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한국사 1
이은직 지음 | 일빛
자랑스러운 삼국 시대의 예술가들우리 나라의 고대 미술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실로 힘차고 박력이 넘치는 높은 예술적 수준으로 5세기 전후의 것으로서는 아마도 세계 최고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와 신라의 그림도 고분벽화 등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는데, 고구려 못지 않은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역사책의 고전 『삼국사기』의 <열전>에 화가 솔거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솔거는 신라 사람이지만 태생이 분명치 않고 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태어나서 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언젠가 그는 경주 황룡사의 벽에 노송을 한 그루 그렸다. 줄기의 비늘과 같은 껍질이며 무성한 가지와 잎이 마치 실물과 같아서 까치나 제비, 참새 같은 새들이 자주 날아와 나무에 앉으려다가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하고 신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룡사의 벽화를 그렸다는 것을 보면 신라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것은 분명하다.
백제의 기록에는 화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기록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얼마나 많은 문화가 건너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도자가 건너갔는지 알 수 있다.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여러 문화가 백제에서 일본에 전해지고 신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는 6세기가 되면서 더욱 빈번해졌다.
백제에서 일본에 파견된 화가 중에서 특히 유명한 사람은 6세기 초의 인사라아와 558년에 건너간 백가 등이 있다. 596년에 장대한 호코지가 낙성되자 혜자와 혜총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본국인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불러오는 한편, 많은 도서를 수입하여 일본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했다.
610년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뛰어난 승려일 뿐 아니라 학식이 풍부한 학자요, 과학자이고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고구려에서 발달해 있던 새로운 그림 도구나 종이, 묵 제조법을 가르치고 널리 퍼뜨렸다. 이에 감동한 쇼토쿠 태자는 그를 자신의 궁전인 이카루가노미야로 불러 국사로 모셨다고 한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많은 악대와 악기 등이 그려져 있다. 또한 많은 무용도도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4세기 중반에 고구려의 이상이던 왕선악이 새로운 6현금을 켰더니 검은 학들이 그 절묘한 곡에 끌려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악기를 '흑학금'이라 했으며, 후에 거문고로 발전했다고 한다. 거문고는 즉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음악가 두 사람이 소개되어 있다. 한 사람은 백결 선생이고, 또 한 사람은 우륵이다. 백결 선생의 설화에는 애처로운 부부애와 달관한 인생관이 나타나고, 또한 신라 음악가들의 탁월한 기량과 고상한 정신력이 담겨있다. 기록에 의하면 457년에 신라의 음악가 80여 명이 일본에 건너가 음악보급에 종사하고, 6세기 초에는 '신라금'이라는 거문고가 즐겨 연주되었다고 한다. 우륵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신라본기> 24대 진흥왕조에 나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륵은 가야 사람이었는데, 그는 가야왕의 후원을 받아 전래되어 온 진한금을 고쳐서 12현의 가야금을 만들고 12개의 곡을 지었다. 그 곡들은 지방의 민중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화려한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가까이 가지 않고 먼 북방의 변경 낭성에서 유랑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금을 켜고 노래를 부르며 가난한 유랑생활을 계속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만든 가야금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악기가 되고, 신라 중기 이후에는 185개 곡이 만들어져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주되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예술적 소질이 풍부한 민족으로 알려져 왔지만, 삼국시대에 활약한 일부 미술가나 음악가의 업적을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신라의 뛰어난 문호들『삼국사기』 <열전> 제육에는 세 문호의 전기가 씌어져 있는데, 그 앞머리에 강수가 소개되어 있다. 강수는 692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출생 연도가 기록되지 않아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관상장이는 그를 보고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닐 성싶으니 소중하게 키우시오."라 하였다. 강수는 성장함에 따라 영리함이 나타나고, 아직 제대로 가르치기 시작하기도 전부터 책을 술술 읽었다. 수재였던 그는 또한 다정다감한 젊은이이기도 했다.
