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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 1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노마디즘 1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2002년 12월/784쪽/28,000원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제 생각이지만, 『천의 고원』은 아마도 20세기에 간행된 가장 ‘위대한’ 철학책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또한 가장 아름다운 책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사유와 그것이 만들어낸 개념들의 새로움과 독창성, 그것을 표현하는 간결한, 그러면서도 익살스럽고 때론 환상적이며 때론 치밀하고 때론 허허로운 문장들이 그렇고, “만 미터 심해를 들여다본 고래의 충혈된 눈”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책-기계로 이용하여 새로운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것은 관두고 읽고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생소함이나 난해함만이 아니라,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체(style)'의 문제도 있을 거예요. 들뢰즈 역시 나름의 독창적인 문체가 독창적 사상가의 전제 조건처럼 간주되고, 그런 문체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면 문장을 돌리거나 비틀기도 하고, 장황한 설명이나 해설은 생략해버리기도 하는 프랑스에서 철학을 하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난해함의 또 하나의 이유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잡학’ 때문일 겁니다. 특히 이 책에는 정신분석학이나 철학, 문학, 언어학은 물론, 신화학, 민속학, 동물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온갖 ‘잡학’들이 다 동원됩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다양한 학문의 성과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유를 펼치려는 생각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성과를 자신의 철학적 사유 안에 담으려는 생각에 따른 것일 겁니다.

들뢰즈나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가, 표상 없이 사유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표상을 통해서 지각하고 생각하며 말합니다. ‘의미’란 대개 그렇게 표상된 어떤 것을 지칭하지요. 그런데 ‘표상(representation)’이란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re-representation)’입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보고 ‘빨간 깃발’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는 단지 눈앞에 나타난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눈앞의 ‘빨간 깃발’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어떤 것과 연관되어 떠오릅니다. 혹자는 거친 투우를 떠올릴 것이고, 혹자는 운동회의 홍군 깃발을 떠올릴 것이며, 혹자는 공산주의를 떠올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깃발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다시 나타남은 언제나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 관념의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포상을 통한 사유, 즉 표상적인 사유가 근본적으로 동일성에 의한 사유라는 것은 이런 뜻에서지요. 그것은 여러 사물들을 보면서 공통성을 추출하는 그런 사유(공통성의 추상으로서 추상 개념)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1980년에 씌어진 『천의 고원』이라는 책에 이르기까지, “둘이면서 하나인 동시에 그 이상인” 이 책의 저자들이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질 들뢰즈는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입니다. 일생 동안 거의 여행도 하지 않고, 인용된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책을 읽고 이용하며 사유했던, 편안하고 여유 있는 표정의 철학자지요. 그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펠릭스 가타리는 정신분석가로, 한때는 라캉의 영향 아래 있었고, 우리(J.Oury)등과 더불어 라 보르드 병원에서 집단요법이라는 실험적인 치료를 하기도 했던 의사지요. 가타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전투적 좌익 활동가였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전투적인 실천을 했던 전사였다는 평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활동가’입니다.

이렇게 다른 경력과 성격을 가진 이질적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사유하고 함께 책을 쓰게 된 겁니다. 그 결과 아주 독창적이고 훌륭한 네 권의 책이 씌어집니다. 아시다시피 『안티 오이디푸스』『카프카』『천의 고원』『철학이란 무엇인가?』가 그것이지요. 나중에 『안티 오이디푸스』로 드러난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세간의 많은 비난을 샀다고 해요. 그 비난의 주된 내용은 전도가 양양한 철학자 들뢰즈가 가타리와 만남으로써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그런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두 사람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들뢰즈는 반대로 “나에게 정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은 가타리와 푸코였다.”고 말하면서 가타리에 대한 애정을 반복해서 표시합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작업했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들뢰즈는, 한 사람은 굉장히 적게 말하고 한 사람은 굉장히 많이 말하는 관계였다고 해요.

