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와 넓이 4막 16장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깊이와 넓이 4막 16장
김용석 지음
휴머니스트/2002년 2월/404쪽/20,000원
프롤로그
전환점이나 물결이라는 말들은 물론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 나는 전세계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사용해오고 있는 인식의 틀에 관한 문제 - ‘혼합의 시대’를 살아가는 실제적인(actual) 문화철학적 논제 - 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새로움을 발견하고 새로움을 제시하며 단절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연속적이다.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모퉁이를 돌아서는 전환의 시기에도 돌아서 가는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이 반영하는 시대의 특성이 있다. 오늘날 그 특성은 ‘혼합의 시대’라는 것이다. 혼합의 시대는 인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과 행동의 문제다. 그 안에는 학문적 삶과 행동도 포함된다. 나는 이 책에서 문명과 문화의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 다양성과 혼합성이라는 차원에서 논지를 전개할 것이다.
1막 환상 속의 현실, 현실 속의 환상
1막에서 다룬 테마는 환상이다. 철학의 오랜 고민거리였던 ‘현실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현실(The Reality)'과 ’현실들(realities)‘이라는 시각을 제시하기도 하고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의 실효성을 이야기한다.
현실과 환상, 깊고 넓게 가는 방법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면 현실이 열리고 ‘현실(The Reality)’은 조각나기 시작한다. 현실의 막(幕)이 열리며 처음 등장하는 연극배우들은 ’현실들(realities)‘이다.
1장 야수의 눈빛이 두려운가?
‘야수’로 불리는 현대문명의 눈빛을 왜 직시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단순한 삶을 살라!, 자연으로 돌아가라! 등은 사회적 불평등 구호라며 이 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서민과 일상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즉 하루하루 바로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실질적 삶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이 문명 발달에 반감을 갖게 된 때부터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단순한 삶=자연 속의 삶’이란 등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과 자연회귀가 누구에게나 가능할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삶을 찾아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회사주나 회사의 권력을 갖고 있는 최고경영자, 아니면 피고용인일지라도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기술 소유자거나 뛰어난 브레인들이다. 도시의 서민들은 오히려 자동차, 휴대전화, 컴퓨터 등의 문명의 이기를 ‘생계를 위한 노동’과 일상생활을 위해서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2장 환상, 마법 그리고 현실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현실이 다양한 차원들과 현실들 ‘사이’를 볼 줄 아는 능력과 연관된다. 곧 환상이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회피적인 자세로 현실을 볼 때 우리는 환상을 현실도피의 출구로만 이해하기 쉽지만,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환상을 즐길 줄 알게 된다. 일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를 철학적으로 읽는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과 연관하여 정말 흥미롭게 관찰 할 수 있는 것은 ‘다름’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모든 판타지 작품의 공통된 특성인지도 모른다. 판타지의 특성은 ‘다른 것’에 대한 지향이다. 그것은 판타지가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성립되는 이유이자 우리가 판타지 작품에서 읽어야 할 문화 컨텐츠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의 특징은 ‘이제껏 보고 듣고 체험한 적이 없는’ 것들, 즉, ‘전혀 다른 것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호비트」에서) 쉰 살이 되도록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안락한 토굴집에 틀어박혀 모난 행동 한 번 없이 얌전하게 살아서 이웃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오던 빌보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그의 모험이 전혀 다른 경험이라는 사실을 극대화한다.
3장 우주를 서핑하는 작가를 기다리며
과학과 예술, 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조력이 네트워크화하고, 공간적 확장과 시간의 회복 및 소환을 추구하는 시대에 인간은 ‘지구 밖’을 지향하는 것이다. Post-Globe 시대에 걸맞는 ‘환상적 작가’, 우주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연습자료를 제공해주는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환상문학은 새로운 문학적 컨텐츠 실험의 한 예일 뿐이다. 이것 외에도 다양한 실험의 가능성을 작가들 자신이 지속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1세기의 작가들에게 미래의 문학을 위한 가능성이자 의무로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에 수시로 그 소재를 제공하는 이 시대의 일상현실은 그 자체로 다양한 요소들의 복잡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은 인간 의식의 복잡계를 탐험하도록 한 방식일 뿐이다.
4장 다차원의 현실과 문화구상력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의 현실적 침투에 따른 경험은 시대의 화두이자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성과물이 개인에게까지 새로운 현실처럼 전파되고 있다. 인문학은 각 개인들이 ‘현실들의 향연’을 펼칠 수 있는 문화구성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전문 분야로서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를 다루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구분 및 혼란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2001년 한해 동안 자살 사이트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이 점이 부각되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Virtual‘을 자꾸 ’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접근해서는 문제를 바로 볼 수 없다. 그것이 가상이라면 어떻게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이 이미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접속자는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현실적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데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란 기준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2막 텍스트 인간, 하이퍼텍스트 지식
인간과 지식의 문제를 깊이 사유한다. 글쓰기는 ‘수정’, 글읽기는 ‘노력’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는데, 이는 철학적 윤리적 문제와 연결된다.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라는 주제로 텍스트를 대하는 능동적 태도와 수동적 태도를 생각해내는데, 이는 우리 지식사회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관점이다.
