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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책임

베른하르트 그림 지음 | 청년정신
권력을 가치 중립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것은 산업, 경제, 교회 등 현재 경험하는 주변세계 전반에 권력구조가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과 범죄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가 온통 정치와 권력, 권력과 폭력으로 어지럽게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권력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권력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내린 결정 안에서 처음으로 의미를 획득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권력은 사람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오면 급격하게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인류의 역사는 끝없이 계속되는 권력다툼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인간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이 생겨났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파괴력을 한 번 생각해보라. 이제 인류는 권력의 성장을 조절하거나 막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권력이 커지면 그만큼 책임도 함께 커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책임의 의무를 누가 짊어질 것인가? 없어서는 안 될 권력의 감시자로 누가 등장할 것인가?



종교 혹은 교회는 올바른 권력의 감시자가 될 수 없다. 이들은 절대로 권위주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권(神權)에 기초하거나 신권을 내세운 폭력에 기초하여 진리를 독점하고 독선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데, 이와 같은 권력 행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에서 권력을 포기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한편, 아무리 부인하려 애써도 오늘날의 정치적 권력이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최상의 목표로 삼는 마키아벨리즘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개별적인 권력자들은 확고한 권위를 획득하고 자신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도덕적 분별력으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권력에 집착하고 있다.



인권, 자유, 존엄성, 정의 등과 같은 가치들을 보장해주는 법 질서와 평화 규약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 정치권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복잡한 이해관계의 얽힘을 풀고 개인들의 이익과 권리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한 실용적인 권력행사 역시 피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의심할 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산업, 경제, 학문 등이 밀접하게 얽혀 있는 정치적 질서로부터 자신과 미래의 세대에 대한 진정한 배려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바람이다.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은 대개 자신을 마키아벨리와 연결시키는 시각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치나 기업 세력들 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이름이든 아니면 현실적 필요에서든 간에 냉혹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항상 마키아벨리즘이 실천되고 있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권력의 화신이다. 특히 정치나 산업, 경제 혹은 문화나 가정, 교회 등에서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더욱 그렇다. 영향력을 잃지 않고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적'보다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해야 한다. 아무런 마찰 없이 정당하고 좋은 수단을 통해서 이를 달성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떤 비윤리적이고 기만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이를 달성하려고 한다.



르네상스 초기에 활동했던 마키아벨리는 현세에 작용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함으로써 중세시대와 결별하고 실용주의를 선언하였다. 실용주의에서 권력은 원칙적으로 정의나 종교에 선행하며, 인간의 행동은 도덕적 진리 내지는 다른 진리들에 선행하고, 욕망은 이성에 선행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수단의 적법성은 결과를 통해 결정될 뿐이다.



'목적과 수단의 전략적 합리성'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종류의 실용주의는 오직 성공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모든 가능한 방법과 길을 모색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결과나 목표에 도달하는 것뿐이며, 목표나 방법이 도덕적으로 합당한지의 여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정치적 현실의 도덕성이나 정당성을 떠나서 권력의 획득 및 사용을 위한 오로지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가 분명하게 채택된다.



마키아벨리가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추천한 기술들은 효과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명백히 비도덕적이다. 만약 이웃집 정원에 열린 사과를 갖고 싶다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따오면 된다. 이때 이웃집의 사과는 마키아벨리에게는 왕관이나 남의 나라를 의미하고, 현대의 기업에게는 수익과 성공을 의미한다. 이웃집 사과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옳은 일인지 의 여부에 대해서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그리고 마키아벨리즘에 따라 윤리적 당위의 문제 저편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직 권력의 획득과 사용과 확산이다. '정당화를 위한 근거'는 욕망하는 목표 자체와 목표의 달성만으로도 충분하다. 오직 성공만이 행동의 성과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것은 도덕적 규범과 무관하거나 도덕적 규범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결함이자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왜냐하면 바로 권력,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열등감을 전능한 우월적 표본을 통해 보상하려는 인간적 보상심리의 한 요소로서의 권력이야말로 파괴적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본적으로 윤리적 통제가 필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권력에는 항상 당위성이 부과되어야 하며 예외 없이 책임이 따라야 할 것이다.세상에는 강력하고 어마어마한 것들이 많지만 인간보다 더 강력하고 어마어마한 것은 없다. 나는 인간에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정신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또한 이제 사춘기에 들어섰다고 할만한 청소년 단계의 인류가 윤리적으로 성숙한 인격체에게나 어울릴 막중한 권력과 책임을 떠맡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고대 그리스의 프로타고라스는 기원전 5세기 경에 벌써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를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인간중심주의로 빠지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기독교 신학은 이 인간중심주의적 사상을 절대화시켰다. 간단히 말한다면 천지창조의 기록에 근거해서 인간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로 정의되었다.



인간의 기술적 능력은 산을 통째로 옮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강의 흐름을 바꾸고 숲을 없애고 도시를 허물어버린다. 인간의 기술적 상상력은 예전부터 태양에 위태롭게 다가가는 이카로스의 비상이나 쥘 베른의 해저 탐험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었고, 핵폭탄의 파괴력에 의한 인류의 종말도 더 이상 정신 나간 사람의 환상에 불과하지 않다. 이미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척도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권력에 대한 뚜렷한 평가 기준은 있는가? 또한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허락되는가? 다시 말하면 또 다른 자아, 또 하나의 개인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 타인을 '도구로 삼는 것',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타인의 존엄성을 빼앗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는가?



