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읽어주는 남자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
철학 읽어주는 남자
탁석산 지음
명진출판/2003년 2월/296쪽/12,000원
Part 1 철학은 교양이 아니다
철학은 교양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철학은 교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잘은 모르고 어렵지만 누구나 한번은 들어보고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철학의 ‘교양주의’다. 이런 교양주의는 꽤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데 언제부터 이런 의식이 생겼을까? 우리 나라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철학을 교양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때는 일제 강점기로 보인다. 우선 ‘철학’이란 말 자체가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때 생긴 말이고, 대중 교육을 시작한 때도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향력으로 우리 나라에서 철학이 교양이라는 의식이 생겼다고 보이는데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에 걸쳐 일본 일대에서 유행한 문화주의(“정신이 만들어내는 문화와 그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내적 통일을 지닌 인격의 형성, 즉 교양을 중시하는 것”)에서 교양주의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주의, 곧 교양주의가 우리에게 그대로 이식되어 지금까지 이 땅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 교수들에게 많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서울대학의 졸업생들은 이후 한국 철학계의 중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영미에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생겨난 뒤에도 이들의 교양주의 성향, ‘교양인 양성’이라는 큰 목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즉, 철학은 구체적인 문제해결 능력이나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라 폭넓은 교양을 쌓게 하여 역사와 사회, 인간에 대한 통찰력과 열린 사고를 키워주는 학문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철학은 여러 가지를 다루기는 하지만 직업 교육이 아닌 교양 교육을 위한 학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목표에 반대한다. 즉, 철학은 교양이 아니라 전문 지식이며, 전문 기술이다. 교양이 있어봐야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이며, 가혹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다.
철학이 교양이라는 사고방식은 철학은 누구나 하고 있으며, 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낳았다. 그리하여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가르치는 것이 철학 교육의 목표라는 믿음도 득세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어렵지만 철학함은 누구나 습득할 수 있으므로 철학은 철학함을 위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함이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 한다면 철학의 한 분야인 논리학을 배우면 족할 것이다. 철학함은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칸트의 철학책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이해하는 철학자는 극소수며 일반인에게 암호와 다름없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철학이란 철학책에 담긴 내용이고, 철학함이란 스스로 사유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함이란 사실 아무런 내용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교양주의에서 더욱더 흥미로운 점은 대중화에 대한 대항이다. 일본근대철학에서 교양은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의 것으로 한정했는데. 이런 태도는 철학이 대중의 것이라는 자세와 충돌한다. 원래 철학은 대중이 아닌 지식인의 것이었는데, 철학의 위기가 오자 철학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것으로, 또한 교양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대중적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심으로 철학은 지식인 전유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철학이 대중화된다면 이는 철학 소비자를 많이 만들어내는 일로 가능할 것이다. 즉, 철학 자체를 대중이 한다는 말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대중이 소비할 수 있도록 가공하고 유통시켜 철학을 대중화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물리학은 대중화되기 어렵지만 물리학의 연구 성과는 대중화할 수 있다. 무선 인터넷, 휴대폰, 퍼지 에어컨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물론 철학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므로 물리학과 똑같은 방식으로 응용되어 대중화되지는 못하겠지만 여전히 철학 소비자는 존재한다. 즉, 철학의 연구 성과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꽤 많다는 이야기다.
