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살아있다
이경재 지음 | 가람기획
'피맛골.' 옛날 종로시전의 뒷골목 청계천 가를 피맛골이라고 했는데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큰 길 양쪽으로 집 한두채 뒤쪽에 좁다란 골목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원래 이 골목은 어둠침침하고 배수시설이 잘 안 돼서 칠적한 데다가, 지각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오물을 배설해서 냄새까지 고약해 다닐 만한 곳이 못되었다.
이 피맛골이란 이름은 관원들이 탄 말이 지체 높은 어른들의 행차를 피해서 다닌다고 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종로는 서울에서도 가장 크고 번듯한 길로서, 종묘가 가까이 있고 창덕궁이 있으며, 또 서쪽에는 경복궁을 위시한 육조거리와 한성부가 있기 때문에 큰길에는 항상 높은 어른들의 가마가 지나다녔다.
관원들은 말을 타고 큰길로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데 저쪽에서 높은 어른이 사인교를 타고 물럿거라, 섰거라 하고 오면 관원은 말에서 내려 엎드려야 했다. 이것은 관원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보면 길을 걷는 시간보다 길가에 엎드리고 있는 시간이 더 길 때가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지체가 낮은 관원들은 업무에 지장이 많았다. 그래서 종로 양쪽 큰길에 면한 행랑 뒤쪽으로 겨우 말 한 마리 지나갈 만한 폭의 골목길을 만들어 지체가 낮은 관원들이나 서민들이 다니게 함으로써 높은 사람을 만나 말에서 내려 엎드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력으로 피맛골이란 이름이 생겨났고 결국 서민의 골목길이 된 셈이다.청계천이란 이름은 일제 초기에 서울의 지명을 개칭할 때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말기까지 개천으로만 불렸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한양은 모든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 전국 제1의 명지이지만 여러 가지 흠이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홍수 때마다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7년 5월 경진에, '큰비가 와서 서울의 모든 하천과 교량이 넘쳤고', 태종 9년 5월 기묘에는, '큰비로 물이 넘쳐 교량이 모두 파괴되고 성내에 두 명의 익사자가 났으며 소격서동에 산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또 태종 9년 5월 기축에는, '밤 중에 크게 비바람이 불고 벼락이 떨어지고 번개가 치더니 성중에 물이 넘치고 교량은 떠내려갔다가 물 속에 잠겼고' 등이 기록되어 있다. 태종 10년에는 5·7·8월에 세 차례에 걸친 홍수를 겪게 되자 그 다음 해에는 개천을 크게 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은 중신들을 모아놓고 의논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을 과중하게 역사시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하게 논죄하겠다. 또한 전의감, 혜민서, 제생원 등에서 의사로 하여금 미리 약을 만들고 또 막을 치게 하여 만일 병이 난 자가 있으면 곧 구제 치료하여 생명을 잃지 말게 하라. 또 역군들이 휴대한 식량이 넉넉지 못할 것이니 군자감이 보유하는 쌀 1만 4백 섬을 풀어 한 사람에게 석 되씩 나눠주게 할 것이며, 역군 중에 부모가 죽어 상을 입은 자가 있거든, 조사하여 환향시키도록 하라."
도성 내를 관통하는 개천 배수시설의 대역사는 당시로 봐서는 정말 방대하고 벅찬 일이었지만 면밀한 사전계획과 여러 조치의 뒷받침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기공 후 1개월 만인 2월 15일에 준공을 보았다. 그러나 태종 때의 이 역사로써 서울의 배수시설이 완비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번 집중호우만 오게 되면 지류와 세천은 홍수를 면치 못했고, 개천에 모인 대량의 물은 좁은 수구를 빠져나가지 못해 수해를 입었다. 이후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여러 해에 걸쳐 지류와 세천의 개척 정비를 했고, 종루로부터 하류의 개천을 넓혔으며 동대문 근처의 수문을 증설하고 여러 다리를 석교로 개축했다.
