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다큐인포 지음 | 북이즈
일본의 잔혹성은 총독부 지하 공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두께 14cm의 철판 문이 있는 방이 네 개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일제 고문 감금 시절의 형태다. 지하실에서 중앙 홀로 올라오면 벽화가 두 점 있다. 그림의 내용은 표면적으로 한국의 '나무꾼과 선녀'와 유사한 '하고모도' 전설을 서양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내선일체의 내용을 담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총독부 철거는 한국의 극일 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는 "총독부 철거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복수다."라고 보도했다.경복궁 복원공사가 한창이던 1995년 12월에는 부산에서 일제의 비밀 도면이 발견되었다. 이 도면에는 총독부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공간 활용 방안도 담겨 있었다. 그들은 경복궁의 건물들을 헐고 그 자리에 음악당, 분수대, 총독관저, 화단 등을 만들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다. 경복궁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철거 당시 총독부 건물의 지하에서 일제가 박아놓은 나무 말뚝 9,388개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1995∼96년 정부가 경복궁 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일제 때 총독부 건물의 지반 다짐용으로 궁궐 터에 박아넣은 대형 말뚝 수천 여 개를 뽑아내지 않은 채 홍례문과 주변 행각을 복원한 사실이 드러났다.(2002년 10월 4일)"고 한다.현 서울시청사는 일제가 1926년 경성부청사로 지은 건물이다. 하필 덕수궁 대한문 맞은 편에 버티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로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조선 왕조의 기를 끊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기와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부린 술수였다. "덕수궁은 1897년부터 고종이 사망한 1919년까지 22년 간 고종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했던 시위가 대한문 광장에서 있은 후,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조선인들의 숭왕 의식과 독립 의식의 발원지로 상징되는 이곳의 기(氣)를 눌러야 한다는 생각이 폭넓게 번졌다." 서울시청사는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셈이다. 일제가 지은 현재의 시청사는 6백년 고도(古都)의 심장부로는 걸맞지 않다.1995년 8월 15일, 구(舊)총독부 건물의 첨탑이 근 70년 만에 잘려 내려왔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화려한 경축행사와 함께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 건물은 완공 후 20년 간 식민지 조선의 총독부로 사용되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 청사로 사용되었다. 1945년 9월 9일에는 일제 항복문서 전달식이 열리기도 했다. 군정이 끝나자 과도 입법회의가 사용하더니, 제1공화국 때는 정부 청사로 쓰이면서 제헌국회 개회식, 초대 대통령 취임식, 9·28 서울 수복 등 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했다. 6·25전쟁 때는 대파되어 '유령의 집'으로 불릴 정도였으나, 완전 복구되어 5·16쿠데타 이후에는 정부 청사로 활용되며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 건물은 유서 깊은 우리 민족의 심장부인 경복궁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들어섰다. 일제는 먼저 광화문과 홍례문을 밀어내고 담을 허물었으며 강령전, 교태전 등 크고 작은 전각 4백여 칸을 뭉개었는데 이는 경복궁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달한다.
풍수로 볼 때, 총독부 자리는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입에 해당한다. 총독 관저의 자리는 사람의 목 부분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총독부와 총독 관저를 지음으로써 조선 정궁(正宮)의 파괴는 물론 풍수의 관점에서 조선의 숨통을 조이고, 입을 막아버리려 한 것이다. 일제가 우리 풍수사상을 교란하기 위해 박았다는 쇠말뚝으로 치면 가장 크고 고약한 쇠말뚝인 셈이다. 총독부를 '日'자 형태로 지어서 '大'자 형상인 북한산과 '木'자 모양으로 지은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와 아울러 '大日本'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영구 통치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경복궁에 들어서면 유난히 주위의 건물과 부조화를 이루는 민속박물관이 서 있다. 그 민속박물관을 오른쪽에 두고서 계속 가다보면 구박물관이 나온다. 그 오른쪽 구석에 '명성황후 조난비'와 '순국숭모비', 그리고 사당이 단촐하게 세워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시신이 불태워진 자리에 표식이라도 하나 세우지 못할망정 공중화장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경회루 뒤편 그늘진 이곳에 우리의 아픈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구 대법원은 시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어느덧 색이 바랜 이 본관 건물은 언뜻 보기에도 왜색풍으로 지어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법원 터에는 1895년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었는데, 평리원은 공평동 부근에 신축 건물을 세우고 이전했다. 옛 평리원 건물은 조선총독부 조사국 분실로 사용되었다. 1919년 4월에 일제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이라는 법을 제정, 공포하고 일제의 치안을 위협하는 우국지사들을 대량 체포, 구금하기 시작했다. 이에 공평동의 한성재판소로는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어 신청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그래서 1926년 6월 정동 옛 평리원 터에 이른바 '경성3재판소'를 세우기로 하고, 재판소는 일본인의 설계에 의하여 1927년 착공되었다."
