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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다큐인포 지음 | 북이즈
1. 건축



총독부와 경복궁



비로소 뽑힌 거대한 말뚝




1995년 8월 15일, 구(舊)총독부 건물의 첨탑이 근 70년 만에 잘려 내려왔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화려한 경축행사와 함께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 건물은 완공 후 20년 간 식민지 조선의 총독부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 청사로 사용되었다. 1945년 9월 9일에는 일제 항복문서 전달식이 열리기도 했다. 군정이 끝나자 과도 입법회의가 사용하더니, 제1공화국 때는 정부 청사로 쓰이면서 제헌국회 개회식, 초대 대통령 취임식, 9·28 서울 수복 등 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했다. 6·25전쟁 때는 대파되어 '유령의 집'으로 불릴 정도였으나, 완전 복구되어 5·16쿠데타 이후에는 정부 청사로 활용되며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 건물은 유서 깊은 우리 민족의 심장부인 경복궁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들어섰다. 일제는 먼저 광화문과 홍례문을 밀어내고 담을 허물었으며 강령전, 교태전 등 크고 작은 전각 4백여 칸을 뭉개었는데 이는 경복궁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달한다.

풍수로 볼 때, 총독부 자리는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입에 해당한다. 총독 관저의 자리는 사람의 목 부분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지음으로써 조선 정궁(正宮)의 파괴는 물론 풍수의 관점에서 조선의 숨통을 조이고, 입을 막아버리려 한 것이다. 일제가 우리 풍수사상을 교란하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으로 치면 가장 크고 고약한 쇠말뚝인 셈이다. 총독부를 '日'자 형태로 지어서 '大'자 형상인 북한산과 '木'자 모양으로 지은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와 아울러 '大日本'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영구 통치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경복궁에 들어서면 유난히 주위의 건물과 부조화를 이루는 민속박물관이 서 있다. 그 민속박물관을 오른쪽에 두고서 계속 가다보면 구박물관이 나온다. 그 오른쪽 구석에 '명성황후 조난비'와 '순국숭모비', 그리고 사당이 단촐하게 세워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시신이 불태워진 자리에 표식이라도 하나 세우지 못할망정 공중화장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경회루 뒤편 그늘진 이곳에 우리의 아픈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총독부 철거로 민족의 숨통이 트이다



일본의 잔혹성은 총독부 지하 공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두께 14cm의 철판 문이 있는 방이 네 개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일제 고문 감금 시절의 형태다. 지하실에서 중앙 홀로 올라오면 벽화가 두 점 있다. 그림의 내용은 표면적으로 한국의 '나무꾼과 선녀'와 유사한 '하고모도' 전설을 서양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내선일체의 내용을 담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총독부 철거는 한국의 극일 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는 "총독부 철거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복수다."라고 보도했다.

뒷 이야기



경복궁 복원공사가 한창이던 1995년 12월에는 부산에서 일제의 비밀 도면이 발견되었다. 이 도면에는 총독부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공간 활용 방안도 담겨 있었다. 그들은 경복궁의 건물들을 헐고 그 자리에 음악당, 분수대, 총독관저, 화단 등을 만들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다. 경복궁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철거 당시 총독부 건물의 지하에서 일제가 박아놓은 나무 말뚝 9,388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1995∼96년 정부가 경복궁 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일제 때 총독부 건물의 지반 다짐용으로 궁궐 터에 박아넣은 대형 말뚝 수천 여 개를 뽑아내지 않은 채 홍례문과 주변 행각을 복원한 사실이 드러났다.(2002년 10월 4일)"고 한다.

서울시청, 구 대법원, 서울시의회 건물의 내력



일제 침탈의 상징, 서울시청사




현 서울시청사는 일제가 1926년 경성부청사로 지은 건물이다. 하필 덕수궁 대한문 맞은 편에 버티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로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조선 왕조의 기를 끊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기와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부린 술수였다. "덕수궁은 1897년부터 고종이 사망한 1919년까지 22년 간 고종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했던 시위가 대한문 광장에서 있은 후,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들의 숭왕 의식과 독립 의식의 발원지로 상징되는 이곳의 기(氣)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이 폭넓게 번졌다." 서울시청사는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셈이다. 일제가 지은 현재의 시청사는 6백년 고도(古都)의 심장부로는 걸맞지 않다.

일제 치안유지법의 산실, 구 대법원



구 대법원은 시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어느덧 색이 바랜 이 본관 건물은 언뜻 보기에도 왜색풍으로 지어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법원 터에는 1895년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었는데, 평리원은 공평동 부근에 신축 건물을 세우고 이전했다. 옛 평리원 건물은 조선총독부 조사국 분실로 사용되었다. 1919년 4월에 일제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이라는 법을 제정, 공포하고 일제의 치안을 위협하는 우국지사들을 대량 체포, 구금하기 시작했다. 이에 공평동의 한성재판소로는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어 신청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그래서 1926년 6월 정동 옛 평리원 터에 이른바 '경성3재판소'를 세우기로 하고, 재판소는 일본인의 설계에 의하여 1927년 착공되었다."

