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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마크 쿨란스키 지음 | 미래M&B
격감된 대구 자원이 다른 나라에서 당당히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낙관론을 고무시켰다. 1989년에 노르웨이 정부는 대구 자원이 줄어든 것을 깨닫고 어업을 제한했다. 실업률이 23%에 이르렀으나 어자원이 아직 상업성이 있을 때, 알을 낳을 수 있는 큰 물고기들이 남아 있을 때 이런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대구 어군이 안정되었고, 몇 년 뒤부터는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어업이 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막대한 돈을 들여 양어장을 만들었다.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야생 새끼들을 양어장으로 옮겨 크고 두꺼워질 때까지 키우는 데 성공했다. 대구는 잘 훈련되어 먹이를 줄 때 모여들기도 하고, 질병에도 강하고, 떼지어 사는 군집성이 있어서 양어장에 적격이었다. 또한 산 채로 시장에 내놓을 수도 있다. 양식장에서 자란 대구는 1년 안에 두 배로 성장하지만, 인공으로 부화된 대구는 네 배로 성장할 수 있다. 크기가 다산(多産)을 결정하기 때문에, 양식장에서 길러 바다에 풀어놓으면 대구 자원이 다시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고 약탈자를 피할 줄도 모르며, 사냥 기술이나 먹이 찾는 기술도 부족하고, 알을 낳기 위해 해안으로 이동해야 하는 시기, 물의 온도 변화 탐지 능력을 상실한 대구는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런 결함을 지닌 물고기가 번성하고 어쩌면 주류를 형성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 종(種)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어떻게 그 다양성, 즉 종이 세상을 살아가며 생명을 위협하는 많은 것들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넓은 범위의 유전 형질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확인할 길이 없는 과학자들로서는 오직 격감되어 얼마 남지 않은 '노던 스톡'들이 한 때 수백만 마리의 유전자 웅덩이에 나타났던 넓은 범위의 특징들을 완전히 그대로 지니고 있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남획은 점차 세계적인 문제가 되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해 확인된 물고기 종의 약 60%가 완전히 고갈되거나, 지나치게 개발된 것으로 분류되었다. 현재 전 세계 어장의 90%가 2백 해리 어장으로 폐쇄되어 있어, 어부들은 새로운 종을 발견하기 위해 수심이 더 깊은 곳을 뒤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 진화를 인간의 행위와 별개의 것으로 보고 싶어한다. 저기에 자연 세계가 있고, 여기에 인간이 있다. 그러나 인간 역시 자연 세계에 속해 있다. 만약 그가 사나운 약탈자라면, 그것 또한 진화의 일부분이다. 인간이 죽여 대구와 다른 종들이 생존할 수 없다면,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것들을 대신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실용주의자인 자연은 끈질기게 적응할 수 있는 종을 찾고 있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증명하듯이, 자연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들은 언제나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각국 정부는 어부와 어항이 사회적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어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단의 규모를 줄이면서 보조금을 주고 있다. 전직 어부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선진국 가운데 아이슬란드만이 어업이 경제에 크게 공헌하리라 기대하고 있는데, 그 나라조차 어부들의 숫자를 줄이려 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198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어선이 움직이는 데 920억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한편 총소득은 7백 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차액의 상당 부분은 어부와 조선업자들에게 제공되는 정부 보조금으로 메워졌다. 한편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1990년대 초에 이르러 유럽 연합의 12개국은 어업 보조금으로 연간 약 5억 8천만 달러를 썼고, 노르웨이만이 약 1억 5천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곤경에 처한 수산업에 신용(信用)으로 190억 달러를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그 대부금의 상당 부분은 결코 회수되지 않을 것이다.



글로스터 항구에서 몇 마일 떨어진 바위투성이의 뉴잉글랜드 해안선을 따라 여행자들이 '고래구경'을 하러 나가기로 계획을 잡아 놓고 있다. 한때 고래를 사냥해 많은 돈을 벌었던 이 울퉁불퉁한 해안에서, 관광시즌 동안 고래 관람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고래를 구경시키는 배의 선장들은 대개 실직한 어부들이다.



고래를 사냥하는 사회의 생활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회의 생활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수백만 개의 알을 낳는 물고기는 새끼를 놓는 포유동물인 고래보다 멸종되기가 더 어렵다. 그러나 1천년 동안 대서양산 대구를 사냥한 결과, 우리는 포유동물보다 멸종시키기 더 어려운 물고기인 대구를 멸종시켰고 자연은 오락과 교육을 위한 전시장으로 전락하였다.포르투갈인도 역시 북아메리카를 탐험하며 해도(海圖)를 그리고 있었다. 1502년에 제작된 지도에 보면, 뉴펀들랜드가 '포르투갈 왕의 섬'임이 나타나 있고, 1500년에 가스파르 레알(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뱃사람)이라는 사람이 뉴펀들랜드에 와서 이곳을 테라 베르데, 곧 그린랜드라고 명명했다.



