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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제국

김창현 지음 | 푸른역사
광종, 조심스러운 출발광종식 개혁의 신호탄, 노비안검과거 도입으로 황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하다의문에 묻힌 혜종의 죽음후삼국시대와 통일 이후 초기에는 호족의 힘이 커 왕위계승 분쟁에서 왕자들의 외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혜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왕요와 왕소 형제의 외가는 충주였다. 국토의 젖줄인 남한강이 도도히 흐르는 충주는 한반도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역사적으로 이곳을 장악한 나라가 천하를 호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을 장악하여 국원성(國原城)이라 하고 남진의 전초기지로 삼아 신라를 예속시키고 백제를 압박하였다. 신라 역시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장악해 작은 수도인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지배층 자제를 이주시킴으로써 신라의 시대를 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국원을 중원(中原)으로 개칭하였다. '국원'은 국가의 근본 땅이라는 뜻이요, '중원'은 국가의 중심 땅이라는 뜻이니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 짐작이 간다. 충주를 얻으면 중부 지역을 장악할 수 있고, 이를 기반으로 남부지역인 경상도와 전라도로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왕건이 남긴 25명의 왕자 가운데 후계자로 낙점된 행운아는 둘째 왕후인 나주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왕무였다. 훗날 체제가 정비된 다음에는 왕의 후계자만을 태자라 칭했지만, 고려 초에는 여러 왕자들을 태자라 칭했으며, 후계자는 따로 '정윤'이라 하였다.



왕무의 외가가 보잘것없어 후계자가 되지 못할까 염려한 왕건은 자신이 입는 자황포를 장화왕후에게 하사하였다. 이를 왕후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 아들인 왕무를 후계자로 낙점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왕건은 아들을 후계자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이 단순한 호족과 장군의 대표가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군주임을, 고려가 궁예나 다른 실력자들의 나라가 아닌 왕씨의 나라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가 자신의 대에서 끝나는 왕국이 아니라 아들과 후손에게 계속 이어질 것임을 확실하게 못 박고 싶었던 것이다.정윤 왕무의 활동은 수도 개경에서 정치를 보좌하고 북방을 순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훗날 왕위에 오른 후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 때문에 그를 허약한 존재로 보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태조를 따라 백제를 정벌하는 데 맹렬하고 용감하게 선봉을 서서 공이 제일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왕무는 전장을 누빈 용맹한 전사였다. 왕무는 태조 19년(936)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쟁에도 참여하여 군대를 지휘하였다. 정윤 왕무는 부왕 왕건과 함께 후삼국 통일의 순간을 만끽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왕무는 후삼국 통일전쟁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제3장 정종 왕요, 고구려를 꿈꾸다

중원의 힘으로 우뚝서다<무일편>을 실천하는 군주, 신앙으로 두려움을 잊다평양을 근거로 고구려를 꿈꾸다서경 천도의 실질적 주체, 왕식렴의 야망광종의 홍위병 '남북 못난이'제7장 후계자를 둘러싼 갈등

정윤 책봉과 대목황후혜종 왕무는 외가의 열세에도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정통성과 박술희의 무력, 그리고 진천 호족 등의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혜종의 측근은 박술희, 왕규, 임희, 연예, 최지몽, 김견술 정도였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충분하지 못함을 느낀 혜종은 혼인관계를 통해 실력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광주 왕규의 딸과 청주 김긍률의 딸을 배우자로 맞이한 사실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혜종 왕무의 치세 동안 일반 신료 중에 실력자는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태조로부터 혜종의 옹립과 중요한 일 처리를 위임받은 대광 박술희를 들 수 있다. 또한 왕실의 어른 가운데 두드러진 실력자는 단연 좌승 왕식렴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쪽에서 올라온 5촌 조카 왕무에게 호감을 갖지는 않았다. 혜종 정권을 지탱하는 두 축은 박술희와 왕규였다. 박술희는 공신은 아니었지만 왕무를 정윤으로 옹립한 장본인이었다. 한편 태조의 장인이자 혜종의 장인이 된 왕규는 한강 일대를 지배한 대호족이었다. 오늘날의 광주는 규모가 크지 않지만 옛적에는 대단히 넓은 구역이었다.혜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정종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도, <훈요>에서 강조한 <무일편>을 실천해야 했다. 정종은 뜻을 예리하게 하여 이치를 탐구하고 밤늦게까지 정무를 꼼꼼히 챙겼다. 이러한 그의 근면과 열정을 보건대 재위 기간이 4년에 그치지 않았다면 참으로 큰 업적을 남겼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가 정무를 몸소 처리하였다는 것은 신하들을 믿지 못할 정도로 정국이 불안했음을 뜻하기도 하니 그 이면에는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정종은 개국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함으로써 개경을 홍수로부터 보호하고 자신의 치세가 무사히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였으며, 엄격한 계율로서 정변으로 인해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안정시키고, 신하와 백성들을 장악하고자 했다. 또한 7만석의 곡식을 큰 절들에 투자하여 불교장학재단을 만듦으로써 불교 교리 학습을 장려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서경 천도는 정종의 창작품이 아니라 부왕 태조의 꿈이자 유언이었다. 태조 왕건은 왕식렴으로 하여금 황폐화한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재건하도록 하고 서경이라 명명하였다. 태조는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 통일을 달성한 것을 본받아 장래의 도읍지인 서경에는 9층탑을 축조하였으니 얼마나 서경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혜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자신이 태조의 정책을 계승한 실질적인 장자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으므로, 서경을 중시하라는 태조의 유언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태조가 꿈꾸었던 서경 천도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최승로는 정종이 서경 천도를 시도한 이유를 도참(예언)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어쨌든 풍수 내지 도참은 서경 천도를 설득하기 위한 표면적인 수단이었고, 진정한 이유는 정종이 자신의 지지기반인 서경으로 옮겨감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정종은 많은 사람들의 반발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고집으로 서경 천도를 밀어붙였다.연호 '광덕'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다제5장 개혁으로 공신을 누르다

