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박영규 지음 | 들녘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
박영규 지음
들녘/2002년 5월/339쪽/10,000원
1. 왕자 충녕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 14년 10월, 태종의 부마인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가 펼쳐졌다. 이 자리엔 세자 이제(양녕)를 비롯하여 여러 종친들이 함께 했고, 충녕대군도 끼어 있었다. 밤이 깊도록 연회는 계속되었는데, 세자는 기생 초궁장을 끼고 흥청거렸다. 세자뿐 아니라 참석한 종친들이 모두 기생을 끼고 놀았던 모양인데, 그 중간에 세자는 초궁장을 데리고 정순공주의 대청으로 찾아들어 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연회 중에 충녕이 기생을 안고 노는 양녕을 훈계했던 모양이고, 양녕은 화가 나서 누나에게 찾아들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양녕의 그 말이 곧 태종의 귀에 들어가자 양녕이 충녕을 질시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일단 양녕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양녕이 이제 막 탈상한 집에 가서 난잡하게 놀아난 것을 함께 꾸짖었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양녕의 이 말 속엔 뼈가 들어 있었다. 충녕이 세자인 양녕을 제치고 조정 대신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 것에 비해 정작 양녕은 충녕에게 대단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또 충녕은 왕자들 중에서 성격이 가장 어질고 동정심도 많았다. 하지만 왕자가 너무 뛰어나서 세상의 마음을 얻으면 위험해지는 법이다. 이 때문에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박은은 충녕의 장인 심온에게 이렇게 말했다. "충녕대군이 어질어서 중외에서 마음이 쏠리니, 마땅히 여쭈어서 처신할 바를 스스로 알게 하시오." 양녕의 말은 바로 그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2. 폐세자 사건과 세종의 즉위
엽색 행각을 일삼는 세자와 태종의 분노
양녕은 세자가 된 뒤로 공부를 게을리 하고, 서연에 참여하지 않는 일이 많아 태종으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태종은 이런 일로 그를 세자에서 폐하지는 않았다. 양녕이 폐위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엽색 행각 때문이었다.
양녕은 열네 살이 되던 1407년에 김한로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성에 눈을 떴는데, 열일곱 살이 되던 1410년부터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의 눈을 사로잡은 여자는 기생 봉지련이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에서 그녀를 보았고, 결국 시종을 앞세우고 그녀의 집에 몰래 찾아들어 사통하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이를 안 태종은 봉지련을 옥에 가두었으나 양녕은 식음을 전폐했고, 태종은 세자가 걱정이 되어 봉지련을 풀어주었으나 세자가 봉지련을 동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금지했다. 그러나 세자는 은아리와 이오방이라는 궐 밖의 안내자를 구해 몰래 궁 밖으로 빠져나가곤 했다.
이 외에도 양녕은 태종 몰래 동궁전에서 매를 키웠고, 곧잘 매사냥을 다녔다. 그 때문에 태종은 세자전의 환관들에게 장을 때려 유배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양녕은 태종을 몹시 원망하였다. 양녕이 단식을 하며 저항하자 결국 태종도 서연을 중단시키는 조치까지 내리며 세자를 달랬다. 이 사건 이후 양녕은 한층 대담해져 1414년 1월에는 동궁으로 창기를 끌어들이고, 병을 핑계로 서연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 무렵 양녕 앞에 나타난 여자가 바로 기생 초궁장이었는데, 그녀는 원래 정종이 가까이 했던 기생이었다. 양녕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녀와 사통하였다가 태종의 분노를 사게 된다. 태종은 자신의 친형인 정종과 사통하던 기생이 아들 세자와도 사통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화가 난 태종은 즉시 초궁장을 동궁전에서 내쫓았다.
초궁장 이후 양녕의 눈에 든 기생은 칠점생으로 원래 매형 이백강이 거느리던 첩이었다. 양녕이 그녀를 궁으로 데려오려 하자 충녕이 “친척끼리 서로 이같이 하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라고 강하게 만류해 일단 칠점생을 포기했으나, 다시 그녀를 동궁으로 데려왔고 궁 밖으로 나가 칠점생을 만나기도 했다.
양녕은 1417년에 또 한번의 간통 사건을 벌이는데, 바로 곽선의 첩 어리 사건이다. 이 소동은 양녕을 폐세자 신세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확대되는데, 전말은 이렇다. 어리가 절색의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양녕은 이오방에게 그녀를 데려오라 하였다. 세자는 어리를 납치해 동궁에 두었는데, 다음 해 2월 그 사실을 태종이 알게 되었다. 태종은 세자 주변인들을 벌 주고 이후 세자를 폐할 것을 결심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한결같이 세자를 폐하지 말 것을 주청했으므로 태종은 한 번만 더 세자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두 달이 겨우 지났을 때 이귀수로부터 방유신의 손녀가 자색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방유신의 집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손녀의 방으로 날아들었다. 다음날 이귀수에게 이불보를 짊어지게 하고, 방유신의 집에서 합궁하고 한밤중에 돌아왔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이귀수는 처형되고, 방유신은 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쫓겨났다.
