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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케인과 홉킨스가 최근에 내놓은 연구서 『영국의 제국주의』는 경제적 해석과 주변부 이론이 지닌 난점을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이들은 영국 내부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특정한 사회세력의 이해 속에서 팽창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도 독점자본 대신에 '신사적 자본주의(gentlemanly capitalism)'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세운다. 이른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 영국 경제사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영제국도 처음부터 이들 신사적 자본가의 경제적 이해와 맞물려 진행되었다는 주장이다.



'신사적 자본주의' 연구의 목적은 물론 주변부 이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있다. 케인과 홉킨스에 따르면, 주변부 이론은 냉전과 탈식민화라는 동시대 상황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해석은 주변부 자체의 위기를 강조하나 왜 19세기 후반에 세계 곳곳에서 위기가 나타났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팽창의 원인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영국 산업의 느리고 불안정한발전과 해외 팽창의 속도라는 두 가지 현상의 관계를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무역 외 소득과 해외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로 북서부 제조업자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관찰했다.

케인과 홉킨스의 저술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자본주의'라는 말 앞에 무수한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신사적 자본주의', '지주자본주의', '서비스자본주의' 등의 표현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인상을 준다. 또한 그들은 유통주의적 시각을 비판하지만, 노동의 상품화만을 내세우지 않고 '축적 요소'를 강조한다. 이 경우 자본주의를 '시장을 통한 자본 축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 활동의 영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자본주의'라는 말 앞에 붙여 사용하는 여러 수식어는 이와 같은 활동 영역이나 또는 자본축적 메커니즘의 여러 형태를 가리킨다.

19세기 초반의 영국에서의 개혁은 당파적 차이를 넘어 재정-군사국가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는데, 자유당 집권기에 제도적으로 굳어진다. 이 시기 자유당의 개혁노선을 대변하는, 글래드스턴주의는 두 가지 신사적 제도의 출현에 기여한다. 첫째, 재무부를 정부 지출의 감독 부서로 일원화한다. 둘째, 잉글랜드 은행을 금본위제의 중심 축으로 삼는다. 신사적 자본주의의 무게중심이 귀족과 젠트리에게서 상업-금융 자본가에게로 이동하는 과정은 신제국주의 정책 강화와 표리관계이다.

요컨대, 18세기 초 이래 영국 근대사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는 원래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해왔다. 지주와 화폐자산 보유층의 동맹은 18세기에는 올드 커럽션으로, 19세기에는 값싼 정부와 자유무역주의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경제 발전과 해외 팽창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다만 19세기 후반에 신사적 자본가층이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내부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동맹의 균형추가 경제개혁의 주된 수혜자였던 금융세력에게로 기울어진 것이다. 이렇게 신사적 자본가들은 적극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도 영국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보수적 진보'를 내세웠다.

