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변환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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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00년 7월/638쪽/15,000원
개화기의 언론 (1883~1910)
임오군란과 고종의 언론관
조선은 민씨 척족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국고가 바닥나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구식 군대의 병졸들은 개항 뒤 새로 만든 신식군인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13개월만에 한 달치 급료라며 받은 게 모래가 섞인 쌀이었다. 군졸들의 격분은 결국 난(亂)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1882년 7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이었다. 고종은 <개화윤음>을 발표하여 어수선한 정국을 타개하려 했으며 이로써 종래의 쇄국, 개국논쟁에서 개국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고종은 공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지한 군주였다 하겠다. 그러나 조정 내지 정체(政體)의 변혁이라든가 또는 조정의 일정한 행동에 관하여 현실적으로 반대 혹은 비난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한성순보」 창간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한성순보」는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가 유길준과 함께 추진한 것으로, 신문 발행에 필요한 모든 요건이 일본에 의해 공급되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광주 유수로 좌천되었으며, 발간 주체는 급진개화파에서 온건개화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돼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되기까지 총 41호가 발간된 순간(旬刊) 신문이다. 정부기관인 박문국(통리아문의 동문학 부속기관)에서 발행하는 관보였기 때문에 관청에서 의무적으로 구독한 신문이었다. 이 신문이 순한문으로 쓰여진 것도 관리와 귀족계급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의병을 비도(匪徒)로 부른 「독립신문」
서재필은 당시 3일천하의 ‘4흉’(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하였다. 그는 1895년 귀국하여 정부의 지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이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이 내건 ‘독립’은 모든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초당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의미였다. 「독립신문」은 순한글로 제작하는 등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다.
국내 학계는 대체적으로 「독립신문」을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지로 보고 있으나 이견이 없는 건 아니다. 「독립신문」은 1897년 친로(親露) 수구파 정부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으로 변해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게 압력을 가하고 서재필의 추방까지 진행되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발간된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독립정신과 인권신장을 강조하였으며, 외국 열강의 부당한 침투에 대해 공격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청, 러시아를 배격하였을 뿐 미국, 일본과의 유대는 강조하였다. 서재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독립신문」은 “의병을 ‘비도(匪徒)’라는 부정적 의미의 용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보도 내용도 의병의 패전이나 해산 그리고 정부군의 진압 상황과 승전에 관한” 것이었다. 「독립신문」 창간 100주년을 맞이했던 1996년엔 이 점이 거론되어, ‘신문의 날’을 「독립신문」이 아닌 「황성신문」의 창간일로 삼자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했다.
「제국신문」「황성신문」「대한신보」「시사총보」「상무총보」
개화기 언론사에 있어서 1898년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 못지 않게 중요한 해임에 틀림없다. 「제국신문」(「뎨국신문」)은 8월 10일자로 창간되어 1910년 3월 31일자까지 대략 3천2백40호를 발행하였으며, 「황성신문」은 9월 5일자로 창간되어 1910년 9월 14일자까지 총 3천4백70호를 발행하였다. 한일기독교인을 규합한 광무협회에 의해 4월 10일에 창간된 순국문 주간지 「대한신보」가 있다. 또 독립협회와 대립하였던 황국협회는 1899년 1월 22일 격일간 국한문혼용의 「시사총보」를 창간하였으며, 4월 14일엔 황국협회의 보부상 모임인 상무회사가 「상무총보」를 창간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상업신문(경제신문)으로는 최초의 신문”이었다.
「황성신문」과 민족사학자들의 언론 활동
1898년 9월 5일에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은 국한문혼용 일간지로 중류계급 이상의 독자를 대상으로 삼았다. 「황성신문」은 「독립신문」보다 보수적이지만, “개신유학적(改新儒學的) 전통을 배경으로 국내에서 성장한 진보파의 대변지”로써 「독립신문」과 공동으로 독립협회를 대변하였다. 「황성신문」은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이들은 역사와 언론과는 서로 깊은 관계가 있으며, 신문은 옛날의 실록(實錄)이며, 신문인을 사관(史官)으로 보는 언론관을 갖고 있었다. 「황성신문」은 고종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반일(反日)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우리 신문도 하나 창간되었는데 그건 바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임시 특파원으로 내한 중이던 어네스트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의 탄압에 반대하는 왕실과 민간 유지들의 비밀투자로 운영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 논설에는 신채호 등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였다. 원래 이 신문은 영자 신문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한국의 처지를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당시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반일논조도 펼 수 있었다.
1907년에 접어들면서 히로부미는 고종을 퇴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사건으로 인해, 7월 19일 고종이 퇴위하면서 순종이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치게 되었다. 일제는 신문들의 비판이 더욱 치열해질 것을 예상했는지 정미 7조약을 조인한 7월 24일에,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정치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보안법’ 및 항일언론을 봉쇄하기 위한 ‘신문지법(광무신문지법)’을 만들어 공포하도록 했다. 1908년 4월 29일 신문지법의 개정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직후 통감부에 매수되기까지 국한문판 24차례, 국문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했으며 2차례 정간 처분을 받았다.