신라 29대의 무열왕이 즉위했을 때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서신을 전달했는데, 그 가운데 해석이 어려운 문장이 있어 곤경에 처한 왕은 학자로 유명한 강수를 불러 그 글을 읽도록 했다. 그는 단 한 번 읽고 문장을 해설했다. 이에 왕은 기뻐하며 그의 내력을 물고선, "경의 머리를 보니 강수(强首)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은 것 같소."라 하여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강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으나 출세를 바라지 않는 그는 여전히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왕은 그를 위해 일부러 쌀을 보냈을 정도였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같은 시기의 문장가 중에서 제1인자였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지만, 그의 저서에 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간단한 기록만으로 그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의 강렬한 개성이 그려져 있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설총은 신문왕 시대에 활약했던 문호로 신라 십현의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유명한 원효대사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좋았고, 어려서 이미 모든 도리를 깨달아 대단히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부터 한자의 음을 가지고 우리 고유의 말을 글로 써서 표현해왔다. 이것을 '이두'라고 하는데, 한문에 정통해 있던 설총은 이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어떠한 한자 문장이라도 우리말로 읽도록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옛 역사학자 가운데는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었다고 잘못 전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그의 이야기가 최상급으로 칭송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총은 고려 때인 1021년에 홍유후라는 높은 지위가 추증되었을 만큼 후세 사람들에게도 위대한 문호로서 더없이 존경을 받았다. 그의 단편소설 「화왕계」는 우리 고대 소설의 원류로서 문학사적인 가치를 가지며, 부친인 원효와 더불어 일본 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파란 속에서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천재로 불린 그는 열두 살 때 당나라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광스러운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당나라에 가서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당나라에 도착한 지 6년이 지난 18세에 진사 갑과라는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20세 때 당나라 선주의 율수 현위라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의 비범한 재능과 고매한 인격은 당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 이방인의 인기를 시샘하는 인간들은 그를 독살하려고 획책하기도 하고 그를 중상 모략하여 절해의 고도로 유배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17년의 이국 생활을 청산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중국의 『신당서』<예문지>에 최치원의 『사륙집』1권과 『계원필경』20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문집 30권이 있어 세상에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의 작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대주의와 민족주의의 두 얼굴, 김부식김부식은 1075년에 신라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도 조상 대대로 고관 자리를 이어왔고 아버지 김근도 조정의 고관이었다. 그는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고, 1122년 예종이 사망하자 즉시 왕의 연대기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만큼 학자로서 실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가의 권력은 일부 권력 있는 문벌에 장악되어, 추악하기 그지없는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권력을 잡은 대신들은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이고, 외척의 지위를 이용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렸다. 그 가운데서도 7대에 걸쳐 고려왕의 외척이 된 인주 이씨 일파가 가장 큰 세력을 쥐고 있었다. 그의 일문인 이자겸은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들였는데, 예종이 죽자 그 딸이 낳은 인종이 왕위를 잇게 되어, 조부로 '한양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후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보내 '조선국공'이라는 이름을 주니, 나라 안에서는 이자겸의 면전에서 머리를 쳐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김부식만은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기로 들면서 정론을 주장하였다. "하늘에 두 해가 없는 것처럼 왕은 오직 하나입니다. 비록 외조부라고 해도 신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가정 안에서 외조부 대우를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공적으로는 신하로 대해야 합니다."
인종과 이자겸이 계속 심각하게 대립하던 중에, 1126년 이자겸은 남해의 끝으로 유배되어 죽음을 맞았고, 이자겸이 유배된 후 김부식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처음 사신으로 송나라에 간 것은 1116년이었는데, 그의 박학함이 소문이 나서 송나라 황제로부터 상으로 그림을 받았다. 그 공적으로 후에 그는 송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고려 정부는 송과 수교를 쌓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북방의 금에 대해서 비굴한 사대주의 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서경 출신인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은 사대주의를 버려 민심을 일신하고, 독립국답게 연호를 만들고 왕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묘청이라는 승려는 운이 강한 땅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번창한다는 풍수지리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에서 막 귀국한 김부식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왕은 일년에 몇 번씩 서경을 오갔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을 지키려는 보수파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천도 결의는 실행될 수 없었다. 이에 묘청 등은 개경 보수파의 압정에 항거하는 투쟁을 펼쳤다. 인종은 김부식을 묘청 토벌의 대장군에 임명하였고 그의 작전은 용의주도하여 정적을 무너뜨렸다.
정적이 거의 사라졌으므로 그가 원하면 어떤 권력도 쥘 수 있었으나, 그는 『삼국사기』편찬에 전력을 바치기로 한다. 『삼국사기』는 1권부터 12권까지가 <신라본기>이고, 13권부터 22권은 <고구려본기>, 23권부터 28권까지는 <백제본기>, 29권부터 31권까지는 <연표>, 32권부터 40권까지는 <잡지>, 41권부터 50권까지는 <열전>으로 되어 있다. 그는 고려가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삼국 가운데 신라가 가장 빨리 건국된 것처럼 쓰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는 중국의 역사 체계를 그대로 흉내낸 나머지 우리 나라의 '민속', '설화', '언어' 등 고유한 것을 거의 잘라내어 지나치게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연표에서 중국의 각종 역사서를 참고하여 동양 여러 나라의 연대를 대조해놓은 것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연구하였는가를 말해 준다.
