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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그 위선의 역사

커스틴 셀라스 지음 | 은행나무
인권, 그 위선의 역사

커스틴 셀라스 지음/오승훈 옮김

은행나무/2003년 5월/457쪽/14,000원



들어가는 말 - 신은 인간에게 인권을 주지 않았다

인권은 따지고 보면 겨우 18세기 계몽운동시대에 등장한 개념이다. 인간의 이성이 종교를 압도하기 시작하고,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면서 생겨난 사상인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유럽 근대사 교수인 린 헌트는 자신의 저서 『프랑스 혁명과 인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사상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 사회적 대변동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 인권 역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8세기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크게 볼 때 당시 대영제국 내부에서, 또 대영제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서 그리고 프랑스 내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정치적 갈등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혁명을 암시하는 이 새로운 철학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고,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함락 이후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인권선언’의 1조에 이 사상을 담았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지금껏 사람들은 신이 내린 사회적 신분체계를 통해 매겨진 지위로 인간을 정의해왔다. 그러나 인권이 선언되는 순간,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권리에 의해 인간을 정의하게 되었다. 인권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하지만 혁명의 열기는 곧 사그라들었고, 한 세기 반이 흐르는 동안 인권의 진보는 국가라는 장벽 안에서 더디게 이루어졌다. 인권을 세계 무대에 올라서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흔히 현대 인권운동은 나치 시대 죽음의 수용소가 몰고 온 공포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가 등장하기 이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사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파국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충격에 휩싸이면서 인권운동은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의 발호를 지켜보면서, 독재자들은 자국에 안주하지 않고 대외 군사침략을 감행할 빌미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권의 대의명분을 널리 알리는 것만이 평화를 회복하고, 안정을 파괴하는 정권의 출현을 막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 존엄이 세계평화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사이 각종 인권 제안서들은 두툼해지고, 인권단체들의 행보도 빨라졌다. 인권헌장도 제안되었다. 노동조합연합운동에서 미국법률연구소까지 다양한 단체가 이 대열에 섰다. 그리고 곧이어 이 인권운동에 정치적 비중이 묵직하게 실렸다. 1940년대 초반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바로 이 인권을 앞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에 참가하려다 의회 설득에 실패해 그 뜻이 좌절된 뒤, 워싱턴 정가에는 고립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전쟁에 개입해야만 국가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국제주의를 대중화시키는 방편으로 인권을 택했다. 그는 영국에 전쟁물자를 제공하자고 설득하면서 미국이 “인간의 기본적인 네 가지 자유, 즉 표현과 신앙의 자유, 궁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선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자유는 최고의 인권을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인권은 자유에 대한 사랑, 인간의 존엄성 등과 같이 미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애국심을 표현하는 데 사용해온 가치들과 교묘하게 결부되어 참전의 명분을 뒷받침하는 데 동원되었다. 또한 미국은 인류 역사에서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시에도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국제적 십자군을 자청해 힘과 이익을 모두 챙긴 첫 번째 나라였다.

워싱턴 정가는 이미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기 전부터 전쟁 이후를 대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을 지향하고, 지구촌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집단안보가 이들의 세운 원칙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한 해 앞둔 1943년, 루스벨트는 불안정한 동맹체제와 세력구도를 혁파하겠다는 야심 하에 “새로운 국제기구 건설”, 즉 국제연합에 대한 구상을 의회에 내놓았다.

루스벨트는 내심 유엔에서 개인의 권리 따위보다는 국가 차원의 업무를 다룰 생각이었다. 그가 구상한 유엔의 모습은 ‘전체주의 봉쇄정책’, 특히 소련을 겨냥한 견제의 원칙에 따라 구성된 열강들의 합의체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게는 ‘세계의 경찰’과 같은 권한이 주어졌고, 유엔 총회는 별 영향력 없는 친선회담장으로 마련되었으며, 그 산하에 난민, 건강, 교육, 문화, 농업 발전을 담당하는 전문기구를 거느리게 되었다. 세계 열강의 ‘철권’이 국제적 인도주의라는 ‘비단장갑’을 끼게 된 셈이었다.

1942년부터 관계 부처 관리들은 유엔 헌장과 함께 선언될 권리장전을 위해 수십 개의 제안서를 내놓았다. 권리장전의 초안을 작성하면서 담당자들은 고상한 단어들 뒤에 숨어 있는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들 조항이 가진 법적 구속력의 문제 그리고 그것과 국가주권 사이에 빚어지는 미묘한 갈등의 문제였다. 결국 1944년 국무부는 유엔 헌장에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권리장전을 추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새로운 조직에 인권선언을 제안하는 책임을 맡겼고, 그 결과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다.