한편 영국은 북아메리카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대구는 아이슬란드에서도 많이 잡혔기 때문에 대구잡이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키가 달린 쌍돛대 케치(근해용 종범선)들이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21개 섬으로 이루어진 화산군도, 아이슬란드와 영국 사이에 있다)로 향했다. 이것은 당시 최고의 어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까지 아이슬란드인은 자신들의 수역에 그만한 성능을 지닌 어선을 띄우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산 대구에 대한 권리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 한자 동맹 사이의 마찰이 점차 심해져 갔다. 상대는 자체적으로 해군을 육성해온 한자동맹이었고 영국은 영국답지 않게 단기간 전투를 벌인 뒤에 아이슬란드 어장에서 철수했다. 영국은 더 이상 아이슬란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뉴펀들랜드 어장이 개발됨에 따라, 영국 서부 지방에서 주요 어항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소금이 부족해 절이지 않고 말리기만 한 월동용 물고기밖에 생산하지 못했는데, 이것을 '스톡피시(stockfish)'라고 불렀다. 이 말은 겨울철마다 물고기를 꼬리끼리 묶은 뒤 '장대(stock)'에 걸어 말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늘어나는 시장에 1년 내내 공급할 수 있는 대구를 생산하고 싶었고, 북유럽같이 서늘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금 절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그린(green)'이라고 불렸는데 말린 물고기 보다 자연 상태에 가깝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소금을 아끼기 위해 영국인들은 소금에 약간 절인 후 말린 건대구를 고안했다. 이는 '록피시(rockfish)'라고 불리었다. 바위투성이의 해안에서 말렸기 때문이다. 록피시는 스톡피시보다 더 사랑 받았고,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왕립 수산회사의 한 회계사가 1682년에 소금에 관한 책을 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의 수산회사들은 몇 세기 동안 소금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유럽인의 세계는 16세기가 경과하는 동안에 두 배로 확대되었다. 그 세계가 외견상 텅 빈 미지의 영역으로 보이자 유럽인들은 열정적으로 탐색 작업에 나섰다. 영양가가 풍부한 가공한 대구를 식량 삼아, 일부는 금을 찾아 남아메리카로, 일부는 대구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갔다.



이 결과로 1621년 영국 청교도인들은 종교박해를 피해 북아메리카의 플리머스로 오게 되었는데 대구를 통해 얻게 될 이익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자마자 굶주려 죽어가고 있었다. 당시 열 척의 영국 배가 뉴잉글랜드 바다에서 수익을 올리며 대구를 잡고 있었고, 다음 해에는 37척의 배가, 1624년에는 50척의 영국 어선이 고기잡이를 했다. 청교도인들이 눈앞에 대구를 두고도 굶어 죽은 것은 아마 낚시 도구를 많이 가져오지도, 사용법도 잘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곧 청교도인들은 어업기지를 건설하여 대구를 팔아 스페인산 소금을 수입하고, 1638년에는 토르투가(아이티 북방 먼바다의 섬)에서 소금을 싣고 와서 영국정부가 외교를 통해 해결할 수 없었던 소금 문제를 무역을 통해 해결했다.



당시 대구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1629년 청교도인들의 고등 형사 법원에서 대구가 문장(紋章)으로 사용되었고, 1640년에 존 스미스가 6만 마리의 대구를 팔아 부자가 되어 유명해졌을 때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는 세계 시장에 30만 마리의 대구를 수출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뉴잉글랜드인은 독립적이고 부유하며 독점에 분개하는 장사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이 보호받는 안정된 시장에서 번영하는 동안, 뉴잉글랜드인은 자유무역 자본주의로 부유해지고 있었다. 18세기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자본주의에 의한 독창적인 저서에서, 뉴잉글랜드의 어업을 칭송했다. 스미스에게 어업은, 개인에게 자유로운 상업환경을 제공해줄 경우에 경제가 얼마나 번영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였다.17세기 노동 집약적 작물 산업인 설탕 전략은 노예 노동으로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수확 때는 16시간 이상 일하는 강노동으로 소금과 단백질이 필요했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카리브 해의 작은 섬들로 운송되는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따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탕수수 재배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며 더불어 카리브 해 지역에서는 식량이 거의 생산되지 않으므로 뉴잉글랜드에서 들여오는 염장(鹽藏) 대구가 최선이었다.



염장 대구는 상품으로 아주 까다롭기 때문에 서툴게 가른 물고기, 기후 조건이 나쁠 때 말린 물고기, 소금기 많은 물고기 등 팔리지 않는 염장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차지였다. 사실상 '서인도'라는 말은 소금에 절인 대구 중 가장 품질이 낮은 것의 상품명이었다.



뉴잉글랜드인은 상륙한 지 25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벌써 삼각무역을 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물고기는 항상 스페인에 팔았고, 포도주와 과일, 철, 석탄 등을 수입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서인도제도로 가서 가장 값싼 대구와 소량의 스페인 상품을 팔고, 설탕과 당밀, 담배, 목면, 소금 등을 사들였다. 그 배는 지중해와 카리브 해산 상품을 싣고 보스턴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정박할 때마다 돈을 벌어들였다.



