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횡단철도
스티븐 E. 암브로스 지음 | 청아출판사
온 국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유다가 갈망하던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내에서도 의원들을 중심으로 샌프란시스코나 새크라멘토가 종착역이 되는 걸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철도 부설에 정말 절실한 부분은 바로 정부의 후원이었다. 유다는 여행 중에 새크라멘토 종점 도시화 계획을 포함하여 새크라멘토 대표자 회의에 상정할 법안들을 작성하고, 버크는 그 법안을 검토해 주었다.
버크는 유다의 열정에 동화되어 의회에서 유다의 법안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여당인 민주당은 이미 1856년에 퍼시픽 철도 찬성 결의안을 받아들인 바 있다. 유다의 철도법안이 통과하기 위해서는 1마일에 150피트나 되는 가파른 경사면에서도 열차가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유다는 선례를 바탕으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취합했고, 실질적으로 지원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회사를 설립한 다음 회사가 추진한 특정 노선에 대한 정확하고 확실한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하기로 결심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어디를 보나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에 깊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산봉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더치 플랫에서 위로 올라가는 오르막 철도 공사가 가능한 유일한 곳이었다.
유다는 당장이라도 회사를 창설하고 싶었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그는 자본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팜플렛을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팜플렛은 1860년 11월 1일 캘리포니아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는 유지들과 몇 차례 회합을 가졌다.
1861년 6월 28일, 한편에선 남북전쟁이 이미 시작되어 불이 붙어가던 와중에 '센트럴 퍼시픽 레일로드(이하 CP)'는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다는 정부로부터 연방정부의 국채와 주정부가 인정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CP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던 스탠포드, 크로커, 헌팅턴 그리고 홉킨스는 유다가 부재 중인 상태에서, 더치플랫 앤 도너 호 마차도로회사를 설립하고 자체적으로 행보를 이어갔다.
유다의 법안을 놓고 하원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1862년 5월, 퍼시픽철도법안은 통과되었다. 법안의 장대함으로 말미암아 CP는 새크라멘토를 기점으로 동부 쪽의 건설을 맡는 반면, 미주리 강을 출발하여 서부로 이어지는 공사는 유니온 퍼시픽의 창립의 계기가 되었다.찰스 크로커는 1868년에는 하루에 1마일씩 진전시키겠다고 CP 파트너들에게 다짐했다. 3주 후 헌팅턴은 크로커에게 '빠른 시간 안에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 최선이다'며 재촉했다. 이미 크로커는 헌팅턴에게 UP가 자체적으로 잡은 목표가 400마일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헌팅턴은 다른 빅포 멤버들에게 편지를 보내 더 빨리 동부로 진출해서 UP를 이기길 원했다.
CP의 작업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동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람과 기관차를 위한 물은 트러키 강에서 길어 거대한 반원뿔 모양의 나무통에 담은 후 평대형 화차에 실어 운반하였다. 선로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으며, 이들 앞에는 노반공사 인부들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10월 말, 노선은 네바다 주 윈네무카까지 뚫렸다.찰스 크로커는 "내가 센트럴 퍼시픽 철도를 건설했노라."고 했다. 쿨리스 헌팅턴, 르랜드 스탠포트, 테오도르 유다, 마크 홉킨스도 같은 말을 했다.
크로커는 1849년 금에 대한 꿈을 갖고 자신의 두 형제와 네 명의 청년과 함께 인디애나 주 사우스 밴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거기서 증기선을 타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플랫 강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는 통솔력을 발휘하여 일행을 하루에 거의 30마일씩 이동시켰다. 크로커 일행은 플랫 강 상류를 거슬러 북쪽 연안으로 올라가 드디어 해발 7,000피트의 록키 산맥 정상에 올랐다. 크로커 일행의 행로는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지역이었고 많은 모험들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알칼리 평원을 지나고 시에라네바다 정상을 지나, 드디어 캘리포니아 주 프레이서 빌에 도착했다. 이들 일행이 얼마 안 되는 돈과 양식 그리고 말과 마차로 평원과 산을 지나는 데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콜리스 헌팅턴은 21세 때 뉴욕 중심부에 위치한 상점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23세에 형과 동업을 하게 된다. 사업을 잘 운영해 나갔지만, 그는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지역을 들뜨게 했던 금을 얻기 위해 1848년 캘리포니아로 떠날 결심을 한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헌팅턴은 정말 잘 이겨냈다. 더군다나 그는 위기를 기회삼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윌리엄 셔먼 중위는 미국 동부에서 태평양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호른 곶을 돌아가는 루트를 선택했다. 항해는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위기를 모면하고 도착했다.