폭풍전야의 태평성대제6장 대숙청으로 이룬 태양의 제국



대숙청 시대의 개막모든 권력은 오직 황제에게로『고려사』에 의하면 광종은 친형인 정종에게 '내선'을 받아 보위에 올랐다고 한다. 형제가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지만 기록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 많다. 왕규가 혜종에게 반역 음모를 알릴 때 왕요와 왕소 형제를 지목한 것은, 왕요뿐 아니라 왕소도 정변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시사한다. 물론 박술희를 유배 보내는 등 전면에 나선 사람은 왕요였으며, 정변에 성공한 후에도 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왕소의 지지 세력이 왕요의 지지 세력보다 더 컸으니, 정종 왕요 정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왕소가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왜 왕요가 왕위에 올랐을까? 동생 왕소가 형 왕요에게 양보한 것일까? 권력의 세계에서 그러한 미덕은 기대하기 힘들다.



왕요와 왕소는 둘 다 혜종 세력을 숙청하는 정변을 주도하였다. 왕요가 앞에 서고 왕소가 뒤에서 밀었다. 혹시 정변을 일으킬 때 왕요와 왕소 사이에 돌아가면서 왕을 하자는 신사협정을 맺지는 않았을까 궁금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왕소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왕요의 즉위를 일단 받아들이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최승로는 정종이 서경 천도를 강행하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복종하지 않아 원망이 일어나고 재앙의 발생이 그림자와 소리의 울림보다도 빨라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고 회고하였다. 정종의 죽음이 서경 천도 추진으로 인한 원망과 재앙 때문이라니. 그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음이 은근히 드러난다.



정종은 동생 왕소에게 평화적으로 왕위를 양보하지 않은 듯하며, 정종이 죽은 것도 병 때문이 아니라 왕소 세력과 개경 일대 세력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광종 왕소의 즉위 과정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변을 통한 권력 장악의 혐의가 짙다.광종은 즉위한 다음해에 연호를 선포하고 대내는 물론 대외에 황제를 칭하였다. 우리 나라의 역대 왕조가 대개 중국이나 북방 강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데 비해, 광종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했으니 그 의미가 크다. '광덕'이란 연호를 사용한 것은 형들의 시대가 가고 자신의 치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광종은 단순히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식적으로 대외에 황제를 칭하였다. 광종 자신이 황제임을 천하에 공식적으로 선포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광종의 '칭제건원'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 국왕도 황제를 칭할 수 있다는 귀중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이후 고려 사람들은 주저 없이 자신들의 군주를 황제나 천자로 표현하였고, 이후 묘청 당파처럼 공식적으로 '칭제건원'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등장하게 된다.적어도 광종의 초반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 평온하였다. 최승로는 훗날 광종의 초반 정치를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신하를 예우하되 아랫사람에게 더 잘해주었고, 감식능력이 뛰어나 사람을 알아보는 데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즉위한 해로부터 8년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였으며 벌과 상이 넘치지 않았습니다."광종 왕소가 서른두 살 되던 해, 곧 즉위한 지 8년째 되는 광종 7년은 그의 치세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몸을 낮추던 광종이 세력기반이 충분히 다져지자 감추었던 본심을 드러내 비로소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광종은 956년에 노비를 안검(按劍)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라 명령하였다. 이른바 노비안검법을 시행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안검 혹은 안험(按驗)은 고찰하고 검사한다는 뜻이니, 곧 노비의 실태를 조사한다는 것이었다.



