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3부 바보회의 조직1970년 9월 전태일은 다시 평화시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때마침 재단사를 구하는 가게가 있어서 거기에 취직이 되었다. 그가 취직한 곳은 왕성사. 취직문제가 일단락 되자 태일은 김개남을 찾아갔다. 그는 개남에게 그 사이의 일을 대충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이번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뜻 있는 사람들끼리 다시 한 번 모여서 본격적으로 해보자."라고 하였다. 뿔뿔이 흩어졌던 바보회 회원들이 그의 출현을 계기로 다시 모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신문기자들을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1970년 9월 16일 저녁, 그 동안 자주 모여서 노동문제를 이야기하던 열두 명의 재단사들이 모여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들었다. 삼동이라 함은 평화시장·동화시장·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킨 것이다. 바보회가 실제로 기업주나 노동당국에 '진정'하고 '호소'하는 데에 그쳤던 것에 반하여, 삼동회는 평화시장의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하였던 것이다.
삼동친목회의 첫 사업으로 전태일의 동지들은 평화시장 일대의 근로자들을 상대로 설문지를 돌렸다. 작업장 안에서 일반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때는 반드시 업주가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며칠만에 126매의 설문지가 성공적으로 회수되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회수된 설문지 126매에 나타난 자료를 종합하는 한편, 설문지에 나타나지 않은 자료에 관해서도 평화시장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노동청에 낼 진정서의 진정인 명의를 가급적 많은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공동명의로 하기로 하고,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회원 외에도 90여 명의 서명을 받는 데 성공했다.
1970년 10월 7일 노동청에 진술서를 낸 그 다음날 시내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적이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경향신문 3백 부를 샀고, 평화시장으로 가서 이 건물 저 건물을 쫓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그러나 신문보도가 있던 날부터 평화시장주식회사에서는 노동청에 진정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늦게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평화시장주식회사 측에 대하여 요구조건을 제출하기로 결의하고, 삼동회의 활동지침을 새로이 마련하였다.
다음 날 전태일, 김영문, 이승철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다랑방 철폐, 환풍기 설치, 조명시설 개선, 여성 생리휴가 보장, 노동조합결성의 지원 등을 합친 8개항의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가지고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신문보도로 인하여 용기를 얻은 재단사들이 기업주들의 대표기관에 찾아가서 당당히 일대일로 따진 것이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지금은 어려우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는 답뿐이었다.
10월 중순 어느 날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으로 있던 임정삼이라는 사람이 평화시장으로 나와서 삼동회 회원들을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취직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일주일 이내로 다 개선시켜주겠다."고 하였다. 근로기준국장이 시장에 다녀가고, 삼동회 회원들이 모두 취직을 하고, 그러고도 일주일이 지났으나 약속했던 근로조건 개선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였다. 평화시장에 들어온 지 6년. 그 노동지옥의 쇠사슬을 끊으려는 전태일의 노력은 결국 이 '데모'라는 두 글자로 귀결되었다. 데모를 하자는 데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망설이는 회원들도 있었다. 전태일은 확신에 찬 어조로, "지금 선거 때니까 탄압 받아봤자 별거 아니다."라고 하면서 망설이는 친구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4부 전태일 사상5부 투쟁과 죽음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청계천의 판자촌은 연건평 7천 4백여 평의 평화시장 건물이 들어섰고 거기에 피복제조업자 및 의류상들이 들었으며, 건물은 수백 개의 점포와 작업장으로 나뉘어져 각 개인별로 분할 등기되었다. 당시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은 상당 수준의 숙련된 기술을 지니고 중노동을 하면서도 한국에서도 최하급 수준인 노동조건 아래 시달리고 있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로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4년 봄경, 그의 나이 16살 때 시다로서였다. 그 뒤 그가 평화시장 노동자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것은 1965년 가을 무렵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출근을 하는 그 날, 그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다. 지금 당장의 생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나 기술을 배우면 새로운 살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이 그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그가 처음 시다 생활을 시작할 때,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일당 50원을 받았다. 당시 그의 목표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빨리 기술을 배워 셋방 한 칸이라도 얻을 수 있을 만한 돈을 장만하여 어머니와 순덕이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힘을 합쳐 남산동 50번지에 셋방을 얻게 되고, 어머니가 중앙시장을 다니면서 야채장사를 하여 태일이 형제의 생활을 도와주게 되면서부터는 그의 수기에 의하면, '편안한 생활'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태일은 남달리 빨리 익힌 기술이 주인에게 인정되어, 월급도 한 달에 3천 원을 받게 되고, 미싱보조가 되었다. 그의 가족이 모두 모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1966년 가을에는 평화시장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하게 된다.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그리고 배움의 길을 걷겠다던 그에게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이 압박해왔다.