「소년」과 「대한민보」
일제의 언론탄압이 심화되는 가운데 1908년 11월 1일 근대적 체제를 갖춘 우리 나라 최초의 잡지가 창간되었으니, 그게 바로 최남선의 「소년」이다. 그런 이유로 1911년 5월까지 모두 23호가 발행된 「소년」의 창간일을, 오늘날 ‘잡지의 날’로 정하고 있다. 1909년 6월 2일 창간된 「대한민보」는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기관지 구실을 하면서, 민족의 단결과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의 자각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였다.” 대한협회는 1905년 5월에 창립된 대한자강회가 1907년 7월 이완용의 집 방화와 일진회 기관지 습격사건의 선동단체라는 이유로 해산 당한 다음, 그 후계단체로 1907년 11월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보안법’(1907년 7월 발포) 하의 합법단체로서 “‘보호정치’ 하에 있어서 체제 내적인 정치, 교육, 산업의 개량단체로 변질할 가능성을 잉태한 것”이었다.
일제하의 언론 (1910~1945)
‘무단(武斷)정치시대’의 신문
‘무단정치시대’로 불리는 1910년의 일제 강점에서부터 1919년의 3.1운동까지의 10년간은 언론의 ‘암흑기’였다. 이 기간 중 발행된 잡지는 50여 종 가까이 되는데, 이 가운데 종교 계통 잡지가 24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제대로 된 언론 활동은 해외에서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단정치 시대’엔 일본인 신문들만이 판을 쳤다. 「경성일보」「매일신보」「서울 프레스」 등 총독부 3대 기관지와 지방에 15개의 일문 일간지가 발간되었다. 한국인들을 위해선 국문판 「매일신보」만이 유일했다. 지방에선 민족지인 「경남일보」만이 살아 남아 1914년 말까지 발행되었다.
3.1운동과 지하신문의 활약
일제의 가혹한 인권탄압과 억압적인 정책의 결과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3.1운동은 고종의 서거(1919년 1월)와 일본에서의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대적인 활동의 이면엔 ‘지하신문’들의 활약이 컸다. 가장 먼저 생겨난 지하신문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에서 창간된 「조선독립신문」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은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도 큰 자극이 되어, 3.1운동 이후 해외에서 35종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1919년 상해엔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임시정부 기관지로 간행된 「독립신문」(1919년 8월 21일 창간)은 독립운동의 상황을 내외에 알리고, 국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일제는 교활한 문화정책에 따라 한국인이 발행하는 민간 신문을 허용하게 되었다. 총독부에 제출된 신문 발행 신청서는 수십 건에 달했으나 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 「동아일보」「조선일보」「시사신문」 등 3개 신문만을 허가했다.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중심이 된 「조선일보」는 노골적으로 친일을 표방한 가운데 1920년 3월 6일에 창간되었다. 「조선일보」는 ‘신문명 진보의 주의’를 사시로 내걸었는데, 이는 일제 문화정치의 구호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초대 사장은 박영효, 사실상의 경영자는 호남 지주 김성수였다. 「동아일보」는「조선일보」와는 달리 민족지를 자처하면서, 전국 13도의 자산가 유지들을 발기인으로 삼는 등 제법 민족지로서의 형식도 갖추고자 하였다. 「동아일보」 초대 사장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래 한국 근대화운동의 선구자였으나, 3.1독립운동 직후 젊은 층의 혁신파에서는 내심 배격하고 있었다. 그것은 병합 당시 일본으로부터 매수(買收) 정책의 하나인 후작(侯爵)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김성수의 사장 취임과 함께 「동아일보」는 와세다 대학파의 아성이 되었다. 일제가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한 속셈은, 당시 일본 고등경찰과장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조유사시에 일망타진하는 경찰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잡지의 창간과 신문의 성격 변화
신문과 더불어 잡지들도 창간되었다. 3.1운동 전인 1919년 2월 동경에서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등 유학생 중심의 문예지 「창조」가 나오고, 국내에선 1920년 7월경에 또다른 문예지 「폐허」(김억, 남궁벽,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등이 참여)가 창간되었다. 1922년 1월엔 또다른 문예지 「백조」가 창간되었는데, 이로써 당시 한국 문단엔 창조파, 폐허파, 백조파 등 3개의 파가 형성되었다. 1922년 9월 총독부 경무국에 접수된 신문과 잡지 발행 신청 건수는 60여 건에 이르렀는데, 총독부로서는 ‘언론 창달’이라는 구호를 내건 이상 무작정 묵살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잡지들이 많이 창간됨에 따라 신문과 잡지 사이의 역할 분담도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신문에서 사실과 가치의 분리를 시도하는 저널리즘적 기법 자체의 변화로 나타났다. 즉, 신문은 사실 중심, 잡지는 의견 중심의 매체로 나아가는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시대일보」와 「중외일보」
