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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지음 | 산처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대심원 공판은 1926년 2월 26일에 시작되었다. 삼엄한 경계 하에 대심원 대법정이 개정되었다.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착용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어를 사용함으로써 천황제국가에 대하여 철저한 민족적 저항의 자세를 보였고, 후미코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음으로써 조선민족의 천황제국가에 대한 투쟁에 연대 의지를 표명했다.



재판장이 검사가 말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할 것이 있느냐고 묻자 박열은 1924년 12월 30일에 작성한 '나의 선언'을 낭독했다. 이것은 박열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피력한 것이다. 약육강식은 인류의 본성이자 자연의 대법칙이라고 단정한 다음, 이에 반역하여 인류를 절멸시키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리고 천황과 황태자를 위해하려는 것은 어떤 생각에서인가라는 질문에 박열은 1924년 2월에 작성한 '어느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자에게 주는 글'을 낭독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수탈, 동화, 우민화정책 등을 폭로하고, 천황제국국가의 멸망을 예언했다. 이렇듯 박열은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지배와 수탈을 자행하는 천황제국가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사상을 표명하는 장으로서 법정을 활용했던 것이다. 천황제국가에 대한 후미코의 투쟁은 자기의 자율을 건 싸움이었다. 이러한 저항이 박열과의 차이나 그의 실패를 넘어 천황제국가에 대한 박열의 민족적 저항과 공동투쟁하는 접점이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심원 공판 첫째 날에 후미코가 박열과 함께 조선옷 차림으로 법정에 나온 것도 그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박열 개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후미코와 박열의 공동투쟁은 민족과 개성이 모두 다른 주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반천황제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수행된 싸움이었으며, 동시에 민족을 넘어선 사랑으로 묶인 투쟁이기도 했다. 다음날인 27일 제2차 대심원 공판에서 후미코의 옥중수기 낭독이 끝난 후, 검사의 논고가 진행되었고 형법 제73조에 의거해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박열의 진술, 변호인의 변호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재판은 막을 내렸다.

대심원 공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26년 3월 8일 다시 「조선일보」특파원과 면회를 했다. 이 면회기사는 후미코가 자살한 후, 그녀를 추도하여 1926년 7월 31일 및 8월 1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다. 그날 후미코는 하얀 치마저고리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얼굴에는 엷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미소를 띤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죽음이라는 것을 앞에 둔 사람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태연자약했다. 그러나 후미코가 쉽게 이런 심경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지닌 후미코였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을 통하여 천황제와 대결을 계속했던 것이다.그런데 은사란, 두 사람의 전향에 대한 기대감과 이에 다른 전향정책의 강요까지 포함되고 있었다. 변호사 후세 다쓰시 등이 쓴 『운명의 승리자 박열』에 따르면, 박열은 소위 '은사'에 의해 감형을 받은 다음날인 4월 6일에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옮겨졌다. 이 형무소는 주로 여성 죄수를 수용했다. 이곳으로 와서 3개월 반쯤 지나 카네코 후미코는 자살했다. 그 날짜와 자살 수단에 관하여 지금까지 잘 알려진 것처럼 얘기되어 왔으나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후미코는 7월 23일 아침 자신이 꼬고 있던 삼실로 목매달아 죽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쿠노가 도치기지소로부터 "후미코사망급래요."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7월 23일 오후 0시에 발신하여 2시 35분에 수신한 전보를 통해서였다. 후미코의 어머니 기쿠노는, 후미코가 박씨 집안으로 입적 결혼했으니 조선에 있는 박열의 집으로 전보를 보내 사체 인수를 의뢰하고 싶다는 뜻을 타전했다. 어찌됐든 후미코의 사망 상황은 형무소 당국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계속 은폐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형무소 당국은 후미코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을 철저하게 비밀로 했다. 그만큼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중대한 행위를 형무소 당국이 후미코에게 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후미코가 만약 '은사' 직후에 자살을 했다면 그녀의 죽음을 국가권력이 부여한 삶을 부정한다는 의미의 자살로 이해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박열은 '은사' 직후에 단식에 의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후미코의 자살은 '은사' 후 3개월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의 일이다. 당연하게도 그 3개월 반 사이에 후미코의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형무소지소의 후미코에 대한 처우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형무소지소로 오고 나서도 전향을 요구받았고 독서 내용도 제한되었다. 편지 왕래를 일절 허용하지 않은 것도 전향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미코는 7월의 자살이 있기 전부터 이미 자살시도와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옥중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후미코에게 가해지는 국가권력의 구체적인 전향정책에 대한 저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유품으로는 후미코의 유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미코의 사고방식에 비추어보아도 그녀가 유서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서적과 잡지의 잘려나간 부분에는 후미코가 형무소의 처우에 대하여 저항 혹은 항의한 문장이나 옥중의 상태를 기록한 문장이 씌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형무소 당국은 후미코가 쓴 것을 말살하고 사망상황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 전향 강요의 흔적을 지워버리고자 했을 것이다.후미코는 밑바닥에 살고 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활방식의 자율적 결정을 거부당하고 있는 '자기'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기가 직면한 근대일본에 내재하는 문제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성실하게 대결하여, 몸소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했으며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관점을 구축했다. 1898년 시행된 메이지 민법은 남성 호주의 권한을 강화했다. 천황제국가는 가족을 통하여 국민을 지배하였으며, 호주에 대한 가족, 특히 아내나 딸의 순종이 천황제국가에 대한 복종을 배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중시했다. 후미코가 천황제국가와 직접 대결하기 이전에, 집 안에까지 침투해 있는 천황제와 먼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후미코가 걸었던 길은 참으로 가혹한 길이었다. 근대일본의 그렇게 냉엄한 역사적 현실이 과거가 되어버렸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종군위안부'에 대하여 '국민기금' 운운하며 국가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보상'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군위안부'를 훨씬 웃도는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군인, 군속에 대한 보상은 어찌할 셈이란 말인가. "저는 일본인이긴 하지만 일본인이 너무 증오스러워 화가 치밀곤 합니다."라고 근대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했던 후미코는, 오늘날보다 훨씬 가혹했던 일본의 역사적 현실과 대치하여 쉼없이 자기 발견의 길을 찾았던 후미코는 오늘 우리의 걸음을 계속해서 격려해 줄 것이다.일본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명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 1875년에 간행된 『문명론의 개략』이었다. 이러한 테제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특권을 고집하는 사족(士族)들이나 국체론자와 민권론자 모두에게 메이지 정부가 추진하는 문명개화 정책에 협력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개화주의라는 관점에서 청일전쟁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출발점부터 아시아에 대한 우월의식 또는 차별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문명개화라는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일본의 침략적 대 조선정책을 문명을 지도한다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던 것이다.



