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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전인권 지음 | 푸른숲
두 개의 공간, 두 개의 자아



아버지 공간의 질서어머니 공간의 만족'아버지 공간'은 늘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으며 질서정연했다. 이 모든 물건들은 어머니나, 어머니의 지도 아래 우리 형제자매들이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신문이나 책을 본 후에도 어질러 놓기만 했다. 다만 족보를 본 후에는 스스로 책꽂이에 꽂아놓았다.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통해 책꽂이의 맨 왼쪽부터 나란히 꽂혀 있던 족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가정이라면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청결이요, 웬만한 장소에는 다 있을 법한 질서였다. 그러나 어린 내 눈에 '아버지 공간'의 청결과 질서는 보통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버지 공간'의 질서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다 그 나름의 의미와 질서가 있다'는 것과 '세상 만물의 질서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질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공간'은 '질서의 공간'이라고 부를 만 했고, 그 공간의 주인인 아버지는 질서의 근원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원죄 또는 그와 유사한 죄를 지은 사람이란 관념이 없었다. 어린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존재였고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아니, 어머니에게도 그런 존재였다.'어머니 공간'은 질서와 별로 상관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널려 있었고 질서와 청결을 유지하려 해도 그게 잘 안 되었다. 그곳은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어머니 공간'은 만능의 공간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안방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쪽에 설치된 쪽마루 외에 식구들이 별도로 이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공간'은 우리 집의 식당이고, 거실이며, 응접실이요, 간이 화장실이었으며, 무엇보다 안방다운 안방이었으며 아기가 잠을 자는 곳이었다. 약간 지저분했던 '어머니 공간'은 나를 끌어들이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곳에서 산수 숙제를 했고, 만화책을 빌려다 읽었으며, 아기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친구가 찾아오면 그곳에서 놀았다.안방의 두 공간은 서로 맞닿아 있었고 크기도 똑같았다. 그러나 각각 반반의 의미를 지니는 평등한 공간은 아니었다. '아버지 공간'이 모세가 제사를 올리던 지성소(至誠所)와 같은 곳이었다면 '어머니 공간'은 인간의 땀 냄새가 배어 있는 통속적인 공간이었다. 하나는 나에게 사적(私的) 세계였고, 다른 하나는 공적(公的) 세계였다. 두 공간은 내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정신을 익히던 수련의 공간이었다. 나는 두 공간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를 배웠다. 하나는 아버지를 대할 때 사용하는 존댓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대할 때 사용하는 반말이었다. 하나는 공식적인 언어였고,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 말이었다. 공식적인 언어는 반드시 내 마음의 진실(reality)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관계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경과 복종의 언어이다. 반면 어머니, 내가 사랑하는 형과 동생, 친구, 후배, 직장의 부하를 대할 때 나는 '어머니 공간'에서 배운 언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는 내 마음의 진실에 보다 가깝고 내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소통과 지배의 언어이지만, 아버지가 나타나면 일순간에 거두어 들여야 하는 말이다.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자아집 - 두 공간의 결합원리

집에 대한 두 가지 느낌아버지의 죽음울타리욕망을 달성한 오이디푸스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자아'어머니 공간'과 '아버지 공간'이 아주 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집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한 가지 느낌은 어머니와 밥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집이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 뭐 잘못한 것이 없나 돌아보아야 했고, 아버지가 뭘 물어보면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내 생활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무덤덤한 편이었고, 나는 내가 할 일의 90% 이상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보여줄 업적이 없을 때, 나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일시적으로나마 그런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는 정반대로 의기양양했다.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이 미안함 같은 것이었다면,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은 그야말로 죄의식 그 자체였다.재떨이와 사회적 정체성아버지의 죽음을 상상했을 때는, 내 마음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커다란 혼란이 닥쳐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할 때는 슬펐지만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보통 아버지의 죽음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하여 '천붕(天崩)'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내 삶의 기둥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은 하늘을 떠받치며 나를 보호하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직적인 슬픔이요, 세상의 질서가 바뀌는 질적인 슬픔이었다. 서류와 문서, 책 같은 물건들은 아버지에게 속하는 것이었고, 그것들은 내가 이 세상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버지의 물건이나 족보가 우리 집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이 넓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통로이자 연결고리였다.세 얼굴을 가진 어머니