인간과 지식. 인간은 세계라는 텍스트 속 또 하나의 텍스트다. 인간은 하이퍼(Hyper)한 텍스트(Text)들을 만든다. 이미지도 텍스트의 자격을 획득한다. 이제 지식의 향연은 시작된다. 하이퍼텍스트가 텍스트의 일부임을 깨닫는 방법은, 인간이 어떻게 쓰고, 읽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1장 글쓰기 방식과 문화적 변동
글쓰기 방식의 변천에서 출발하여 의식의 변화를 거쳐 각 세대의 문화적 변동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화두가 있다. 의식의 진화와 글쓰기의 관계를 ‘수정’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글쓰기 방식의 변천에 동반하는 문화적 변동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띤다.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들의 물질적 특성, 휴대성과 일상생활, 도구와 기계의 동력조달 방식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 말이 시각화된 문자의 예술적 차원, 글쓰기와 사회적 권력 사이의 관계, 글쓰기가 인쇄 문화 및 전자 문화와 맺는 관계, 그것의 미래, 쓰기와 읽기의 변증적 관계, 쓰기에 따른 읽기 방식의 미래적 변화 추이, 지금까지의 글쓰기의 선형성과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에 대한 이해와 오해, 하이퍼 프로세서가 가져올 글쓰기의 변화 등은 무궁무진한 연구와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쓰기, 치기, 처리하기, 각각에 내재된 고치기 방식의 변화는 곧 의식 진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글쓰기 방식은 문화 추이를 동반하며, 또한 그것은 여러 차원에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나타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구나 이는 현재의 청소년들과 미래 세계의 문화적 변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현재 워드프로세싱에 익숙해 있고 앞으로 하이퍼 프로세서를 사용하게 될 그들의 글쓰기 방식은 글쓰기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식변화와 깊이 연관될 것이기 때문이다.
2장 하이퍼텍스트 원고, 텍스트 피고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는 모두 ‘현재의 텍스트’이다. 서구에서 개발된 하이퍼텍스트, 그 중요성과 문화적 가치를 서구보다 더 편향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디지털문화와 하이퍼텍스트의 연구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 모순에 대한 성찰을 위해 ‘텍스트의 다양한 성격들’을 넓게 파악한다.
상상의 가능성과 폭에 관한 것이다. 디지털 문화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상상력 범위를 넓혀준다는 견해가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경로를 제공하면서 퍼져가는 네트워크를 기본으로 하는 하이퍼텍스트도 상상의 폭을 넓혀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지 중심의 멀티미디어가 사실은 상상력의 여지를 별로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화 같은 영상매체에서 전달되는 이야기는 특정한 표상의 연속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상상의 틈새만을 남겨두기 쉽다. 책으로 씌어진 이야기는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고 책의 내용에서 전이된 이미지를 창조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글자를 보지만, 머릿속에서는 색깔, 소리, 모습, 풍경 등을 연출해낸다.
3장 지식의 창조와 지식의 습득
읽기가 지식 창조의 방식이라면, 글읽기는 인간과 지식 사이에서 ‘지식 습득’의 방식이다. 그것은 인간과 지식이라는 21세기의 화두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시대적 의미들이 오늘의 세계관과 윤리관 형성에 폭넓게 개입한다는 것을 관찰한다.
읽기는 ‘지식 창조의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다양한 현상을 읽는 사람들은 읽기의 행위를 자신의 두뇌작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포착하여 그것을 읽어내 갖가지 기호 및 말이나 글로 표현하고자 한다. 즉, 남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때의 읽기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탄생시키도록 하는 ‘세상 읽기’라는 인간 욕구의 발현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읽기’, ‘그림 읽기’ 등도 일정한 대상을 읽어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읽기가 ‘지식 창조’의 방식이라면, 글읽기는 인간과 지식 사이에서 ‘지식 습득’의 방식이다. 이 점에서 ‘읽기’와 ‘글읽기’는 확연히 구분된다. 따라서 글읽기를 읽기의 한 방식이라고 보기보다는 그것과는 다른 차원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글쓰기의 변천을 꿰뚫는 화두가 ‘수정’의 문제라면, 글읽기의 변화를 꿰뚫는 화두는 바로 ‘노력’의 문제다. ‘고치기’와 ‘애쓰기’가 없는 세상이 있다면 그건 파라다이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실낙원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다.