1875년 9월 20일, 일본은 조선을 도발하여 강화도사건을 일으켰고 1876년 2월 26일에 강화도수호조규가 조인되었다. 러일전쟁이나 조선침략에 반대했던 초기사회주의자는 문명 극복을 지향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 역시 타민족을 억압하는 문명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문명국의 편에 섰다.

결국 그들은 '문명국'이 식민지와 종속국을 야만적으로 침략하는 제국주의라는 사실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했을 뿐, 문명 선진국이라는 의식에서 생겨난 민족차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청일전쟁에 의해 확립된, 아시아 특히 조선에 대한 민족차별의식을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는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민중의식의 측면에서 본 청일전쟁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천황제의 권위가 민중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일본이 문명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는 대국의식(大國意識)의 등장과 함께 천황의 권위도 상승했다.



1895년 4월 17일 청일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요컨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영토를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천황이 문명개화에 앞장선 결과라고 말한다. 일본 문명의 대국의식이나 천황숭배는 그 대척점에서 조선침략의 진행에 다른 중국인, 특히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의식을 심화, 고양했던 것이다. 이 두 측면의 내적 연관성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가네코 후미코가 천황제와 대결함과 동시에 조선인과 연대해야 했던 역사적 필연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후미코의 사상형성과 조선 체험기성 가치관과 결별하다

도쿄에 돌아온 이후의 사상형성박열과 만나다



후미코와 박열의 만남박열의 성장과정일본으로 온 뒤 박열의 사상편력과 생활후미코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은 할머니였으며, 그 다음이 고모였고 게이자부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할머니는 대단한 권위주의였다. 아버지의 권위주의는 그녀에게서 이어받은 듯하다.



핫토리 도미에는 이 학교에 부임하자 여러 가지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학교 뒤에 있는 땅을 빌려 농업실습을 하기도 했다. 핫토리는 생산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농민에 대한 존경심을 농업을 통하여 가르치고 싶어했던 듯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할머니의 그것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농업실습 사실을 안 할머니와 고모는 그녀에게 실습 참가를 금했다. 일본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는 핫토리에게 편지를 썼다. 핫토리는 그녀에게 그때까지와는 다른 가치관, 즉 할머니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농민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르친 은사이자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말하는 선(善)과 핫토리가 말하는 선 사이의 거리! 이처럼 상극과도 같은 선에 관한 두 관점은, 도쿄 학습시절에 자율적으로 형성된 그녀의 가치관 수립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이 점에서 이와시타 가의 사람들은 그녀의 반면교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공동투쟁



