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의 제국
김창현 지음 | 푸른역사
제1장 혜종 왕무, 정통을 계승하다
내외 신료는 모두 동궁의 처분을 받으라통일신라 말기에 도래한 후삼국의 난세는 변방 송악 출신인 태조 왕건에 의해 평정되었다. 왕건이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지방 세력인 호족들과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데 있었다. 그런데 막상 대업을 이룬 후에는 그들이 왕의 권위와 중앙권력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호족과 장군들의 힘은 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점차 커져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태조조차 우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이 통치하고 있는 동안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왕건은 예순일곱 살 되던 해인 태조 26년(943)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그해 4월 박술희를 불러 자손을 훈계하는 훈요10조를 남겼다. 이 문서는 후계 왕들에게만 비밀스럽게 전하는 것인데 후계자들의 정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훈요 10조목 중에서도 혜종, 정종, 광종 때의 왕위계승 분쟁과 관련이 깊은 것은, 왕위계승을 장자, 차자 순으로 하라는 셋째 조목이다. 후대에 조작된 내용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왕건은 즉위한 지 26년 만에 붕어하였다. 왕건은 죽는 것은 하늘의 이치요, 사물의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하고 "내외 신료는 모두 동궁의 처분을 받으라!"는 유명을 남겼다.
정략결혼, 호족의 딸들에게 몸을 바치다왕건은 장군일 때와 임금이 된 후 수많은 여인들과 혼인했는데, 대부분 정략적인 이유로 맺어졌다. 특히 나주 오씨 소생의 왕무를 정윤에 책봉했던 무렵 그에 반발하는 실력자들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의 딸들과 혼인해야 했다. 왕건의 배우자들은 모두 30명이었다.
장자 왕무, 험난한 후계자의 과정을 거치다왕건이 남긴 25명의 왕자 가운데 후계자로 낙점된 행운아는 둘째 왕후인 나주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왕무였다. 훗날 체제가 정비된 다음에는 왕의 후계자만을 태자라 칭했지만, 고려 초에는 여러 왕자들을 태자라 칭했으며, 후계자는 따로 '정윤'이라 하였다.
왕무의 외가가 보잘것없어 후계자가 되지 못할까 염려한 왕건은 자신이 입는 자황포를 장화왕후에게 하사하였다. 이를 왕후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 아들인 왕무를 후계자로 낙점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왕건은 아들을 후계자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이 단순한 호족과 장군의 대표가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군주임을, 고려가 궁예나 다른 실력자들의 나라가 아닌 왕씨의 나라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가 자신의 대에서 끝나는 왕국이 아니라 아들과 후손에게 계속 이어질 것임을 확실하게 못 박고 싶었던 것이다.
제2장 혜종 왕무, 바다를 꿈꾸다
후삼국 통일의 선봉에 선 왕자정윤 왕무의 활동은 수도 개경에서 정치를 보좌하고 북방을 순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훗날 왕위에 오른 후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 때문에 그를 허약한 존재로 보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태조를 따라 백제를 정벌하는 데 맹렬하고 용감하게 선봉을 서서 공이 제일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왕무는 전장을 누빈 용맹한 전사였다. 왕무는 태조 19년(936)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쟁에도 참여하여 군대를 지휘하였다. 정윤 왕무는 부왕 왕건과 함께 후삼국 통일의 순간을 만끽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왕무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혜종 때 실력자들혜종 왕무는 외가의 열세에도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정통성과 박술희의 무력, 그리고 진천 호족 등의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혜종의 측근은 박술희, 왕규, 임희, 연예, 최지몽, 김견술 정도였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충분하지 못함을 느낀 혜종은 혼인관계를 통해 실력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광주 왕규의 딸과 청주 김긍률의 딸을 배우자로 맞이한 사실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혜종 왕무의 치세 동안 일반 신료 중에 실력자는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태조로부터 혜종의 옹립과 중요한 일 처리를 위임받은 대광 박술희를 들 수 있다. 또한 왕실의 어른 가운데 두드러진 실력자는 단연 좌승 왕식렴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쪽에서 올라온 5촌 조카 왕무에게 호감을 갖지는 않았다. 혜종 정권을 지탱하는 두 축은 박술희와 왕규였다. 박술희는 공신은 아니었지만 왕무를 정윤으로 옹립한 장본인이었다. 한편 태조의 장인이자 혜종의 장인이 된 왕규는 한강 일대를 지배한 대호족이었다. 오늘날의 광주는 규모가 크지 않지만 옛적에는 대단히 넓은 구역이었다.