아버지를 닮은 아들세 얼굴을 가진 어머니어머니의 응전과 우리의 슬픔확실히 어머니와 나는 친밀했다. 아니, 두 사람은 친밀하다는 정도를 넘어 어떤 끈끈한 끈으로 뭉쳐진 부부 같은 데가 있었다. 나의 이런 주장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오히려 여성들일 것이다. 한국식 가정생활에는 분명 그런 구석이 있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도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자관계라고 마냥 파묻어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어머니와 부부 사이의 친밀함을 나누었다고 하는 것도 내가 처음 생각해낸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이미 100년 전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제기했던 것이다. 내 이야기는 프로이트가 한 이야기와 좀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도 많다.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는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했지만,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어머니인 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어머니인 줄 다 알면서도, 어머니와 결혼생활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았다. 오이디푸스는 불행했고, 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린 셈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육체적으로도 열망했다. 나야말로 '어머니에게 품었던 모든 욕망을 달성한 행복한 오이디푸스'였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너무 과도하게 충족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아버지는 아버지의 길을 가려고만 했고, 나더러는 나의 길을 가라고 했다. 정작 두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는 길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신분관계로 맺어진 아버지와 나의 관계였다. 아버지는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계'의 당사자가 되기보다는, 그 관계를 초월하여 높은 곳에서 말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나에게 아버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길을 고집했다. 자신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먼저 생각할 뿐, 자신의 아들과 사귀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와 나는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완전히 딴 세상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딴 세상의 주범은 '신분'이었다. 아버지에겐 아버지란 신분이 있었고, 나에겐 아들이란 신분이 주어져 있다. 내 아버지야말로 대표적인 '신분적 인간'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과 나, 사람과 사람이 모두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유적존재(類的存在)란 관념이 없었다. 오직 나를 자식이라는 관점으로만 대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를 미숙한 아이로 보았으며, 자신은 아이를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았다는 것만 생각했다. 바로 그 의무감이 아버지를 더욱 신분의 감옥에 머물게 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란 내면적 성찰이 아니라, 부자유친(父子有親), 붕우유신(朋友有信), 부부유별(夫婦有別)과 같이 외면적 차이를 기준으로 하는 인간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분리사랑과 분리통치문제는 내가 가족의 실상을 30년 동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동생과 형도 '어머니가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어머니는 결과적으로는 세 아들을 모두를 바보로 길렀다. 그리고 어머니의 바보 육아법은 어머니가 세 얼굴을 가지고 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얼굴은 아예 버리고 살았다. 다시 말해, 어머니라는 역할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아마 어머니에게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면 분명 또 다른 얼굴을 하나 더 개발했을 것이다. 이것이 어머니의 실체였다.우리 집엔 '어머니', '아버지' 말고 더 확고한 '하나의 울타리'란 개념이 있었다. 나에게도 하나의 집, 하나의 공동체란 관념이 있었다. 울타리! 그것은 '어머니 공간'과 '아버지 공간'을 포함하면서 우리 집의 또 다른 모습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구조물이었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하고 묶어주는 통합의 원리였다. 울타리는 정말 한국적인 조형물이다. 한국의 울타리는 안이 들여다보일 듯 말 듯한 반투명의 형상으로, 내 집과 남의 집 또는 내 집과 도로의 경계를 표시한다. 그런 울타리는 낯선 사람조차 쉽게 포용할 것 같은 따뜻함을 지녔다. 그러나 신분이 높아지고 재산이 늘어나면, 울타리는 어느덧 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높은 벽이 되고 담이 된다. 내 마음의 울타리도 그렇다. 그것은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반투명의 열린 공간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높은 담이 되기도 한다. 내 마음 속에는 수많은 울타리가 있다. 내 마음에 수많은 자아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이런저런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 여러 가지 울타리들이 다 모일 때 비로소 나의 자아가 완성된다.나는 '어머니 공간'에서 대체로 행복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의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그 같은 위협이 가족, 특히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로부터 온다고 했다. 나의 경우에도 아버지로부터 왔다. 첫 번째 위기는 3살 반, 한국 나이로 5살, 동생이 태어날 무렵에 찾아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젖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금지 명령을 내렸다. 어머니는 그 전부터 젖을 떼려고 애를 썼던 모양이다. 나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형과 누나는 나를 놀렸고, 주변 사람들은 이유 사건을 화제로 삼았다. 그것은 어머니와 나, 둘만의 평화로운 삶에 강력한 침입자가 등장했으며, 나의 행동이 사회의 규제를 받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과장된 듯한 엄격한 태도는 필요한 경우, '한 두 번은 젖을 먹게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아버지는 이유 문제에 대해 정책 지향적(policy-oriented)으로 임했던 것이 아니라, 신분 지향적(status-oriented) 태도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유 명령은 언젠가 한 번은 풀릴 수밖에 없는 금지였다. 금지된 젖을 언젠가 한 번은 허용할 때, 아버지의 권위가 한층 더 잘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기가 젖을 떼는 통과의례의 고비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돈독히 해두는 것은 아버지의 목표였으며 한국식 생활방법이었다.두 가지 성 이야기