캘리포니아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았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사람들 틈에 유난히 수려한 외모의 마크 홉킨스가 있었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호른 곶을 향해 출발했다. 수많은 역경을 딛고 6개월만에 도착했지만 순탄할 것 같은 이들의 사업은 내분으로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은 금방 재기했다.
크로커, 헌팅턴, 셔만 그리고 홉킨스는 캘리포니아의 이주물결을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엄청난 비용과 도처에 숨어 있는 위험, 장기 여행에서 오는 권태와 육체적 고통을 모두 감수하였다.센트럴 퍼시픽의 탄생센트럴 퍼시픽, 네바다 주를 관통하다대륙횡단철도의 완성과 함께 축하 행사가 거행되었다. 골든 스파이크가 마지막 침목에 박히자, 드디어 동부와 서부를 잇는 양쪽 노선이 하나로 합쳐졌다. 이제 험난한 역경을 거친 대륙횡단철도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게 되었다.
5월 8일 두 철도가 연결되며 축하행사가 예정되어 있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퍼레이드는 웅장했다. 오전 11시, 주최자들에게 철도 연결이 전해지자 새크라멘토는 점점 달아올랐다. 5월 10일 월요일, 이른 아침 몇 시간 동안 정상으로 올라가서 동이 트자마자 일을 시작하면 축하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대피 선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CP를 대표하는 인사들로는 스탠포드, 스트로브리지, 임원들 그리고 쥬피터 호 기관사 조지 부스, 소방수 머피, 차장 엘리 데이슨 등이 참석했으며, UP에서는 도지, 듀란트, 더프, 딜론, 리드, 혹시, 케이스먼트 형제 잭과 댄 등이 자리했다. 행사내용은 두 가지로 정해졌다. 첫째는 전선 두 개를 해머에 연결하여 골든 스파이크를 가볍게 내리쳐서 그 메시지를 전국으로 보낸다는 계획이고, 두 번째는 하트, 러셀, 솔트레이크 시티의 세비지 대령이 마음대로 사진을 찍게 하자는 것이었다. 스트로브리지와 리드가 마지막 침목을 제자리에 갖다 놓자, 듀란트는 들고 있던 골든 스파이크를 박았다. 쉴링은 '완성!' 메시지를 보냈다.두 회사가 공동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자재였다. 1869년 1월, CP에는 샌프란시스코행 배가 35척 있었다. 이 배편으로 18대의 기관차를 포함하여 꼭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였다. 트러키에서는 제재소마다 CP가 주문한 100만 개의 침목 주문을 맞추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동되었다. UP의 경우 또한 오마하 적하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침목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스먼트가 주문한 침목은 600대의 평대형 화차로 400마일의 거리를 운반해야 했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게 침목은 부족했다. 그 원인 중에 하나가 변덕스러운 해상 운송이었다.
기후 조건은 두 회사 모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두 회사는 겨울에도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에 날씨에서 오는 문제는 대부분 자체적인 실수로 간주되었다. CP의 노반공사와 선로작업은 고도 5,000피트 이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네바다 주 홈볼트 웰즈와 유타 주에 진입해서는, 스트로브리지가 노반공사 인부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이들은 눈사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UP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월 10일, 폭설이 와이오밍 주를 강타했다. 2월이 되자 9대의 CP 기관차를 시에라네바다에 묶어 놓았던 폭설이 유타 주로 건너왔다. 사고는 노선마다 빈번하게 일어났다.
