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미국인
한스 디터 겔페르트 지음 | 에코리브르
전형적인 미국인
한스 디터 겔페르트 지음/이미옥 옮김
에코리브르/2003년 3월/247쪽/11,000원
머리말
2001년 9월 11일, 과격 이슬람 단체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무너뜨리고 워싱턴의 펜타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때, 미국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독립전쟁 이후 처음으로 적들이 철옹성처럼 안전한 미국이라는 요새를 침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에게 경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테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치 체계를 다지는 초석이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미국적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에는 미국인의 특징이라 불리는 모든 덕목들뿐 아니라 미국인들의 신화, 약점과 강박관념들조차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사랑, 협동 정신, 낙관주의, 애국심, 거침없는 추진력 등은 그야말로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선의의 미국인들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골수에 사무치게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것에 대해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다, 영국적이다, 프랑스적이다 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다 라는 말은 그렇지 않다. 유럽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특정 국민들이 전형적으로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 여러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미국인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집단적인 행동이나 사고에는 그런 전형적인 성향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미국인
누가 진정한 미국인이며 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사실 지역이나 민족 분포에서는 미국을 찾을 수 없다.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어느 지역에 살든 그리고 조상이 어디에서 왔든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는 아주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미국 사회에서 동질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한 국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조사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미국이 그런 대상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유럽 국가들은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이를 거부하고 싶을 때면 과거를 들여다보곤 한다. 그러나 신생국 미국은 신세계에서 하얀 종이와 같은 자화상만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과거가 하나도 없는 국가였던 셈이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보수적인 자화상과 개혁적인 자화상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미국에서는 하나의 자화상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한편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특하게도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개혁적이다. 이 점이 바로 미국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의 신화들
명백한 운명 - 선택받은 민족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북미로 갔던 영국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권리를 존중하던 청교도들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도착한 땅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정주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청교도들은 그들로부터 땅을 구매해야 했다. 하지만 사유재산이 없는 인디언들에게 땅을 구매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인디언들과 우호조약을 맺어보았지만 조약 체결자가 죽거나 마음이 변하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청교도들은 신대륙을 밟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장했고, 세력을 팽창시키는 정복자가 되고 말았다. 반면 남부에 도착한 식민지 개척자들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대농장을 운영해 큰돈을 벌 목적으로 미국에 이주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영국의 지방 귀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똑같아진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켜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는 사회화된 사람들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어떤 일을 하면,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좀더 고상한 이상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인디언들이 질병과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가며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날 즈음 생겨난 이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신화들을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 되었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즈 매거진 & 데모크라틱 리뷰」 지 7/8월호에 존 오설리반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대륙으로 건너와 매년 수백만 명에게 자유롭게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어쩌면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명백한 운명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 미국에서 지배적이었던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영토 확장에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토 확장을 단순히 땅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확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에게 가한 부당한 행동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국가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 어떤 비판의식도 운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신념을 흔들어놓지는 못하고 있다.
비록 유대인들처럼 자신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인들의 무의식은 그 점을 확신하고 있다. 구약성서를 지침으로 하는 청교도들에게 신은 인자하신 분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여호와이다. 만일 그들이 믿는 대로, 이 신이 선택한 미국인들에게 모든 대륙을 지배할 임무를 주었다면, 저주받은 인디언들을 인자하게 다룰 도덕적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신의 전사이며, 다른 편에서 싸우는 전사는 악의 하인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 -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신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도처에서 볼 수 있다. 1956년 의회에서 선거 표어로 발표했던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표현은 사실 1864년부터 여러 종류의 동전에 새겼다가 나중에는 모든 달러 지폐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표현보다 더 자주 듣고 보는 문장은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이다. 공적인 행사가 있을 때면 늘 이 말로 끝을 장식하는 게 보통이고,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모든 광고판에 이 문장이 등장했다. 전체 미국인의 96퍼센트는 신을 믿거나 신적인 존재를 믿는다. 악마의 존재에 대해 서독 사람 가운데 겨우 18퍼센트가 믿는데 반해, 미국 사람들은 69퍼센트가 믿는다.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원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분별 없는 행동으로 보일 게 분명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기독교 교리를 일상 생활에 필요한 도덕이나 철학적인 도덕으로 해석해놓았고, 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목사들도 어느덧 생겼다. 그에 반해 미국인의 대다수 -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 는 단순하고 민속적이며 성경을 중시하는 기독교 형태에 만족하며, 교회세를 통해 매월 월급에서 삭감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낸다. 반면 미국의 학교들이 종교 수업을 금지한 것은 이상해 보인다. 이들은 오랜 기간 논의한 뒤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기독교의 상징물도 학교 내에 둘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렇듯 미국은 교회와 국가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미국인들이 국가와 국가 시설에 대한 절대적 중립을 고집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그것은 과거를 보면 알 수 있다.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이끌던 영국 국교로부터 압력을 받자 신대륙으로 이주해버린 과거를 생각해 보라. 이때부터 미국의 신교도들은 어떤 교권주의도 증오했다. 이들은 상부로부터 명령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교구에 속하기를 원해, 다양한 교파들이 수많은 교회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교차들이 공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부분에 한정되어야 하므로, 미국의 신앙에는 애초부터 근본주의 성향이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40퍼센트가 다윈의 진화론을 학교에서 추방하려 하는 창조주의자라는 사실은 미국이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자 중 핵심 인물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낙태수술을 하는 의사들은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대중 문화의 모티프들
