껴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며 살빛이 누렇고 긴축되었으니 이는 동사(凍死)이다.



병들고 굶주리고 언 채 구걸하다가 길에서 죽은 경우, 시체의 형체가 야위고 수척하며, 살빛이 누렇고 희며, 눈을 감고, 두 손을 약간 쥐고 있다. 그리고 두 발이 뻣뻣하고, 이를 악물고 있으며, 입술이 이를 덮지 않았다. 별다른 상처가 없고 의복이 홑겹으로 얇다. 검혈 시에 술과 지게미로 닦으면서 조금 열기가 가해지면 두 뺨이 붉어지고 얼굴이 연꽃색처럼 되며, 입 안에 거품이 있지만 끈적이지 아니하니, 이것이 동사의 증상이다.만일 악취를 회피하여 친히 검험하지 아니하면 종종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시체의 사방을 측정한 후 물을 끼얹어 구더기와 오물을 씻어내는데, 피육이 이미 깨끗해지면 곧 검험할 수 있으니, 반드시 초와 지게미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자주 새 물을 길어다가 시체의 사면(四面)에 뿌려주어야 한다. 구타 당해 죽은 경우, 상처 부위의 뼈가 상하는 데 이르지 않았다면, 피육이 뼈 위에 달라붙어 물을 세게 부어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손톱으로 긁어내야 비로소 떨어진다. 피육이 붙어 있던 곳에 상처가 있었다면 바로 상흔이 나타나게 된다. 시체가 썩은 경우, 구타당하거나 칼 등에 다친 상처는 피육이 붉은 색으로 되는데, 매우 깊고 진하며, 상처가 오래되면 청흑색으로 변해 뼈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아니하고 벌레도 먹지 않는다.



몸이 본래 검붉은 색이었으면 죽은 후에 청구색으로 변한다. 상처의 흔적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의심스러운 부위가 있으면 먼저 물을 뿌려 적신 후에 파의 흰 뿌리를 짓찧어 상흔이 있는 곳에 바르고 초로 적신 종이를 그 위에 덮어 한 시간쯤 지난 후 제거하고 물로 씻으면 흔적이 곧바로 나타날 것이다. 그냥 시체가 모두 썩어 검험할 만한 것이 없다고 보고하여, 억울한 일이 있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먼저 무덤이 누구의 땅에 속하며 지명이 무엇인지 조사한다. 봉분이 한 개이면 높이와 길이·넓이가 얼마인지 헤아려 모두 몇 척촌인지 계산한다. 시체가 옥하(屋下 : 집의 처마 아래) 혹은 옥내(屋內 : 집 안)에 가매장된 경우도 앞서와 같이 모두 측량한다.



다음에 시체의 머리와 다리가 어느 방향인지 살피는데, 머리는 동쪽으로 다리는 서쪽으로 두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머리가 어떤 장소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다리는 어떤 장소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살핀다. 좌우의 손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사람을 입회시켜 흙을 파거나, 혹 임시 매장하는 데 사용한 벽돌을 제거하고 시체를 무언가로 담아다 묻었는지 살피는데, 관목(棺木)이라 한다면 칠과 장식이 있는지, 돗자리라고 한다면 가장자리 장식이 있는지, 대나무 자리인지 등을 살피도록 한다. 이들을 함께 들어내 펼친 후, 시체를 밝은 곳에 꺼내놓고 검험한다.발문(跋文)



발문(跋文) - 손조서 지음신주무원록 권상(券上) - 격례(格例)