태종은 개천공사를 마치고, 여러 곳의 다리를 고쳐 석교를 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청교, 종침교, 중학교, 혜정교, 모권교, 광통교 등이나 현재는 다 없어지고 수표교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수표교는 원래 마전교라고 했는데, 세종 23년에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고 아울러 단위 시간당 우수량도 측정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수표와 측우기가 설치됨으로써 그 이름이 수표교로 바뀐 것이다.태종 10년(1410), 서울 장안에 큰 비가 왔다. 개천의 물이 범람하여 죽은 사람이 세 명이나 되고, 태종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천에 걸려 있던 여러 토교와 목교가 모두 떠내려가는 등 성문 안의 교통에 비상이 걸렸다. 이때 태종이 명령을 내렸다. "정릉에 석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석재를 써서 광통교, 혜정교, 금천교 등을 석교로 고치도록 하라." 명령을 받은 한성부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동 마루턱에 남아 있던 정릉의 석재를 써서 다리와 개천의 석벽을 쌓았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서울의 대역사인 청계천을 복개할 때, 광통교에 쓰인 정릉의 아름다운 신장석(神將石)들은 그대로 개천 속에 묻히고 말았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의 강씨는 집 앞 용연 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청년장군이었던 이성계와 마주치게 됐고, 물을 찾던 이성계에게 물에 버들잎을 띄운 바가지를 권하여 결국 그 예지에 감동받은 이성계가 아내로 맞은 여인이다. 지덕을 갖춘 신덕왕후는 태조를 도와 조선조 창건에 내조의 공을 다했다. 신덕왕후가 태조 5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몹시 슬퍼하여 4일간이나 조회와 시전을 정지하고 백의로 친히 나가 능지까지 구했다. 하지만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에 대해서는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제1왕비인 신의왕후의 소생인 태종 방원은 태조가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자의 난을 통해 방석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방원은 정릉을 문밖으로 옮기고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태평관의 북루 3칸을 지었으며, 태종 10년 여름에는 정릉 구기의 석물을 실어다가 광교에 쓰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능묘에 관원을 파견해서 제사를 드리게 하던 의례까지 폐지하여 결국 직손이 없는 분묘에는 풀이 무성하고 석물은 무너져 일반 사람들도 그것이 누구의 묘인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광교에 쓰인 정릉의 열두 개 신장석은 그 길이가 8척(약 2.4m), 넓이 3척 4촌(약 1m)의 화강암이다. 구름무늬와 당초무늬를 조각하고 가운데에는 보관을 쓰고 양 소매를 가운데 모으고 합장을 한 신장을 부조한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광교가 그대로 있을 때 거꾸로 묻혀 있긴 했어도(태종의 지시) 내려가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개천 복개를 할 때 이 신장석은 콘트리트에 묻혀버렸다.혜정교라는 다리가 기록상으로 처음 보이는 곳은 태종 12년(1410)이다. 당시는 토교나 목교로 되어 있었으나 태종 12년에 서울 장안에 큰 비가 와서 여러 다리가 모두 떠내려가 종묘 입구 서쪽 개천의 석축작업을 하면서 이 다리도 석교로 개축했다. 혜정교는 도심지 교통의 요지에 있는 다리였다. 일제 때인 1926년에는 길을 넓혀서 수리를 하고 다리 이름을 복청교라고 고친 일도 있다.
