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한일민족문제학회 지음 | 삼인
일제 말기 조선인 민족 운동의 특징은 비밀 결사에 의한 반제 반전 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비밀 결사 활동은 노동자, 학생, 종교인 등 각계 각층의 한인이 중심이 되어 비록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민족 운동이 해방 직전까지 끊임없이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본 지역에서 전개된 조선인의 민족 해방 운동은 2.8 독립 선언과 관동대학살 사건 이후 의열 투쟁을 비롯해 사상 단체 활동, 노동 운동 그리고 당과 대중 단체에 의한 반제 운동, 비밀 결사 운동 등으로 다양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사상 활동과 노동 운동의 투쟁 경험은 국내와 중국에도 유입되어 항일 전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진 민단과 총련의 뿌리이기도 하다.천황제는 일본 사회의 부조리한 모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흔히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역사 왜곡, 민족 차별 등의 현상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그 근원적인 배경에 천황제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두드러진 우경화의 동향도 그 배후에 천황제의 문제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천황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강한 국가'를 지향하기 위해 국민 통합을 강화하는 방법은 히노마루, 기미가요의 법제화나 야스쿠니 신사 특수 법인화, 그리고 국가주의적인 역사 교과서의 개편이라는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의 우경화가 심화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민 통합이 강화되면 될수록, 그것이 일본 사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재일 조선인의 존재는, 또다시 일본 사회 속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근대 일본의 이데올로기적인 지배의 특징은 신화를 근거로 하여 천황에 대한 민중의 대대적인 숭배와,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세계 지배의 사명을 합리화하는 허위 관념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근대 이래 일본 사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아시아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현상도,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천황제와 관련하여 볼 때 일본의 조선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뿌리는 의외로 그 역사가 깊으며, 그 원류는 8세기 초 천황가의 영속적인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창작된 『고사기』와 『일본 서기』의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 멸시관을 배경으로 한 조선 침략의 구상은 구미열강의 위협에 대한 민족의 독립이라는 현실적인 과제가, 신화와 역사의 재생과 결합된 환상적인 천황상을 중핵으로 전개되었다는 데에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재일 조선인에게 천황제란 무엇인가
천황제와 국민 통합의 사슬천황제와 민족차별일제 말기 비밀 결사 운동재일 동포 새롭게 인식하기재일 조선인의 국적은 '한국', '조선', '일본'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의 현실 생활이나 아이덴티티의 존재 양태는, 실제로는 남북한 및 일본이라는 세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리고 있으며 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재일 조선인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일본은 물론, 한국 그리고 북한을 제대로 시야에 넣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동시에 남북통일 문제도 자신들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외부의 힘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으며, 그것은 결국 남북 분단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 재일 조선인을 보는 눈도 '적'이냐 '아군'이냐 하는 이분법적이며 대립적인 것이 되었다. 재일 조선인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 각기 국가의 이익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전에 조선인을 '일본 국민'이라며 혹사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패전하자마자 재일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1945넌 5월의 신(新)헌법 즉 '일본국헌법'의 발포로 노골적으로 드러났는데, 거기에는 재일 조선인의 '국적'을 둘러싼 악랄한 책략이 있었다. 신헌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에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령'을 공포 및 시행하고, 조선인과 대만인 등 구(舊)식민지 출신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면서 일반 '외국인'으로 내몰아버리는 계책을 사용했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구식민지 출신자를 의도적으로 외국인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에 대한 국가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회피했다는 데에 있다. 재일 조선인은 1947년에 실시된 최초의 외국인 등록에서, 국적 표시가 모두 '기호'로서의 '조선'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 성립되자, 일본 정부는 국적 표시를 '한국'으로 바꿀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 다시 말해 '기호'로서의 국적으로 '조선'과 '한국'이라는 두 종류가 된 것이다.분단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반일' 슬로건을 내걸었다. 한국 정부는 재일 동포에 대해서는 분단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분열 정책을 폈다. 한국 정부는 필요할 때에만 재일 동포를 '국민'으로 규정했다. 일본 정부의 재일 한국인 정책은 '민족 차별'에 다름 아니다. 재일 동포는 이제까지 한국과 일본, 또 북한 어느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셈이다.