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추적자
볼프강 에베르트 지음 | 푸른숲
보물 추적자
볼프강 에베르트 엮음/정초일 옮김
푸른숲/2003년 1월/400쪽/15,000원
1장 옥수스 강의 무덤 발굴자들
1970년대 말, 러시아의 고고학자 빅토르 사리아니디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굴한 세계 최대 규모의 황금 유물 이야기. 무려 2천여 년 동안 사람들의 탐욕을 피해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황금의 무덤이 한 고고학자의 열정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황금의 나라 박트리아’의 전설을 현실로 만든 이 역사적 발굴은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권력 투쟁의 혼란 속에서 빛을 잃고 만다. 오랜 노력의 보람도 없이 허망하게 보물을 놓친 한 불행한 고고학자의 이야기가 중앙아시아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틸리야테페 고분의 마력 속에서
행운이 고고학자에게 미소를 보내는 일은 비록 일어난다 할지라도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다. 그런데 사리아니디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은 이미 20여 년 전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틸리야테페에서 빛을 발했다. 당시 그는 질그릇, 주화, 또는 금줄 등속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보화들을 움켜쥘 수 있었다.
아무다리야 강을 따라 북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남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를 거쳐 아랄 해까지 이어지는 녹색 띠의 폭은 수 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는 강 주변 저지대에 대국이 들어선다. 이른바 1천 개의 도시가 있는 이 나라는 박트리아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연안지역의 상인들이 당시 히르카니아 해라고 불렸던 카스피 해 너머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넓은 땅으로 과감히 찾아온다. 그들은 황금의 나라 박트리아와 이 나라의 정교한 보물들에 대한 소식을 처음으로 전해준다.
사리아니디가 남몰래 소망하던 박트리아의 전설적인 황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흔적은 사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틸리야테페. 황금의 언덕. 주변에서 목화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옘시테페에서 불과 5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높이가 약 3미터에 폭이 1백 미터 가량 되는 구릉을 그렇게 불렀다. 1978년 11월 12일이 되어서야 고고학자들은 모래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낸다. 수수께끼는 다음 날 아침 고분을 찾아내고서야 풀리게 되었다. 스물 다섯에서 서른 다섯 살 사이로 추정되는 여인의 해골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 공주가 아니면 옛 통치자의 아내였을 것이다. 옷감 조각과 값진 물건들, 특히 다량의 금붙이들이 죽은 이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특히 수백 년 동안 명성을 떨쳐온 박트리아의 금 세공술은 매력적이었다. 모두 여섯 기의 고분들이 아직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섯 기에는 여자들이, 한 기에는 남자가 매장되어 있다. 그 해 겨울 그들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을 2만 점 넘게 파냈다. 그 중 하나인 샤면의 왕관은 다섯 장의 금박 종려나무 잎으로 만들어졌고, 무수히 많은 진주와 터키석이 박혀 있었다.
황금의 저주
얼마 후 전문가들은 사리아니디가 찾아낸 것들을 20세기 최대의 발굴 중 하나로 평가한다. 이것은 투탕카멘의 보물이나 중국 진시황릉의 방대한 병사 및 병마 도용들에 비견할 만한 발견이다. 규모로 보아도, 또 질로 따져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서로 극히 이질적인 동양과 서양 문화가 공존하는 유산으로서 유일무이하다는 점이다. 이란, 중국, 인도, 그리고 특히 그리스의 문화가 이 황금의 보화에 두루 각인되어 있다.
