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한국사 1
이은직 지음 | 일빛
의천은 1055년 9월, 고려 11대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후였다. 다섯 살 때부터 학문을 시작한 그는 10살 때 이미 내외의 명저를 섭렵하는 수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1살 때 아버지인 문종은 그를 불문에 넣었다. 그리고 2년간 수행을 시킨 뒤, 승려로서는 최고 지위인 '우세승통'을 주었다.
그는 송나라로 유학을 떠날 꿈을 갖게 되어 국왕에게 누차 승낙을 졸랐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종이 죽고, 그 뒤 의천은 선종에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송나라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비상 수단으로 야밤에 몰래 개경을 빠져나와 항구에 정박해 있던 송나라의 배를 타고 송나라로 출발했다. 중국 밀주항에 무사히 도착한 그는 바로 송나라 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학 온 목적을 알렸다. 송은 고려에 대해 지극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환영하며 명승으로 알려진 유성법사를 비롯하여 학식이 높은 중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유명한 사찰을 견학시켜 주며 그의 공부에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누웠다는 소식과, 귀국을 독촉하는 형 선종의 편지를 받고 유학 1년 만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
송나라에서 귀국한 그는 송에서 가지고 온 방대한 서적을 정리하고, 그 중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4천 수백 권을 골라 판목 제작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사업을 직접 지휘하면서 학식이 높은 많은 승려와 기술자를 동원하였다. 그의 문화적 공적은 이 출판 사업뿐만 아니라 23세 무렵부터 평생에 걸쳐 불교 경전을 이두를 사용하여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2백 36권에 이르는 많은 책을 번역하여 우리 언어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자로서 우리 나라 역사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일연은 이름 없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로서는 최고 지위인 '국존'의 자리에 오르는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전남 해양의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4세 때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각지의 절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다. 그는 1227년 국가 시험의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몽고군이 침입하였으나, 그는 이 국난의 시기에 승려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승려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 44세 때 주지가 되고 54세 때 대선사 자리에 올랐다.
아명이 견명, 승명이 일연이었던 그는 불교에 관한 저작과 문집을 많이 남겼는데,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나마 그가 70세가 넘어 시골의 절에서 6∼7년 동안 쓴 역사서 『삼국유사』가 보존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애국적 정열에 불타서, 국민 전체를 떨쳐 일어나게 하려면 올바른 역사를 써서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역사적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1세기 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지나치게 사대주의에 기운 데 큰 불만을 가지고 틀에 박힌 역사체를 버리고 자유로운 야사체를 선택하였다. 이 책은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데 1, 2권은 고조선부터 1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대체로 나라별,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3권부터 5권까지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되고 보급된 상황, 승려, 사원 등 불교와 관련된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단군 신화를 비롯한 신화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14수의 향가와 『균여전』의 「보현십원가」 11수의 '향가'를 모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드높은 애국심이 이 책을 쓰게 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정신은 이 책 속에 살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긍지와 기쁨을 주고 있다.이야기에 등장하는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아름답고 장하고 용기가 있으며, 풍부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여성의 훌륭한 소질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신사임당이었다. 그는 1504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태어난 곳은 외가였다. 외동딸이었던 신사임당의 어머니는 아버지 이사온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상당한 학식을 쌓은 재녀였다고 한다. 신사임당과 자매들은 아버지가 집에 없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차녀인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났고 얼굴이 예뻐서 외할아버지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외조부와 어머니에게 문자를 배웠는데, 기억이 빨라서 한학의 기본 서적에 금세 정통하였고, 그럴듯한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그녀는 어머니의 엄한 교육으로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웠는데, 그 빠르게 익히는 모양에 대해 평판이 자자할 정도였다. 또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게 되자 외할아버지는 그녀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채고 신사임당은 7세 때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림 교재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주었다. 소녀 사임당은 그림 실력이 좋아짐에 따라 풍경화뿐만 아니라 각종 화초, 과실, 벌과 나비, 잠자리 같은 곤충류를 즐겨 그리게 되었다.
사임당의 아버지는 보기 드문 이 재원을 위하여 서울에서도 수재로 평판이 높았던 이원수라는 젊은 사람을 사위로 삼았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뿐인 가정에서 자란 이원수는 처에게 가고 싶었으나 비어 있는 서울 집을 지키고 있는 홀어머니를 혼자 있게 할 수 없는 효자였다. 그러나 사임당의 어머니는 훌륭한 여성이어서, 남편 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딸에게 서울의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21세가 된 사임당은 서울로 올라가 시어머니인 홍씨 앞에서 절을 올리고 며느리로서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신사임당은 4남 3녀의 자녀를 두어 자식복도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사임당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서, 33세 때에도 셋째 아들을 출산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역사상 유명한 대학자 이이였다.
