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
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2003년 4월/354쪽/10,000원
우리의 근현대 수난사를 돌아보며
우리는 흔히 한국 근현대사를 일컬어 수난사, 또는 시련의 역사라고 한다. 관변 사학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긍정 일변도로 그리기 위해 이러한 수난사라는 말을 자주 동원했다. 온갖 시련을 딛고 이만큼 잘사는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함석헌과 같은 민중 사상가에게는 수난사의 의미가 달라진다. 가시 면류관을 쓴 조선을 못에 박힌 예수에 비유하여 그 고통의 민족사적 의미를 종교의 차원이나 제3세계의 고통받는 자와의 연대 차원에서 탐구했던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개념화․범주화된 집단적인 기억이다. 한국인은 이처럼 수난에 중점을 두고 과거를 기억하고 이것은 개인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변 보수 사학자이든, 상당수 민중 사학자이든 수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대개는 ‘우리’가 ‘그들’로부터 입은 집단적․국가적 피해를 강조하게 된다. 물론 구한말에 있었던 외세의 침략에서 시작된 식민지와 분단의 상처로 한국사가 얼룩져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해선 안 될 점은 국가의 입장이 아닌 19세기 말 민초들의 일상에서 볼 경우, 외세의 침범보다도 조선 사회의 내재적 위기가 훨씬 큰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유교적인 온정주의를 정책의 기조로 채택한 조선 왕조는 지역 사회의 일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19세기 초부터 지방 행정관이란 관직은 뇌물에 의해 매매되는 자리가 되었다. 이렇게 자리를 얻은 탐관오리들은 중앙의 세도가들은 물론 심지어는 왕과 그 측근에게까지 정규적으로 재물을 상납했다. 전국이 부패망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민생에 중점을 둬야 할 유교 국가가 유교적 원칙들을 짓밟고 약탈 국가로 변하면서 사회 전체도 폭력화되었다. 외국에 나가 본 민영익, 김옥균, 윤치호와 같은 사람들이 조선을 빛 없는 지옥으로 부른 것은 과연 지나친 것이었을까?
동학의 무장 운동이라는 전국적인 폭발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개항 이후의 불평등한 대외 무역으로 인한 고통도 한 요인이 되었겠지만, 민초들의 불만이라는 화약고가 폭발 직전의 상태에 이르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개항 이전에 이미 서너 세대들은 수난 속에 살아온 것이다. 일제의 지배라는 새로운 형태의 수난이 본격화된 뒤에도, 자신들을 괴롭혔던 무리들에 대한 백성들의 적개심은 여전했다.
역사에서 가정법이란 무의미하지만, 고종의 이이제이 정책이 성공해 한국이 일본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다 해도, 근대화의 과정은 어차피 농민의 저항과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반 민중적 대외 종속적 자본주의 발달과 통치 기구의 공공성의 결여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수난사로부터 우리가 겪어야 했던 진정 가슴아픈 고통은 무엇일까? 침략자들과 토착적 착취자로부터의 물리적 고통인가?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외세의 침략 속에 세계체제에 편입된 나라의 상당수 사람들이 그 체제의 반인륜적인 논리를 자기화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난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외적들에게 삼천리 강토를 빼앗기고 부일배(附日輩)나 부미배(附美輩)들로부터 착취와 통제를 당하는 것도 고난이겠지만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압도당해 그들의 논리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것이 가장 큰 치욕이라는 생각이다.
일제가 강화조약을 강요했을 때 이에 결사 반대했던 최익현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지금 금수들에게 양보를 한다면 우리도 장차 인간성을 잃은 금수가 된다고…. 최익현의 견해는 틀린 것 같지 않다. 강화조약이 조선에 강요된 지 20년이 지난 뒤 조정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이 발간된다. 그런데 이 신문은 문명의 이름으로 동학과 의병들을 학살했던 일본 군인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있다. 일군의 수고뿐만 아니라, 이들은 원주민들의 폭동을 진압했던 영국, 미국, 심지어 러시아까지 두루 치하하고 있다. 한국의 새로운 지식인의 원조격이라 할 수도 있는 그들이 제국주의의 논리를 깊이 내면화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최대의 손실이자 수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까기 마사오(박정희)가 자랐던 식민지 조선은 이렇게 제국주의적 침략을 문명의 논리로 생각하는 신지식인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그가 나중에 미국의 베트남 침략의 공범으로 나선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국민이라는 이름의 감옥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외국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부딪히게 되는 한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그것은 극동의 근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메이지 시대의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영어로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국민국가’는 서구의 ‘nation-state’를 일본화시킨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국민’을 단순히 ‘nation’의 번역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근현대 한국어의 경우에 국민이라는 단어는 보통 어떤 문맥에서 쓰이게 되는가? 이미 그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기는 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가장 귀에 익은 국민의 파생어 중의 하나는 ‘국민학교’였다. 1941년부터 일본 제국에서는, 국가의 의무인 초등교육을 일체 주민들에게 ‘천황의 신민’, 즉 ‘국민’의 정신을 드높이게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고쳐 부르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국민학교라는 용어가 남한에서 일제의 전통을 이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비위에 맞아 최근까지 쓰이게 된 것이다. 이것만 봐도 현대 한국어에서 ‘국민’이 관습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연결된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외워야 했던 개발독재의 관변 민족주의의 이념을 압축시켰던 문건의 이름은 ‘국민교육헌장’이었고, 지금까지도 공식적인 모임의 개․폐회식 절차를 일컫는 말은 ‘국민의례’이다. 국민개병, 국민개학 등과 같은 슬로건들은 지금도 그 힘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국민이란 단어는 지배층이나 특권층이 그들의 이해관계를 ‘전체 우리들의 이해관계’라는 말로 호소하며 호도하려고 할 때 많이 써먹는 말이다. 몇몇 재벌 왕조들을 국제 수준의 사회 귀족으로 만들고 국내 60% 피고용자들을 불안에 떠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든 한국의 재벌경제이지만 공식적인 연설에서는 늘 국민경제로 지칭된다. 신자유주의를 적극 도입하여 이를 현실화시킨 정부도 바로 국민의 정부로 불린다.