법원 청사는 일제 치하 당시의 대법원 격인 조선고등법원과 경성복심법원 청사로 출발하여, 8·15 광복 후 대법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사법부의 총본산인 대법원이 일제 잔재 건물을 쓰고 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자, 서초동에 새 청사를 마련하여 이전하게 되었다. 1925년 경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일제는 기존에 있던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는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더욱 더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한 치안유지법은 구 대법원 청사(당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시행되었던 대표적 악법이었다. 일제가 자기들의 손으로 지어 제멋대로 우리 민족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판결을 내리던 억울한 역사, 그 역사를 담고 뻔뻔스럽게 서 있는 건물을 철거하거나 이전한다고 해서 그 치욕의 역사가 청산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일제 식민 문화의 홍보 창구,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



시청 맞은 편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은 일제가 문화적·경제적 측면에서 갖은 약탈을 자행하고 막대한 부(富)를 독점하던 1930년대 명목상 민(民)을 위한 관(館)을 세우기로 계획하면서부터이다. 원래는 조선시대 초부터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그 오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부민관(府民館)을 세운 것이다.

부민관은 주로 공연장으로 식민 문화의 홍보 창구로 많이 쓰였는데, 일제 말기 변절한 친일파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모윤숙을 들 수 있다. 1941년 12월 27일, 모윤숙은 부민관에서 개최한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은 전사다'라는 연설로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자임했다. 8·15광복이 되면서 정부는 이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친일파가 대거 국회의원으로 재등장한 국회의 근거지로 쓰기에는 적격(?)이었을 것이다. 이 건물에서 초대 대통령까지 선출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필 일제가 조선 지배의 목적으로 지은 건물에서 우리의 국회가 발족하고, 그 흐름을 끊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서울시의회가 간판을 내걸어야만 하는 것인가?

2. 산하



대전(大田)과 태전(太田)의 거리




우리에게 한밭(太田)을 대전(大田)이라 부르고 표기하도록 강요한 이는 바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다. 역사학과 풍수 등 동양학에 능했던 그가 한밭(太田) 주위의 산천 경계에 흐르는 상서롭고 강렬한 지기를 꺾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태전지명찾기 운동본부'를 찾아갔다. "예부터 이곳은 한밭, 콩밭이라고 불렀어요. 우리말의 '한'은 크다는 뜻 외에도 밝다, 동쪽이다, 중심이다, 하나다, 통일하다, 희다, 처음이다, 으뜸이다, 높다, 하늘, 임금 등 20여 가지 이상의 뜻이 있죠.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한'이라는 말을 '대'라는 글자로 번역하여 대전(大田)으로 쓰면 그저 작은 밭이 아닌 큰 밭 정도의 의미밖에 나타내지 못해요. 먼저 '태'자는 창조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시작한다(太組, 太始)의 뜻이 있으며, 성장이 정지된 대(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至尊)하다는 의미(太皇帝, 太上皇)도 담고 있죠. 또한 유독 우리 나라에서는 특이하게 '태'자를 '콩[豆]'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데, '태'자가 갖고 있는 '가장 크다'는 근본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1904년 경 이토가 태전을 대전으로 고치라고 명하기 전까지 정부 문서나 신문 등에서는 태전으로 쓰고 있어요."

지명은 그 땅의 역사이자 혼이다



국토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 위계질서를 부여하여 지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낙남정맥(洛南正脈) 등의 전통적인 산줄기 체계인 산경표를 없애버리고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산맥도로 고치는 등 우리 민족의 정신이 깃든 것이면 손대지 않은 것이 없다. '태전'을 '대전'으로 개악한 경우는 지극히 작은 예일 뿐이다. 논산군에 있는 봉동(鳳洞)을 조동(鳥洞)으로 고친 것, 인왕산(仁王山)의 왕(王)자에 일본(日本)의 일(日)자를 더하여 인왕산(仁旺山)으로,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將軍峰)을 자기네 연호인 대정봉(大正峰)으로 고쳐 부르는 등 곳곳에 마수를 뻗쳐 그 잔재가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지명은 곧 그 땅의 역사요, 혼이다.

중부의 수도, 태전의 역사



중부의 수도 태전이 도시가 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서울과 한반도 남쪽을 연결하는 경부선이 1905년에 개통되자 태전은 도시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이후 1913년, 호남선까지 태전을 지나게 되면서 명실공히 철도가 낳은 신흥 도시로 발전한다. 일제는 한만(韓滿) 간의 철도 연락을 통해 만주의 광물, 압록강 목재 등을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에서 생산된 공업 제품을 다시 식민지 전역에 팔아넘겼다. 이때 일본 거류민이 날로 급증하였으며, 1935년에는 오늘날의 시에 해당하는 대전부(大田府)로 승격했다.