악과의 투쟁
서부 영화와 괴기 영화는 미국 영화 가운데 가장 특징 있는 장르에 속한다. 이 두 장르는 어느 형태로든 악과 싸우는 것을 다룬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악은 소도둑이나 갱 또는 교활한 인디언들이고, 괴기 영화에서는 갑자기 인간 세계에 들어와 세상을 파멸시키려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이다. 사실 괴기 영화의 선구자는 무서운 내용의 소설인데, 이 소설이 나온 곳이 바로 유럽이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악마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혹은 순전히 악의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힘을 대표한다. 가령 괴테는 악마가 메피스토펠레스 형상을 한 채 악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역시 신의 도구일 뿐이라고 묘사했다. 사실 독일 문학보다 앵글로색슨 문학에 악마적인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청교도들은 악마를 지옥에 떨어질 숙명을 가진 자로 본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악마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근절시켜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듯 악마와 싸워서 무찔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치적인 인식을 결정함으로써 가장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이 나치스 제국을 악마의 제국이라 보고 이들과 대항해서 싸웠을 때는 나름대로 정당했다. 하지만 훗날 공산주의와 투쟁할 때 그 같은 강박관념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고, 악마를 쫓기 위해 점점 바알세불(히브리어로 악을 쫓기 위해 더 사악한 악을 동원하는 것)과 연합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악을 의식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1970년대 이래 그 같은 의식이 쇠퇴하자 이를 민족적인 문제로 볼 정도였다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조지 W. 부시는 2002년 1월 31일 연두교서에서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미국이야말로 악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국인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해서 상대를 악하다고 간주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도전적인 자극으로서의 대재난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자주 개봉하는 미국의 액션 영화들은 대재난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거나 이를 막는 데 성공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일반적인 모티프에 비하면 악과 싸워 승리하는 주제는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왜냐하면 자연이 주는 위협에 비한다면 악이 우리에게 주는 위협은 현실적으로 미미하니까 말이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지진, 토네이도, 해일, 산사태, 난파 등의 대재난은 사람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긴장된 주제는 유럽의 영화에서도 볼 수 있지만, 미국 영화가 훨씬 자주 다룬다. 이 역시 미국인들이 가진 강박관념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 처하면 미국인들은 그들이 지닌 여러 덕목들을 활짝 꽃피울 수 있다. 철저한 계획을 통해 재난을 극복하면 이들은 만족하고, 재난에 처한 사람들이 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면 만족은 정점에 이른다.
미국인들은 삶을 위협하는 대재난에 맞닥뜨리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던 신념을 더욱 믿는 경향이 있다. 즉,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팀플레이를 할 준비가 된 전문가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이다. 정확한 계산에 의하면 20년 안에 지구에 혜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이 혜성을 떨어지기 전에 발견한다면, 충돌 직전에 첨단 기술을 이용해 그 비행 물체를 파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오직 미국인들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재난 영화에서 영웅적인 주인공이 폭발하기 바로 직전에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버튼을 누르듯이 말이다. 미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미카제식 자살 비행이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저지르는 테러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들에게는 개인이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바로 집단적인 대재난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스콧 단장을 포함한 남극 탐험대의 일원인 오츠 단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동상으로 인해 업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오츠는 "잠깐 나갔다 오겠소."라는 말만을 남긴 채 살을 에는 추위 속으로 나가 죽음을 택했다. 미국인들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비록 발이 꽁꽁 얼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계속 행군하고, 친구들은 그를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어떤 재난을 당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미국이 보여주는 모순들
폭력과 친절
클린턴 대통령 아저씨, 부탁드릴 게 있답니다. 제발 도시에서 죽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고, 저는 누군가 저를 죽일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살인을 그만두게 해주세요. 정말 정말 부탁드릴게요. 저는 대통령 아저씨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대통령 아저씨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알아요. - 당신의 친구, 제임스
이 편지는 1994년 4월 29일 뉴올리언스에 사는 아홉 살짜리 제임스 다비가 쓴 것이다. 그는 그 해 5월 8일 지나가는 차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처럼 섬뜩한 일화로 데이비스 G. 마이어스는 『미국의 패러독스』의 '폭력'이란 장을 시작했다. 어떤 미국인은 폭력이란 애플파이처럼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 대신에 유별나게 친절하고 정중한 미국인들을 접한다.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살인율은 독일보다 5배 높고, 영국보다 7배가 더 높다. 가장 끔찍한 것은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 연령층이라는 점이다. 25세에서 34세 사이의 남자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독일보다 30배 많으며, 영국보다 40배가 더 많다. 폭력이 일어나는 중심지는 흑인들이 거주하는 대도시의 슬럼 지역으로, 흑인은 국민들 가운데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를 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가장 많이 희생당하기도 한다. 범죄자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직업을 가질 가망도 없다. 이들은 범행, 감옥, 출소, 새로운 범행이라는 원을 끝없이 돌다가, 마침내 무기징역이나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범죄율에 대해 흑인의 사회적 환경에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슬럼에 사는 흑인들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특수한 미국적 현상으로 좁혀진다. 우선 미국인 2억 5,000만 명 가운데 2억 명이 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권총을 소유하는 것을 신성한 기본권으로 간주할 정도여서, 지금까지 어떤 정권도 무기 소지 제한을 반대하는 전국총기협회를 이기지 못했다. 특수한 미국적인 두 번째 현상 역시 총기 소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상적인 남성성을 상징한다. 미국이 서부로 확장하던 시절의 윤리가 아직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즉, 스스로 무기를 들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지 않고 경찰에게 그 과제를 맡기는 남자는 대부분의 미국인들 눈에 겁쟁이나 졸장부로 보인다. 그러나 변경에서 무기로 인디언들을 쫓아낸 개척자들과 달리, 오늘날 자기 방어 준비를 갖춘 용감한 시민들은 오히려 범죄자만 더 늘릴 뿐이다. 미국에서 강도는 집주인이 침대 곁에 권총을 두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장한 채 침입하고 필요하면 총을 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