삶의 의미는 철학만이 말할 수 있다
탈레스 시대의 철학은 과학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루었다. 하지만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인간의 삶에 관련된 윤리학이나 논리학은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우주나 세계의 구성 물질이 무엇이냐를 두고 논쟁하던 초기 철학의 관심을 인간사로 돌린 철학자들은 소피스트였다. 소피스트들은 인간의 삶을 철학의 중심 논제로 삼았고, 이제 철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윤리적 삶이 무엇인지가 논쟁에 등장했으며, 재판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는 변론술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시민이 직접 변호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인기가 있었다. 즉, 삶의 직접적인 필요성 때문에 철학이 생활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금 바꿔놓았다. 잘 알려진 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이런 철학은 중세를 넘어 근대까지 지배적 지위를 계속 유지했는데 그 과정에서 존재론과 인식론, 윤리학과 논리학 모두 철저히 학문화되었다.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변적이 됨에 따라 우리 삶과는 멀어져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은 또다시 탈바꿈한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철학이 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삶과 유리된 철학은 이제 자연과학에게 많은 영역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설을 신비스러운 이야기로 격하시켰다. 천체 운행을 수학 공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더 이상 목적이나 능동이나 형상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근대에는 어떻게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느냐를 탐구하는 인식론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철학의 세부 학문 중 인간의 삶은 윤리학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철학은 영토를 거의 다 잃었다. 우주론과 존재론, 인식론은 과학자의 손에 거의 다 넘어갔고, 논리학은 수학의 영역이 돼가고 있다. 윤리학도 규범 윤리학은 퇴조했고, 메타 윤리학은 외면당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철학의 영역을 더 명료하게 하는 결과도 낳았다. 즉, 과학은 사실을 다루고, 철학은 사실의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그런데 철학이 의미를 탐구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인간인 우리에게 해당하는 의미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우리에게 무표정한 감정이 없는 지식을 제공한다. 물론 지식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의 의미를 묻고 찾는다. 그러니까 질문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어떻게(how)를 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why)를 묻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사실에 대한 질문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을 묻는다.
의미란 결국 인간에게 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인간에게 의미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삶과 관련해서다. 인생과 관련이 없다면 구태여 의미를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쨌다는 거야? 그게 내 삶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라는 물음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가 우리 삶과 직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나는 왜 살까? 철학은 이런 물음에 답해야 한다. 결국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인생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지만 누구나 다 전문 기술에 속하는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너무나 많은 요소들로 구성돼 있고, 각각이 모두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내 인생을 이해하고 내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면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게다가 복잡한 내 자신도 이해해야만 한다. 개인의 사주팔자나 과학의 의미에 대해 무지하고서 인생의 의미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이 ‘어떻게’를 말해주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왜’의 문제, 즉 의미의 문제를 철학이 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철학은 사유 실험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자가 사유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현실에서 출발하여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유 실험을 한 다음 그 결과를 다시 현실에 적용한다. 잘 알려진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보자. 플라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진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동굴에 갇힌 인간을 그리고 있다. ‘동굴에 갇힌 인간’은 일종의 사유 실험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동굴에 갇힌 인간이더라도 밖에 나와 해를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나올 수 없게 돼 있기 때문이다. 동굴의 우화는 자신의 주장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플라톤이 고안한 장치다.
이런 사유 실험을 하는 이유는 우선 철학의 특성인 보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철학적 사유의 특성인 근본적 사유를 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것을 사유하고자 철학이 택한 방식은 현실과 무관해 보이는 가정된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가령 카프카의 『변신』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주인공은 자기 몸이 벌레로 변한 것을 발견한다. 의식은 전날과 동일하다. 이런 경우 벌레로 변한 이 존재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다면 어떤 근거에서 그렇고, 아니라면 또 어떤 근거에서 아닌가? 이런 문제는 인간의 의식과 육신에 관한 근본적 질문이다. 우리가 의식의 연속으로 자기 정체성을 파악한다면 이 벌레로 변한 존재는 여전히 전날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답에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연속이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육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부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옛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은 새롭게 바뀌었지만 육신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단순히 기억을 상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벌레로 변한 존재보다는 훨씬 더 예전 존재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즉, 육신에 더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듣던 말하고는 다르다. 즉, 우리는 흔히 인간은 이성적 존재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의 사유실험을 보면 우리는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다. 기억이 바뀌더라도 육체가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육체가 바뀐 상태로 정신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동일성을 부여한다는 말이다. 그럼 인간을 인간답게, 아니 한 개인을 그 개인으로 하는 것은 정신보다 육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사유 실험만으로 우리는 뛰어난 철학적 결론을 얻을 수 있다.