평화시장의 참혹한 노동현실은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약 1.5미터 정도. 이것이 악명 높은 다랑방이다. 원래는 높이 3미터 정도의 방이었던 것을 공중에다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여 그것을 두 방으로 만든 것이다. 여공들은 허리를 펴고 걸어다닐 수 없다. 밀폐된 곳에서 재봉틀 소음 속에서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노동을 한다. 야간 작업을 할 때면 졸지 말고 밤일 잘 하라고 주인 아저씨가 사다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일을 해도 한달 임금은 평균 3천 원(1970년도 현재).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신경성 위장병이라는 병을 새로 얻는다.
한 달을 통틀어 휴일은 2일. 그것도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며, 업주가 필요로 할 때에는 언제든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작업장에는 환기장치가 되어 있지도 않고 조명상태도 극히 빈약했다. 2천 명 이상의 인원이 변소 3개를 함께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인간시장의 현장 평화시장. 1966년 전태일은 그 속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팔고 있었다. 1966년 가을, 추석 대목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전태일은 통일사 미싱사가 되었다. 업주들은 일이 밀려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뿐만 아니라 야간작업도 시키고 있었다. 이때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억울하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때 그가 취한 행동은 미싱사를 그만두고 재단사가 되는 것이었다.
1966년 추석 대목일이 끝나 며칠 쉬는 동안에 그는 재단보조 자리를 찾아 평화시장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는데, 그 결과 '한미사'라는 잠바집에 재단 보조로 들어갔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밤 10시에 퇴근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그는 남보다 고되게 몸을 놀렸다. 그 무렵 그의 가족은 그 동안 살던 남산동 50번지 일대가 큰 화재가 나고 철거된 뒤 미아리로 갔다가, 다시 도봉산 기슭의 판자촌으로 옮겨와서 살았다.1967년 2월 24일 전태일은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명목상 재단사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은 오히려 바빠졌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차로 그는 평화시장에 처음 들어왔던 때의 벅찬 희망과 꿈이, 그리고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때의 기대가 모두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상으로 화해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돈 문제로 겪는 고통은 여전하였다. 그 무렵 그의 일기를 보면, 젊은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현실 속에서 그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쌓인 좌절감이 얼마나 크고 암담했는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남다른 재기가 있고 꿈이 컸던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그 고된 노동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떼어놓은 일이 별로 없다.