우리의 삶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존중할 수 없게 되자마자 곧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누가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법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더욱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둘러싼 권력의 구조로 볼 때, 우리의 삶은 그것이 더 이상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윤리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행위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띨 수 있는 것이다.

권력 문제의 핵심은 책임이다. 책임은 권력에 대항하는 반대 권력이나 마찬가지이다. 권력과 책임은 서로 일치해야 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이다. 책임을 지는 주체는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은 순수하게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규범과 가치에 결합된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린아이나 정신질환자는 책임감에서 면제된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행동도 책임에서 벗어난다.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는 노름꾼이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노름을 한다면 그의 행동은 범죄가 된다. 하지만 이 노름꾼이 한 가정의 아버지이고 그가 노름에 거는 돈이 자기 돈이라면, 돈을 잃고 따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행동은 무책임한 것이 된다. 무모하게 차를 모는 운전자가 자신의 무모함으로 인해 옆자리에 탄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릴 때는 무책임한 것이 된다.



다른 사람(아내와 아이 혹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안위나 이익 혹은 운명이 내 손에, 즉 나의 관할권과 판단력에 달려 있게 되면, 그것에 대한 나의 통제력은 그것에 대한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를 고려하지 않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는 것은 책임의 신뢰관계를 무너뜨리는 명백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한편,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방종에서부터 절대적 결정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오해들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인간적 자유란 모든 생물적·심리적·사회적 조건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책임과 연관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무엇에 대한 책임을 '선언'할 때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유와 책임은 서로 교환 가능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때 책임은 자유를 포괄한다. 따라서 책임이 없이는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권력의 동기를 찾아서 - 위계질서의 타파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인간에 관하여 말할 때 '거의 완벽한 존재'라고 표현하였다. 이로써 스콜라 철학은 '창조의 절정'인 인간에게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최고의 품격을 부여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중세가 종교적 쟁점이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룰 때는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모른다. 굳이 중세만 들먹일 필요 없이 현재까지 진행된 인류 전체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게 고귀한 존재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른 인간중심주의에서는 항상 인간이 우주의 중심 테마이다. 인간적 의무의 대상도 인간 자신 내지는 추상적 의미의 인류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다. 인간의 이처럼 오만한 자기과대평가는 인간을 자연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과 도덕적 규범까지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악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종류와 형태의 살인과 고문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늘 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수백만 번도 넘게 대답이 내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운 인간의 기준이 되는 어떤 표본적인 도식 같은 것은 아직 마련되지 못하였다.



북풍이 불고 있을 때 동쪽으로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그쪽으로 조종하면 실제로는 남동쪽 방향으로 날아가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를 북동쪽 방향으로 조종하면 정확하게 동쪽의 원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를 원래보다 나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을 그가 마땅히 되어야 할 바에 따라 보게 되면, 자기 존재 안에 담긴 가능성을 실현시키게 만들 수 있다.



갓난아기는 태어난 직후부터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존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생명의 정신적·물리적 안전을 보장해줄 친밀한 관계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필요하다. 대개의 경우 이 역할은 부모가 담당한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말에 의하면 유아기의 기본체험으로서의 열등감은 갓난아이의 불충분한 생물학적 조건에 기인한다고 한다.



열등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인간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란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열등감은 그 자체로 정상이며, 인간의 문화와 역사가 발전하기 위한 원천과 자극제로 작용하였다. 인류문화의 시작과 각 단계에서 항상 인간은 무지와 불완전에 대해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권위의 추구는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목표를 갖는 것으로서 열등감에 대한 반작용이다. 즉, 열등감과 우월감은 서로 긴밀하게 한 쌍을 이룬다. 열등감이 특히 강한 아이는 미래의 삶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단순한 균형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멀리 나갈 위험이 있으며, 권력과 우월성을 향한 노력이 지나치면 병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고 아들러는 경고한다.



한편,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두려움이 항상 인간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줄이고 제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왔지만, 이런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인간적 실존이 지닌 유한성과 의존성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계속해서 두려움을 마비시키고 몰아내려고 해도 두려움은 결코 인간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항상 인간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대체로 두려움은 감지된 위협이 커서 자신감을 능가할 정도가 되면 생겨난다. 자신감이 더 크면 당연히 두려움은 침묵한다. 하지만 두려움의 근원은 더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모든 두려움의 원인은 인간이 스스로와 일치하지 못하는 데 있다. 즉, 신뢰와 안정을 주는 중심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권위적 태도와 권력의 집착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양보와 관용 능력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태도나 주장의 '다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정당성을 시인하거나 반대되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을 자신의 취약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부한다. 한편, 체면에 대한 집착은 자신을 남보다 절대적 우위에 놓는 자기평가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또는 자신의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또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성공과 무관하게 무조건 남에게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사치스런 겉치레를 지위의 상징으로 삼는 태도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것은 직업이나 지위, 타이틀, 집, 옷 등과 같은 외적 요소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엘리트 냄새를 풍기는 복잡한 언어사용 방식도 자기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는 교묘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지위의 상징과 같이 자기 과시를 위해 사용되는 모든 행위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무의미성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려는 것이다.



한편, 소유에 대한 집착은 권력이나 권위와 같이 의지할 데 없는 상태나 개인적 무력감에 대항하는 보호수단으로 작용한다. 부가 권력과 명망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에 대한 집착도 이렇게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오늘날 돈은 권력을 의미한다. 특히 다른 마땅한 권력 수단이 존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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