1868년도 끝나갈 즈음, UP와 CP 간의 전쟁은 서서히 끝은 맺고 있었다. 측량팀들은 이미 임무를 완수하였으며, UP는 훔볼트 웰즈까지, CP는 에코 캐년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해체되었다.
1월이 되자 UP의 선로는 에코 캐년 어귀에서 겨우 8마일 떨어져 있는 에코 시티에 진입했고, 첫 기관차가 오전 11시에 도착했다. 문제는 에코 바로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터널공사가 느리게 진척되고 있었던 것이다. 1월 말, 에코에 가장 근접한 가장 긴 터널 속으로 빛이 비쳐들었다.
CP는 에코부터 훔볼트 웰즈를 향하여 선로를 놓으며 1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달 28일에는 에코 서쪽 150마일 지점까지 선로가 이어져 있었고, 훔볼트 웰즈에 도착한 후에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주 경계선 쪽으로 놓이게 되어 있었다. 경쟁이 서서히 마무리지어지자 찰스 크로커는 현장의 중국인 인부들에게 작업속도를 더 높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2월 26일, CP의 선로는 훔볼트 웰즈 서쪽 20마일 지점에 있었으며, 이즈음 UP는 오그덴 동쪽 20마일에 있었다.
유타 주 외곽에서는 양 철도회사가 빠른 속도로 선로를 놓고 있었다. 홉킨스는 하루에 4마일의 속도로 선로를 놓고 있다는 의미로 헌팅턴에게 '방랑하는 델리아 피쉬 댄스'라는 암호문을 보냈다. UP의 교량이 먼저 건설되었다. 4월 7일, 그 첫 번째 기관차가 증기를 내뿜으며 베어 강을 지나 코린느로 들어오고 있을 때 CP는 여전히 모뉴먼트 포인트 서쪽 15마일 근방에 있었다.
의회는 공동 결의문에서 'UP와 CP이 공동 종착역은 오그덴이나 그 근방이 될 것이며, UP가 건설을 맡는다. 그리고 CP는 종착역에서 프로몬토리 서미트까지 철도에 대한 대금 및 소유권을 이양받을 것이다. 이로써 양 철도는 프로몬토리 서미트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연속 노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고 공식화했다.새크라멘토에서 오는 CP와 오마하에서 출발한 UP의 종착역은 오그덴이 되었지만, 두 철도가 처음 만나는 지점은 프로몬토리 서미트에 있는 분지이다. 노반공사 인부들과 선로작업 인부들은 도지와 헌팅턴, 의회의 결정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4월 10일 UP는 프로몬토리 정상 서쪽 노반공사를 중단했으며, 4월 15일에는 CP가 정상 동쪽 노반공사를 중단했다. 양측은 인력, 텐트, 장비, 마차, 말 그리고 노새 등 모든 것을 철수시켰다.