법원 청사는 일제 치하 당시의 대법원 격인 조선고등법원과 경성복심법원 청사로 출발하여, 8·15 광복 후 대법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사법부의 총본산인 대법원이 일제 잔재 건물을 쓰고 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자, 서초동에 새 청사를 마련하여 이전하게 되었다. 1925년 경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일제는 기존에 있던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는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더욱 더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한 치안유지법은 구 대법원 청사(당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시행되었던 대표적 악법이었다. 일제가 자기들의 손으로 지어 제멋대로 우리 민족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판결을 내리던 억울한 역사, 그 역사를 담고 뻔뻔스럽게 서 있는 건물을 철거하거나 이전한다고 해서 그 치욕의 역사가 청산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시청 맞은 편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은 일제가 문화적·경제적 측면에서 갖은 약탈을 자행하고 막대한 부(富)를 독점하던 1930년대 명목상 민(民)을 위한 관(館)을 세우기로 계획하면서부터이다. 원래는 조선시대 초부터 흥천사(興天寺)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그 오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부민관(府民館)을 세운 것이다.
부민관은 주로 공연장으로 식민 문화의 홍보 창구로 많이 쓰였는데, 일제 말기 변절한 친일파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모윤숙을 들 수 있다. 1941년 12월 27일, 모윤숙은 부민관에서 개최한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은 전사다'라는 연설로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자임했다. 8·15광복이 되면서 정부는 이 건물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친일파가 대거 국회의원으로 재등장한 국회의 근거지로 쓰기에는 적격(?)이었을 것이다. 이 건물에서 초대 대통령까지 선출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그 용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가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필 일제가 조선 지배의 목적으로 지은 건물에서 우리의 국회가 발족하고, 그 흐름을 끊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서울시의회가 간판을 내걸어야만 하는 것인가?우리에게 한밭(太田)을 대전(大田)이라 부르고 표기하도록 강요한 이는 바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다. 역사학과 풍수 등 동양학에 능했던 그가 한밭(太田) 주위의 산천 경계에 흐르는 상서롭고 강렬한 지기를 꺾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태전지명찾기 운동본부'를 찾아갔다. "예부터 이곳은 한밭, 콩밭이라고 불렀어요. 우리말의 '한'은 크다는 뜻 외에도 밝다, 동쪽이다, 중심이다, 하나다, 통일하다, 희다, 처음이다, 으뜸이다, 높다, 하늘, 임금 등 20여 가지 이상의 뜻이 있죠.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한'이라는 말을 '대'라는 글자로 번역하여 대전(大田)으로 쓰면 그저 작은 밭이 아닌 큰 밭 정도의 의미밖에 나타내지 못해요. 먼저 '태'자는 창조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시작한다(太組, 太始)의 뜻이 있으며, 성장이 정지된 대(大)와는 달리 무한히 커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더 이상 클 수 없는 가장 크고 지존(至尊)하다는 의미(太皇帝, 太上皇)도 담고 있죠. 또한 유독 우리 나라에서는 특이하게 '태'자를 '콩[豆]'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데, '태'자가 갖고 있는 '가장 크다'는 근본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1904년 경 이토가 태전을 대전으로 고치라고 명하기 전까지 정부 문서나 신문 등에서는 태전으로 쓰고 있어요."국토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 위계질서를 부여하여 지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낙남정맥(洛南正脈) 등의 전통적인 산줄기 체계인 산경표를 없애버리고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산맥도로 고치는 등 우리 민족의 정신이 깃든 것이면 손대지 않은 것이 없다. '태전'을 '대전'으로 개악한 경우는 지극히 작은 예일 뿐이다. 논산군에 있는 봉동(鳳洞)을 조동(鳥洞)으로 고친 것, 인왕산(仁王山)의 왕(王)자에 일본(日本)의 일(日)자를 더하여 인왕산(仁旺山)으로,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將軍峰)을 자기네 연호인 대정봉(大正峰)으로 고쳐 부르는 등 곳곳에 마수를 뻗쳐 그 잔재가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지명은 곧 그 땅의 역사요, 혼이다.일제의 풍수 침략 - 백두대간의 수난
민족정기를 끊기 위한 음흉한 비수박중양. 대구를 중심으로 온갖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았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까지 일컬어지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사람이었다. 대구는 일제 침략기에 항일 저항운동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 때에도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지로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던 곳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대구는 1995년 광역시로 승격, 우리나라 3대 도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중양과 같은 역사적 죄인의 유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침산공원 오봉산 제1봉 정상에 남아 있다는 박종양의 비석, 일소대(一笑臺), 침산공원은 도시 근린공원으로 개발돼 묘소들은 행정 당국으로부터 이전 명령을 받아 이장을 했지만, 유독 박중양의 기념비와 그의 부모 묘소만은 남아 있다고 한다. 비석은 1943년 박중양이 자신의 풍운아다운 기개를 상징하여 세웠다고 한다. 일소대비는 보수한 흔적이 역력했는데, 마치 공원 전체를 박중양의 기념공원으로 꾸며놓은 것 같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경북 달성 출생. 조선총독부의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으며 이토의 양자였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바 없다. 그는 청일전쟁을 전후해 1897년 일본에 건너갔다. 1904년 조선에 귀국, 러일전쟁에 일본의 고등 통역관 대우로 참전하였다. 일본의 승리 후에 대구로 내려간 것은 만일의 경우 도쿄로 도주하기 편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한 회유 강연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제단을 만들어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다.