의문에 묻힌 혜종의 죽음정통성과 덕망을 지닌 혜종은 박술희와 왕규의 보좌를 받으며 올바른 정치를 펼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심을 품은 동생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강력한 호족 및 장군들에 에워싸여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혜종 정권은 순조롭게 굴러가지 않았다. 최승로는 혜종이 덕의 정치를 행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목숨을 아껴 호위병에 파묻혀 살았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정종 형제(왕요와 왕소)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이 있을 정도로 정국이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아무리 덕망이 큰 혜종이라도 덕의 정치를 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국이 혼돈 상태인 가운데 혜종이 즉위한 지 2년 남짓한 945년 34세의 나이로 갑자기 붕어하고 만다. 사망 원인은 병세가 악화되어서라고 되어 있다. 침실을 침범한 자객을 주먹 한 방으로 죽일 정도로 강건했던 혜종이 순식간에 이름 모를 병으로 죽다니.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려사』 <최승로전>에 의하면 즉위한 이래 945년 8월까지 아팠다는 기록이 없다가 9월에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독살 내지 암살의 혐의가 짙다. 만약 왕규가 혜종을 죽였다면 기록에 남지 않을 리가 없으니 왕요와 왕소 형제에게 혐의가 넘어갈 수밖에 없다.
여러 신하들이 정종(왕요)을 받들어 즉위시켰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혜종이 여러 동생에게 뒷일을 부탁하지 못하자 정종이 스스로 여러 신하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최승로의 회고를 보면, 혜종은 왕요와 왕소 세력이 왕위를 이양하라며 갖은 협박을 다하는 데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살해당하였을 것이다.
제3장 정종 왕요, 고구려를 꿈꾸다
중원의 힘으로 우뚝서다후삼국시대와 통일 이후 초기에는 호족의 힘이 커 왕위계승 분쟁에서 왕자들의 외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혜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왕요와 왕소 형제의 외가는 충주였다. 국토의 젖줄인 남한강이 도도히 흐르는 충주는 한반도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역사적으로 이곳을 장악한 나라가 천하를 호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을 장악하여 국원성(國原城)이라 하고 남진의 전초기지로 삼아 신라를 예속시키고 백제를 압박하였다. 신라 역시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장악해 작은 수도인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지배층 자제를 이주시킴으로써 신라의 시대를 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국원을 중원(中原)으로 개칭하였다. '국원'은 국가의 근본 땅이라는 뜻이요, '중원'은 국가의 중심 땅이라는 뜻이니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 짐작이 간다. 충주를 얻으면 중부 지역을 장악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남부지역인 경상도와 전라도로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무일편>을 실천하는 군주, 신앙으로 두려움을 잊다혜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정종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도, <훈요>에서 강조한 <무일편>을 실천해야 했다. 정종은 뜻을 예리하게 하여 이치를 탐구하고 밤늦게까지 정무를 꼼꼼히 챙겼다. 이러한 그의 근면과 열정을 보건대 재위 기간이 4년에 그치지 않았다면 참으로 큰 업적을 남겼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가 정무를 몸소 처리하였다는 것은 신하들을 믿지 못할 정도로 정국이 불안했음을 뜻하기도 하니 그 이면에는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정종은 개국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함으로써 개경을 홍수로부터 보호하고 자신의 치세가 무사히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였으며, 엄격한 계율로서 정변으로 인해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안정시키고, 신하와 백성들을 장악하고자 했다. 또한 7만석의 곡식을 큰 절들에 투자하여 불교장학재단을 만듦으로써 불교 교리 학습을 장려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평양을 근거로 고구려를 꿈꾸다서경 천도는 정종의 창작품이 아니라 부왕 태조의 꿈이자 유언이었다. 태조 왕건은 왕식렴으로 하여금 황폐화한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재건하도록 하고 서경이라 명명하였다. 태조는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 통일을 달성한 것을 본받아 장래의 도읍지인 서경에는 9층탑을 축조하였으니 얼마나 서경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혜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자신이 태조의 정책을 계승한 실질적인 장자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으므로, 서경을 중시하라는 태조의 유언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태조가 꿈꾸었던 서경 천도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최승로는 정종이 서경 천도를 시도한 이유를 도참(예언)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어쨌든 풍수 내지 도참은 서경 천도를 설득하기 위한 표면적인 수단이었고, 진정한 이유는 정종이 자신의 지지기반인 서경으로 옮겨감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정종은 많은 사람들의 반발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고집으로 서경 천도를 밀어붙였다.
서경 천도의 실질적 주체, 왕식렴의 야망왕식렴은 태조 원년 서경에 파견된 이래 서경을 개척하고 경영하고 지배하였다. 서경 천도를 결정한 사람은 정종이지만,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바로 5촌 숙부인 왕식렴이었다. 그는 서경을 경영하였을 뿐 아니라 안수, 흥덕 등의 요새에 성을 쌓았다. 영토 개척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그는 북방 일대를 지배한 군벌이자 총독이었다. 그의 군대는 후삼국 통일전쟁 과정에서도 별 피해를 입지 않고 잘 유지되어, 혜종을 보위하는 개경의 군대를 격파하고 정종을 보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왕식렴과 정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뜨면서 서경 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종이 붕어하자 노역꾼들이 기뻐 껑충껑충 뛰었다고 한다. 정종과 왕식렴이 꿈꾸었던 서경 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려가 압록강을 확보한 후 그 북쪽으로 국경을 확대하지 못한 데에는 수도가 개경에 머물렀던 점도 작용했다. 이처럼 정종과 왕식렴의 서경 천도 실패는 고려는 물론 이후 역사에도 많은 숙제를 남겼다.