신사임당은 줄곧 서울과 고향을 오르내렸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소홀히 하거나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편을 상냥하게 대하고, 아이들 교육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녀는 연로한 시어머니도 극진히 모시며,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가계를 꾸려나가는 모범적인 주부였다.
1550년 여름 이원수는 업무차 평안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고, 장남 준과 셋째 아들 이도 함께 갔다. 그런데 사임당은 갑자기 병상에 눕더니 이삼 일 후에 위독해졌다. 그리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처녀 시절부터 신사임당의 그림은 일류라는 정평이 나 있었지만, 결혼한 뒤에도 그녀는 그림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초기 무렵에 그녀가 즐겨 그린 산수화는 그 무렵의 화가들이 그리던 관념적인 그림이나 중국의 풍경화들과는 상이하며, 그녀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고향의 산하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사임당은 문제에도 뛰어났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최영은 1316년 조정의 관리인 최원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고려사』<열전>을 보면 소년 시절부터 우람한 몸집으로 위풍당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관이 된 그는 항상 국방의 최전선에 있었는데,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워 왕궁 근위병의 대장이 되고 1352년에는 정권을 독점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조일신을 격퇴시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최영은 적을 섬멸하였고 반역자를 토벌하고 국방의 중요한 책임을 맡는 자리에 올랐다. 이때 고려는 왜구의 침입까지 계속되어 안팎으로 다사다난했다. 최영과 이성계는 국경 근처에서 이 침략군을 일거에 무찔렀다. 그러나 이처럼 공훈을 쌓아가던 그의 운명에 뜻밖의 함정이 나타났다. 왜구가 들어와 왕의 묘를 훼손한 사건이다. 그 무렵 고려 조정에는 신돈이라는 승려가 왕의 신임을 받아 재상으로 있었다. 짓눌리고 있던 농민들은 성인이 나타났다며 신돈을 숭상했으나 기존의 귀족들은 사사건건 그를 비난하고 매장하려 했다. 신돈은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특히 천민 지역과 천민 계급을 해방하려는 노력은 역사에 빛날 일이었으나 문란한 생활로 오명을 썼다. 1371년 최영은 신돈이 실각한 후 조정으로 복귀하여 곧 국방을 강화하는 요직에 앉았다.
그 당시 고려의 재상은 이인임이었는데, 그는 보수파와 결탁하여 친원 정책을 펴다가 친명 정책을 취하는 등 외교 정책에 일관성이 없었다. 최영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홀로 청렴한 정치를 지켜나가려 했다. 1388년 왕은 최영에게 명하여 이인임 일파를 추방해버리고 최영을 새로 재상에 임명하였다. 그가 권력의 최고 자리에 올라선 이 해에, 명나라가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최영은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당황하여 평양에서 개경으로 급히 물러나 성문을 굳게 잠그고 방비를 강화했지만, 항전한 보람도 없이 왕과 함께 붙잡히고 만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추방한 조민수는 이성계와 더불어 요직에 앉게 되었다. 회군을 결행하기 전, 조민수는 이성계와 동지적 결합을 맺고 어떠한 경우에도 행동을 함께 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조민수는 이성계 세력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조민수의 배반을 격렬하게 따졌다. 창을 왕으로 옹립시킨 일로 권력을 잡은 조민수는 왕의 이름을 빌려 추방당한 이인임 일파를 다시 복귀시키려 했지만, 이인임은 이미 유배지에서 죽고 그 일파는 이성계의 압력으로 유배지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개혁파의 조준은 조민수의 부정을 폭로하여 탄핵하고 마침내 창녕으로 추방해버렸으나 창왕은 자신의 탄생일에 조민수를 용서하고 석방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389년 이성계 일파의 공격 앞에 창왕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이어 왕씨 혈통의 공양왕이 이성계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가 무력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려 할 때 최후까지 저항한 것은 고려의 오랜 귀족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귀족들의 신망을 받으며 이성계의 가장 무서운 정적이 됐던 것은 이색과 정몽주였다. 두 사람 모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대학자로서, 학식이 없는 이성계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존재였다.