케인과 홉킨스의 저서에서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사적'이라는 개념이 매우 불분명하다는 데 이 연구의 치명적 약점이 있다. 둘째, 17,18세기 지주의 경제적 역할에 관해서 너무 과장된 평가를 내린 것 같다. 셋째, 19세기 후반 시티의 상업-금융자본가가 '신사적 자본가'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점을 전제로 내세우고, 이들의 경제적 열망과 새로운 제국주의 정책 사이의 관련성을 강조하는데, 몇몇 표본적인 집단만을 대상으로 한 한계가 있다. 넷째, 산업자본의 역할을 낮게 평가하는 근래의 수정주의 연구 일반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적 지배와 경제구조의 토대를 '신사성'에서 찾지만, 이러한 접근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그들은 이 신사성을 일종의 이념형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신사성만으로 시티의 금융과 서비스 경제의 외관을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빅토리아 시대의 영제국과 오늘날의 영국을 비교하면 세계체제의 중심국가가 반주변부로 전락했다는 느낌이다. 물론 영국 경제가 일방적으로 쇠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분명히 '상대적 쇠퇴'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상대적 쇠퇴를 경제사가들은 기업가들의 보수적 태도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신사층 문화의 영향에서 찾는 경향이 나타났다. 90년대에도 경제 쇠퇴문제는 여전히 경제사가들의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특히 루빈스타인의 연구는 계량적인 분석을 통하여 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자본의 실체를 조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위너 테제를 검토하면서 산업정신의 쇠퇴라는 말 자체가 오류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경제의 핵심이 공업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그는 문화적 해석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영국 경제의 장기 지속적인 쇠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 논의는 영국 경제사의 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미 1960년대부터 문화적 해석이 나타났지만, 이를 체계화한 것은 위너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사가들은 경제 쇠퇴를 생산요소, 즉 자본이나 노동 또는 토지의 공급 문제로만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순 경제적 요인만으로 이를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고, 19세기 중간계급의 시대정신에서 추적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중간계급 이데올로기에 '가치의 반혁명'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가치의 반혁명'과 젠트리화가 기업정신, 나아가 영국 경제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기업가들은 교외 생활을 동경했으며, 변화를 불신하고 매일의 사업 활동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그들 사이에 아마추어적 소양을 숭상하고, 여가를 즐기려는 젠트리적 문화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풍조가 영국의 경제 성장에 장애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위너 테제는 독창적인 견해라기보다는 그동안 간헐적으로 거론된 지주문화의 역기능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자본주의, 문화, 그리고 영국의 쇠퇴』에서 문화적 해석을 소개한 후, 영국 경제의 발전에 관한 낙관적인 견해를 통하여 위너 테제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영국 경제는 우선적으로 산업경제였고, 그 산업 및 공업상의 주도권은 1870년 이후 양적인 쇠퇴를 겪으면서 사라졌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영국 문화의 경험주의, 중용, 타협, 관용, 보수주의 전통이 결코 반공업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사립학교 교육이 기업가 2세의 젠트리화에 기여했는지를 검토한다. 그리고 지주, 시티의 상업 및 금융 엘리트, 북부의 산업 엘리트 등 세 집단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개략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그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최고 수준의 정치의 장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즉, 그는 영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추진세력을 젠트리 및 그들과 관련된 시티의 금융가들에서 찾는다. 영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산업화는 일시적인 분출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자본이 경제의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 시기는 전혀 없었다. 19세기 후반 영국 산업의 쇠퇴가 있었다면, 그것은 산업혁명기의 비정상적인 분출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이 좀더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조건을 갖춘 영역은 거의 예외 없이 금융 분야였다. 19세기 말 이후 산업의 후퇴는 이 분야에 대한 자본 유입이 줄어들고 좀더 기회가 많은 금융 분야로 자본 이동이 가속되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6. 다시 보는 자본주의의 역사7. '신사적 자본주의'와 제국8. 쇠퇴인가 지속인가, 영국 경제의 문화적 이해현대 추구는 19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제도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근대 스포츠로서 축구는 노동계급의 삶과 열망을 반영하면서, 사회 통합의 요소로 자리잡았던 것처럼 보인다.



축구는 18세기 여가의 상업화와 관련되어 발전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민중문화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근대 스포츠로서 축구는 역설적으로 민중문화와 유리된 뒤에 나타났다.



산업혁명 초기에 공업 지대의 노동자들은 이전의 민중적 놀이문화를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다. 공장 지대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닭싸움이나 개싸움을 지켜보며 환호를 지르는 데 익숙해 있었다. 사실 산업화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음주는 일과 놀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노동과 분리되지 않았다. 산업화가 전개될수록 노동과 여가의 미분리가 생산성에 장애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노동계급의 놀이문화는 외부의 압력과 함께 급속도로 쇠퇴한다.



18세기에 축구는 명문 사립학교의 교내 경기로 그 전통을 이어가다가 다음 세기에 더욱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사립학교 중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이들 학교에서 축구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로도 손쉽게 전파되었을 것이다. 이들 학교는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갖가지 문화 상징물을 내세웠는데, 축구도 이에 해당했다. 근대 스포츠로서 축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립중학의 경쟁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덕분이다.