박중양의 비뚤어진 국가관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있으니, 일기 형식의 글인 『술회』(述懷), 전 335족, 필사본)가 바로 그것이다.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쓴 것으로 시국에 대한 감상과 회고 등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쉽되, 국가 위급 존망할 때의 당면한 책임자가 선처하는 것이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이 청국의 예속을 면하고 독립이 조선인의 실력이 아니고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결과 일본의 힘으로 독립한 것이다. 금일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이등박문은 세계적 위인이다. 나는 이등 공을 표본으로 하고 조선 중흥을 이상하였다. 일본, 조선, 만주를 혼성일체 통합하여 강대국을 조직하고 평화를 보존하게 되면 동양의 대행(大幸)이요…."
그가 독자적으로 대구의 성곽을 허물고 일본인들에게 상권을 넘겨주자, 일본인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부르며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박중양의 과거사를 볼 때 그를 기념할 만한 일은 친일파의 거두였다는 것밖에 없다. 1996년 '일소대철거위원회'가 결성되어 대구시에 일소대의 철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시에서는 공원 조성시 일소대를 보존해주는 조건으로 부지를 매입하였던 탓에 그럴 수 없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이에 시민단체는 박중양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일소대 앞에 세우게 되었고, 1996년 10월 11일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져 박중양 후손들이 일소대를 자진 철거했다고 한다. 시민들은 그 자리에 '국채보상운동 기념탑'을 건립하려 했으나, 침산공원 중 일부는 아직도 박중양 후손의 사유지인 까닭에 성사되지 못했다. 청산은 되었으되 결코 청산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1993년 12월 13일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꼭대기에서 전국농학계대학 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 18명이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쌀 개방 반대 시위를 벌였다. 열강의 침략 야욕에 맞서 자주, 민권, 자강의 의지를 다지며 세운 주권 수호의 상징인 독립문에서 시위를 벌임으로써, 그들의 의지를 좀 더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이려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독립문이 오히려 부끄러운 문화유산이라면, 그들은 엉뚱한 곳에 힘들여 올라가서 주장을 한 것이 된다.
방곡령 사건은 오늘의 쌀 수입 개방 문제를 비춰보는 거울이 된다. 방곡령은 1889년, 이 땅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행한 곡물의 해외 수출 금지령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게 개항한 이래 일본 상인들은 우리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방법으로 쌀, 콩 등을 매점하여 제 나라로 보냈다. 그 바람에 이 땅의 식량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곡물 수출항인 원산을 관장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8년 9월, 원산항을 통해 해외로 유출되는 곡식의 수출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린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는 분규가 일어나게 되고, 조병식 선생은 결국 강원도 관찰사로 전출을 가게 되었으며,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방곡령 문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자주독립의 상징 독립문과 관련된「독립신문」은 방곡령과 조병식 선생을 비난하는 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독립'의 의미는 청나라로부터 독립, 일본에 붙자는 속뜻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12월 15일자 「독립신문」을 들춰본다. 극심한 가뭄으로 굶어 죽어 가는 민중에 대해서는「독립신문」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또한 그들의 표현대로 '야만국' 조선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1백년 전 이 땅에는 쌀 수출 문제를 두고 개방과 금지 주장이 서로 맞섰다. 오늘날 또다시 이 땅에 쌀 수입 문제를 두고 개방과 반대의 주장이 맞서고 있다. 독립문에 올라가 쌀 개방 반대 시위를 벌인 아리송한 현상은, 우리가 독립문의 '독립'이라는 말에 너무 현혹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독립문, 「독립신문」, 독립협회의 '독립'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제(외세)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때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에 붙자는 속뜻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임금이 버젓이 있고 조선국이라는 국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르지만, 독립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쉽사리 구분하기가 어렵다. 독립운동 탄압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자리에는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바로 옆에는 독립문이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