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재한 재일 동포'는, 한국인 아니면 일본인이 되라는 국가 국적 중심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심적 부담감을 안고 있다. 재한 재일 동포는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다 하더라도, 출입국과 법적 지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각종 불이익을 받고 있다. 공공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거나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은, 대한민국 헌법이나 국제인권 규약에 위배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일본인관은 많이 변화되었지만,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은 어쩌면 오히려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냉전 시대에 제일 심각했던 문제는 재일 동포를 '간첩'으로 의심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재일 동포 단체 중 반국가 단체로 낙인찍힌 것은 총련 뿐만이 아니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의 간부들은 한국 국적이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다. 한통련의 전신은 한민통인데,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문제시되었던 단체이다. 제일 큰 문제는 조선 국적을 가진 무국적 재일 동포들이다. 이들이 모두 총련 소속도 아닐뿐더러 결코 '북한 국적'이 아니다. 일본의 법무 당국도 조선 국적은 '기호'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 및 그 후손들 가운데,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던 자" 정도의 뜻인 것이다. 그들은 남북 분단과 북일 단교의 틈바구니에서, 무국적자로서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통일 과정에서 풀어가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내가 출신을 밝히기 위해 '본명'을 대놓고 밝힌 것은 스무 살 학생 시절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학생 운동의 정점이었다. 이른바 전공투(全共鬪) 세대이다. 재즈 다방에서 서로 알게 된 일본 연인은 내가 출신을 고백하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의 이유는 내가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느 쪽에 떠 있나>가 일본 영화상을 독차지하리 만큼 대박을 터뜨린 것은 기억에 새롭다. 원작(양석일, 『택시 드라이버 일지』)이 갖는 괴팍한 맛을 적당하게 각색을 함으로써, 이제껏 은폐되었던 재일 조선인의 일상을 백일하에 드러내 보인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쓴 글 『이카이노 이야기』 중의 한 편 「이군의 우울」이, 같은 제목으로 NHK 드라마 스페셜에서 다루어진 것은 <달은 어느 쪽에 떠 있나>에 앞서 4년 전인 1990년 5월이었다. 텔레비전이 갖는 제약으로 인해 「이군의 내일」이 편집되어서 내보낸 재일 조선인의 일상성은 작은 알갱이 같은 맛에 그쳤지만, 일반 가정 거실에서 방영된 드라마로서는 일본 대중문화의 금기를 깨뜨린 것이었다.
<달은 어느 쪽에 떠 있나>도 텔레비전에서 몇 번이고 방영되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가 성숙되어 왔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제작 자체는 아직은 일본 대중문화의 금기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일본 영화의 주류의 하나는 역시 야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스위크」의 인터뷰 코너에서 야마구치 구미(山口組)의 타오카 두목이 "일본의 차별 구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부락민과 재일 조선인의 야쿠자는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일본의 야쿠자 영화에는 부락민도 재일 조선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문화의 금기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쿠자 영화에 리얼리티가 부족한 것은, 그 은폐성에 있다고 보아도 마땅하리라. <대부>라는 명작이 무시무시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태리 마피아를 은폐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리얼리티에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일본 대중문화가 금기로 삼는 은폐성을 타파할 영화는 일본인 감독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지만, 재일 조선인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글을 끝마치면서 <달은 어느 쪽에 떠 있나>의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정의신(극작가)의 인터뷰를 재인용해 본다.
"'이제 본심을 말할 시기일세, 그렇지.'라고 말하는 최 감독의 한마디로 <달은 어느 쪽에 떠 있나>의 시나리오는 쓰여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재일 조선인'은 '깨끗하고 가난하고 아름다운' 조선인을 연기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려 하는 '재일 조선인'의 모습은 때론 어리석고 때론 웃기지만, 그 열심인 자세는 흐뭇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게도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듯이, 조선인에게도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다. 김치를 싫어하는 조선인도 있다.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일인데, 나도 최 감독도 당연한 '이웃의 조선인'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재일'로서의 코리안』)."
나도 이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앞으로도 은폐성을 깨뜨리고 나와서 새로운 표현을 획득하는 재일 조선인의 표현자가 되기를 바란다.일본이 재일 조선인의 국가로서의 한국과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였다. 동시에 재일 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결정하는 '한일 법적 지위 협정'이 맺어졌다. 그때 '한국' 국적은 정규 국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국적을 '한국' 국적으로 바꾼 사람에게는 일본 정부로부터 '협정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국민건강보험의 적용뿐이었다. 정주 외국인, 특히 재입국 허가 제도의 적용, 공무 취임권(국가 공무원, 지방 공무원) 등은 거부당한 채였다.