혜정교에는 조선시대의 재미난 풍습이 전해내려온다. 국법을 어겼다거나 부정을 저지른 후, 혹은 국고나 남의 물건을 가로챈 사람을 팽형(烹形)에 처하는 풍습이 그것이었다. 팽형이란 사람을 물이 팔팔 끓고 있는 가마솥에 넣고 삶는 형벌이었다. 얘기만 들어도 아주 끔찍한 이 형벌은 사실상 구한말까지도 이어졌다. 어떤 외국 선교사가 이를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실형이 아니다. 가마솥 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가마솥 밑에 장작을 지피기는 하나 실제로 불을 뗀 일은 없었다.'라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로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했고 길도 넓은 편이어서 부정을 저지른 관리를 끌어내서 처형을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겠는가. 종로 네거리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혜정교 한복판에 높다란 부뚜막을 가설해놓고 그 위에는 사람이 하나 들어갈 만한 큰 가마솥을 걸어놓는다. 그리고 가마솥 밑에는 장작까지 잔뜩 지핀다. 군막을 친 자리 상석에는 포도대장이 앉아 있어 죄인을 불러내놓고 인정신문과 죄상을 읽어내려간다. 다음은 포졸들이 오라에 묶인 죄인을 들쳐메고 가마솥 안에 밀어넣은 후 솥뚜껑을 덮는다. 포도대장의 명령에 따라 포졸이 가마솥 밑의 장작에 불을 지피는 시늉을 한다. 그런 다음에 포도대장이 죄인 아무개의 팽형을 마친다고 고하고 포도대장과 포졸이 바로 옆에 있는 좌포도청으로 들어간다. 이것으로 팽형은 끝이 난다.
팽형이 끝나면 군중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죄인의 가족들이 어이어이 곡을 하며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죄인을 꺼내 준비해갔던 칠성판 위에 눕힌다. 죄인은 말 한마디 못하고 누워있다. 그때부터 죄인은 죽은 시늉을 해야 한다. 집에 가서도 가족들은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비록 묘는 쓰지 않더라도 족보에는 그날로 죽은 사람이 되며, 자식을 낳더라도 사생아가 된다. 부정을 저지른 관료에게 팽형을 함으로써 사형을 집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서울에는 옛날부터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을 남촌이라고 했고 북쪽을 북촌이라고 했는데, 남촌에는 술이 좋았고 북쪽에는 떡이 좋았다는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남주북병에 대해 물어보면, 북촌에서도 대표적인 낙원동 근처에 가보면 모두 떡집이고, 남촌에서도 현대적으로 대표적인 동네인 강남에 가보면 모두 술집인데, 이것이 바로 남주북병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다. 정말 그럴듯한 대답이다. 낙원동의 떡집이며 강남의 술집이며, 조금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서 남주북병의 유래를 제대로 살펴보자.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의 구별을 두었는데, 북촌에서는 떡을 손꼽았다고 하는 것은 북촌의 떡이 맛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북촌에는 떵떵거리는 양반이나 종로의 시전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떡을 쪄먹을 수가 있지만, 남촌에는 빈한한 선비들, 즉 남산골 샌님들이 살고 있어서 떡을 쪄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까 그저 술이나 빚어서 나물 한 접시를 안주 삼아 마셨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남산골 샌님이란 말은 남산에 살고 있는 샌님이란 뜻인데, 샌님이란 생원님의 준말이다. 남산골에는 벼슬을 못한 불우한 양반이나 과거에 떨어진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런 말이 생겨난 것이다. 남산골 샌님은 비록 불우하고 가난한 살림을 하고 있을망정 정신적으로는 선비로서의 고고한 기질이 살아 있어서 고을원을 낼 수는 없어도 원님의 목을 뗄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부정을 보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상소를 써내 고을원의 목을 날아가게 했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남산골 샌님이란 말은 그저 빈한하고 건달 같은 사람이라고 업신여기는 말이 아니라, 누더기를 입어도 뼈대만은 단단한 사람들을 일컬었던 것이다.