잡지 발행흑우회와 불령사천황제와 대결하다



대역죄 적용에 맞서불령사 설립은 1923년 4월에 후미코와 박열의 논의를 거쳐 이루어졌다. 총 동인수는 23명이며, 이 가운데 조선인이 17명이고 나머지 6명은 일본인이다. 불령사 동인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모두가 20대 청년이며, 조선인과 일본인 고학생 및 노동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미코의 설명에 따르면, "흑우회 회원은 비교적 세련된 무정부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을 규합하여 이 주의를 선전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설립 모임에서 논의 끝에 불령사의 목적을 "민족적이지도 않고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은, 다만 반역이라는 것"으로 결정했다. 결국 불령사는 당시의 사회에 저항하고자 했던 조선인과 일본인을 널리 결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대중단체에 머물 뿐 특정한 행동은 하지 않고, 직접행동은 개개인의 의지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불령사의 분위기를 보면 1917년의 러시아혁명, 1919년의 3.1운동과 그 후 중국 동북지방을 근거지로 한 무장투쟁 및 테러 투쟁의 고양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청년 박열의 정치적 낭만주의가 만난 것이어서, 그들의 운동이 아무런 꾸밈없이 기층민중 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했다. 불령사 동인의 회합 장소였던 박열의 집에는 '불령사'라는 표찰이 당당하게 걸려 있었다. 흔히 불령사는 비밀결사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이 단체를 비밀결사라고 부를 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다. 때때로 습격을 했다고 해도 그것을 비밀결사라는 거창한 말로 과장할 수는 없다.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대지진이 간토(關東) 일대를 엄습했다. 도쿄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푼다는 유언비어가 확대되어 갔다. 2일,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 9월 3일자는 "불령선인 각 곳에 방화, 제도(帝都)에 계엄령 선포"라고 보도하면서 전국에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군대, 경찰, 자경단 등 관민일체의 조선인 학살이 전개되었다. 그 기간은 전반적으로는 9월 1일부터 6일까지이지만, 부분적으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관헌이 조선인 학살에 앞장선 기본적인 이유는 거족적인 3.1운동과 그 후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에 따른 공포감에 있었다. 3.1운동 후 조선의 농민운동과 노동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중국 동북지역과 시베리아를 거점으로 하는 무장투쟁과 중국에 거점을 둔 의열단과 같은 테러투쟁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 재일조선인 운동도 3.1운동을 기점으로 학생들의 민족주의 운동에서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운동과 노동운동으로 급속히 변화해 갔다. 1923년 5월에 있었던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경찰이 조선인과 주의자에게 탄압의 창 끝을 겨누고 있었다. 이러한 치안당국의 동향을 보면, 간토대진재가 일어나자 그들이 조선인폭동이라는 환상에 위협받고 있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박열,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 동인의 체포 및 기소

박열,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 동인의 체포우선 성장기 그녀의 부모 체험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후미코의 양친 체험은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된 가장 기본적인 원체험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양친 특히 아버지와의 대결을 통하여 근대 일본과 맞서게 된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1903년 1월 25일이다. 출생지는 요코하마 시였다. 아버지는 사에키 분이치. 사에키 가는 주조업을 하면서 대대로 촌장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방의 명망가였던 셈이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상당한 자산이 없으면 히로시마현에서 도쿄의 중학교에 진학시킬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천황-귀족-노동자-조선인이라는 천황제를 지탱하는 차별적인 가치 서열 안에서 격이 높은 자신의 가계를 과시하고자 한 인간이었다. 아버지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가문을 자랑한 것은 경제적 몰락에 따른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가나가와 현을 떠난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어머니는 가네코 기쿠노이며 산골 농사꾼의 딸이다. 평범한 서민층에 속한 가네코 집안은 풍요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에키 집안 사람들처럼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서민적 애정을 간직한 집안이었던 듯하다. 다만 어머니는 남자에게서 자립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 어머니와 천황제적 가족주의 권위를 내세웠던 아버지는 후미코에게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녀의 불행은 양친의 부부관계가 무너지면서 시작됐다. 이들의 부부관계는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의 아내가 된, 어머니의 여동생 다카노(즉, 후미코의 이모)가 그녀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어머니와 부부로서 살아갈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다카노를 호적에 올린다.



일곱 살이 될 즈음 그녀는 양친이 다투면 어머니를 동정하고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질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억압받는 쪽에 서는 후미코의 삶의 태도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카노와 아버지, 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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