재일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협정 영주권이라는 것은, 한국 정부에 의한 '기민(棄民)정책'이며 일본 정부의 동화(同化)정책의 강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구식민지 출신자 및 그 자손인 재일 조선인 약 51만 명이 '특별 영주자'로서 영주권을 보장받고 있다. '한국'이 정식 국적인 반면, '조선'은 아직도 국제적으로 무국적을 의미하는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니 재일 조선인 젊은 세대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기만 하는 상황이다.한국인은 재일 동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첫째, 재일 조선인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산물이다. 한국 정부가 국익을 최대화하는 국내·외교 정책을 펴지 못함으로써 한국인이 재일 동포에 대해 잘못 인식하게 된 부분이 적지 않다. 둘째, 재일 한국인들 중 특히 상공인과 기술자 등 지식인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셋째, 재일 동포 가운데서도 민족 의식을 가진 이들이 귀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재일 동포 2∼4세는 일본 사회에 '동화'되는 것과, 민족성 회복 사이에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며 악전고투하고 있다. 넷째, 내국인도 언제든지 재일 한국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 현행법상 내국인이 외국에 체류 중일 때는, 재외 국민과 마찬가지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재일 동포의 참정권 행사에 대한 논의를 한국인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외국 체류자의 부재자 투표권이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다섯째, 한국인이 모르는 뛰어난 재일 동포가 너무 많다. 특히 그 인재들 가운데 한국에 자유 왕래하는 것조차 금지당한 30만 명 정도의 조선 국적, 무국적 동포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 사회가 그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재일 조선인의 이웃조선이라는 국적은 존재하지 않는다식민 지배와 남북분단이 가져다준 분열의 노래
냉전이 낳은 또 하나의 현실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대륙 침략을 노골화하여 만주 침략에 이어 중일전쟁으로 치달았으며, 합법 단체 통제와 활동가 전향 공작을 강화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는 운동 단체의 침체를 뚫고 활기를 불어넣었다. 유학생 민족 운동은 1930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1936년 조선유학생연구회 사건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항거한 반제 비밀 결사 운동이다. 일제의 강제 징용과 창씨개명, 신사 참배 등 민족 말살 정책에 반발한 학생과 노동자들은 비밀 결사를 꾸준히 결성하여 항쟁하였다.
한편 1920년대 재일노총과 조선공산당 일본 총국을 중심으로 노동 운동을 지도하던 공산주의 운동은, 1928년 12월 제6차 코민테른대회의 테제를 계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만주와 일본 등지의 조선공산당 조직은 이른바 속지주의(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에 각각 흡수되어 활동하게 된 것이다. 1932년 당시 일본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은 119개 단체의 1만 3천 명에 이르렀고, 경시청에 검거된 조선인 수도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전협으로 흡수된 이후 조선인 노동조합원도 일본공산당과 여러 조직에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933년과 이듬해의 대검거로 조선인의 활동은 큰 좌절을 겪었다.패전 후 군국주의의 재발과 일본의 공산화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천황제의 존속을 꾀하려는 일본 지배층의 이해가 일치하여 탄생한 것이 상징 천황제였다. 비록 천황이 '신'에서 '상징'으로 바뀌었지만 자민족 중심적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국민적 일체감을 확인하는 배타적인 폐쇄성을 기본적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패전 전의 천황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재일 조선인에게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조국의 해방이 곧 인간으로의 복권,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일 조선인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일본 사회 속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부각되면서 갖가지 제도적·사회적 차별과 역할을 감수해야 했다. 1952년의 '외국인등록법'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로 인해, 재일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당하고 무국적 외국인으로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곧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외국인'이 된 재일 조선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합법적 유린'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으로도 '조센징'이라는 차별어는 범죄자나 도둑놈, 거짓말쟁이 등 부정적 이미지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멸시, 학대 행위의 배경에는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민족적 우월감이 일상화되어 가는 역사적인 과정이 있었다. 결국 전후 상징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국민의 재편은 재일 조선인을 비롯한 구식민지 출신자들을 이질적인 것으로서 배제하고, '일본인'만을 '국민'으로 하는 것이었다.
국제화 시대의 오늘날에도 상징 천황제는 국민 통합에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천황제의 권위와 질서에 순응하는 자를 '양민'으로,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자를 '비국민'으로 판정하는 선별과 배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