제4장 따스한 해가 떠오르다
최후의 승자, 광종 왕소『고려사』에 의하면 광종은 친형인 정종에게 '내선'을 받아 보위에 올랐다고 한다. 형제가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지만 기록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 많다. 왕규가 혜종에게 반역 음모를 알릴 때 왕요와 왕소 형제를 지목한 것은, 왕요뿐 아니라 왕소도 정변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시사한다. 물론 박술희를 유배 보내는 등 전면에 나선 사람은 왕요였으며, 정변에 성공한 후에도 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왕소의 지지 세력이 왕요의 지지 세력보다 더 컸으니, 정종 왕요 정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왕소가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왜 왕요가 왕위에 올랐을까? 동생 왕소가 형 왕요에게 양보한 것일까? 권력의 세계에서 그러한 미덕은 기대하기 힘들다.
왕요와 왕소는 둘 다 혜종 세력을 숙청하는 정변을 주도하였다. 왕요가 앞에 서고 왕소가 뒤에서 밀었다. 혹시 정변을 일으킬 때 왕요와 왕소 사이에 돌아가면서 왕을 하자는 신사협정을 맺지는 않았을까 궁금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왕소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왕요의 즉위를 일단 받아들이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최승로는 정종이 서경 천도를 강행하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복종하지 않아 원망이 일어나고 재앙의 발생이 그림자와 소리의 울림보다도 빨라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고 회고하였다. 정종의 죽음이 서경 천도 추진으로 인한 원망과 재앙 때문이라니. 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음이 은근히 드러난다.
정종은 동생 왕소에게 평화적으로 왕위를 양보하지 않은 듯하며, 정종이 죽은 것도 병 때문이 아니라 왕소 세력과 개경 일대 세력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광종 왕소의 즉위 과정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변을 통한 권력 장악의 혐의가 짙다.
왕요와 왕소의 차이광종 왕소가 왕위계승 다툼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호족과 장군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친형제인 왕요와 광종 왕소의 세력기반은 외가인 충주를 기본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지만 충주 외 세력기반은 두 사람이 전혀 달랐다. 왕요의 지지 세력은 왕식렴을 제외하면 왕소에 비해 그리 내세울 게 못 되었다. 그에 비해 왕소의 세력은 개경 주위의 주류 세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 범위가 넓고 구성원이 풍부하였다.
왕요의 지지 기반인 왕식렴은 서경을 지배하긴 했지만 서경 세력 모두가 그의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서경에는 왕식렴 말고 다른 실력자들도 존재하였다. 서경에 대한 지배는 왕식렴이 군사권을, 박질영과 김행파가 민사권을 행사하는 식이었다. 박질영과 김행파는 왕소 편에 기울었다. 이처럼 왕식렴이 군사적으로 지배한 서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성원이 복잡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왕소 편에 가담해 있었다.
광종, 조심스러운 출발왕소는 배다른 형 혜종과 친형인 정종을 차례로 몰아낸 비정한 인물이지만, 호족, 장군들의 권력투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몰고 간 측면도 있다. 광종 왕소의 승리와 대권 장악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예고하고 있었다.
광종 원년(950) 정월 어느 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광종은 사천대 관리에게 재앙을 물리칠 방법을 물었는데 덕을 닦는 일밖에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광종은 군주가 잘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리므로 열심히 수양해야 재앙이 물러난다고 해석했다. 그 때부터 광종은 수양을 위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기 시작했는데, 이후 이 책은 광종의 애독서가 된다. 당 태종 이세민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 하며, 이 시절 행해진 당 태종과 신하들의 문답을 실은 책이 바로 『정관정요』이다.
광종 왕소도 당 태종 이세민과 많이 닮았다. 광종은 이세민에게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세민은 형제와 조카들을 많이 죽였지만 정치를 잘해 현군으로 칭송받고 있지 않은가. 나도 형제와 조카들을 죽게 만들었지만 앞으로 정치를 잘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 후대에 현군으로 칭송받으리라."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연호 '광덕'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다광종은 즉위한 다음해에 연호를 선포하고 대내는 물론 대외에 황제를 칭하였다. 우리 나라의 역대 왕조가 대개 중국이나 북방 강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데 비해, 광종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했으니 그 의미가 크다. '광덕'이란 연호를 사용한 것은 형들의 시대가 가고 자신의 치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광종은 단순히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식적으로 대외에 황제를 칭하였다. 광종 자신이 황제임을 천하에 공식적으로 선포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광종의 '칭제건원'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 국왕도 황제를 칭할 수 있다는 귀중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이후 고려 사람들은 주저 없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제나 천자로 표현하였고, 이후 묘청 당파처럼 공식적으로 '칭제건원'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