최남선은 총독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24년 3월 31일 「시대일보」를 창간했다. 일제는 민영지를 3개 정도 허용할 방침이었으므로 종간된 「시사신문」 대신, 최남선에게 「시대일보」를 발행하도록 허가를 내준 것이다. 「시대일보」는 다른 신문들과는 달리 1면을 정치면으로 꾸미지 않고 대담하게 사회면으로 만드는 등 신선한 감각을 보여 주었으나, 자본이 달려 1926년 8월에 폐간되고 말았다. 그 후신으로 이름을 고쳐 「중외일보」가 창간되었다. 「시대일보」의 실패는 최남선의 몰락을 재촉해 그의 변절의 정도를 더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 동아의 일제에 대한 충성
1933년 3월 21일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금광에서 그야말로 노다지를 발견해 벼락부자가 된 인물로, 한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일제는 1937년부터 한국인을 일본천황의 백성으로 하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운동을 벌였으며, 뒤이어 우리말 사용 대신 일어 사용 그리고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 비극적인 상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 후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어용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조선일보」는 일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미 군정하의 언론 (1945~1948)
‘언론의 둑은 터졌다’
해방 직후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신문이 매우 현실적인 권력임을 간파한 좌파는 신문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우파도 신문 발행에 열을 올렸다. 우리 글과 우리 역사에 대한 갈증은 순식간에 역사책들과 국어독본들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주었으며, 심지어 ‘38선의 밀수품’ 품목에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터진 건 ‘언론의 둑’과 ‘출판의 둑’만은 아니었다. 미군의 주둔과 함께 이른바 ‘양키이즘’이 유입되면서 ‘문화의 둑’도 서서히 터져 나갔다. 그러나 미 군정의 태도가 ‘절대적인 언론의 자유 보장’을 선언한 지 한 달도 안 돼 돌변했다.
「서울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미 군정은 언론 통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좌익 언론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공세에 들어갔다. 우익일지라도 미국 또는 미군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기사를 내보내는 신문에 대해선 보복을 서슴지 않았다. 미 군정은 1945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정간 명령을 내렸다. 해방 후 최초의 이 정간 조치와 함께 「매일신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고, 11월 23일자부터 「서울신문」으로 바꾸어 속간되었다. 반면 미 군정은 우파 신문은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는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그런 혜택을 받은 신문이었다.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대변지 노릇을 한 반면 「조선일보」는 김구를 지지하는 노선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정치적 성향이 농후한 김성수, 송진우 등 경영진이 반공을 내세워 친일행적을 은폐하면서 정치적 재기에 「동아일보」를 이용하려 했던 데 비해, 사업가로서의 기질이 강한 「조선일보」의 경영진은 좌우익 대립의 이념적 혼란기에 민족주의 노선을 취함으로써 역시 과거를 은폐하면서 이미지를 제고하고 독자를 확보하려고 했다. 극도로 산란한 정치 상황에서 신문들이 노골적인 정파성을 드러냄에 따라 1946년 내내 신문사 피습사건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한국 민중의 입장에선 과연 무엇이 좌익이고 무엇이 우익인지 그 구분이 늘 명확한 건 아니었다.
‘미 군정의 언론 대학살’
1946년 5월 29일엔 군정법령 제88호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을 공포하였는데, 이 법령의 골자는 발행의 허가제로서 일제 때로 원상 복귀한 것이었다. 1947년 미 군정의 발표에 따르면 일간지 85개(서울에 40개), 주간지 68개, 격주간지 12개, 월간지 154개 등에 이르렀다. 주요 신문들을 살펴보면, ‘극우’에「동아일보」「현대일보」「대동신문」「가정신문」, ‘우익’에 「조선일보」「한성일보」「민주일보」「민중일보」,‘중도’에「경향신문」「서울신문」「자유신문」「중앙신문」, ‘좌익’에 「조선중앙일보」「우리신문」, ‘극좌’에 「독립신보」등이 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벌어진 언론탄압 실상은 자료의 부족 또는 은폐로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현대 발굴’의 차원에서 저널리즘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말」지 1989년 5월호에 실린 <현대사 발굴 - 미 군정의 언론 대학살>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의 언론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려 40여 개의 신문이 폐간, 정간 처분 당하고 ‘반군정적’이라는 죄목으로 기자들이 대량 구속됨으로써, 미 군정 3년 간의 언론 탄압은 그야말로 우리의 언론사상 명실공히 최초 최대 규모의 언론대학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