『천의 고원』은 한마디로 ‘배치(agencement)’에 관한 책입니다. 배치란 흔히 사용하는 말이라 별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어떤 새로운 태도를 포함하고 있어요. 그걸 이해하려면 약간의 우회가 필요합니다. 그건 ‘계열화’라는 개념을 통과하는 겁니다. ‘계열화’란 개념은 주로 시간적인 선을 따라 진행되지만 공시적(共時的)인 차원에서의 계열화 역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처럼 공시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계열들을 ‘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 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합니다. 물론 여러 기계가 접속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배치가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관련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접속하는 항이 달라지고, 작동하면서 그것이 절단하고 채취하는 흐름이 달라지면 동일한 항도 다른 기계가 됩니다. 가령 식당의 배치 안에서 입은 식기와 접속하여 영양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에는 ‘먹는 기계’지만, 강의실의 배치 안에서 여러분의 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에는 ‘말하는 기계’가 되고, 침실의 배치 안에서 성기나 성감대와 접속하여 리비도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면 ‘섹스 기계’가 되며, 거식증 환자의 배치 안에서 밀어내는 식도와 접속하여 음식을 토하는 경우에는 ‘싸는 기계(항문 기계)’가 됩니다.

비로 이 점에서 배치의 개념은 역사유물론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맑스는 『임노동과 자본』이란 책에서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요. 이는 계열화 내지 배치를 통해서만 어떤 항의 의미나 기능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지요. 이 말이 역사유물론의 기본명제라는 것은 모두 잘 아시는 바일 겁니다. 요컨대 맑스가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배치의 역사이론을 선취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벗어나 기호나 사회관계는 물론, 얼굴이나 리듬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역사유물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환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천의 고원』ㅡ ‘고원’은 책 전체의 서론에 해당되는데, 이 ‘고원’에서는 ‘뿌리줄기’라는 뜻을 갖는 리좀(rhizome)을 통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내재성(immanence)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1장, 2장…’처럼 각각의 장들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고, 그것이 ‘결론’으로 이어지며, 역으로 ‘결론’을 통해 앞에 등장한 여러 장들이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가 되는 고전적인 책의 구성방식에 대해 거리를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리좀이란 이런저런 줄기들이 어떤 중심뿌리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그런 상(狀)을 취하는데, 자신들이 쓰려는 책 또한 그런 리좀 상(狀)의 구도에 따라 만들려고 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 책의 각 장은, 다른 것과 접속되고 이어질 수 있는 길을 이리저리 갖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독자성을 갖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각각의 장은 일종의 고원이고, 이 책 전체는 그런 고원들이 이리저리 이어지면서 연결되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모든 논지와 문장을 끌고 가지는 않은 고원들의 ‘모호한(fuzzy) 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ille Plateaux'이란 제목은 직역해서 ‘천의 고원’이라고 하긴 했지만, ‘수많은 고원들’이란 뜻이고 그래서 ‘수 천의 고원들’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한 그런 제목입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둘이서 함께 『안티 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자가 여러 명이었던 것처럼, 그것 또한 이미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접근해갔던 모든 것들을 가장 가까운 것에서 가장 먼 것에 이르기까지 이용했다.” 이는 어떤 책을 하나의 ‘저자’에 귀속시키는 것에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 책은 들뢰즈, 가타리라는 두 사람의 저작으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는 그들이 인용문의 형식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발언하고 있는 것이고, 인용은 없지만 이미 그들이 읽고 들은 수많은 저자들이 발언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그런 많은 발언들이 중첩된 연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쓴 사람이 단수일 경우에도 대상이 이미 복수라면, 책이 주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상도 마찬가지지요. 그렇다면 책이란 무엇인가? 저자들은 말합니다.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성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다.”라고 말입니다. 또한 상이한 상대속도를 갖는 흐름들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책은 하나의 다양체”라고도 말합니다.