미국은 인권 문제가 국제적 의제로서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1944년 덤바턴 오크스 회의를 거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그해 4월 25일에서 6월 26일까지 한 달여 동안 연합국 50개국 대표가 참석해 덤바턴 오크스 회의에서 합의된 유엔 헌장 초안을 분과별로 심의하고 최종 유엔 헌장을 채택한 회의)에 회원국들이 유엔 헌장에 서명하기 위해 모였을 때 미 국무부는 다시 한번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다. 그곳에서 인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후 몇 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인권 분야에는 뚜렷한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권은 다른 이상들이 고갈되거나 영향력을 상실했을 때에만 등장했다. 특히 우리 시대의 또다른 서구 이데올로기인 반공산주의가 시들해질 때면 항상 인권이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데탕트 시기에 다시 힘을 얻은 인권은 현재의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

인권정책은 치열한 정치논쟁의 주제이지만 인권의 이상만큼은 신성불가침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인권은 흔히 추상적인 도덕성의 차원에서 논의되지만 다른 정책들과 마찬가지로 정치라는 토대에 발을 딛고 있으며, 똑같은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정부는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인도주의 정책을 선보이고, 다른 나라의 인권탄압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그 정부도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과 똑같은 행위를 저지르고 인권을 무시한다. 이 책은 인권을 정치적인 문제로 본다. 여기에는 국제선언, 전쟁범죄와 재판, 대중운동과 비밀스런 외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국, 히로시마 그리고 도쿄 전범재판 - 천황 폐하께서는 무고하십니다!

1946년 일본의 침략과 전쟁범죄 그리고 비인도적 범죄를 처벌하기 전에 극동국제군사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법정의 설치강령, 임명권, 기소권은 모두 미국의 손에 있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점령군 사령부가 관장했다. 판사들은 모두 정치적 배려에 따라 그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었다.

도쿄 재판(일본 전범을 다룬 재판)도 뉘른베르크 재판(정식 명칭은 국제군사재판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전범을 소추, 처벌하기 위해 세운 법정이다)처럼 전쟁범죄보다 침략행위를 처벌하는 데 더 골몰했다. 법정 공방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와 영토를 둘러싼 추악한 전쟁은 일본의 야만에 대항한 위대한 투쟁으로 탈바꿈했다. 그로 인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와 같이 논쟁이 분분한 사건들도 국제적인 범죄에 항거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소추위원회가 침략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연합국은 ‘반평화 범죄’라는 것이 국제법상의 근거가 미약하고 법조계에서도 이를 입증하는 데 회의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동안 변호인단은 일본의 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확산 야욕에 대항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뿐이라며 침략 혐의를 부인하여 애썼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시기상 모순이 있었다.

‘반평화’ 죄목은 도쿄 법정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는 ‘침략전쟁’을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지구촌을 1940년대 후반의 ‘현 상태(status quo)’대로 굳히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다시 말해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재판 헌장에 입각할 경우, 당시 아시아의 화두였던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은 금지된 것이었다. 전쟁 또는 이른바 ‘무력을 통한 자위’가 금지되었고, 식민지들은 순순히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식민지 문제는 재판소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연합국은 한편에서는 침략적인 외교정책을 들어 일본을 소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들을 무례하게 팔꿈치로 밀어제치며 이미 체결되어 있던 식민지 협약을 멋대로 어기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적 발상은 재판부와 소추위원회를 구성하는 데도 반영되어 일본을 고소하기 위해 나선 당사자는 중국과 필리핀을 제외하면 식민지였던 나라들이거나 그들과 싸웠던 나라들도 아니었다. 그 대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때문에 지배권을 방해를 받았던 식민지 열강(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이 도쿄 재판소에 나타나 잘못을 꾸짖고 있었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침략 행위’에 대한 소추가 제기될 당시는 바로 기소를 담당한 열강이 옛 식민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유럽인들이 일본의 철수를 도우면서 다시 지배권을 획득했다. 패권의 배턴이 넘겨진 것이다.

또한 도쿄 재판은 법정에 선 전범들의 면면만큼이나 끝까지 소환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의혹으로 유명한 재판이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수상쩍은 사람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이었다. 각료 중 일곱 명이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는 한번도 소환을 당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히로히토가 명목상의 왕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일왕은 전시정책에 대해서만 개입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외교정책의 실행을 최종적으로 지시했고, 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고관을 가차없이 낙마시켰다.

