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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한국사 2

이은직 지음 | 일빛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은 근대화를 목표로 한 장엄한 투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지도한 이가 바로 전봉준이다. 그의 출생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54년 태어났다고 되어 있을 뿐 출생일과 태어난 곳도 정확하지 않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재능을 타고나서 학문에 몰두했지만, 권력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아 벼슬길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삶의 목표를 찾아 각지를 전전하였던 듯하다.



그가 어느 무렵부터 동학 교도가 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천도교는 서양의 천주교가 유입되어 일부 선진적인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아 동요하고 있을 때, 경주 출신의 학자 최제우가 민족의 전통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족 종교로서 동학을 제창하면서 비롯되었다. 간단한 주문만 외면 현실 속에서 이상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천도교의 교리는 부패한 권력층의 압정과 착취에 신음하던 농민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리하여 천도교의 교세는 삽시간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농민 사이에 퍼져 나갔다. 당시 봉건 정부는 천도교를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여, 1864년 3월 교주 최제우를 사형에 처하고 포교를 금지하였다.



동학운동은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애국적인 사람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1890년대가 되자 동학 운동은 정부에 대한 공공연한 시위 행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1890년 무렵 조선은 민비 일파의 권세 아래 있었으며, 이들이 전국 구석을 지배하며 수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민중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2년 고부군 군수가 된 조병갑은 가장 전형적인 악덕 관리였다. 그는 농민들에게 무거운 전세를 매겼고, 그의 아버지 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긁어모았다. 이치에 맞지 않는 무거운 세금에 견디다 못한 군내의 농민들은 1893년 11월, 12월 두 차례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군수는 농민 대표를 붙들어 고문만 할 뿐이었다. 이에 농민들은 폭력적인 수단으로 군수를 쫓아내려고 하였다. 또한 19세기 후반이 되자 농민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봉기 계획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농민 궐기를 촉구하는 '사발통문'이 고부군 일대의 농민에게 돌려졌다. 1894년 1월 10일, 계획대로 1천여 명의 농민이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갖추고 말목 장터에 모였다. 전봉준은 궐기한 군중 앞에서 사기를 고무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두 개 대열로 나뉘어 고부 군청으로 진격하였다. 농민군의 고부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근처 각지의 농민들이 동학 교도를 선두로 하여 잇달아 고부성으로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고부에 새로운 자치 체제를 만들고 일부 농민군을 배치하여 수비를 굳게 하고, 농민 주력군을 말목 장터로 옮겼다.



한편,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그 자리에 용안 현감 박원명을 임명하였다. 그는 농민군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군청의 일도 농민군이 추천한 사람들을 쓰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민란 수습을 위해 파견된 이용태는 민란에 참가한 농민을 색출하여 투옥하고 조병갑에 못지 않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성의 원성은 높아져 마침내 농민군은 다시 총궐기를 맹세하였다. 3월 25일 다중의 뜻에 따라 전봉준이 대장이 되었다. 전봉준은 민중을 위해 싸우는 군대로서 행동강령을 제시했고, 군대의 규율을 바로잡기 위해 12조의 규범도 만들었다.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4월 3일 행동을 개시하여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권력층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장성에서 정부군과 첫 전투를 벌여 결정적인 승리도 거두었다. 농민군은 4월 24일, 당초 계획대로 곧장 북상하여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그 다음날인 4월 28일에는 완산에 도착하였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놀란 민씨 일파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청나라는 파병을 결정하여 5월 5일부터 아산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청나라는 전에 일본과 체결한 천진 조약으로 조선 출병을 일본에 통지하였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조선 출병을 지시하였다.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여 각자 출신지로 돌아갔다. 농민군이 해산한 직후부터 전봉준은 동지들 20여 명의 기마대로 전라도 내 각지를 순회하면서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난감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침략하여 조선 전 국토가 전쟁터로 화하여 유린당하고 나라가 중대한 위기에 처하였다.



