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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1부 어린 시절



1962년 여름, 어느 한낮에 전태일은 부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때의 모습은 그의 수기에서 "아, 저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길래 전부가 다 행복한 얼굴들일까? 나는 왜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고, 항상 괴로운 마음과 몸 그리고 떨어진 신발에 남이 입다 버린 계절에 맞지 않는 헌 때뭉치 옷을 입어야 할까?" 바로 이러한 것이 전태일의 어린 시절이었고 짧은 평생의 기록이었다.

1948년 8월 26일 전태일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 씨는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였는데,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직접 피복제품업을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는 사이 좌절감으로 폭음과 술주정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 이소선 씨는 연약한 몸이었지만 매우 명석한 두뇌와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8·15 후 고향에 돌아와 전상수 씨와 결혼하고부터는, 생활을 위해 온갖 종류의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사업에 큰 타격을 받았다. 기술은 있으니 서울 가면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해 여름 가족을 끌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태삼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순옥이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오긴 했으나 2년 동안 일거리를 찾아 평화시장, 중부시장 등지를 떠돌며 실업자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염천교 밑에서 노숙하면서 석 달 가까이 동냥을 하여 연명하였다. 그러던 중 남편이 불쑥 나타나서 그때 돈으로 3천 원쯤 주면서 "몇 달 뒤에 돌아와서 천막집이라도 사줄 테니까 죽지말고 있으라."는 한마디를 하고는 어디론지 가버렸다. 어머니는 그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하였고, 열심히 저축하여 천막집 한 채에 재봉틀 한 대를 살만큼 되었다. 이리하여 태일은 남대문 초등공민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 처음으로 짧은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안정된 생계를 갖자 태일의 아버지는 술도 끊고 부지런히 일하여 가게를 장만하고 미싱사까지 두면서 사업을 했다. 그러나 1960년 브로커에게 사기당하고 다시 낙담하여 폭음하면서 허송하기 시작했다. 그 해에 태일은 남대문 초등공민학교에서 남대문 국민학교로 편입하는 시험을 치렀는데 혼자 합격하여 전학하게 되었다. 식구는 여동생 순덕이가 하나 더 늘어 모두 여섯 식구인데, 돈버는 사람이 없어 굶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그는 신문팔이 소년을 보고 자신도 신문을 팔기 시작했다. 이 때 나이 열두 살. 결석하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4학년 초 중퇴하였다. 여섯 식구의 생계를 어린 어깨에 전적으로 떠맡게 된 태일은 두 살 아래인 태삼이를 데리고 동대문시장에 나가 삼발이 장사를 시작하였다. 물건을 팔아 원금을 입금하고 남은 돈으로는 여섯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나던 무렵, 그는 위탁받아 팔던 물건들을 동대문시장 안의 어느 손수레 보관소에 맡겨놓고, 그대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였다. 첫 번째 가출이었다. 막상 집을 나오긴 했으나 달리 갈 데도 없던 그는 다시 서울로 왔다. 그러나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하루 이틀 서울거리를 방황하다가 구두닦이가 되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구두통을 메고 방황하기 1년, 그 1년 동안 그는 돈을 벌기는커녕 저 한 몸도 추스릴 수가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그리하여 1962년 여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무작정 부산에 내려갔지만 부산에 내려온 첫날 몰매를 맞고 구두통까지 빼앗겨버린 후,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주운 돈으로 기차를 타고 먼 곳에 있는 외가로 갔다. 큰집에는 분명 서울 아버지로부터 붙잡아두라는 연락이 왔을 것 같아 큰집을 피하고 외가집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외할머니로부터 막상 집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온통 반가움으로 설레었다. 집에 돌아온 태일에게는 오랜만에 비교적 안정된 가정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봉틀로 삯 제품일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도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해가 바뀌어 1963년 태일의 나이 열다섯이 되었다. 어느 날 큰집에 다녀온 어머니가 학교 입학 얘기를 꺼냈다. 1965년 5월, 전태일은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청옥에서 보낸 일 년도 못되는 학창시절, 그것을 뒷날 전태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청옥에서의 꿈 같은 학생생활이 일 년도 채 계속되지 못한 1963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교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하였다. 태일은 그 무서운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매일매일 아버지의 꾸지람과 호통과 매질을 받아가면서도 학교에 나갔고, 집안일도 그전보다 더 열심히 하였다. 어머니는 남편보다 아들 편이었다. 이런 일이 빌미가 되어 아버지는 다시 폭음하기 시작하였고, 가정에 다시 고함, 구타, 울음의 고통스런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태일은 굴복하기 싫었다. 이 환경 속에서 공부를 계속하려면 다시 집을 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결심이 싹텄다. 서울에 가서 고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태삼이도 데리고 가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작정했다.