광종이 노비를 안검하자 공신들이 탄식하고 원망하였다고 하니, 노비안검에 대한 공신들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공신과 호족의 반발에도 광종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배우자인 대목황후가 공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혁명적 조치인 노비 안검은 광종의 세력기반이 공신과 호족을 누를 수 있을 만큼 튼튼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광종은 8년 동안 신진 세력을 꾸준히 등용하는 등의 준비과정을 거쳐 친위 세력과 친위 병력을 충실히 다졌고, 바로 이것이 노비 안검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호족이나 장군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지만 광종과 국가에는 이익이 되었다.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양인이 된 결과, 호족이나 장군들은 광종의 권위에 도전할 기반을 상실한 반면, 조세를 부담하는 양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국가 재정은 풍부해졌다. 이에 따라 광종의 권력은 탄탄해지고 중앙정부의 힘도 성장하였다.광종은 9년(958) 5월 한림학사 쌍기에게 과거 시행을 명령하였다. 시험이 끝나면 고시관인 쌍기가 답안지를 채점해 합격 여부와 등수를 정하였고, 광종이 몸소 급제자를 발표하였다. 최초의 장원급제자는 최섬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과거가 시행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과거제도는 노비안검법과 함께 광종이 추진한 개혁정책의 핵심이었다. 과거는 고려는 물론 조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까지 그 여파가 남아있다. 과거는 문치주의가 도래하는 바탕이 되었다. 즉, 칼의 시대에서 붓의 시대로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과거는 관료 채용 방법의 혁신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후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도 많았다. 똑똑한 인재들이 과거 공부에만 매달리고 기술학이나 상공업은 천시되었다. 또한 벼슬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게 되면서 행세 깨나 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중앙으로 몰려들어 중앙은 점점 비대해졌고, 이는 지방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어쨌든 과거제도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갖고 있었으므로 광종의 과거 도입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당시 지방의 힘이 지나치게 크고 무사적인 기질을 소유한 이들이 지배층을 장악하여 중앙 권력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광종이 노린 효과는 바로 이것이었다.노비안검법과 과거시험 실시로 권력기반을 강화한 광종에게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서른여섯 살로 접어든 960년 정월, 개혁 모델로 삼았던 쌍기의 조국 후주가 멸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광종은 후주가 망한 직후 한동안 사용했던 후주의 연호를 버리고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한다. 이는 고려가 후주와 같은 꼴이 되지 않기 위해 신하를 '준엄하게 다스려 풍성한 태평성대를 열리라'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는 신하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뜨거운 시대, 공포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광종은 연호를 반포한 직후 백관의 관복인 공복(公服)을 정하였다. 공복은 관청에 출근할 때 입는 복장으로 모두 네 등급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광종이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행된 제도였다. 공복을 통하여 신하들의 서열을 확실히 함으로써 하극상 풍조를 억제하고 나아가 관료조직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인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만들려 한 것이다. 이제 신하들은 서열에 따라 정해진 복장을 통해 상급자에 대한 행동을 조심하고 예의를 차리게 되었다.



신하들의 관복을 정한 다음 광종은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로, 서경을 서도(西都)로 칭하도록 명하였다. 특히 서경을 서도라고 칭한 것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태조 이래 추진해온 서경 천도 시도를 일단 중단하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서경이 개경과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고 장차 천도할 예정지로 남아 있는 한, 서경 세력의 힘에 의해 정국이 불안해지고 황제의 권위도 흔들릴 염려가 있었으므로, 서경에 대한 개경의 우위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개경을 황도로 선포한 일은 고려의 권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황제국 체제를 유지한 고려의 구심점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황도였던 것이다. 이후 개경은 고려의 군주가 공식적으로 황제를 선포하지 않을 때에도 황도로 불리게 되며, 세계 최강 몽골군의 침략에 오랫동안 항쟁하다가 굴복해 그 제후국으로 편입되기 전까지, 황도로서 존재하며 고려의 자존심을 지켰다.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관심이 많았던 광종은 그러한 방향으로 관제를 개편했다. 특히 대숙청이 시작되는 광종 11년 군령권을 쥔 매우 중요한 순군부를 군부로 개편했다. 그것은 군령권을 쥔 힘센 신하가 숙청에 저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러한 조치들과 함께 정치제도와 정치운영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변화의 핵심은 광종이 문필 비서실인 한림원과 정무비서실인 내의성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한 점이다. 내의성은 위상이 높아지면서 재상부의 하나가 됨은 물론 여러 재상부 중에서 서열이 가장 앞서게 되었다. 통치자가 비서실을 강화해 독재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고려 말 충선왕은 한림원의 개칭인 사림원에 권력을 몰아 독재를 행했고, 조선 초의 태종 이방원은 재상을 배제시키고 비서인 승지들로 하여금 행정부인 6조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독재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광종이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취한 것들은 모두 자신에게 도전하는 정치세력을 응징해 정치판을 다시 짜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황권을 강화함으로써 영원히 왕씨가 지배하는 나라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대숙청이었다. 이때 이루어진 숙청은 감옥이 넘쳐 임시 감옥을 짓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이어질 정도로 대규모였다. 또한 광종의 시기함이 날로 깊어져 황족도 목숨을 많이 잃었다고 하니, 지위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황제의 근친이라 해도 처벌에서 제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광종 때 개혁과 숙청을 이끈 강경파로는 최승로가 지적한 '남북용인'을 음미해 보아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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