전봉준의 노력으로 재결성된 동학 연합군은 10월 중순 대부대의 논산 전진 기지에 집결시켜, 공주를 일거에 점령하고 서울로 북상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신 무기를 갖추고 근대적인 전투훈련을 거듭해온 일본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의 신식 무기로 싸움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전봉준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재기를 꾀하며 동지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정부군은 동학농민군 소탕에 혈안이 되어, 전봉준을 생포하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포고하였다. 밀고자의 고발로 전봉준은 12월 2일 포박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1895년 3월 29일 사형에 처해졌다.19세기 초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농정가로 평가되는 서유구는 1764년 권좌에 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서유구는 일찍부터 실학에 마음을 두고, 스물 다섯 살 때에는 자신의 호인 '풍석'을 따 『풍석고협집』이라는 논설집을 발표하여 적극적인 정책론을 기술하였다.

서유구는 수리 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도처에 마치 인체의 혈관과 같이 수로를 만들어 농작물의 수확 증대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임지에서 수로 건설을 장려하였다. 그는 또 양반 출신이라는 이유로 노동을 하지 않는 악습을 고쳐, 양반 출신이라도 농업과 상업 및 공업에 종사하여 노동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유구는 19세기 초 우리 나라의 산업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발전하는 사회 현실에 적합한 의견으로서 매우 탁월한 농업 정책론이요, 그 시대에서는 선진적인 경제론이기도 하였다.



그의 공적으로 꼭 특기해야 할 것은 농촌에 고구마 재배를 보급한 일이다. 그는 호남 순찰사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돌아보았는데, 이때 농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고구마 재배를 대대적으로 보급하기로 하였다.



1845년, 그는 여든두 살로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다. 서유구가 우리 역사에 탁월한 농업 정책가로서가 아니라, 고구마를 보급한 학자로 이름을 남긴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굶주리는 민중들을 위하여 노력한 공적은 크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훈민정음은 창제된 이후 양반 계급으로부터 '언문'으로 불리며 배척되었다. 그러나 민중을 사랑하는 많은 학자들이 위정자들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훈민정음의 활용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여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1824년 『언문지』를 저술한 유희의 공적은 특히 위대하다. 유희는 어느 지방의 현감을 지내고 있던 유한규라는 사람의 아들로, 1773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갓난아이 시절부터 어른의 이야기를 정확히 알아들었다는 일화를 남겼을 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그의 학문은 날이 갈수록 진전되어 천문학, 조류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깊은 학식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연구 가운데 평생의 대작으로 평가되는 것은 『언문지』이다. 그는 언어학 연구에서 과거의 학자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깊은 학식과 다방면에 걸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언어의 발전 과정과 그 독특한 음계를 분석하여, 『언문지』에 「초성례」,「중성례」, 「종성례」,「전자례」라는 네 항목을 들어 해설하였다. 그는 중국 문화에 매몰되어 우리 언어의 연구까지 한자음에 의존하려는 한 종래 학자들의 사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19세기 초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금석학 연구에 위대한 공적을 남긴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청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용산월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혜택 받은 가문의 출신으로 교양이 높은 어머니 유씨에게 학문의 기초를 배우면서 면학의 길로 나섰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열여섯 살에 실학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던 박제가의 문하생으로 입문시켰다.



그는 18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부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수행원으로 북경에 갔다. 거기서 박제가가 소개해준 청나라의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갔다. 특히 노학자 옹방강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노학자의 서고는 금석 탁본의 보고라고 해도 좋을 만했고, 금석학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김정희는 노학자의 서고에 흠뻑 빠졌다.



그는 중국에서 귀국한 뒤 동서고금의 경학을 계속 연구하여 몇 년 뒤에 「실사구시설」이라는 논문을 써냈다. 김정희는 사실에 기초하여 실제를 규명한다는 학문적 태도를 취하여, 역사 연구도 고증에 중점을 두게 되어 점차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16년 그는 친구와 함께 양주의 북한산에 올라 그때까지 버려져 있던 비석의 비문을 판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를 남천주로 고친 뒤에 세운 것임을 밝혀냈다.



그는 김씨 배척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오랜 유배생활로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애국심에 불타 우리 나라의 연안을 침략하는 외세를 배척하고자 호소하여 「해국도지」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김정희는 우리 나라의 고고학과 금석학을 새롭게 개척하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된다. 또한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그랬듯이 그는 서양의 선진적인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는 천주교의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였던 듯하다. 그는 정치, 교육, 과학 기술 문제에서도 선진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그가 남긴 저서 가운데 그러한 논설이 그다지 많이 수록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판소리'는 170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고전 예술이다. 전라도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여, 대중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무렵에는 '열두 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열두 곡목이 나왔다. 춘향가, 심청가, 배비장타령, 가루지기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 흥부타령, 옹고집타령, 토끼타령, 무숙타령, 장끼타령, 적벽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장편 가곡을 중심으로 공연되던 판소리는 신재효의 출현으로 비약적인 발달을 보게 되었다.