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때에 세자는 또 은밀히 어리를 동궁에 들여놓았다. 어리는 아이를 가졌고 그녀의 배가 불러오자 다시 세자빈의 할머니가 어리를 데리고 나가 아이를 낳게 하였다. 출산 후에 어리는 또다시 동궁에서 지냈는데, 태종이 그 사실을 안 것이다. 이때가 태종 18년인 1418년 5월이다. 태종은 노기를 드러내며 세자를 옛 궁궐인 한양으로 나가게 했고 숙빈을 궁궐에서 쫓아내 친정에서 거처하게 하였으며, 김한로는 나주로 유배시켰다.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에 책봉되는 충녕
세자를 한양으로 내쫓을 때, 태종은 이미 세자를 폐위할 것을 결심한 터였다. 태종은 세자의 서연관들을 불러 세자를 가르쳐보라고 하였다. 서연관들은 세자에게 만나기를 청했으나, 세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세자는 결국 그들의 끈질긴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만났는데 빈객과 서연관이 대화를 나눠보니, 전혀 반성의 빛이 없고 개선의 여지도 없었다. 그들은 또한 태종이 이미 세자를 폐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간파했다.
6월 태종은 의정부 대신과 공신, 6조, 3군도총제부, 각 관청의 관리들을 모두 소집하고 “세자는 여색에 빠져 옳지 못한 행동을 함부로 저지르고 있어 훗날 그가 살리고 죽이며, 죽고 빼앗는 권한을 차지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다. 여러 재상들이 잘 살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조정에서는 정당한 절차를 밟아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정 대신들은 태종이 세자를 폐할 결심을 한 것을 깨닫고 세자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렸다. 결국 세자를 폐위하자, 곧 새로운 세자 책봉 문제가 대두되었다. 신하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폐세자의 아들 중에서 새 세자를 세우자는 쪽과 어진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여기서 어진 사람이란 곧 충녕대군이었다. 형을 내쫓고 동생을 세우는 것은 변란의 근원이라고 원경왕후는 반대했지만, 폐세자의 아들을 세워도 파란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양녕의 큰아들은 불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어린 세자가 세워지면 왕권이 불안해질 것은 당연했고, 혹 자신이 일찍 죽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태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에 어진 사람으로 고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내렸다.
태종은 효령과 충녕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 태종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세자로 충녕이 결정되었고 세자 책봉례를 거행한 후, 태종은 그 사실을 종묘에 고하도록 했으며,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3. 왕도정치를 구현한 세종과 조정의 대들보들
정무 처리의 귀재, 황희
세종 시대를 떠받친 정치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황희일 것이다. 그는 세종 8년(1426년)에 우의정에 제수된 이래 1449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고, 1432년부터 1449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으니,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만하다. 그는 영의정이 되던 해에 이미 70세의 노구였고, 그 때문에 누차에 걸쳐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세종은 허락하지 않다가 그가 87세가 되던 1449년에야 비로소 치사(致仕 :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남)를 인정할 정도였다. 세종 재위 31년 중에서 24년 동안 정승직을 수행했으니, 세종이 남긴 업적 중에 절반은 황희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희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성에서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군서는 판강릉부사를 지냈는데, 그 덕에 황희는 14세에 음보로 보안궁녹사가 되었다. 그리고 21세에 사미시,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13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황희가 관직에 나왔을 무렵, 고려 조정은 엄청난 격랑에 휘말려 있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을 때 황희는 관직을 내던지고 여러 학관들과 두문동으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두문동에 은거한 학자들 중에서 인재를 찾자 함께 머물던 동료들은 황희의 등을 떠밀어 조정으로 갈 것을 권했고, 황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태조와 정종 시절에 황희의 관직 생활은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이는 그의 완고한 성품 탓이었다. 원칙주의자였던 그는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상대가 누구든 결코 타협하는 일이 없었고, 이는 때로 상관이나 왕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태종은 스스로 말했듯이 황희를 혈족처럼 여기며 늘 자기 주변에 두려 했고, 웬만한 잘못은 쉽게 눈감아줬다. 그 때문에 하륜 같은 훈구 대신들이 황희를 시기하여 어떻게 해서든 공격할 빌미를 찾고자 했던 것인데, 그때마다 태종은 황희 편을 들어줬다. 그러나 두 군신의 관계가 항상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양녕의 폐세자 문제가 터졌을 땐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황희가 양녕의 폐위를 반대하자 태종은 양녕을 두둔한 황희의 직위를 빼앗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교하로 내쫓았으나 네 해가 흐른 1422년 2월, 태종은 황희를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황희의 행정 능력을 높게 평가했던 세종은 곧 감찰과 언론을 맡는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겸하게 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426년 2월 10일에 이조판서로 임명하여 중책을 맡겼다. 하지만 이조판서에 오르자마자 황희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남원 부사 박희중이 부정을 저질러 탄핵을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사실을 황희가 누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그에 대한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5월 13일에 우의정으로 삼아 정승의 반열에 올렸으며, 8개월 뒤인 1427년 1월에는 좌의정으로 승격시키고 세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좌의정에 오른 지 5개월 만인 1427년 6월 황희는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등과 함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황희와 서선은 사돈지간이었는데, 황희의 사위이자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대흥현으로 가는 길에 신창현을 지나게 되었다. 