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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혁명

존 맨 지음 | 예지
구텐베르크 혁명

존 맨 지음/남경태 옮김

예지/2003년 2월/405쪽/14,500원



들어가며 : 제3의 혁명

지난 5천년 동안 인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그 전보다 훨씬 빨라지고 범위도 비약적으로 넓어지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전환점이 있다. 첫째는 글쓰기의 발명이다. 글을 사용하는 사제 엘리트들이 출현함으로써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사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는 문자의 발명이다. 문자 덕분에 보통 사람들도 네 살부터 글쓰기를 배우는 게 가능해졌다. 넷째 전환점은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중 셋째 전환점을 다룬다. 그것은 550년 전에 유럽에서 터져나와 전 세계로 퍼진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의 발명이다.

15세기 유럽은 이미 인쇄술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굳이 독일이 아니더라도, 구텐베르크의 고향이 아니더라도 인쇄술은 탄생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다만 그 불붙기 쉬운 요소들에 불을 붙여 새로운 것을 만들었을 뿐이다. 즉, 인쇄술은 탄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발명이었다. 그 결과는 물론 새로운 의사소통의 세계였다.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이 잠에서 깨어났다. 지배자들이 신민들을 세금과 표준화된 법으로 억눌렀다면, 신민들은 이제 반란을 조직할 지렛대를 손에 쥔 셈이었다. 학자들은 발견의 성과를 비교할 수 있었고,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세계를 더 정확하고 더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현대적 역사, 과학, 대중문학이 성장하는 토양을 제공했고, 민족국가의 탄생을 불렀으며, 우리가 지금 현대라고 규정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생겨나는 데 기여했다.

인쇄술이 현대를 낳은 초석들 가운데 하나였다면 구텐베르크는 헌신적인 천재였어야 할 것이다. 그는 현대성의 수호자로서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새로운 지식의 혜택을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한 인물이었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준 대륙의 거대한 시장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벌고자 애쓰는 기업가의 목적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현대인이기에 앞서 자본가였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분열된 그리스도교권을 통일하는, 철저히 보수적인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오히려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 되는 결과를 실현시켰다는 것은 역사의 커다란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다.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문헌들을 인쇄하고 나서, 그리스도교의 통일을 영구히 날려버리는 혁명 - 종교개혁 - 을 불렀다.



1. 빛 바랜 황금의 도시

1400년에 마인츠에는 발명가 구텐베르크의 집이 있었다. 이 집은 이미 100년 전부터 구텐베르크 저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명가의 가족이 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까지 구텐베르크는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집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의 출생 연도가 1400년으로 추측되는 이유는 단지 마인츠 시의 유지들이 그렇게 홍보했기 때문이다. 마인츠의 축제는 너무 평범했다. 마인츠에 필요한 것은 그 도시만의 고유한 행사였다. 1890년대에 시 유지들은 좋은 계기를 발견했다. 구텐베르크의 탄생일을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 정확한 연대와 날짜는 아무도 몰랐으나 그 점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기가 바뀌는 시점보다 더 좋은 연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 탄생일은 언제로 잡아야 할까? 여기서도 역시 아무 날이나 선택해도 상관없으므로 마인츠 시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날, 즉 요하네스라는 구텐베르크의 이름을 고려하여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로 정했다.

1348~49년에 흑사병은 마인츠를 덮쳐 약 1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흑사병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두 차례나 더 발발하여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2만 명의 인구는 6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길드의 수도 50개에서 34개로 쪼그라들었다. 황금의 마인츠는 이제 금박이 다 떨어져나간 셈이었다.

1400년경에는 현대적 개념의 과학적, 역사적 진리란 존재할 수 없었다. 문헌의 양이 사막의 꽃처럼 드물었을 뿐더러 설사 있다 해도 평생 동안 찾아다녀야 겨우 하나 건질까 말까 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참된 진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교회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부유해졌으나, 부와 특권에 부수되기 마련인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세속의 부는 중심의 부패를 낳으며, 그 부패에 놀란 신민들의 불안을 낳는다.

요하네스는 지닌 재산도, 물려받을 재산도 없었고, 연금 수령도 불확실했다. 어머니가 가게 주인이라는 것 때문에 요하네스는 귀족 신분에 속하지 못했고, 따라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사업에 참여할 길도 막혀 있었다. 그 사업이란 화폐 주조였다. 조폐국의 훈작사 시절에 그의 아버지는 화폐 주조 기술을 익혔다. 요하네스와 이름이 같은 삼촌 역시 훈작사였다. 화폐는 금속 주형을 이용하여 주조되었다. 주형은 요철 모양으로 된 형판을 한두 개 사용하여 만들었고, 형판은 펀치로 두드려 만들었다. 15세기 초 펀치 제작은 이미 유서가 깊은 기술이었다. 펀치의 정밀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놀라운 결론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어린 시절부터 현대 레이저 프린터의 해상도보다 적어도 여섯 배나 정밀하게 강철에다 문자를 새길 수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2. 극비리에 이루어진 모험