다음 단계의 삼각무역으로는 아프리카 노예로부터 시작되었다. 1645년 세네갈 서쪽 해상에 있는 제도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사고 이들을 바르바도스에서 판 다음, 포도주와 설탕, 소금, 담배 등을 싣고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뒤이어 소금에 절인 대구를 선적하기에 이르자 노예, 대구, 당밀이 상업적으로 연결되었다. 오늘날까지 서아프리카에는 소금에 절인 대구와 '스톡피시' 시장이 존재하고 있다.1848년에 일어난 미국 독립 혁명은 놀랄 만큼 성공적인 혁명이었다. 혼란과 폭력 상태에 빠지지도 않았고, 독재로 흐르지도 않았다. 혁명을 지지한 이들은 상업적인 이해 관계가 달린 매사추세츠의 중산층 상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누구보다 영향력이 컸던 존 애덤스는 경제적인 체제로서 식민지주의를 신용하지 않았다.



한편 18세기 전반 동안 영국인은 급성장하는 아메리카 식민지가 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대영제국 안에 그대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영국 왕이 깨닫지 못한 것은 혁명 지도자 등이 근본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춘 실용주의자들이라는 점과 당밀과 대구와 차는 단순히 불화를 초래하는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영국은 얼마간 융통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글로스터에는 세관원조차 없었으며 프랑스령인 서인도제도와의 무역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는 모국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영국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의 독립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이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1733년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 이외의 지역에서 사들인 당밀에 무거운 수입 관세를 부과하는 당밀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프랑스령 서인도제도로부터 당밀은 암거래되어서 오히려 대구·당밀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결국 1760년에 영국은 모든 당밀에 세금을 부과하는 사탕법을 시도하였으나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암거래로 버텨내고 있었다. 이에 자극 받은 영국은 그 다음해 인지조례를 제정해, 처음으로 식민지인에 관세가 아닌 직접세를 부과했다.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처음으로 글로스터에 파견된 세관원은 습격을 받거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이후 영국은 손해를 본 상품을 왕실에 변상할 때까지 식민지 민중을 굶기려고 1774년에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식민지의 잉여 식료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발생한 것이었는데, 마블헤드에서 대구가 공급되고 찰스턴에서 쌀이 공급되었으며, 볼티모어에서 밀이 공급되었다. 코네티컷에서는 양떼를 몰고 오기까지 했다.



영국과 식민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3년이 지난 1778년에 파리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국경 문제와 영국에 대한 채무 이행 문제, 어업이 주 문제였는데 그 중에서도 어업 문제가 가장 까다로웠다.

노예 제도가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 1834년에,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에서 1848년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에서는 1849년에 폐지됨으로써 북아메리카의 대구 어업은 대단히 큰 타격을 입었다. 2세기 동안 카리브 해의 노예 시장에 덤핑해 왔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산 대구는 질적인 조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의 수요가 가장 많은 시장은 언제나 지중해 지역이었다. 이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19세기에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런데도 북아메리카인은 이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 노바스코샤는 거의 전적으로 생계를 고기잡이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질이 형편없어, 잡은 물고기의 대부분을 보스턴이나 카리브 해 지역에 팔았다.



서인도제도 시장이 쇠락함에 따라 뉴잉글랜드에서는 내수 시장이 성장했다. 소금에 절인 대구가 미국 군대의 주식이 되었고, 글로스터는 남북 전쟁으로 큰돈을 벌어들였다.대구를 잡는 일은 경제적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북극 바람이 물보라를 얼려 버릴 때에도 북대서양으로 나갔다. 그럴 때에는 밧줄들이 약 30센티미터 두께의 얼음 기둥으로 변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이 얼음으로 무거워져 배가 불안정해지면 배가 전복하지 않도록 도끼로 얼음을 떼어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손을 보호해 주는 합성 소재가 있지만 최근까지 어부들은 니퍼, 곧 목면 안감을 댄 두꺼운 고무 장갑을 꼈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만일 끼지 않으면 손가락이 30분 내에 자신도 모르게 얼어 버릴 수 있다.



대구잡이 어부들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는, 특히 라디오가 발명되기 전의 안개였다. 대구 어장은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걸핏하면 안개가 낀다. 2.4미터 짜리 배의 중앙부에서 배의 선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낄 때도 있다. 형체 없는 잿빛 안개 속에서 표류하는 어부들은 다른 배들이 듣고 충돌을 피하도록 뿔피리를 불거나 호각을 불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도리선 어부들이다. 17세기에서 1930년대까지 일반적으로 대구잡이에는 모선(母船)인 스쿠터와 두 명 혹은 한 명이 탈 수 있고 갑판이 없는 6미터 짜리 소형 보트인 도리선이 사용되었다. 도리선 어부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종종 자신들이 발견한 어장으로 몰래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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