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최종덕 지음 | 휴머니스트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2003년 2월/304쪽/15,000원
제1장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공부를 하는 일은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질문이 없는 공부도 뭇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지식의 향유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시대적 유행을 잠시 일으킬 수 있지만, 결국 공허한 영점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글쓰기 담론과 관련해 공부의 주체가 된다고 하는 소위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자성이 일고 있다. 가치의 중립성을 표방하면서 역사를 상실한 공부법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다. 그러나 막상 지식인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지식 권력의 구조가 형성되었고, 그 구조 속에서 후배 지식인은 선배 지식인을 답습하는 구태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바른 길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공부하는 이유와 공부한 내용으로서의 지식이 반드시 남과 더불어 공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공유로부터 실천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공학에서의 역사성 없는 공부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갖는다. 결국 지식의 가치중립성 명제는 그 자체로 지식이 될 수 없는 자기모순이며, 진공 속의 지식일 뿐이다. 이제 진공 속의 공부가 아니라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를 찾는 길이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래서 밀레니엄이나 21세기 담론은 철저하게 과거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장밋빛 미래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사의식과 문명사관을 정립하는 것이 공부의 길이다. 다시 말해서 지식이 무엇이며 또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여러 각도에서 반성적으로 제기되면서, 내가 왜 공부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이러한 질문은 결국 공부하는 방향과 방법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공부를 강요받으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 중 하나는 삼진시대의 형설지공의 말을 남긴 차윤의 이야기였을 뿐,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요즘 대학이 고시 시험장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지금이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요즘 들어 이러한 질문이 이곳저곳에서 던져지고 있다. 미비하지만 90년대 들어와 포스트모더니티 논쟁 혹은 동아시아 담론 등의 의미 있고 창출성 있는 인문학의 작은 성과가 그 예이다. 따라서 1990년대는 지식인의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반성 작업 그리고 실천적 대안 찾기에 분주했던 때라고 생각된다. 기존 철학의 틀은 이제 급속히 변화하는 다원화된 산업사회를 더 이상 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의 새로운 틀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당위성은 철학 공부의 너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철학이 사회가 요구하는 실천 강령을 반드시 그리고 항상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천을 염두에 두지 않은 철학 공부는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면 박제된 철학일 뿐이다.
인문학이 자연과학의 옷을 입고 그 권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사회과학조차도 실천의 이론화가 이론의 실천화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 비판을 넘어선 미래의 대안이라는 명목으로 과거의 것을 비판 없이 ‘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논리가 득세하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공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판력은 삶을 진화시키는 역사의 필연적 선택이다. 공부는 바로 그런 역사를 숨쉬는 일이다.
제2장 삶과 세계를 연결하는 인문학적 통찰
학계에서는 이미 인문학의 위상 내지는 새로운 방향 정립에 대한 문제가 다양한 모임에서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반성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비판적 상황이 어느 정도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인문학 전체의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 동안 있어 온 인문학 위기의 진단은 각양각색이지만 그래도 그 위기의 내적 구조를 거시적으로 정리해보면, 첫째 현대 학문의 사유형식인 이성 그 스스로가 학문의 내용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그것이 외형적으로는 이성의 권력으로 나타남과 동시에 학자들 역시 이성의 권력을 휘둘러왔다는 점이며, 셋째 현대를 이름 짓는 시대의 와류 속에서 별 고민 없이 틀에 박힌 대로 전통과 현대 혹은 전통 사상과 외래 문물이 그대로 전근대성과 근대성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며, 넷째 학문의 세밀한 분화가 가치 중립성이라는 껍질을 쓰고 나와 역사를 상실하고 사회와의 대화를 단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문학의 위기는 따지고 보면 인문학자 스스로의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학문의 위기는 학자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거나,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 지적을 조동일은 자신이 저술한 『우리 학문의 길』이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해내고 있다.