충남도청 1, 2층을 구분 짓는 돌출된 처마마다 조선총독부 '휘장'이라는 오동나무 꽃 모양의 무늬가 보인다. 이 무늬를 자세히 뜯어보면 가운데는 일장기의 태양 같은 큰 원이 있고, 그 둘레를 16개의 작은 원이 감싸고 있는데 그 바깥으로 8장의 꽃잎이 펼쳐져 있다. 청사 외벽뿐만 아니라 청사 내부의 현관과 천장, 심지어 도지사 집무실과 도지사실 출입문에까지 부착돼있어 마치 충남도청의 상징물처럼 보인다. 철거하자는 지역 여론에 밀려 지난 1981년 공보관실 옆에 있는 외벽의 무늬 하나를 시험적으로 철거해보았으나, 외벽의 무늬는 안쪽에 굵은 쇠못으로 벽면에 고정되어 있어 분리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철거를 포기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뒷 이야기



충남도청은 지난 2002년 5월 31일 문화재 보호법 제2장 42조(2001년 3월 신설법인)에 의거,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됐다. 지정 사유는 '일제강점기 권위적 성격의 청사 건물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등록문화재가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해당 건축물의 이전이나 멸실 등이 금지조항이 아니라 권고조항이라는 부연 설명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고발 없이 건축사에 의의가 있다고 보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태전 지명찾기는 1992년부터 실시한 100만 인 서명운동의 자료와 그 동안의 태전지명찾기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한 상태지만 의제 상정이 안 돼 운동 자체가 보류상태라고 한다.

일제의 풍수 침략 - 백두대간의 수난



민족정기를 끊기 위한 음흉한 비수




백두산에서 힘차게 뻗어 남으로 내려오는 큰 맥은 두류산에서 서쪽으로 꺾이고, 낭림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돌아내려와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달리다가 속리산에 이르러 또다시 남하하여 지리산에 닿는다. 이것이 백두대간(白頭大幹), 우리나라의 등뼈이다. 이 등뼈에서 금강산과 속리산 사이의 모든 물이 모인 강을 이름하여 '한강'이라 한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의 물줄기가 합쳐진 남한강은 양수리에서 만나 북한산과 관악산을 끼고 서울 한복판으로 유유히 흐른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풍수가 훌륭해 인걸이 많이 나고, 천하의 명당이 많은 땅이라고 알려져 왔다. 따라서 이웃 나라의 질투도 심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진산과 고궁 등에 얼마나 치밀하게 풍수 침해를 가했는지는 무수한 자료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지금은 풍수라는 것을 구시대의 유물이나 미신 정도로 치부하고 있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우리 민중에게는 신앙 같은 역할을 했으므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쇠말뚝 철거 활동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은 1984년, 서울의 백운대 정상과 노적봉에서 일제가 서울로 흐르는 정기를 차단하고자 박은 쇠말뚝 27개를 모두 뽑아냈다. 1985년부터 거의 해마다 전국 명산에서 민족대혼제(民族大魂祭)를 지내는 등 민족혼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온 이 모임은, 총독부 건물 철거를 강력히 주장한 단체이기도 하다. 이 쇠말뚝은 우리나라 산의 정기를 끊어놓았다는 심리적 암시를 주기 때문에 뽑아내는 것이 옳다.

풍수 침략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모임을 찾았다. "제국주의 국가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할 때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바로 정신적· 문화적 전통과 유산이죠. 그 다음으로는 첫째, 자국의 언어 사용을 강요합니다. 둘째, 역사적 자료를 없애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셋째, 전통적 풍습이나 민간신앙을 통해서 패배감을 심어나갑니다. 말과 글을 없애고 역사를 없애는 작업이 그 나라 상층부나 지식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일반 민중에게 폭넓게 또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습이나 민간신앙이죠. 그래서 일제가 조상을 명당에 묻으려는 묘지풍수사상을 비롯한 풍수지리학을 이용하여 패배의식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 풍수 침략으로 나타난 거예요." 여러 각도에서 검토해본 결과 일제가 산의 정기를 끊으려 한 목적에서 한 짓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여 뽑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가설은 귀한 증인을 만나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사탑



옥천 죽향초등학교에 남아 있던 '황국신민서사탑'




충북 옥천의 죽향초등학교에서 '일왕에 대한 충성을 새긴 돌무더기'가 발견되었다. 문제의 '통일탑'은 원래 '황국신민서사탑'이었는데, 황국신민서사를 깎아내고 '통일탑'이란 글자를 새겨넣은 것이다. 광복 이후 전국에 걸쳐 신사나 탑들이 민중의 손에 의해 철거되거나 파괴되었는데, 이곳 죽향초등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당시 철거했더라면 탑 밑에 있는 돌을 발견했을 것이며, 뒤늦게 부끄러운 상처가 발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절의 고장에 가해진 일제 침탈



옥천은 1919년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한 운동 지역의 하나였다. 의병과 역사의 고장, 충절의 고장에서 일제는 민족 정기 말살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곳 옥천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옥천초등학교에 세운 황국신민서사탑(통일탑)이 바로 그것이다. '황국신민서사'를 새긴 돌을 비롯해서 '충성', '충의', '내선일체', '천황폐하 만세' 등의 글귀가 적힌 돌들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쌓은 돌무더기는 무려 2백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발굴 당시 "학교 정경을 훼손하면서까지 묻혀 있는 과거를 굳이 파낼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로 학교 측과 마찰도 있었다. 어쨌든 일본의 잔학상이 폭로되었으며, 이는 역사교육적 차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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