그는 이제 할 일을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다. 저녁에 호텔에서 코냑을 마시며 사리아니디와 동료들은 앞으로 복원 작업이 끝나면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트리아의 황금을 구경하며 경탄하기 위해 방탄 유리창 앞으로 몰려들 것인지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지 않아 암담한 현실 속에서 눈을 뜨는 것으로 끝나게 될 꿈이었다. 이미 1974년에서 1975년 사이에 불법 탐사 활동의 전리품들이 최초로 시장에 등장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아프가니스탄의 가두 시장에서는 어김없이 장사꾼들이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황금 팔찌, 주화, 그리고 장식용 단도들은 형편없이 낮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사리아니디는 즉각 소련 외무 장관 셰바르드나제와 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대사 보론초프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박트리아 보물을 잠시 소련 내의 박물관에 보관했다가 아프가니스탄의 내정이 안정된 직후 반환하기로 모스크바가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부정적인 답신을 보내왔다. 카르말의 후계자 나지불라 역시 사리아니디의 계획에 반대했다. 사리아니디는 절망하여 유네스코에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유물의 보존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일도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1992년 1월이 되었다. 소련군의 마지막 탱크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소련과 허수아비 정부는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 이슬람 전사들에게 굴복해야 했는데, 얼마 후에는 나지불라 정권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1996년이 되자 이번에는 탈레반이 진격해왔고, 카불의 권력은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은 보물상자들이 어느 안전한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보물을 보여준 적이 없다.
1천 개의 도시가 있는 나라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암흑 시대의 막이 올랐다. 권력자들은 빠르게 뒤바뀌고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그리고 유목민족이 뒤이어 등장한다. 그들과 함께 이 지역의 역사 기록은 거의 2백 년 동안이나 중단된다. 이 시기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라진 틸리야테페의 황금뿐일 것이다. 박트리아의 암흑 시기는 쿠샨 왕조가 성립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린다.
50년경 박트리아에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정복 전쟁을 개시한다. 중국 한나라의 연대기에 큐쥬쿄로 기록된 그는 월지족의 다른 갈래들을 압박하여 자신을 새로운 지배자로 섬기게 한다. 그의 부족 - 퀘이 샹 - 을 가리키는 이란어 이름 쿠샨으로 세계 제국의 성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월지는 기원전 2세기에 박트리아를 점령하여 5개의 소국가로 나누었는데 그 중 하나였던 쿠샨이 훗날 월지의 5개 국가를 통일하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전성기인 1세기의 쿠샨 왕국과 중국, 로마, 그리고 파르티아는 당대의 4대 유라시아 국가였다. 이 제국은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인도 북부를 포괄한다. 옥수스 강 하류에 인접한 ‘점토로 세운 요새’ 토프라칼라는 아직까지 역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이 새로운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한 곳이었다.
아나히타 여신의 부활
아나히타, 즉 아무다리야 강에 살고 있는 물의 여신이자 풍요로운 생산의 여신이다. 박트리아의 거장들에게 영감을 주어, 위로 솟아오른 풍만한 가슴과 날개가 있는 여인상을 만들게 했던 바로 그 여신이다. 사리아니디가 틸리야테페에서 발굴한 모든 유물 중 가장 사랑하는 것도 그 여인상이다. 아나히타-아프로디테. 2만 점이 넘는 틸리야테페의 유물 중에서 사리아니디가 사랑한다고 선언한 날개 달린 여신. 지금까지도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한다. 1999년 말에는 아프가니스탄 라바니 정부의 전직 고위 관료가 사리아니디의 한 동료에게 전화로 보물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사리아니디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리트빈스키는 틸리야테페의 고분을 발굴하기 한참 전에 그에게 ‘황금을 찾아내는 고고학자는 불행하다’고 경고했다. 맞는 말이다. 사리아니디가 이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금은 일종의 저주이다. 황금이 사막의 흰 태양 아래 유난히 눈부시게 빛나는 동방에서는 특히 그렇다.”
2장 실크로드에 몰려든 이방의 악마들
20세기 초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이 실크로드를 따라 보물 추적을 한 이후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일대는 유럽인들에게 낭만적인 모험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의 학자들은 경쟁하듯 사막 속에 숨어 있던 중앙아시아 각국의 문화재와 보물을 자국으로 실어갔다. 심지어 영국의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금강경』목판 인쇄본을 비롯한 1만 3천 종에 이르는 고문서를 어리숙한 중국인에게서 단돈 130파운드에 사들였다. 도굴과 역사적 발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고학자들의 모험과 서구 열강에 유린당한 아시아의 비극적 근대사를 따라가본다.