인문학도 학문의 보편성을 이루어내야 하지만, 그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과 역사에 대한 개인의 갈등과 고민으로부터 학문의 보편적 논제가 형성되는 인문학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 된다. 그러자면 먼저 인문학의 자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인문학의 자립성은 그 학문이 행해지는 토양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뿌리 있는 학문이란 단순히 고증학의 해석이 아닌 학문적 작업 속에서 그 학자의 역사의식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학문의 실천성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진리 탐구는 실천 의식과 떨어질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학문의 실천 의식이 학문의 진리 탐구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의 실천이란 과거의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화된 것을 다시 현재 속에서 구체화해 보편성을 체화(體化)하는 일이다. 보편성의 체화는 정치사회적인 것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나 종교 혹은 자연과학이나 예술, 그리고 신화나 이데올로기 등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큰 의미에서 본 삶의 인문학이다. 여기서 삶은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 혹은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 때문에 인문학의 실천 의식은 인문학을 살아 숨쉬게 하는 일이며, 인문학의 화석화를 피하려는 기본적인 노력일 뿐이다.
제3장 학문의 현실인가, 현실의 학문인가?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는 현대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인 인간의 위기를 제대로 풀지 못한 것에서 생긴 위기라고 본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몸부림은 상실된 인간다움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다움의 추구는 인간의 이상향을 찾으려는 허무한 몸짓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처한 구체적 역사 속에서 행위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인간다움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먼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묻고, 왜 인간다움이 상실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도려내는 비판과 더불어 공허한 언어 행위에 대한 강한 제동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학문 후속세대들이 학벌이라는 그물의 동선에서 덜미를 잡히고 있는 현상은 이미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의 누적은 결국 요즘 들어 학벌의 피폐성을 공론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학벌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계층이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둘째, 학벌 사회를 비난하던 많은 사람들이 학벌이라는 꿈을 좇아 그들의 아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아가면서 학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벌의 아성에 편승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이는 것, 동시에 학벌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이 바로 대학원의 구조이다. 좀더 쉽게 말해서 교수와 대학원생 간의 무의식적 권력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도제를 빙자한 교수와 원생 간의 불공정 관계는 세월의 변화에 따라 여전한 정도가 아니라, 더 심각해져만 가고 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교수와 원생의 문제를 마치 대립적으로 비교하면서 양쪽 모두를 비난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대학원 논문 통과 과정에 이르기까지 교수는 원생에 대해 대립적 위치가 아니라 분명한 우월적 지위에 서 있다. 그래서 교수가 우월적 지위의 칼을 비합리적으로 휘두를 경우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게 된다. 사실 이 문제는 대학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안고 있는 권력 구조의 모순이 대학원 사회에 반영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접근할 경우 우리 대학원 구조가 당장 풀어야 할 문제점들이 희석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비록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더라도 좀더 작은 범위 안에서 실용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타율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잉태된 오염의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근대화가 진짜 근대화였는지 그리고 근대를 인정할 때 타율적 근대화인지 아니면 내재적 원동력인지를 따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주장들은 정도의 차이일 뿐 근대화 과정에서 타율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타율적 근대화의 길이 우리의 학문과 그 학문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시켜 왔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학문에 있어서 타율적 근대화의 왜곡된 결과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개발독재의 물질 만능주의에서 온 인문학의 급격한 쇠퇴이며, 둘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위세를 충실히 등에 업고 오늘날까지 학문의 풍토를 조성하고 있다는 것과 셋째, 동양과 서양의 갈등이 곧바로 전통과 근대의 갈등 양상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등이다.
제4장 지식과 삶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한 의미체가 지닌 정보는 단일한 정보로 그치지 않고 그 의미체의 환경 적응력에 따라 다의적으로 변환한다. 다의적인 정보 변환은 시간적인 추이에 따른 다의성이 있지만, 공간적 차이에 따른 변환도 가능하다. 나아가 관점의 차이에 따른 정보의 변환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선풍기 팬을 거꾸로 설치하면 환풍기가 된다. 유리를 깎아 만든 렌즈를 두 개 겹치면서 천체를 바라보는 망원경이 되었는데, 기존의 렌즈를 두 개 겹치는 데 무려 300년이 걸렸다. 다시 말해서 정보의 의미는 객관적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수용하는 지각 주체의 지각 구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지각심리학의 잠재적 정보 가상성이다. 디지털 방식의 정보 구성력은 전기신호의 디지털 단위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정보 세계의 의미 개체들이 생성된다. 그래서 세계에 존재 가능한 모든 의미 개체들은 디지털 원소 단위로 환원 가능하다. 이러한 환원 가능성을 정보 환원주의라고 부르겠다. 정보 환원주의는 기존의 원자론적인 물질 환원주의와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기존의 원자론적 환원주의는 원리적인 측면에서 환원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디지털 방식에 의한 정보 환원주의는 지식은 분해하고 조립하는 이론적 근거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적 근거 중의 하나가 정보의 가역성이며, 이는 정보 원자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전환은 전기신호 0과 1 사이의 존재 가능한 중간 미세 정보들을 0과 1의 디지털 단위로 편입시킴으로써, 중간 미세 정보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 전달 과정의 노이즈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기는 했으나 원래 자연 정보와의 차이의 간격을 메우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미세한 차이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가상계의 미래를 그 안에 품고 있다.