이색은 1328년 고려 말기의 대학자인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여러 번 북경에 왕래하며, 원나라가 고려의 처녀들을 제멋대로 끌고 가는 범죄적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원의 문인들과 교제를 넓혀 문명을 날리고, 귀국한 뒤에는 역사 편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26세가 된 이색은 당시 대학자로 불리던 이제현이 시험관이었을 때 과거 시험을 치러 수석으로 합격하고, 원나라로 파견되는 사절단의 서장관에 뽑혀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조정의 요직에 앉아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사절단의 서장관이 되어 원의 수도로 떠나게 되었다. 공민왕은 그를 발탁하여 다시 조정의 요직에 앉혔고, 또한 왕에게 보답하기 위해 '시정팔사'의 개혁안을 제출하여 당시 고려의 권력자들이 국사를 제멋대로 주무르던 '정방제도'를 없애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사상은 민중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편에 선 것이 아니라,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고 보수적인 귀족들의 권익을 지키는 봉건적인 보수파에 기울어 있었다.
정몽주는 1337년 이름 없는 양반의 아들로 경상도 영일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단한 효자라는 평판이 났고, 1360년 문과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관직에 올라 조정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품이 대단히 강직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보다 2년 빠른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1372년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왜구 토벌의 원수로 임명하여 왜구 격멸에 전념토록 했다. 그는 각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했는데, 특히 1377년 지리산에서 왜구를 포위하여 전멸하는 공헌을 세웠다. 그리고 이 토벌전에서 그는 정몽주와 깊게 사귀게 되었다. 고려 정부 안에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했을 때 이성계는 철저한 친명파였던 정도전의 영향을 받아 친명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몽주는 그러한 이성계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정도전과 정몽주는 같은 유학자이고 친명파이면서도 사상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항상 반목하였을 뿐 아니라, 정몽주는 어떤 면에서는 이성계의 참모이기도 했던 정도전을 끝없이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몽주는 관직에 진출한 뒤 이색의 제자로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 무렵 거의 동년배인 정도전도 동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도전은 경상도 봉화에서 태어났는데, 출생 연대나 신분은 확실치 않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공부에 힘써 1362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 정몽주 등과 함께 이색의 문하가 되었는데, 그는 정몽주의 박학함에 반하여 그를 둘도 없는 학우로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관리 생활을 하면서부터 타락한 권세가들을 매우 증오하였고, 억압받는 민중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1375년 보수적인 친원파의 매국적 행동을 격렬히 규탄했다. 또한 정몽주가 모호한 태도로 이색 등 보수파를 옹호하는 것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런 것들에서 서로가 용서할 수 없는 적대적 존재로서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다.역사상 가장 명망 높은 학자의 한 사람인 이이는 1536년 음력 12월 26일 강원도 강릉군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홀로 살던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말보다 글을 먼저 깨쳤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신동다운 면모를 발휘하였다. 그리고 열세 살에 주위의 권유에 따라 과거 초등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시험관들은 이 소년의 천재성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 상을 마치고, 어머니를 그리워한 나머지 인간의 삶과 죽음 문제에 사로잡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 선의 총본산으로 알려진 봉은사라는 절에서 불교 서적을 읽다가 자기 번민을 불교 연구로 해결하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1년간의 수도 생활을 통하여 불교 신앙에서는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된 그는 강릉의 외할머니 댁에 몸을 의지하고 회복하면서 인생을 재출발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이이는 스물한 살 때, 한성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다시 서울에서 과거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스물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상을 마친 스물아홉 살 되던 해, 두 번 있던 문과 고급시험에서 모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역량을 인정받아 신임 관리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호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서른한 살 때는 '시무삼사'라는 정책론을 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는 신념에 충실하려는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속인들과 뒤섞이다가 상처를 받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이황과는 대조적이다. 서른 세 살이 된 그는 어린 왕 앞에서『논어』를 강의하는 한편, 왕으로서 정치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서술한 책을 써서 왕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책임이 따르는 일을 그만두고 요양에 힘쓰면서 교육 사업에 몰두하였는데, 생활이 곤란한 친척들이 많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주의 석담이라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모두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1581년 마흔여섯 살이 된 그는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사헌부 대사헌에 오르게 되고, 곧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3년 동안은 이이가 정치가로서 책임 있는 자리에 올라 가장 열성적으로 활약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원래 건강하지 못했던 그는 신명을 다 바친 정치 활동에 지쳐서, 1584년 1월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철학, 교육학, 사회·정치적 문제 등 각 방면에서 커다란 공적을 남겼는데, 특히 철학과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