신재효는 1812년 11월 6일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신광흡은 유복한 생활을 하여 많은 광대들의 뒤를 보아주었기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광대들의 노래에 끌려 음악 전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광대들은 봉건 사회의 족쇄에 묶여 가장 멸시받는 천민 계급으로 분류되어 가난과 천대 속에서 살았다. 신재효는 이러한 광대들을 멸시받는 예인의 세계에서 긍지 높은 예술가의 지위로 끌어올릴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재능 있는 광대들을 교육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연기하는 대사와 가사를 문학적으로 다듬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십대부터 오십대에 걸쳐 정열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처세 면에서도 야심을 품기 시작한 듯하다. 대원군이 경복궁 증건으로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도록 했는데, 그는 많은 액수를 기부하여 '호장'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또한 1867년 경복궁 공사가 낙성되자, 그는 여러 장으로 구성된 '경축가'를 지어 제출하여 정3품 당상관에 상당하는 '절충장군'을 받았다.



그는 자를 백원, 호를 동리라 하였는데, 스스로 호장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점차 '판소리'의 기본인 열두 곡의 대본을 정리하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고전 소설 여섯 편을 뽑아서 고루한 표현을 사실적이고 품위 있는 가사로 고치고, 쓸데없는 것을 추려내어 간결하게 하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는 또한 이러한 곡목 안에 전라도에서 유행하던 많은 민요를 집어넣어서, 판소리가 어느 곳에서나 민중에게 사랑을 받는 예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판소리의 뛰어난 가곡 대본을 쓰고 광대 교육에 힘을 쏟았으므로, 당시 뛰어난 소리 광대치고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판소리의 발전을 위하여 평생을 바쳐 우리 문학사와 연극·음악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그는 1884년 11월 6일 하얀 눈이 쌓인 날, 아들 석경과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들 듯이 삶을 마감하였다. 오늘날에도 국창이라 불리는 명창들에 의해서 노래되고 있는 판소리는 그 명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민족 사관을 정립한 역사학자 신채호판소리 중흥의 공로자 신재효천재 화가 장승업19세기 초에 활약한 애국적인 학자들갑오 농민 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정선은 우리 민족의 개성을 살려낸 독특한 화풍을 세운 화가로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태어난 것은 1676년으로 왜란과 호란의 상흔도 가라앉아 국제적으로는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정선은 가난한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좋아하여, 아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한학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던 듯하다. 대신 우연히 그의 집안과 알고 지냈던 고관 김창집의 알선으로 도화서의 화원으로 임용되었다.



직업적인 화원들은 당시 권력 사회의 사대주의적인 사상을 반영하는 중국의 격식에 맞는 화풍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그것이 조선 관화의 주류가 되어 있었다. 도화서의 젊은 화원들은 중국화를 모방하는 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직업적인 화원에게 어울리지 않는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천성적인 것인지, 타고난 환경 탓인지, 혹은 줄곧 가난하게 살아오면서 체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점차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화원들의 그림이 아닌 문인들이 그린 남화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도 서민 생활과 동떨어진 독선적인 것으로서, 정선은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서른 살 전후부터 우리 나라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자연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이처럼 방향을 바꾼 것은 실학 사상에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난한 생활에 고통받으며 권력자들의 부패와 사치에 울분을 느끼고 있던 정선은 실학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직접 전국 각지를 돌아보고 민중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보겠다는 의욕에 넘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나라의 자연을 찾아 걸어다니면서 점차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재현하고픈 충동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전국의 각지를 걸어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가 가장 사랑한 곳은 금강산이었다. 그는 금강산의 비로봉에 올라 일만 이천 봉의 울창한 미관을 내려다보며,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 폭의 화면에 그려내는 데 성공하였다.



정선의 도화서에서의 성실한 근무 태도와 화원에서의 활약이 인정되어 그는 현감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의 독자적인 화풍은 일반 화원의 시각에서는 아류였다. 그는 화단에서 고립되어 있었지만 근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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