4월 27일, CP의 선로가 새크라멘토에서 678마일 지점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곳은 프로몬토리 서미트에 14마일 떨어진 곳이고, 8마일 반경 내에서는 UP가 하루에 1마일씩 선로를 놓고 있었다. UP는 아직 빅 트레슬과 난공사인 암석 절단작업을 얼마간 남겨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4월 30일, CP는 도너 호 위쪽에 있는 첫 번째 정상에서 동쪽으로 500마일 이상 떨어진 마지막 정상에 이른다. 기관차 전량과 철제, 스파이크, 이음새, 볼트 등을 동부 해안에서 옮겨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1년 반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상분지에서는 프로몬토리라는 새로운 마을의 탄생을 예고하며 텐트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반면, UP는 커트구간 한 곳만 빼고 모두 끝났으며, 양쪽 방향으로 노반 및 선로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바퀴 달린 지옥은 이제 그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코린느에서, 서쪽으로는 UP 캠프에서, 장소는 바뀌었지만 위스키 판매상, 도박꾼, 매춘부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UP 인부들이 프로몬토리 서미트에서 동쪽으로 도로 건설을 시작했을 때 두 철도는 이미 만난 상태였다. 그게 아니라면, 마지막 2,500피트만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거의 만났다고 할 수 있었다. UP는 아직 커트구간을 일부 남겨놓고 있었고, 교량은 미완성 상태였다. 그리고 선로도 일부 더 놓아야 했기 때문에 CP 기관차들만 그 부지까지 올 수 있었다. 서로가 만족한 상태에서, 빅포와 UP 이사진은 철도 연결 날짜를 5월 8일 토요일로 정했다. 도지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승리와 고생을 한마디로 평하는 걸로 그 끝은 맺었다. "철도 부설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 막을 내리고 있다. 그 대단원 막을 내리는 이 순간, 마치 남북전쟁을 끝낸 듯하다."유니온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유타 주로 돌격하다정상으로브라이햄 영은 수려한 외모와 공정성 그리고 결단력을 겸비한 지성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인물됨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인도하든 그를 따르겠노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솔트레이크 시티를 세우고 그곳을 모르몬교의 종산으로 만들었으며, UP와 CP를 건설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UP 초창기부터 노선 선정에 관여했고, UP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UP의 초창기 주주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는 열광적인 철도후원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영이 비모르몬교도와의 상업적 교류를 반대하며 유타주의 광물 채굴을 저지하려 하기 때문에 철도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지도자로서 그는 재능이 있었다. 그의 역량은 현실로 나타났으며, 1867년에만 약 5천 명의 영국 출신 성인들이 지온으로 왔다. 영은 리버풀에서 UP의 선로종착지까지 이민자 한 명에게 들어가는 총경비가 철도가 생기면 훨씬 저렴할 것으로 집계했다. 이 외에도 일과 돈을 철도로 얻을 수 있었다. 영은 모르몬교도들이 에코 캐년 상단에서부터 솔트 호 쪽으로 노반공사를 진행하되, 공사는 10일 후부터 시작하여 11월 1일에 끝내기로 합의했다. 6월 초, 모르몬교도들은 공사에 들어갔다. 노반 및 교량작업 외에 모르몬교도들과 UP 노동자들은 터널을 뚫어야 했다.세계 최대의 걸작품 완성1865년 1월, 정부가 파견한 세 명의 위원들은 선로작업 구간을 조사하기 위해 UP의 작업현장으로 갔다. 위원들은 작업현장과 철로 상태를 면밀히 검토하며 흡족함을 나타냈다. 1866년 2월, 듀란트는 케이스먼트 형제에게 선로설치를 맡겼다. 듀란트는 이것말고도 여러 가지 조정 역할을 맡았다. 그 중에서도 UP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가장 최고의 선택은 결심을 굽히지 않고 도지 장군을 설득하여 군복을 벗게 한 사실이다. 4월 말, 듀란트는 도지에게 UP 기관장 자리를 제안하기 위해 세인트조셉으로 향했다. 도지는 쾌히 승낙하고, UP 조직을 정리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UP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의 공격은 그들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였다. 네브래스카 주에 사는 인디언들은 매우 공격적이었다. 인디언과의 잦은 교전 속에 어느새 UP 인부들은 인디언들에 대해 공격적으로 변해 있었다.
인부들은 대개가 10대 혹은 20대에 접어드는 청년이었고 그들의 신분은 전역군인이었다. 임금은 작업량에 따라 일당으로 2.5∼4$ 정도를 받았다. 작업은 하루가 다르게 진척되었으며, 1866년에는 전체 8천여 명의 인부들 중에서 선로 끝머리나 그 근방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이 약 1천 명 정도였다. 인부들은 케이스먼트 형제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지가 보고서를 놓고 씨름하는 동안, 노반공사와 선로작업, 기타 작업장에서는 인부들이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1866년 11월 말까지 철도는 미주리 강에서 시작하여 노드 플랫 강 서쪽 10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