한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발견
‘돌아올 수 없는 황무지’ 타클라마칸 사막은 중국의 북동쪽에 있다. 옛 중국의 수도 장안, 오늘날의 시안에서 출발하여 지중해를 향해가던 대상들에게 이곳의 북쪽과 남쪽 가장자리는 언제나 옛 실크로드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많은 도시들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무서운 모래 폭풍 카라 부란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부와 문화유산이 엄청난 모래 더미 아래 묻혔다고 한다. 스웨덴 출신 탐험가 스벤 헤딘이 쓴 『아시아의 사막을 지나』에는 그런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1889년 쿠처 인근에서 보물을 찾아다니던 현지인들은 글자가 적힌 자작나무 껍질 한 무더기를 발견했지만, 그밖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쿠처의 이슬람교도 판사에게서 사들여 캘커타로 가져간 이 문서는 ‘바우어 필사본’으로 명명되었다. 이 산스크리트 문헌은 불교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이며, 이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극히 건조한 타클라마칸의 기후 덕분이었다. 이로써 극히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했던 옛 실크로드 시대의 첫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시아 내륙의 보물창고’를 향한 ‘줄달음질’이 시작되었고, 각종 필사본과 프레스코, 그리고 조각품들이 러시아, 스웨덴, 영국, 인도,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그리고 기타 여러 나라의 박물관으로 한 번에 몇 톤씩 운반되었다. 중국 민중의 분노는 ‘이방의 악마’라는 명칭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잠깐 사이에 중국 전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모든 서구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보물 추적자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중국의 서부, 즉 옛 실크로드 지역에 흥미를 느꼈다.
스벤 헤딘의 발견
대부분의 보물 추적자들은 전문 지식을 갖춘 고고학자가 아니라 모험을 좋아하는 일반 학자나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강대국들의 유급 조수이자 식민정책의 공범들이었다. 특히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탐색 활동의 와중에도 해당 지역의 지형을 세심하게 측량한 것 때문이다. 스벤 헤딘도 무수한 모험담뿐만 아니라 다량의 중앙아시아 지도를 후세에 남겼다. 최초로 죽음의 사막을 정복하는 모험이라는 점에서 이 도전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01년 겨울 스벤 헤딘은 우선 유적지의 지도를 완성한 다음 대원들에게 발굴을 지시했다. 곧 인도의 문자가 새겨진 나무토막이 출현했고, 뒤이어 중국 문자들이 적힌 낡은 종이들도 여러 장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후에 이 문서를 근거로 그곳이 '러우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우란은 한때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이었다. 330년 이후 규모를 짐작하기 힘든 재앙이 이곳을 휩쓸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재앙은 실크로드의 주요 경로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점까지 중부 경로 최대의 요지였던 러우란은 이후 제작된 중국의 지도에서 여백으로 나타났다. 스벤 헤딘의 동료들이 찾아낸 문서들은 1천6백 년 전 이곳의 생활에 대한 새롭고도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고
20세기 초 스벤 헤딘의 책들에 매료된 것은 전 세계의 소년들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어른들도 큰 관심을 갖고 그의 모험담에 몰입했다. 헝가리계 영국 고고학자 마크 오렐 스타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07년 3월 12일 동양학자 겸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은 얼음처럼 차가운 모래 폭풍을 무릅쓰고 둔황에 당도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귀에도 몇 년 전 들었던 소문이 전해졌다. 즉, 모가오 동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도교 승려 왕 위엔루가 1900년 6월 22일 우연히 어느 동굴의 벽 뒤에서 엄청난 분량의 옛 문서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훗날 전문가들은 이 고대 오아시스 도시에 있는 석굴 사원들을 '사막의 미술관'으로 부르거나, '세계에서 가장 풍성한 박물관 중 하나'로 규정했다. 어쨌든 이곳에는 3천여 개의 초상이나 불상이 소장된 730여 개의 석굴이 있으며, 이 점에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비슷한 시설들 가운데 최대 규모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곳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석굴 중 한 곳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문서고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야음을 틈타 무엇인가를 손에 넣은 도둑들처럼, 스타인과 그의 긴밀한 동지는 그토록 소망하던 보물을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었다. 그들은 소문나지 않게 운반에 필요한 상자들을 구한 다음,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며 약 7천 종의 완전한 문서와 약 6천 종의 단편적인 문서들을 포장했다. 오렐 스타인이 실크로드의 보물을 향한 경주에서 위대한 승자가 되어 소중하고 값진 화물과 함께 둔황을 떠나던 장면은, 중국의 어느 젊은 시인에 의해 이렇게 묘사되었다. “저녁이 되어 스타인이 인솔하는 대상들을 열두 개의 큰 상자를 싣고 길을 떠났다. 그때 마지막으로 그들은 저무는 핏빛 태양, 선혈이 흐르는 한 나라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세계 최고의 문서고에서 그처럼 중요한 일부를 가져오기 위해 지출된 영국 정부의 예산은 130파운드에 불과했다.