Part 2 철학은 삶의 숨소리다
둘은 그저 우연으로 맺어진 관계다 - 사랑과 섹스
한 보고에 따르면 남녀 간의 사랑은 보통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사람이 갖고 있는 속성인 미모, 재산, 성격은 변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속성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보는 게 옳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어떤 사람의 속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실상 속성을 사랑하면서도 아닌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어떤 점이 좋아요?”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다 좋아요.” 아니면 “그냥 그 사람 자체가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런 답은 사실 위장된 것이다. 아직 사랑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결점이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만, “그 사람자체가 좋아요.”라는 답은 철학적으로 따지기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는 속성과 실체에 관한 오래된 철학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플라톤 이래 주요한 논쟁거리였다. 고대에서 근대까지 많은 철학자가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실체와 속성 간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힘을 쏟았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변해도 영혼이라는 실체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서양에서 근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흄은 실체란 이름만으로 존재하고, 속성은 사실만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흄의 주장에 따르면 마음이란 관념의 다발이다. 여기에는 변화하는 속성의 터로서 실체는 없다. 변하지 않으면서 어떤 마음을 그 마음으로 만드는 신비한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실체를 갖지 않고 연속된 관념의 다발일 뿐이라면 변하지 않는 마음,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관념의 다발을 구성하는 구성원 중에 기억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할 때 지금의 오감이 전하는 인상과 그 인상에서 생겨난 관념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 중요한 요소로 기억을 활용한다. 기억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관념의 다발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과 현상이 인식에서 일반적이라면 사랑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속성이 변하여 예전 속성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한 기억과 예전의 아름다웠던 기억,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새로운 다발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사랑이 지난 뒤에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열정을 불사르며 사랑을 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사랑이 끝난 뒤 허망함을 맛본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성장했음을 느끼고, 사랑을 통해 스스로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왜 다른 결과가 남을까? 두 사람이 사랑하는 동안에 형성된 관념의 다발은 각자 달랐지만 그 다발들도 이미 사라졌다. 남은 것은 기억뿐이다. 그런데 기억은 기존의 인식 체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한 사람은 사랑을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다른 사람은 밥 먹는 것과 같은 일상으로 여겼다면 동일한 사랑 체험을 했으면서도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이 판단들이 각자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일한 사랑도 서로 다른 색깔을 띤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과 인식 체계에 따라 사랑의 색깔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사랑은 허망한 것으로도, 또는 영원한 것으로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라는 미명 아래 숨어 있는 위험 - 국가와 통일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고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으뜸 임무라는 관점에서 남북한 통일 문제를 살펴보자. 남북 통일은 두 가지 이념이 절대선이라는 전제 밑에서 논의되고 있다. 하나는 통일은 선이고, 분열은 악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이 지상 최대의 가치로서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민족지상주의다. 이런 전제에서 보면 통일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거나 북한에 대해 철저한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은 반통일 세력이고, 민족보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반민족주의다. 민족과 통일, 합하여 민족 통일은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이다. 예전에는 반공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였으나 지금은 민족 통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럼 두 가지 전제를 검토해 보자. 통일은 선이고, 분열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려 한다. 중국은 티베트 지역이 원래 중국의 일부였으므로 중국 통일이라는 점에서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티베트는 중국과 종교와 문화가 다르므로 독립은 당연하다고 주장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경우 통일이 선이고, 분열은 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사례와 다르다. 즉, 우리는 원하지 않는 분단이었기에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원하지 않은 분단, 즉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고통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통일이 이 고통을 덜어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와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른 남과 북이 과연 통일로 그 질곡과 원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전쟁 전 북한은 통일하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미국의 괴뢰 정권으로부터 인민을 구해내려면 통일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옳았다 해도 통일을 위해 무력을 행사한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