4장 이미지와 함께 살기, 이미지에 딴죽걸기
이미지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화두이다. 하지만 이미지 이상으로 상상력에 대한 관심 역시 크다. 현실적으로는 기존의 이미지들이 상상력을 질식시킬 위험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말과 그림이 어우러진 것이 만화이다. ‘말이 시각화된 글’과 ‘캐릭터화된 그림’이 조화를 이룬 것이 만화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만화의 표현 양식은 문자와 이미지가 어우러짐을 그 본질로 한다. 관심 있는 독자는 이원복의 만화에서 만화(그림과 말풍선)를 한번 제거해 보라. 그림을 제거해도 그가 바탕화면의 공간에 써놓은 메시지와 정보를 설명하는 글은 그대로 잘 이어져간다. 반대로 바탕글을 제거하면 말풍선이 있어도 만화는 제 역할을 못한다. 그의 만화책은 사실 만화를 가리고 글만 읽어도 된다. 만화책 속에 만화가 없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원복의 만화를 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그가 ‘메시지가 있는 만화, 정보를 전달하는 만화를 그리고자’했기 때문에 택한 방식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 이미지가 문자에 예속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만화가 독립된 장르로 발전해나가기 위해서는 문자에 대한 이미지의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말의 이미지화가 필요하다. 예술성이란 실용성을 동반할 때에도 지켜져야 하며, 더 나아가 실용적 목적의 창작에 예술성이 보존될 때, 더 빛을 발하기도 한다.
3막 과학과 대화하기, 문화와 동행하기
3막은 과학의 세계를 깊게 탐색한다. 과학의 중립성이 결국 ‘과학을 위하는 길’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정통과학, 신과학, SF를 횡단하면서 우주관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도구, 기계, 기술이라는 주제를 가로지르며 종교관과 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과학과 인문학의 접속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21세기의 앙가주망’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과학과 문화, 키워드는 첨단. ‘미치광이 과학자’는 연구실을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연구실은 자기의 세계이고, 그곳을 나와 세상으로 나가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누가 만든 것인가? 이제 과학과 인문학은 만나야 한다. 서로 접촉하고, 접속하며,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1장 과학의 중립성, 그 허구의 권력
‘과학적’이란 말은 가치 개념이 오래된 지 오래다. ‘가치 있는 것’으로서의 과학은 과학 대중화, 과학 커뮤니케이션 등 한 단계 더 나아간 문화적 침투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이에 따라 위상 제고에 나서고 있다.
과학이 비중립성을 ‘고백’하는 것은 신뢰성 및 투명성과 연관이 있다. 대중이 과학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반인들에게 그것은 꼭 개별 과학 지식의 내용을 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과학과 과학자의 활동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그 현실적 의미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전문 과학 지식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거의 불가능하다. 대중은 과학과 일상생활의 상호 관계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고,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문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과학적 삶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편안해지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대중은 과학과 과학자를 믿고 싶은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대중의 신뢰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과학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 삶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투명해야 한다. 투명하기 위한 본질적 조건 중의 하나가 과학의 중립성이라는 권력을 버리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것을 버려야 가장 중요한 것을 얻는다.
좁은 의미의 과학 비판을 넘어서는 폭넓은 비평이 필요하다. 예술에서도 좋은 비평은 예술 창작에 훌륭한 자극제와 자양분이 된다. 문학비평, 미술비평, 영화비평이 있듯이, ‘과학비평’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학 기술적 창조물에 대한 미학적 접근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이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유전공학의 산물인 복제양 돌리에 대한 미학적 접근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이런 접근은 오늘의 문제를 훨씬 더 다각적으로 조명해주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과학이 좀 더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과학과 예술의 결합이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장 과학적 권위, 신과학 그리고 SF
과학적 권위, 신과학, SF는 모두 과학이란 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갖지만, 이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에서는 매우 다른 문화적 코드들을 읽는다. 지키기, 따라가기, 놀리기, 만나기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관계라는 점에서 문화 담론에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한다.
기존의 과학적 권위는 신과학을 견제하고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신과학은 ‘과학적 위상’을 얻기 위해 과학을 따라가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른바 정통 과학의 권위를 편이에 따라 차용하기도 한다. 신과학은 ‘과학적’이기를 원하므로 ‘허황된 이야기’인 SF와 차별화를 시도한다. SF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위상은 관심 밖이기 때문에 신과학의 이런 태도에 무관심하거나, 자신이 생산하는 허구적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놀릴 수도 있다. 사실 SF의 놀리기가 진짜 대상으로 하는 것은 정통 과학과 그 권위다. 반면 후자는 SF로부터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취할 경우가 많다. SF로부터 자기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