그 고을 아전이 서달에게 예를 갖추지 않자 서달은 그의 종들과 아전을 매로 쳐서 죽게 했다. 사위가 살인을 한 사태를 접한 황희는 친분이 깊던 판부사 맹사성을 찾아가 피해자 집안과의 중재를 요청했고 맹사성은 신창현감 곽규에게 편지를 보내 무사히 처리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다. 청탁과 뇌물이 오고 간 후 이 일은 대충 넘어갔다. 형조참판 신개는 제대로 심리하지 않고 서달을 석방시켜 버렸고 그의 종들에게 죄를 물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처결문건들을 낱낱이 살펴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이 많이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보고, 의정부에 사건을 다시 내려보내 죄인들을 심문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청탁과 뇌물이 오갔음이 밝혀지고 관련자들은 파면 당하거나 유배 당했다. 비록 황희가 시집간 딸을 생각하여 살인을 은폐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죄는 컸지만 세종은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좌의정 벼슬을 복원시켜줬다. 하지만 황희는 서달 사건으로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모친을 당한 처지였다. 여러 번 기복 명령을 거둬달라는 상소를 올리며 조정으로 나오지 않았으나 세종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황희는 좌의정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뒤 황희는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뇌물을 받거나 온정에 이끌려 청탁이나 권력을 행사하다가 탄핵을 받게 되었는데 이런 일 때문에 실록의 황희 졸기에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엔 단점이 있으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살인 사건과 뇌물 사건에 휘말려 홍역을 치른 황희였지만, 그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변함 없었던 덕에 1431년(세종 13년)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에 임명된다. 이때 황희의 나이 69세였다. 세종이 황희를 택한 것은 지금껏 정승을 지낸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청렴하고 일 처리 능력이 탁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다 황희는 어떤 문제든지 계책이 남달랐고, 상황과 사건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내놓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또 비록 몇 번 뇌물을 받았다고는 하나 다른 신하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고, 인정이 많고 마음이 유순하여 노비들에게도 모질게 하는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청백리의 대명사, 유관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상신(相臣)으로 꼽히는 정치가가 유관이다. 그는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었으며, 황희나 맹사성에 앞서 재상의 초상으로 여겨졌던 인물이다. 비록 영의정엔 오르지 못하고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우의정에 머무는 것에 그쳤으나, 그의 삶은 세종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1433년(세종 15년) 5월 그가 죽자, 세종은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는데도 그를 애도하는 의식을 감행했다. 세종이 황희에게서 정무 처리의 해박함을 배우고 맹사성에게서 삶을 즐기는 유연함을 배웠다면, 유관에게서는 진정한 선비의 길이 무엇인지 배웠던 것이다.
유관은 1346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황해도 문화로, 고려시대에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을 지낸 유안택의 아들이다. 그가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6세 되던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전리전랑, 전교부령을 거쳐 고려 말기에 봉산군주, 성균사예, 사헌중승 등을 역임하다 조선 개국을 맞이했다. 그는 불교를 배척하고 신유학인 성리학에 몰두했고, 이런 학문적 인연으로 조선 창업에 동조하여 원종공신이 되었다. 조선 개국 후 그가 처음 맡은 소임은 내사사인이었으며, 태조에게 이틀에 한 번꼴로 『대학연의』를 강의했다. 그는 태조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어 간관의 수장인 좌선시상시(좌상시)에 발탁되었다.
그가 좌상시 직책을 수행하던 3개월 동안 무분별하게 시행되는 기복조치를 본래 취지에 맞게 시행하도록 했다. 당시 관리들은 상을 당하면 삼년상은커녕 채 1백 일도 채우지 않고 해당 관청이 기복 신청을 하도록 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유관은 삼년상이 천하의 공통된 상례임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중대사와 관계되지 않은 관리들은 반드시 삼년상을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 일을 관철시킨 그는 조정에서 깐깐한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1398년 봄에 형조전서로 진급한 그는 또 한 번 깐깐한 기질을 발휘했다. 개국 초라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형법의 적용도 엄정하지 못했는데, 1398년 5월에 형법 개정을 품신한 것이다. 당시 가장 문제가 되던 것은 형법의 형평성 문제였다. 부자는 법을 어겨도 재물로 형을 대신하는 제도가 있었고, 사람을 사서 형을 대신 받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유관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공평하게 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형법의 문제는 비단 법 자체에 한정되지 않았다. 형옥을 관리하는 형리들이 법에 무지하여 일반 백성들이 형평에 맞지 않는 처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법 조문이 구체적이지 못해 해석 여하에 따라 형벌의 강도가 크게 차이 났다. 유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형옥은 반드시 형법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하며, 형리들이 법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태조의 허락을 얻어냈다. 또 법에 명시되어 있는 고문의 한계를 지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