시체의 상흔이 불명확한 경우상하여 썩은 경우독을 만들거나 모으고, 혹은 독약을 매매하여 사람의 목숨을 해친 경우에는 각각 일정한 형벌이 있다. 독충도 여러 종이 있어 이를 모두 아는 이는 드물며, 풀이나 술, 과일에도 독이 있는 경우가 있어 모두 열거하기란 쉽지 않다. 무릇 (독을 잘못 먹거나, 독충 등에 물려) 중독된 경우 모두 애매한 데다, 시체의 발변(發變) 또한 중독의 예와 유사하므로, 검험할 때 매우 자세하게 분별하여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중독으로 죽은 경우인데도, 검험할 때 스스로 독을 먹고 자살하였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더욱 자세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1299년 4월 강서행성의 차부(箚付)에 황제 조서(詔書)의 한 항목이 실려 있는데, "해당 정령(政令)이 불편하고, 관리들의 폐단이 아직 혁파되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고통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면 차정된 관리와 본처의 관리들이 마땅히 개혁할 만한 것은 곧바로 개혁할 것이다." 이 한 건 외에도 검시가 명확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해가 되고 불편하다고 하였다. 상부에서 원래 내려 보낸 「검시정식」을 보면 춘하추동 4계절에 따라 각각 기한이 있는데, 이 기간을 넘기면 시체가 부패하므로 단지 심문에 의존하여 치명한 원인을 결정하게 된다. 폐단을 꾸미는 사람들이 관사(官司)에서 별달리 금지하지 않는 것을 엿보고는 드디어 간계(奸計)를 만들어낸다.



어느 집안에 우연히 한 사람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원수에게 복수하려고, 혹은 재산을 도모하려고 문득 남에게 구타당해 죽었다고 관에 고발하거나, 혹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면서 사연을 꾸며대거나, 증거를 날조하여 시간을 끌면서 수 개월이 지나 시체가 부패하여 썩기를 기다린 후 고발한다. 주현(州縣)에서는 사건이 인명에 관계되므로 곧 법리대로 접수하고 관원을 차정하여 검험하려고 하지만, 이미 시체가 썩어 없어진 상태였다. 이에 단지 시체의 상흔을 허투루 날조한 오작과 항인들의 말에 의존하게 될 뿐이다. (형부에서) 논의하기를, 이제 부(府) 관할하의 사현(司縣)에서는 모름지기 성부에서 원래 반포한 바를 참조하여 법식에 따라 검험할 것이다.춥고 더운 데 따른 변동신주무원록 권하(券下)

목졸려 죽은 경우주먹이나 손발 등으로 구타당해 죽은 경우얼어 죽은 경우굶어 죽은 경우본 시체의 경우 뱃속이 비어 달라붙었고, 몸이 누렇게 야위었으니 이와 같으면 굶어죽은 것이다. 굶어죽은 경우, 전신이 검고 야위고, 뻣뻣하며, 눈은 감고 입은 벌리고 있으며, 어금니를 앙다물고, 손과 발을 모두 뻗고 있다.무덤이나 집 안에 임시 매장되어 있는 경우『신주무원록』은 조선 초기에 간행되어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법의학의 기본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이 책이 오랫동안 법의학 지침서로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검시의 구체적인 절차, 검시 과정의 엄밀성과 주의사항 등에 대한 행정 절차상의 규식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다양한 원인으로 사망한 시체의 검시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무원록』 자체는 중국에서 간행되었으나, 이를 도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주석본을 만들었으며 또 이후에 이를 엄격하게 지키고 사용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수준 높은 법 정신을 가늠케 해준다. 엄격한 사건 조사 및 투명한 법 집행에서부터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는 정신이야말로 『신주무원록』 간행의 기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병든 자를 1, 2분의 가벼운 증세에서부터 점차 8, 9분의 심한 경우로 나누고 10분에 이르면 거의 죽을 지경으로 보았다. 병이 들었는데 곧 10분에 이르게 되면 치료가 어려워 죽게 된다. 진심통(眞心痛 : 심장 부위에 발작적으로 생기는 심한 통증이다. 가슴이 답답하며 땀이 몹시 나고 팔다리가 시리면서 피부가 퍼렇게 변한다)이나 진두통(眞頭痛 : 머리가 심하게 아프며 골속까지 통증이 미치고 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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