정보 가상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현실성 비교 문제이다. 무엇이 과연 현실인가 하는 문제이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에 대한 최후 근거로서 분명하고 확실한(clear and distinct) 사유의 거점의 끝까지 가보는 반성적 자아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가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얻기 위한 여정일 뿐 그 차이 자체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 가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디지털의 내적 특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디지털 방식의 구성체인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차이는 디지털 특성과 아날로그 특성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 디지털 의미의 구성체는 불연속 분해 단위의 정보 조합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의미체는 연속적인 어떤 하나이다. 물이라고 하는 정보의 전달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내 물동이의 물을 다른 사람의 물병으로 옮기려고 할 때, 물 잔으로 한 잔, 두 잔, 세 잔으로 세어서 물을 옮기면 물의 손실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 방식의 물 전달 효과이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물의 손실은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에 나의 물동이를 들고 다른 사람의 물병으로 직접 부으려고 한다면 옆으로 새고 흘리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물 전달의 노이즈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점을 은유해 아날로그 방식의 물 전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는 디지털 방식의 물 옮기기는 정확한 양이 문제인 반면 상대방의 의도와 어긋날 수 있으며, 아날로그 방식의 물 옮기기는 물은 흘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양을 줄 수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러한 수사적 비유는 결국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차이에 대한 수사적 비유이기도 하다.
이제 지식은 종이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식은 특정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중(air)을 통해서 만인이 누릴 수 있는 공중성(publicity)을 갖게 되었다. 전화선을 통해서 혹은 위성 전파를 통해서 지식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에서 전문적 지식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지식은 높은 진리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넓히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점에서 마땅히 정보라고 불려질 만하다. 이러한 상황은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는 시대적 흐름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식 정보를 거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화를 통한 공부의 방식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개인 컴퓨터가 놓여진 책상 앞에서 저 먼 나라의 작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까지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자료가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기 어렵게 되었다. 학문적 성과를 나타내는 출판의 방식도 매우 다양해 홈페이지와 공공 인터넷 자료실을 통해서 독자와 만나는 기회가 아주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현재 정보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공부를 거부하는 인문학자들이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앞으로는 조금씩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정보 네트워크에 의존한다고 공부가 다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용도 지식이 늘어나도 진짜 공부가 줄어드는 오늘날의 문명적 자괴감이 점점 커지는 현상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용도 지식은 말 그대로 용도 지식일 뿐이다.
제5장 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정신 이념적 세계관 혹은 문화사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이 당시의 철학적 정신의 잉태물이라거나, 철학이 과학의 시녀라는 일방향적 관계로 보는 시각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과학과 사회 혹은 역사를 하나의 문화 사회학적 총체의 시각으로 보아야만 한다. 특히 1970년대 들어서 관심이 크게 고조된 신과학 운동(New Science Movement)은 과학 발전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변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과학 운동은 기존 고전 과학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고전 과학은 초기 정보만 주어진다면 최종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는 인과적인 확정성의 사유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신과학 운동은 결정론, 환원주의, 분석주의와 기계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대안 운동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근 신과학 운동의 흐름은 신과학을 하는 일선 과학자보다 훈수만 두는 신과학 평론가가 더 많은 것 같다. 소설가보다 소설평론가가 더 많은 격이다. 이렇게 된다면 진정한 신과학은 없으며, 최근의 과학을 나름대로 설명하려는 신세대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