그렇다면 한국의 국민 담론은 어떤 목적을 갖고,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한국의 개화기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만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는 인민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 책은 서구의 고전적인 자유주의를 한국에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유길준의 가치 서열에서 양심의 자유는 국가의 전상(典常)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최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국가의 병역법을 위반하는 것이 양심이냐” 등으로 매도하는 국방부 관계자나 일부 보수층들은 유길준식의 개화기 초기의 국가지상주의적 ‘인민’ 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서유견문』에서 피치자(被治者)들은 대개 인민, 때로는 아예 옛날 그대로 백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개화를 담당했던 위정자들의 개화 행위의 대상으로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유길준은 인민들의 자발적인 정치 행위가 소요가 아닌 혁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철저한 우민관으로 무장했던 그가 동학의 무장 운동을 진압한 일본군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던 것은 강자에 대한 단순한 아부가 아니라, 그의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피치자를 철저하게 대상화했던 일은 이후에도 계승된다. 1885년에 갑오 내각의 내무대신이었던 유길준으로부터 「독립신문」의 발행 자금을 건네 받았던 서재필, 『서유견문』의 저자를 개화의 원조로 흠모했던 1900년대의 신문, 잡지들의 논객들, 유길준을 개인적인 스승으로 생각해 흥사단의 부단장으로 앉힌 안창호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국민’의 담론은 메이지 개화 프로젝트와 양계초 등의 중국 초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구한말 그 모습을 갖추게 됐으며 근본적으로 개명한 엘리트에 의한 우민들의 국민의식화, 조직화, 동원, 통제를 의미했다. 그 담론에서 군사주의, 배타주의, 팽창주의를 강조했던 것은, 일면 다가오는 국망(國亡)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개화 엘리트의 핵심적 사상 체계인 사회진화론의 일종의 실천강령으로 고찰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률적으로 강요된 이러한 국민의식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 우리의 창조성, 우리의 개성, 우리의 자유를 생각해보라.
인종주의의 또 하나의 얼굴, 범아시아주의
20세기 초반에 전 세계를 휩쓴 인종주의의 격렬한 광기는 조선의 지성인 사회에도 매우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모든 지식인들이 이러한 경향을 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상식화되어버린 ‘백인 우월주의’나 ‘흑인 멸시론’ 등의 인종주의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신채호로 대표되는 1910년대의 독립․ 항일투쟁을 지향한 대종교 계통의 망명가 지성인들은 한국인의 조상으로 생각했던 ‘부여 인종’이 여러 면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믿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신채호는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과 같은 과거 군사 영웅들의 위대한 상무 정신을 통해 태생적으로 우수한 한국인들이 열강의 백성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채호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1900년대 「대한매일신보」 계통의 신지식인들 사이에는 군사주의에 기반을 둔 ‘우리’ 본위의 우월주의가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을 일단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일제의 현실적․상징적 권력과 타협을 모색했던 대다수 조선 지성인들 사이에 가장 쉽게 착근된 인종주의적 광기는 다음 아닌 범아시아주의였다. 즉, 황인종과는 대동단결하고 백인종과는 결사 투쟁을 하자는 논리였다. 바로 그 논리는 ‘황민화’와 ‘전시 총동원’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되었다.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는 상황에서 범아시아주의는 일종의 허구의식을 만들며 마취제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다면 과연 일제는 독자적으로 이 정신적 마취제를 개발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 어떤 인종이나 대륙의 대동단결을 부르짖는 ‘범’ 자가 붙은 이데올로기는 19세기 중반의 유럽에 만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화를 향해 질주했던 일본은 외제 이데올로기를 분해한 뒤에 다시 일본의 필요대로 재조립했을 뿐이다.