두 형제는 밤 열차를 타고 다음 날 새벽 서울 용산역에 내렸다. 용산역에 내린 형제가 우선 부닥친 것은 심한 추위와 불안이었다. 그들은 궁리 끝에 사과궤짝 열두 개를 사서 두 형제가 그 속에서 발을 좀 오므리면 잘 수 있을 만하게 상자를 만들었다. 형은 동생에게 그 상자를 지키고 있으라고 일러두고는 하루 종일 일거리를 찾아 서울 바닥을 헤맸지만 일거리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구두닦이 용품 일체를 샀다. 태삼이에게는 신문팔이를 시킬 작정이었다. 밤에 둘이 다시 만났을 때, 태삼이는 집에 돌아가자고 졸랐다. 태일이는 이틀 동안의 서울생활에서 절망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이제 평생 못한다.' 태일은 깊고 캄캄한 절망 속에 몸부림치면서 마침내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 날 밤으로 형제는 대구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집 떠난 지 사흘. '서울고학'의 꿈은 이렇듯 아쉽게 패배하였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태일은 아버지의 매질에 시달려야 했다.

해가 바뀌고 늦겨울의 추위가 있을 무렵, 방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태일이네는 대구시 내당동 맹아학교 부근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매일 폭음을 하고, 어머니 혼자서 여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를 하고 있었다. 1964년 2월,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가야겠다고 말하면서 다음 날 새벽 집을 떠났다.

정월 대보름날 태일이는 작은집에서 오곡밥을 얻어먹으면서 작은아버지의 손목시계를 훔쳐 팔아 돈 백 원을 장만하고 어머니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등에는 막내동생 순덕이가 업혀 있었다. 다시 온 서울은 언제나 냉혹한 곳이었다. 그는 순덕이를 데리고 함께 엄마를 찾다가 여러 어려움으로 순덕이를 시청과에 맡기고 단신이 되었다. 그는 20원짜리 싸구려 하숙집에서 잠을 잘 때면, 자신을 울면서 기다릴 동생 생각으로 밤잠을 못 자고 몸부림쳤다.

전태일은 구두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다. 구두닦이만으로 모자라면 저녁에는 신문팔이, 한밤중에는 담배꽁초 줍기, 비오는 날은 우산장사, 때로는 손수레 뒤밀이. 그것이 그의 열여섯 살이었다. 이런 식의 생활이 1년 넘도록 계속되었는데 그는 매우 꿋꿋하게 견뎌나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와 형과 순덕이가 서울로 떠나버린 후 대구에 아버지, 순옥이와 함께 있던 태삼이는 매질을 못 견디고 집에서 도망쳐 형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하루는 태일이 남대문시장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데, 태삼이가 다른 두 거지아이들과 함께 깡통을 차고 그 앞을 지나갔다. 두 형제는 이렇게 서울바닥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다시 만난 형제는 나란히 구두통을 메고 서울거리를 헤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옛친구를 통해 어머니의 소식을 들었다. 상률이 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온 태일이. 어머니와 아들은 한동안은 멍하니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으로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청계천의 판자촌은 연건평 7천 4백여 평의 평화시장 건물이 들어섰고 거기에 피복제조업자 및 의류상들이 들었으며, 건물은 수백 개의 점포와 작업장으로 나뉘어져 각 개인별로 분할 등기되었다. 당시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은 상당 수준의 숙련된 기술을 지니고 중노동을 하면서도 한국에서도 최하급 수준인 노동조건 아래 시달리고 있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로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4년 봄경, 그의 나이 16살 때 시다로서였다. 그 뒤 그가 평화시장 노동자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것은 1965년 가을 무렵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출근을 하는 그 날, 그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다. 지금 당장의 생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나 기술을 배우면 새로운 살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이 그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그가 처음 시다 생활을 시작할 때,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일당 50원을 받았다. 당시 그의 목표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빨리 기술을 배워 셋방 한 칸이라도 얻을 수 있을 만한 돈을 장만하여 어머니와 순덕이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힘을 합쳐 남산동 50번지에 셋방을 얻게 되고, 어머니가 중앙시장을 다니면서 야채장사를 하여 태일이 형제의 생활을 도와주게 되면서부터는 그의 수기에 의하면, '편안한 생활'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태일은 남달리 빨리 익힌 기술이 주인에게 인정되어, 월급도 한 달에 3천 원을 받게 되고, 미싱보조가 되었다. 그의 가족이 모두 모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1966년 가을에는 평화시장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하게 된다.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그리고 배움의 길을 걷겠다던 그에게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이 압박해왔다.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현실은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약 1.5미터 정도. 이것이 악명 높은 다랑방이다. 원래는 높이 3미터 정도의 방이었던 것을 공중에다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여 그것을 두 방으로 만든 것이다. 여공들은 허리를 펴고 걸어다닐 수 없다. 밀폐된 곳에서 재봉틀 소음 속에서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노동을 한다. 야간 작업을 할 때면 졸지 말고 밤일 잘 하라고 주인 아저씨가 사다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일을 해도 한달 임금은 평균 3천 원(1970년도 현재).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신경성 위장병이라는 병을 새로 얻는다.