강도인가, 고고학자인가
둔황 연구가 안고 있는 핵심 문제들 중 하나는 고대 도서관에서 나온 문헌들이 수많은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둔황연구소에 의하면 중국에 약 2만 종, 영국에 1만 3천7백 종, 러시아에 1만 2천 종, 프랑스에 6천 종, 인도에 2천 종, 그리고 일본에 45종의 문헌이 있으며, 그밖에도 타이완, 미국, 독일, 덴마크, 핀란드,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스웨덴에도 소량의 문헌들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표명하는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이 값진 예술품의 부당한 상실을 20세기 초 유럽인과의 접촉에 대한 나쁜 기억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양에서 온 탐험가나 연구자들의 연구 보고서가 수십 년 동안 그 분야의 유일한 성과로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러우란의 몰락에도 마력의 족쇄를 처음으로 깨뜨린 것도 유럽인들이었다. 그밖에도 문서 반환에 관해서 논의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오렐 스타인이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둔황의 문서를 되도록 값싸게 입수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초 중앙아시아의 연구에 종사한 다른 연구자들도 모두 옛 신화 ‘실크로드’의 부흥에 기여했다. 중국에서도 실크로드의 보물과 관련해서 더 이상 ‘약탈’이나 ‘탈취’를 운위하지 않으려는 진일보한 지식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둔황의 예술품은 ‘세계문화유산’, 즉 인류공동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제3장 황제의 다이아몬드
1918년 10월 31일, 한밤중에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궁 보물 전시실 8번 진열장에서 값진 황실 보물들이 사라졌다. 그 중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인 ‘피렌체 다이아몬드’도 있었다. 역사상 이 다이아몬드를 소유했던 사람은 아무도 행복하지 못했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랬고,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제 카를 1세 부부는 타국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저주받은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피렌체 다이아몬드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질긴 인연은 곧 유럽 왕정의 흥망성쇠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저주받은 다이아몬드는 지금 누구의 손에 있을까?
‘이름 없는 다이아몬드’의 경매
1981년 11월, 주네브. 유명한 리치먼드 호텔에서는 예년과 다를 바 없이 크리스티의 가을 경매가 개최된다. 710번. “81.56캐럿의 이름 없는 황색 다이아몬드. 14개의 작은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여 있고, 금으로 물려 금 사슬에 연결되어 있음.” 놀라운 점은 그처럼 캐럿 수가 높은 보석에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러 모로 추측을 해본다. 혹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운명의 보석‘, 한때 세계 최대의 크기를 뽐내다가 60년 전에 사라진 다이아몬드의 일부는 아닐까? ’토스카나 대공‘이란 이름의 보석은 18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에 들어왔다. 그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유럽 정치판이 권력 투쟁에 필히 휘말리도록 저주가 내려진다고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