한국 불교의 두 기둥, 의천과 일연의천은 1055년 9월, 고려 11대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후였다. 다섯 살 때부터 학문을 시작한 그는 10살 때 이미 내외의 명저를 섭렵하는 수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1살 때 아버지인 문종은 그를 불문에 넣었다. 그리고 2년간 수행을 시킨 뒤, 승려로서는 최고 지위인 '우세승통'을 주었다.
그는 송나라로 유학을 떠날 꿈을 갖게 되어 국왕에게 누차 승낙을 졸랐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종이 죽고, 그 뒤 의천은 선종에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송나라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비상 수단으로 야밤에 몰래 개경을 빠져나와 항구에 정박해 있던 송나라의 배를 타고 송나라로 출발했다. 중국 밀주항에 무사히 도착한 그는 바로 송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학 온 목적을 알렸다. 송은 고려에 대해 지극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환영하며 명승으로 알려진 유성법사를 비롯하여 학식이 높은 중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유명한 사찰을 견학시켜 주며 그의 공부에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누웠다는 소식과, 귀국을 독촉하는 형 선종의 편지를 받고 유학 1년 만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
송나라에서 귀국한 그는 송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서적을 정리하고, 그 중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4천 수백 권을 골라 판목 제작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사업을 직접 지휘하면서 학식이 높은 많은 승려와 기술자를 동원하였다. 그의 문화적 공적은 이 출판 사업뿐만 아니라 23세 무렵부터 평생에 걸쳐 불교 경전을 이두를 사용하여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2백 36권에 이르는 많은 책을 번역하여 우리 언어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자로서 우리 나라 역사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일연은 이름 없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로서는 최고 지위인 '국존'의 자리에 오르는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전남 해양의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4세 때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각지의 절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다. 그는 1227년 국가 시험의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몽고군이 침입하였으나, 그는 이 국난의 시기에 승려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승려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 44세 때 주지가 되고 54세 때 대선사 자리에 올랐다.
아명이 견명, 승명이 일연이었던 그는 불교에 관한 저작과 문집을 많이 남겼는데,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나마 그가 70세가 넘어 시골의 절에서 6∼7년 동안 쓴 역사서 『삼국유사』가 보존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애국적 정열에 불타서, 국민 전체를 떨쳐 일어나게 하려면 올바른 역사를 써서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역사적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1세기 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지나치게 사대주의에 기운 데 큰 불만을 가지고 틀에 박힌 역사체를 버리고 자유로운 야사체를 선택하였다. 이 책은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데 1, 2권은 고조선부터 1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대체로 나라별,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3권부터 5권까지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고 보급된 상황, 승려, 사원 등 불교와 관련된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단군 신화를 비롯한 신화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14수의 향가와 『균여전』의 「보현십원가」 11수의 '향가'를 모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드높은 애국심이 이 책을 쓰게 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정신은 이 책 속에 살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긍지와 기쁨을 주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들최영은 1316년 조정의 관리인 최원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고려사』<열전>을 보면 소년 시절부터 우람한 몸집으로 위풍당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관이 된 그는 항상 국방의 최전선에 있었는데,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워 왕궁 근위병의 대장이 되고 1352년에는 정권을 독점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조일신을 격퇴시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최영은 적을 섬멸하였고 반역자를 토벌하고 국방의 중요한 책임을 맡는 자리에 올랐다. 이때 고려는 왜구의 침입까지 계속되어 안팎으로 다사다난했다. 최영과 이성계는 국경 근처에서 이 침략군을 일거에 무찔렀다. 그러나 이처럼 공훈을 쌓아가던 그의 운명에 뜻밖의 함정이 나타났다. 왜구가 들어와 왕의 묘를 훼손한 사건이다. 그 무렵 고려 조정에는 신돈이라는 승려가 왕의 신임을 받아 재상으로 있었다. 짓눌리고 있던 농민들은 성인이 나타났다며 신돈을 숭상했으나 기존의 귀족들은 사사건건 그를 비난하고 매장하려 했다. 신돈은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특히 천민 지역과 천민 계급을 해방하려는 노력은 역사에 빛날 일이었으나 문란한 생활로 오명을 썼다. 1371년 최영은 신돈이 실각한 후 조정으로 복귀하여 곧 국방을 강화하는 요직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