재단사가 되어서 어린 여공들, 시다들을 돕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수록 그는 일개 재단사에 불과한 자신의 혼자 힘만으로는 그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될 결심을 하던 무렵에는 약자인 노동자들이 강자인 기업주에게 당하는 억울함을 시정해보겠다는 결심까지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까지도 아직 그는 정신적인 노예상태를 청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는, 길들여진 양으로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시다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이때까지는 아직도 그것이 기업주가 책임질 일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직하다. 그러나 여공들의 힘겨운 노동현실과 그 자신이 대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괴로움은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토해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다.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러한 여공들의 참상은 전태일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도 그의 기운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그를 일깨우고 쇠잔해가는 투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피를 토한 여공이 전태일에게 준 깊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보자.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 없는지를 가리기에 앞서서 그는 우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절실한 양심의 목소리에 분연히 일어섰다. 이제 태일이에게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그 전에는 드물었던 아버지와의 대화가 잦아진 것이다. 밤마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동운동에 관한 모든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생전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렇게 해서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이번에는 전태일 바로 그 자신에게 일어났다.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유는 재단사가 미싱사와 시다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생각해주는 것이 업주에게 이로울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해고당한 사실 자체는 태일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화시장에서 그 정도의 기술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바닥에서는 최소한의 인정을 베푸는 것까지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 여전히 재단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전태일은 이미 어제까지의 전태일이 아니었다. 그는 낮이면 직장에서 재단사 친구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바보회'를 조직하는 조직자였고, 밤이면 그의 판자집에서 '근로기준법'을 뒤지며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내일의 밝은 노동조건을 꿈꾸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 씨는 젊은 시절에 대구에서 어느 방직공장에 다녔는데, 대구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하게 되어서 그 파업에 가담하였던 경력이 있다. 이때 평범한 노동자로서 파업에 가담하였을 뿐이고, 주도하는 간부는 아니었다고 한다. 전상수 씨는 아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아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의외로 깊고 집요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그는 생각을 달리하여,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려주고자 했다.
태일은 아버지의 얘기를 듣게 되면서 차차로 노동운동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를 짐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얘기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전신에 새로운 희망과 확신과 환희가 벅차 올랐다.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실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중대사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근로기준법의 규정들을 보면서 이제껏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직장에서 주인이 맘대로 하는 것인 줄만 알고 찍소리 한번 못하고 속아 살아온 자신이 정말 '바보'였다고 느꼈다. 나라의 법으로까지 보장되어 있는 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쟁취하지 못하고 죽은 듯이 혹사당하고만 있는 평화시장 일대의 모든 노동자들이 다 '바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바보'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만든다.
1968년 봄 평화시장 재단사인 김개남은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 김개남은 새로 사귀게 된 이 평범한 재단사친구의 얼굴이 무엇인가 무거운 고뇌에 짓눌려 있는 듯한 어두운 인상이라고 느꼈다. 개남과 태일은 작업장이 가까이 있었던 관계로 그 뒤로도 자주 마주하게 되었고 차차 깊은 교우관계로 발전해갔다. 그러는 사이에 개남은 태일이 평화시장 3만 노동자들이 다 같이 당하고 있는 작업환경이나 노동시간 문제 따위에 '이상하게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남도 태일과의 대화가 거듭되면서 점차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1968년 말경 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자고 제의해왔다. 개남은 너무 커다란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사나흘만에 10명 남짓한 인원이 모아졌다.
첫 번째 회합은 동화시장 아래 은하수 다방에서 열렸다. 첫날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두 번째 모임에서 태일이 기대하던 대로 근로조건에 개선에 대한 얘기가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회원들의 소극적 태도는 조금씩 차차로 나아지기는 했으나 크게 보면 바보회가 해체될 때까지 그대로 계속되었고, 이것이 태일을 몹시 실의에 빠지게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태일의 비상한 열의로 재단사 모임은 계속되어 1969년 6월 말경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가지기로 되었다. 창립총회는 남들의 눈을 피해 덕수중학교 근처 허름한 중국음식점 방에서 열렸다. 태일의 제의에 따라 명칭은 바보회로 결정되었고, 그 후 그들은 창동 태일이네 집으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밤을 새우며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토의했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는 스스로의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소를 던지고 그들을 바보라고 낙인찍는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부르짖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나서자고 호소하는 전태일을 보고 나이든 선배 재단사들이 '바보'라고 불렀을 때 그는 당연코 '좋다. 나는 바보다'라고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택한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그들이 치켜든 한 개의 작은 촛불은, 내일 수천만의 횃불로 타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