1429년 무렵 그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 마인츠를 떠났다. 1434년경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에서 상류 쪽으로 이틀 거리에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다. 스트라스부르는 그가 필생의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었다. 이후 10년간 일어난 사건들은 그가 기술을 연마하고, 자신의 야망을 다지고, 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특성들을 자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마인츠 시로부터 지급받지 못했던 연금을 받아 일 강 상류 2km 지점에 있는 수도원 옆의 작은 마을에 집을 전세 냈다. 그가 하는 일에 관해서는 추측이 무성했으므로 비밀이 보장될 필요가 있었다. 시내에서는 엿보는 눈과 말이 많았고 시의 조례에는 화제의 위험 때문에 용광로의 사용도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골로 나오면 실험이 자유로웠으며, 시와 연계망을 갖춰두면 장차 그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는 장인에서부터 귀족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는 직원과 좋은 인맥을 거느린 유복한 사람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인쇄술에 대한 관심이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 그에 관련된 문제와 해결책을 찾느라 부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을 즉각 만들기 위한 계획이 필요했다.

북쪽으로 250km 떨어진 도시 아헨은 제국의 건국자인 샤를마뉴 - 카롤루스 대제 혹은 샤를 대제 - 시대의 위대한 수도이며, 그리스도교와 로마 전통의 원천이다.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아헨의 대성당에는 샤를마뉴의 시신이 묻혀 있다. 1165년 샤를마뉴는 성인으로 추존되었고, 중세 순례 여행지가 되었다. 당시 성물과 관련하여 거울이 넓은 각도의 시야를 보여줌으로써 성물에서 발산되는 치료의 효능을 흡수할 수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거울은 교황의 사진이나 오늘날 록 스타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처럼 행복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1432년의 문제는 아헨의 금 세공인과 도장 제작자가 그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지의 길드 조합원들은 짧은 순례 기간 동안 외부인들도 순례 배지와 거울을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돈을 인쇄하는, 즉 동전을 주조하는 특허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구텐베르크의 영감을 사로잡았다.

그는 1439년 아헨의 순례를 위해 거울을 대량생산할 마음을 먹었다. 최소 수익을 계산해도 경비 600길더를 들여 1만 6천 길더를 버는 것이었으니, 2,500%의 막대한 수익률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아무도 그런 거울을 그런 식으로 대량생산한 적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에게 600길더나 되는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인쇄술과 무슨 연관이 있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연관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거울을 만드는 기술과 책을 인쇄하는 기술은 서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프레스가 필요하다.

1438년 구텐베르크는 동업자 세 사람을 얻었다. 한스 리페, 안드레아스 드리첸, 안드레아스 하일만은 모두 지방 유지들이었다. 구텐베르크는 무려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의 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 중에서 1/10의 수요만 충당한다고 해도 상당한 양의 납과 주석을 녹여 합금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금속을 구입하고, 운송하고, 가공해야 하는 소규모 산업 공정이었다. 구텐베르크는 기술자이자 기업자로서 그 작업을 훌륭하게 처리했다.



3. 통일을 꿈꾸는 헤라클레스

구텐베르크 시대의 유럽의 정황은 복잡다단했다. 그리스도교권은 여러 가지 경쟁과 적대감으로 인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과 대립교황, 독일 황제와 교황, 제후들과 황제, 가톨릭교와 후스파, 교황과 고위 성직자 평의회의 다툼이 그것이다. 그 중 마지막 갈등은 교황이 지닌 권위의 성격을 교회 지도자들이 문제시하면서 첨예한 대립을 빚었다.

구텐베르크는 1424년 소송 사건으로 잠시 마인츠에 체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니콜라우스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스물 네 살 동갑의 두 청년은 막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였으며, 교회법 율사는 꿈이 컸고 활동적인 기술자는 자신의 기술로써 사업에서 성공을 노리고 있었다. 니콜라우스는 학교를 졸업한 뒤 내내 추구해오던 그리스도교의 통일을 꿈꾸었다. 그 통일은 유럽의 모든 그리스도교들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경전을 읽고, 같은 기도문을 읊고, 같은 찬송가를 노래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의 경전부터 통일되어야 했다. 트리어 대주교 후보자를 위해 법적 문제를 처리하러 바젤에 간 니콜라우스는 모든 유럽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핵심적인 문제가 책이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1350년경에는 대학이 설립됨으로써 책의 수요는 더욱 증대했다. 천 조각이 종이로 사용되면서 책은 더욱 값싸졌다. 갈수록 자국어로 글을 쓰고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5세기 초반 구텐베르크가 젊었을 때 독일에서는 교훈, 시, 역사, 전설 등 그 전까지 구슬로 전승되던 이야기를 자국어로 기록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술의 발전도 내용과 디자인이 다양해지는 데 한몫 했다. 한 장씩 목판으로 인쇄하는 기법은 1300년경부터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00년 뒤에는 동판을 이용한 삽화도 등장했다.