축구가 근대 스포츠로 탈바꿈하는 데 중간계급의 관심이 크게 기여했지만, 본격적인 대중 스포츠로 발돋움한 것은 노동계급의 참여 덕분이었다. 노동자가 축구 관중의 주류로 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노동계급의 여가 소비를 살펴야 한다. 특히, 노동시간의 단축추세와 생활수준 향상, 그리고 온건한 노동운동의 정착에 주목해야한다. 즉,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축구 발전은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토대로 한 것이다. 숙련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노동시간의 단축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노동계급에게 여가 소비의 제도화가 가능해진 것은 이러한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또한 축구라는 스포츠에 노동계급(북부)와 중간계급(남부)사이의 관계가 반영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축구 경기가 각 지역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흥분을 자아내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브리튼 국민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회도 제공했다. 축구는 역사적으로 신분적 구별과 차이가 강한 영국 사회를 하나의 국가로 만든 사회적 접착제 중 하나였고, 갈등을 넘어 통합으로 나가는 데에도 기여했다.'자본주의'만큼 다양한 뜻을 가진 용어도 흔치 않다. 우선 단순히 생산기술 차원에서 자본을 사용하는 생산양식 또는 우회생산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생성·발전하는 특정한 사회경제 체제를 의미한다. 일찍이 돕은 그의 『자본주의 발전연구』에서 자본주의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을 세기지 인식틀로 정리했다. 첫째,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이윤을 추구하는 태도 또는 정신 및 그에 따른 경제 활동의 결과, 둘째, 시장을 위한 생산 조직과 시장경제, 셋째,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초를 둔 상품 생산체제. 첫째 해석에서 합리성에 근거를 둔 이윤 추구 태도는 좀바르트와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적 정신에 해당한다. 둘째 해석은 애덤 스미스나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해석은 마르크스주의 해석으로 시장경제가 자본주의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해석은 자본주의를 봉건적 생산양식과 다른 또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간주한다.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초를 둔 시장생산체제로 시장경제를 매개로 나타난 임금노동 생산체제라고 보는 것이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물질생활', '시장경제', '자본주의'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예외적으로 높은 이윤을 추구하고 또 그것이 가능한 교환의 세계이다. 또한 자본가들이 시장을 왜곡하고 독점함으로써 예외적인 이윤을 획득하는, 일반인들에게 종잡을 수 없는 불투명한 유통의 영역이다. 윌러스틴은 자본주의 생산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본은 자본 자체를 축적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를 위해서는 이윤이 필수적이며, 이윤은 주로 시장 판매를 위한 생산 형태를 통해 달성된다. 이같이 자본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시장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생산·유통·소비 과정이라고 하는 자본순환이 중단 없이 이어져야 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모든 생산 요소들의 상품화, 만물의 상품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들의 자본주의관은 주의할 점이 있다. 우선 브로델은 경쟁보다는 독점을 자본주의의 정상 상태로 보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거의 같은 의미로 파악하였다. 또한 독점과 투기를 당연시하여 베버의 자본주의관을 부정하고 있다. 윌러스틴은 프롤레타리아화를 자본주의 발전의 장기 추세로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자본 축적 또는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을 임금노동에서 먼저 찾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자본-임금노동 관계는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근대 경제학자의 지적 전통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세 가지 합의가 있었다. 첫째, 생산성은 분업의 정도에 비례하고 분업의 발전은 시장의 크기에 달려 있다. 둘째, 봉건제 지배 하의 소농 경제가 자본주의적 시장생산체제로 이행한다. 셋째, 장기적으로 기술 진보에 의해 생산력이 발전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에 대한 유통주의적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을 지닌 일부 연구자들에게서 발견된다. 1950년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논쟁'에서 폴 스위지, 최근의 브로델과 윌러스틴까지 더욱 정교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에 기반을 둔 시장 경제체제이다. 그러나 윌러스틴은 세계경제의 출현 시기에 임금노동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보지 않는다.



윌러스틴은 『근대 세계체제』에서 팽창과 정체의 주기 변동, 중심국가의 재편과 지리적 확대 등을 얘기하고 있다. 윌러스틴은 세계경제의 주기 변동을 16세기 세계경제의 확대, 17세기의 수축, 18세기 후반 이래의 재팽창으로 구분하며, 이러한 세계체제의 주기 변동은 자본주의 존속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이다. 윌러스틴의 설명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봉건 지배세력의 부르주아화를 강조함으로써 봉건적 위기, 소생산자의 해방과 분해, 부르주아지의 대두, 근대적 정신, 시민혁명, 산업혁명,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이어지는 근대 사회로의 이행 모델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봉건적 지배세력과 근대 자본주의의 추진세력을 구분하는 것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란 봉건 지배세력이 시장을 통한 자본 축적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단순상품 생산이라는 추상적 단계를 설정한다. 마르크스가 시초축적 과정에서 절대주의국가 및 지주의 강제력과 폭력성을 강조했다면, 레닌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출현을 시장경제의 주요 특징인 경쟁을 통한 분해라고 하는 순경제적인 과정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9. 대불황과 정치10. 시험의 사회사, 연줄과 경쟁의 변증법1870년대 중엽이래 20여 년 간 영국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나타났지만, 영국의 현상은 더욱 심각했다. 왕립위원회의 '다수보고서'에서는 경기 변동의 측면에서 파악하면서 낙관적으로 전망하였으며, '소수보고서'에서는 불황을 가져온 영국 경제의 구조적인 요인에 주목하면서 비관적으로 전망하였다. 이 견해차를 보면 당시 사람들의 견해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영국 경제를 비관적으로 본 연구자들은 경제성장률의 둔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와 달리 오늘날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1873∼94년의 '대불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 이 시기 저물가 현상은 영국이 국제무대를 주도하면서 국제적인 가격 변동에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민감했기 때문이라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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