무의식과 욕망 : 욕망하는 기계에서 욕망의 다양체로

매우 거칠게 말하는 게 되겠지만,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의 근저에서 성욕을 봅니다. 프로이트가 집요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모든 성욕은 본질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성욕이고, 어머니와 자려는 욕망이며,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명제가 욕망을 성욕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면, 이 명제는 모든 성욕, 아니 모든 욕망을 어머니에 대한 욕망으로, 그리하여 남근으로 귀착되는 욕망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명제는 필연적으로 욕망의 억압을 말하는 명제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인간은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자려는 ‘동물적인 욕망’으로 인해 ‘야수’가 될 것이고, 인간이 문화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찬양하는 모든 질서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경스럽고 끔찍한 욕망을 거세로 위협하며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는 법과 질서, 문화, 문명을 대변하는 심급(審級)이고,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억압된다고 해도 욕망 자체가 사라지거나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억압된 채 무의식 깊숙한 곳에 남아서 꿈이나 환상 등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나거나(re-present), 문학이나 예술에서처럼 암묵적 형태로 다시 나타나거나, 법적인 금지에서처럼 부정적 형태로 다시 나타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된 욕망은 이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한 표상(representation)들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나 햄릿에서 초현실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혹은 마치 발기한 남근처럼 우뚝 솟은 높은 건물들, 아니면 말실수나 농담 같은 다양한 언어적 상징들, 그리고 꿈이나 환상 같은 수많은 표상들이 바로 그런 무의식이 드러나고 표상되는 영역입니다. 이제 삶은 무의식이 펼쳐지는 극장이 되지요.

반면 들뢰즈와 기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을 정의합니다. 욕망을 성욕화하는 것도, 그것을 엄마-아빠-나의 오이디푸스적 가족 삼각형 안에 가두는 것도, 그리고 무의식의 표상들을 산출할 뿐인 극장들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무의식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의식이란 상징이나 환상, 기호를 만들어내며 통상적인 현실을 통해 숨겨진 채 다시 나타나는 그런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통해 작동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고, 그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와 실천들의 집합이며, 그런 것을 변이시키고 변환시키는 변혁의 장이고, 그 모든 것의 질료로서 그 모든 욕망이 자리잡고 작동하며 물러서고 전진하는 기관 없는 신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분열 분석은 욕망의 배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기계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들을 구성하는 질료이기도 한 기관 없는 신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무의식이 때론 욕망 내지 욕망의 배치로 정의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관 없는 신체로 정의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말은 신체적인 모든 것, 신체적인 변용을 야기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러한 신체와 결부된 언표행위 모두가 바로 무의식에 포함되며, 그 모두가 분열분석이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이란 것을 뜻합니다.



이중분절, 혹은 지질학적 역사유물론

저자들의 어법으로 말하면, 지구는 어디든 지층화되어 있고 이중분절의 집게발에 의해 분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지층은 또한 나름대로 변이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상기계(抽象機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지층의 내적 조건을 이루는 외부에 의한 것이든, 모든 지층은 변이의 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층은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갖는 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떤 지층을 오직 하나의 동일성에 의해 포착합니다. 손은 손일 뿐이고 입은 입일 뿐이라는 거지요. 더구나 지층에 붙여놓은 이름은 그런 동일성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 동일성의 표상 아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지층이 다른 지층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고 접속된 지층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지층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절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 지층의 변이능력에 대해 좀더 접근하기 쉬운 통로를 제공합니다. 숟가락을 든 손, 시청을 가리키는 손, 다른 유기체를 때리는 손, 애인의 몸을 더듬는 손, 이처럼 두 지층이 만나는 양상이 달라지면 동일한 손이 다른 기계가 됩니다. 이처럼 상이한 지층들이 계열화를 통해 정의되는 사물의 상태를 ‘배치(agencement)'라고 합니다.

배치가 지층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간-지층이었다면, 추상기계는 지층과 탈지층화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즉 지층들 뒤에 있다는 점에서 메타지층의 위치에 있는 셈입니다. 배치는 간-지층일 뿐만 아니라 메타지층이란 점에서 이미 변이의 선, 추상의 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체적인 배치는 항상 추상기계를 작동시키고 있으며, 역으로 추상기계는 항상 구체적인 배치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그렇지만 저자들은 추상기계를 우리가 구체적인 기계적 배치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배치는 항상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영토화하는 성분 또한 항상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치가 작동시키는 탈영토화는 그 자체로는 항상 상대적 탈영토화에 머물 뿐입니다. 반면 추상기계의 탈영토화는 모든 지층에서 탈분절화하고 탈지층화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절대적 탈영토화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언어학의 외부 :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위하여

언어활동의 본질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도록 시키고 명령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들의 공준(공리(公理)처럼 확실하지는 않으나, 원리로 인정되어 어떤 이론 전개에 기초가 되는 근본 명제)입니다. 이런 관점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더욱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언어활동의 기초단위인 언표는 명령어다.” 여기서 언표는 ‘에농세(enonce)’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진술하다, 서술하다’등을 의미하는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말해진 것, 진술된 것을 뜻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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