남주라고 하면 옛날에는 공덕동 소주가 유명했다. 지금의 공덕동은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선 번화가이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교외의 쓸쓸한 촌이었고, 산줄기를 타고 대가들의 별장이나 간혹 눈에 띌 정도였다. 일제 때에는 이곳에 화장터를 두었는데, 후에 공덕동이 서울 시내로 편입되면서 홍제동으로 옮겼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교외로 교외로 밀려났다. 공덕리라는 곳은 벌판에 가까운 동네인데, 황해도의 신계, 곡산, 안악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정착을 하고 공부를 하던 곳이다. 이들은 본래 빈한해서 생활할 방도가 막연했다. 그래서 이 선비들의 부인들이 모여 의논을 한 결과,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려면 여자들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공론들이 나왔다. 이에 부인네들은 고향에서 하는 식으로 소주를 고아서 팔면 생계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공덕리는 아예 소주촌이 되어버렸다. 공덕리에서는 소주뿐만 아니라 식초도 만들어 팔았는데, 공덕리에만 가면 소주 냄새와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서울에는 옛날부터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을 남촌이라고 했고 북쪽을 북촌이라고 했는데, 남촌에는 술이 좋았고 북쪽에는 떡이 좋았다는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남주북병에 대해 물어보면, 북촌에서도 대표적인 낙원동 근처에 가보면 모두 떡집이고, 남촌에서도 현대적으로 대표적인 동네인 강남에 가보면 모두 술집인데, 이것이 바로 남주북병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한다. 정말 그럴듯한 대답이다. 낙원동의 떡집이며 강남의 술집이며, 조금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서 남주북병의 유래를 제대로 살펴보자.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의 구별을 두었는데, 북촌에서는 떡을 손꼽았다고 하는 것은 북촌의 떡이 맛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북촌에는 떵떵거리는 양반이나 종로의 시전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떡을 쪄먹을 수가 있지만, 남촌에는 빈한한 선비들, 즉 남산골 샌님들이 살고 있어서 떡을 쪄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까 그저 술이나 빚어서 나물 한 접시를 안주 삼아 마셨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남산골 샌님이란 말은 남산에 살고 있는 샌님이란 뜻인데, 샌님이란 생원님의 준말이다. 남산골에는 벼슬을 못한 불우한 양반이나 과거에 떨어진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런 말이 생겨난 것이다. 남산골 샌님은 비록 불우하고 가난한 살림을 하고 있을망정 정신적으로는 선비로서의 고고한 기질이 살아 있어서 고을원을 낼 수는 없어도 원님의 목을 뗄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부정을 보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상소를 써내 고을원의 목을 날아가게 했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남산골 샌님이란 말은 그저 빈한하고 건달 같은 사람이라고 업신여기는 말이 아니라, 누더기를 입어도 뼈대만은 단단한 사람들을 일컬었던 것이다.
남주라고 하면 옛날에는 공덕동 소주가 유명했다. 지금의 공덕동은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선 번화가이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교외의 쓸쓸한 촌이었고, 산줄기를 타고 대가들의 별장이나 간혹 눈에 띌 정도였다. 일제 때에는 이곳에 화장터를 두었는데, 후에 공덕동이 서울 시내로 편입되면서 홍제동으로 옮겼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교외로 교외로 밀려났다. 공덕리라는 곳은 벌판에 가까운 동네인데, 황해도의 신계, 곡산, 안악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정착을 하고 공부를 하던 곳이다. 이들은 본래 빈한해서 생활할 방도가 막연했다. 그래서 이 선비들의 부인들이 모여 의논을 한 결과,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려면 여자들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공론들이 나왔다. 이에 부인네들은 고향에서 하는 식으로 소주를 고아서 팔면 생계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공덕리는 아예 소주촌이 되어버렸다. 공덕리에서는 소주뿐만 아니라 식초도 만들어 팔았는데, 공덕리에만 가면 소주 냄새와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옛날에는 비 오는 날 밤중에 혼자서 다리를 건너면 도깨비나 귀신이 홀린다고 했다. 청계천에는 수많은 다리가 있었는데 수표교와 같은 이름난 다리는 그렇지 않더라도, 삼각동 옆에 있던 굽은 다리라든가 관수교 같은 다리에는 어김없이 귀신이 나타나서 잘못하면 다리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는 수가 있다고 했다.
옛날에 한 시골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식이 없어서 치성을 드리던 중, 신령의 도움으로 산삼 한 뿌리를 캐먹고 아들을 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공부는 안하고 늘 활을 만들어서 사냥만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가산을 팔아서 활을 사주며 무관으로서 꼭 과거에 붙으라고 축수했다.
소년은 한양으로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서 어느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에 어여쁜 처녀가 있었다. 주인은 소년을 보니 영특하고 똑똑하게 생겨서 자기 딸과 결혼을 했으면 싶어 딸에게 소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