필사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 이외에 실수가 나온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이 실수는 필사할 때마다 점점 많아져서 나중에는 진리 자체를 침해할 수도 있었다. 미래는 필경사의 필사보다는 목판인쇄에 달려 있는 듯했다. 그러나 목판인쇄는 필사보다 더 제작하기 어려웠으며, 낡거나 부러지면 한 판 전체를 새로 깎아야만 했다. 그림을 위주로 하는 동판 인쇄를 본문 인쇄에 사용한다 해도 난점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은 동판 인쇄처럼 한 쪽 전체를 금속으로 제작하는 기법이 아니라 책을 실수 없이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기법이었다.

각 지역의 지배자들은 각기 자신이 거느린 필경사들과 자기 지역의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도 일탈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면 세상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또한 그렇다면 얼마나 거대한 시장이 생겨날까! 마인츠 한 곳에만 해도 수도원과 수녀원이 350군데나 있었다. 이것은 기업가 정신을 지닌 젊은이들이 노리기에 충분한 야망이었다.



4. 여러 가지 전조들

어떤 의미에서 인쇄술은 글쓰기 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다. 글쓰기도 알고 보면 일종의 인쇄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머릿속의 창고에서 하나의 기호를 생각한 다음 펜과 잉크와 종이를 이용하여 그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싱이나 타이핑과 같은 원리다. 두뇌 속에 문자들이 저장된 창고가 있고, 우리는 그 문자들의 디자인을 준거틀로 삼아 무한정으로 복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동양과 서양이 교류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이루어진 발전이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전하는 데 모종의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접촉은 상당히 광범위했으므로 인쇄술이 여러 문화권과 대륙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마르코 폴로 이외에도 몇몇 여행자들이 몽골 제국에서 중국의 지폐가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아무도 목판인쇄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 유럽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은 있었으니까 - 나무나 세라믹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서구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종이 문자를 발명하고 혁명을 가능하게 했을 때, 사태가 달라지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설사 일부 서구인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인쇄술의 발명을 낳은 많은 요소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긍정적 요소들은 구텐베르크의 발명이 등장하는 데 필요한 그 밖의 많은 요소들이 부재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문자 체계가 너무 복잡했다. 인쇄술은 알파벳 체계를 필요로 한다.

- 기존의 문자 체계가 원래 보수적이다. 심지어 왕이 주도하는 변화라 할지라도 아무도 변화에 관심이 없었다.

- 종이의 종류에 문제가 있었다. 중국의 종이는 붓글씨나 목판 인쇄에만 적합했다.

- 동양에는 나사를 사용한 인쇄기가 없었다. 포도주 압착기도, 올리브도 없었기 때문에 종이를 말리는 데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 인쇄술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중국, 한국, 일본에는 연구와 개발을 위해 자본을 투자하는 제도가 없었다.



그와 달리 1440년경 유럽의 모든 주요 도시에는 구텐베르크의 발명을 위한 모든 요소들이 갖춰져 있었다.



5. 드러난 비밀

앞선 다른 문화권의 발명자와 비교해보면 구텐베르크에게는 커다란 이점이 있었다. 수천 개의 글자 대신 수십 개의 글자만 만들면 되었고, 금속에 자국을 낼 수 있는 전통적인 도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해결책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의 눈앞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펀치의 끝에 새겨진 문자들로 책 표지를 인쇄하고 동전을 찍는 것을 익히 보았던 그다. 구텐베르크는 몇 개의 펀치를 바라보다가 윗 부분을 고르게 잘라내고 펀치들을 묶어 한 단어나 한 문장을 만든다. 나아가 그는 금속 문자로 책의 한쪽 전체를 만들고, 거기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대고 누른다. 그것이 바로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펀치를 값싸게 복제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문자를 매번 새로 새기는 일은 없어야 하므로 그 과정은 기계적이어야만 한다. 펀치를 이용하여 문자를 복제하는 일은 쉬우므로 동전이나 화폐의 제작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복제물들을 한데 묶어, 인쇄하기에 충분할 만큼 단단하면서도 재사용하기에 충분할 만큼 부드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문제는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려 했던 구텐베르크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요소는 작은 금속 조각에 문자의 형상을 두드려 새기는 것이다. 이 금속 조각은 필요한 정보, 즉 음각의 형태로 조각된 문자를 담고 있다. 이제 그 각인된 문자를 펀치와 같은 작은 금속 사각형의 끝 부분으로 옮긴다. 그것이 성공하면 똑같은 문자를 부조로 제작해서 활자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발명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발명과 기술로 나뉜다. 발명은 손에 들고 사용하는 주형이다. 이것은 정말 태양 아래 처음으로 생겨난 물건이었다. 그 주형은 다루기가 무척 편리했으므로 이후 500여 년 동안이나 활자 주조공들의 기본 장비로 사용되다가 19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기계식 주조방식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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