이러한 일제의 신생 광기에 매료된 조선의 신지식인들은 일본의 범아시아주의자들의 단체인 ‘흥아회’와 결연(結緣)하기에 이르렀다. 김홍집, 강위, 유길준 등이 그들이다. 우리는 호랑이 나라인 러시아에 비해서 일본이 조선에 훨씬 덜 위협적이라는 유길준 평생의 정치적인 소신에서 ‘흥아회’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유길준처럼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윤치호와 서재필에게서도 이와 같은 사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한 예로, 미국 유학 시절에 미국인들의 인종주의에 눌려 서구인에 대한 강력한 복수의 욕망을 갖고 있었던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인수한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원색적인 ‘동양 공영론’과 ‘일본 맹조론’이 지상에 게재되었다. 일본이라는 정보원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영어 구사 능력을 가졌던 친미적 지성인들까지 일본을 동양의 거울, 동양의 맹주, 구라파를 능가할 수 있는, 그리고 후진적인 우리를 이끌어 줄 형제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미적 지성인의 실정이 이러했다면 1900년대의 일본 유학파들의 의식은 또 어땠을까? 도일 유학생과 접촉이 많았던 안중근 의사 역시 1904년 러일전쟁을 보며 일본이 백인 러시아를 막아 동양 평화에 이바지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을 정도였으니 조선 독립에의 열렬한 의지가 없었던 대다수의 평범한 재일 유학생 출신 조선 지성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범아시아주의에 입각한 친일의 전형을 보인 자는 이광수이다. 그는 반민특위의 관계자들로부터 ‘광수(狂洙)’란 별칭을 들을 정도로 태평양전쟁 시기에 거의 발악적으로 친일 선동을 했다. 이광수는 범아시아주의적인 친일반아(親日反俄) 의식에서 출발해 “조선인의 구각(舊殼)을 벗어 던지고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한 길을 걸어갔다. 그의 이러한 친일 활동이 단순한 현실적인 타협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와 소설을 통해, ‘인종 사이의 전쟁’이라는 생각이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춘원의 두뇌를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어용 사상이 이미 과거가 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에 와서도 ‘황백(黃白) 전쟁’을 선언했던 장지연이나 이광수의 목소리와 어투가 비슷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개인에 대한 사회(대가족)의 우위와 공동체(국가)에 봉사하는 적극적인 자유(국가에 대한 예속)가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해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친일파들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정확한 대중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 국민적 공동체의 미덕’을 기리는 어용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
국사 교과서 너머의 백 년 전 조선
국사 교과서들이 개화기를 이야기할 때, 보통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민족적 저항과 자주적 근대화의 모색”과 같은 거대한 도식을 잘 사용한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외세의 피해자’라는 공동 의식을 주입시켜 민족적 단결을 기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아울러 개화기의 근대 지향성을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와 하나로 연결시켜 역사의 정통을 세우려는 의도도 담고 있다. 그러나 과거 신문을 통해서 어느 정도 역사적 현실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도식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적 침략자들이 제시했던 근대의 모습과 자주적 근대를 모색했던 우리 선각자들이 생각했던 근대의 모습이 과연 서로 그렇게 많이 달랐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100년 전에 근대를 지향하던 신지식인들의 구상을 단순한 모방으로 취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상에서 이렇다 할 대안이나 자주성을 찾기란 매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내가 낡아 닳아버린 황색의 신문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오늘날 민족주의적 색채를 머금은 거대한 도식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과거 일상의 미시적 진실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국정 교과서에서 들리는 오늘의 관용 학자의 목소리가 아닌 과거 한국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100년 전의 신문들을 다시 뒤지는 것이다.
「독립신문」이 전하는 근대기 자화상을 보자. 「독립신문」은 미국 시민인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개화 지향적 중․상류층 지식인들에 의해 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까지 총 776호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개명한 대국(즉, 제국주의적 열강)과 일본을 ‘위협’보다는 ‘모델’로 생각했고, 조선의 기존 현실을 구습과 악습이란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물론 이러한 「독립신문」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완벽한 거울일 수는 없다. 그러나 편집진의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이 그렸던 100년 전 조선의 일상의 윤곽은 현실과 상당히 가깝다고 봐야 한다.
「독립신문」과 정부 문서들이 전하는 100년 전 조선의 현실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근대적 치안이 부재하고 일상적 폭력이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구한말의 경우에는 어느 전근대적 사회도 당연히 갖는 ‘치안 부재’라는 특징에다 한 세기 동안 지속된 가렴주구와 같은 세도 정치의 폐단이 가미되어 한국 근세사상 백성이 살아가기에 가장 힘든 시기 중의 하나였다. 「독립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흉년으로 인해 한 가족이 모두 도둑으로 몰려 잡혀가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가난 때문에 희망과 인간성을 잃은 가장들이 돈 몇 푼에 가족들을 파는 끔찍한 일들도 일어났다.
인신매매와 같은 극단적인 사건으로 가지 않는다 해도 당시에는 가정폭력이 마치 부부생활의 전제조건의 하나처럼 늘 남아있었다. 또한 놋요강을 잃은 사람의 분노가 타인에 대한 살해로 이어질 정도로 당시는 물건값에 비해 생명 값이 낮았다. 수질이 나쁜 우물물 때문에 유행병이 나돌고, 이로 인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도 그 시대에 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