한 달을 통틀어 휴일은 2일. 그것도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며, 업주가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든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작업장에는 환기장치가 되어 있지도 않고 조명상태도 극히 빈약했다. 2천 명 이상의 인원이 변소 3개를 함께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인간시장의 현장 평화시장. 1966년 전태일은 그 속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팔고 있었다. 1966년 가을, 추석 대목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전태일은 통일사 미싱사가 되었다. 업주들은 일이 밀려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뿐만 아니라 야간작업도 시키고 있었다. 이때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억울하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때 그가 취한 행동은 미싱사를 그만두고 재단사가 되는 것이었다.

1966년 추석 대목일이 끝나 며칠 쉬는 동안에 그는 재단보조 자리를 찾아 평화시장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는데, 그 결과 '한미사'라는 잠바집에 재단 보조로 들어갔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밤 10시에 퇴근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그는 남보다 고되게 몸을 놀렸다. 그 무렵 그의 가족은 그 동안 살던 남산동 50번지 일대가 큰 화재가 나고 철거된 뒤 미아리로 갔다가, 다시 도봉산 기슭의 판자촌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1967년 2월 24일 전태일은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명목상 재단사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은 오히려 바빠졌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차로 그는 평화시장에 처음 들어왔던 때의 벅찬 희망과 꿈이, 그리고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때의 기대가 모두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상으로 화해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돈 문제로 겪는 고통은 여전하였다. 그 무렵 그의 일기를 보면, 젊은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현실 속에서 그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쌓인 좌절감이 얼마나 크고 암담했는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남다른 재기가 있고 꿈이 컸던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그 고된 노동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떼어놓은 일이 별로 없다.

재단사가 되어서 어린 여공들, 시다들을 돕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수록 그는 일개 재단사에 불과한 자신의 혼자 힘만으로는 그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될 결심을 하던 무렵에는 약자인 노동자들이 강자인 기업주에게 당하는 억울함을 시정해보겠다는 결심까지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까지도 아직 그는 정신적인 노예상태를 청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는, 길들여진 양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시다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이때까지는 아직도 그것이 기업주가 책임질 일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직하다. 그러나 여공들의 힘겨운 노동현실과 그 자신이 대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괴로움은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토해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다.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러한 여공들의 참상은 전태일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도 그의 기운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그를 일깨우고 쇠잔해가는 투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피를 토한 여공이 전태일에게 준 깊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보자.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 없는지를 가리기에 앞서서 그는 우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절실한 양심의 목소리에 분연히 일어섰다. 이제 태일이에게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그 전에는 드물었던 아버지와의 대화가 잦아진 것이다. 밤마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동운동에 관한 모든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생전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렇게 해서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이번에는 전태일 바로 그 자신에게 일어났다.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유는 재단사가 미싱사와 시다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생각해주는 것이 업주에게 이로울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해고당한 사실 자체는 태일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화시장에서 그 정도의 기술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바닥에서는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 것까지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 여전히 재단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전태일은 이미 어제까지의 전태일이 아니었다. 그는 낮이면 직장에서 재단사 친구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바보회'를 조직하는 조직자였고, 밤이면 그의 판자집에서 '근로기준법'을 뒤지며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내일의 밝은 노동조건을 꿈꾸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3부 바보회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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