대부분의 연합국들은 히로히토가 일본의 전쟁에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미국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진주만과 여러 지역의 공격을 승인해주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서방 언론은 좀더 비판적인 논조를 띠기 시작했고, 서방 정부들은 쏟아지는 비난을 그저 묵묵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도쿄 재판이 새롭게 증명한 것이 있다면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의 정치적 사욕과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교수대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약탈행위들 역시 재판과정에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731부대의 세균전 의학실험에 대한 논의 역시 곧 중지되었다. 미국이 이 사건에 연루된 일본 관리들과 사면의 대가로 연구자료를 제공받기로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열한 명의 판사는 전쟁유죄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편이 갈렸다. 그리고 재판장의 교체, 무능력한 검사의 존재, 변호인단이 재판을 준비하는 데 제한된 여건, 모호한 법정 규칙 등의 문제들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짐에 따라 여론은, 특히 미국의 여론은 재판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될 것이 뻔했다. “결국 시간은 피고 편에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방을 질질 끌어서 형량을 낮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1948년 11월 12일, 2년 6개월을 끌고 4만 8,412면에 달하는 증언기록을 남긴 채 재판은 종결되었다. 법정은 일본 수장들의 전쟁범죄와 침략전쟁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일곱 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열여섯 명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무죄로 석방된 피고는 아무도 없었다. 판사들은 일본에게 전쟁의 죄를 묻는 문제에 대해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재판부는 처형방법을 놓고도 의견이 갈렸다가 결국 총살 대신 교수형으로 정리되었다.

1948년 12월, 인권이라는 거대한 기획의 양쪽 바퀴 - 평화를 건설하는 것과 옛 죄를 씻는 것 - 가 동시에 함께 역사적인 한 발을 내디뎠다. 세계인권선언이 같은 달인 12월 10일 파리에서 채택되었고, 일본 전범 일곱 명이 12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쿄 재판은 흔히 ‘실패한 뉘르베르크’로 일컬어진다. 이 재판이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승자의 정의를 위해 봉사했거나 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상황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연합국의 단결력이 겉보기에 아직 완전했을 때 열렸지만 도쿄는 그것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각국이 독립을 회복한 서구 유럽에서 열렸고, 도쿄는 아직도 각국이 자유를 부르짖고 있던 아시아에서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소추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새로운 갈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민지와 인권 - 앰네스티, 그 대영제국의 애국자들

1953년 영국 정부가 유럽 인권협약을 식민지에서도 확대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좌익 진영의 영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스」는 긴급조치법에 의해 인권을 제한당하고 있는 식민지에다 주민들의 청원권이 거부되는 인권협약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완벽한 위선이라고 비난했다.

1953년 반식민주의 정서는 절정에 달했고 영국은 급한 대로 조정에 나섰다. 인권협약을 모든 식민지에 확대함으로써 제3세계의 비난을 누그러뜨리고, 국내에서의 정치적 신뢰도 회복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협약의 비준 과정에서 추가된 예외조항에 따르면 ‘대영제국 백성들’은 유럽 인권위원회에 청원할 권리도 없었으며, 유럽 법정에 불만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협약은 두 가지 면피책이 있었다. 협약 15조는 “전시 또는 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공의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협약을 무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63조 3항은 가맹국들이 식민지 영토 내에서 “지역의 요구에 반해” 행동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 정부는 몇몇 억압적인 식민지 법률을 개정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협약에 부합하도록 거친 부분만 다듬으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영국의 이런 확신을 키프로스가 무너뜨렸다. 1950년대 영국의 중동 정책에서 핵심적인 요충지였던 키프로스가 독립을 시도한 것이다. 1954년 그리스-키프로스 통일운동 에노시스(그리스 복귀 운동)를 위해 창설된 EOKA(키프로스 전투병 국민 조직)는 키프로스 섬의 영국 군대와 게릴라전을 벌인 후 영국 식민당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1955년 영국 정부는 키프로스의 새로운 총독을 임명하고, 긴급사태를 선포했다. 이곳을 찾았던 젊은 영국인 변호사 피터 베넨슨(국제사면위원회의 창립자)은 기본적인 법 절차조차 무시된 채 체포와 투옥이 횡행하는 현실에 치를 떨었다.

그리스는 인권 문제를 앞세우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에노시스 운동을 전개했다. 1956년 아테네 정부는 영국 총독부가 집단처벌 부과, 불법적인 추방과 투옥, 아이들에 대한 태형 등을 자행해 유럽 협약을 위반했다며 스트라스부르 유럽 인권위원회에 제소했다. 이에 영국 식민 당국은 키프로스인에 대한 야만행위는 극히 예외에 불과하며, 그들의 군대에서 그런 ‘인간 쓰레기’가 발견되면 즉시 처벌된다며 완강하게 맞섰다. 1957년 7월 그리스는 유럽 인권위원회에 영국을 두 번째로 제소했다. 이번에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은 영국의 고문행위였다. 이에 대해 외무부는 그리스가 에노시스를 위해 잔학 행위 사례들을 조작했다며 맞고소를 제기했다. 결국 영국이 조사를 받아들이는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는 영국에 대한 기소를 취하했다. 조사 소위원회의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았고, 영국은 이것이 책으로 발간되는 상황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유럽 협약 확대 방안을 철회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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