DSZ, 성의 비무장지대어머니와 형의 사랑에는 내가 넘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사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말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형과 나를 대비하다보니, 나야말로 아버지를 쏙 빼 닮은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나쁜 점만큼은 닮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 나야말로 아들이라는 '신분의 감옥'에 갇힌 채 어머니를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 다른 것이었으며 억울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형은 하루하루의 날씨 변화와 계절의 오고감을 화제로 삼았으며, 새싹처럼 커 가는 자식들 이야기, 고향 마을 사람들에 대한 험담을 주고받았다. 그게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욕이라도 할 것 같으면, "어머니 자신을 위해서도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목사님처럼 설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바로 아버지의 전형적인 말투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버릇이 깊이 박힌 멋대가리 없는 '신분적 인간'이었다.어머니는 왜 서로 다른 세 얼굴을 가지고 세 아들을 그처럼 극진하게 사랑했을까. 물론 그것은 자식에 대한 본능적 사랑, 모정(母情)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얼굴 현상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전달되는 한국적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여성, 곧 어머니의 지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하나씩 낳을 때마다 크게 달라졌다. 아들을 낳는 것 자체로 엄청난 신분 상승이 일어났다. 어머니 혼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지만, 세 아들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또 아버지-남편-아들로 이어지는 삼부종사의 길에서 어머니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남자는 세 아들뿐이었다.



요컨대, 어머니의 '세 얼굴 현상'은 19살에 시집 온 새댁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가부장제도에 대한 적응이자 응전이었다. 지금 노인이 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권력관계를 비교해보면, 세 얼굴 작전은 완전히 성공이다. 내가 어릴 적에 안방의 두 공간에 있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권력관계는, 이제 정반대로 역전되었다. 세 얼굴 현상은 이래저래 우리의 슬픈 역사를 대변한다. 그것은 3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얼굴은 내세우지 못한 채,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한 여인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세 얼굴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세 얼굴 현상은 한국 사람 모두의 슬픈 역사가 된다.나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다른 식구들로부터 체계적으로 격리된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었다.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이런 유형의 공간에서 생기는 편견과 가치관을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이라고 불렀다. 동굴의 우상은 학식이 많은 사람의 가르침, 타인과의 교제, 감명 깊게 읽은 책 등을 통해 생겨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명저를 읽으면 지혜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굴의 우상이 생겨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랑도 '동굴의 우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의 어머니도 극진한 사랑을 통해 세 아들에게 동굴의 우상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도덕적으로 선하며 훌륭한 사람이라는 우상', '특별한 사람일지라도 모른다는 우상', 최종적으로 '이 세상은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우상' 등이다. 그것은 황제나 가질 수 있는 우상이란 점에서 '동굴 속 황제의 우상'이라고 할 만하다. 30년 동안 '어머니가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평범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도 그 우상 때문이었다.어머니가 나를 '동굴 속 황제'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공간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모성의 공간에 갇힌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만 6살 때까지 나를 어머니에게 맡겼으며, 나는 아직 어머니의 아들일 뿐이었다. 더 넓은 사회를 살아가는 진정한 '동굴 속 황제'가 되기까지는 좀더 긴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 여정의 첫 번째 안내자는 아버지였다. 한마디로 '어머니 공간'이 '동굴 속 황제'의 탄생지였다면, '아버지 공간'은 '동굴 속 황제'의 성장 공간이었다. 어머니의 분리 사랑이 가부장적 권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역(逆)도 성립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막내인 여동생이 태어날 무렵, 나는 '어머니 공간'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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