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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박제가 지음 | 돌베개
주(周)나라는 주(周)나라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다. 주나라와 오랑캐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오랑캐가 주나라를 어지럽혔다고 해서 주나라의 오랜 문물까지 자기들 것으로 바꾸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 나라는 명(明)나라를 신하의 입장에서 섬긴 지가 2백여 년이었다. 임진년에 왜란이 발생하여 종묘사직이 파천(播遷)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명나라의 신종황제께서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왜놈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불행히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시절을 당해서 천하 백성들이 변발을 하고 여진족의 옷을 입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주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따지는 사대부들이 앞뒤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청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지가 1백여 년이 흘렀다. 중국 백성의 자녀들이 태어나고 보석과 비단이 생산되는 것이라든지, 집을 짓고 배와 수레를 만들며 경작하는 방법이며, 최씨(崔氏)·노씨(盧氏)·왕씨(王氏)·사씨(謝氏)와 같은 명문가의 씨족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저들까지도 깡그리 오랑캐로 몰아세우며, 그들의 법까지도 팽개친다면 그것은 크게 옳지 못한 일이다.



만약 백성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성인은 그 법을 채택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의 옛 땅에서 만든 법이 아닌가?



지금 청나라가 되놈이기는 하다. 되놈의 청나라는 중국을 차지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약탈하여 소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빼앗은 주체가 되놈인 것만 알고 빼앗김을 당한 존재가 중국인 줄을 모르고 있다.



정축년에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하고 맹약을 맺을 적에 청나라의 칸(汗)이 동방 사람들에게 모두 호복(胡服)을 입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국과 왕래하지 못하도록 호복을 입히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옛날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호복을 입기를 좋아하더니 결국은 동방의 호족(胡族)을 대파할 수 있었다. 옛날의 영웅은 원수에게 반드시 보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호복을 입는 것쯤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은 중국의 법에 대해 "배울만 하다."라고 말하면 떼를 지어 일어나 비웃는다. 필부가 원수를 갚고자 할 때 원수가 날카로운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칼을 빼앗을 방법을 고민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천하에 대의를 펼치려고 하는데도 중국의 법 하나를 배우려 하지 않고 중국의 학자 한 사람도 사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고생만 숱하게 겪을 뿐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고, 궁핍에 찌들어 굶어죽게 만들었다. 나는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오랑캐를 물리치기는커녕 우리 나라 안에 있는 오랑캐의 풍속도 다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오랑캐를 물리치고자 한다면 차라리 누가 오랑캐인지를 분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을 높이고자 한다면 차라리 저들의 법을 완전히 시행함으로써 더욱 중국이 높아질 수가 있다. 만약 다시 명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고 우리가 당한 치욕을 설욕하고자 한다면 20년 동안 힘써 중국을 배운 다음에 함께 논의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청(淸)나라가 흥성한 이래로 우리 조선의 사대부는 중국과 연계된 일체의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억지로 사절(使節)을 받들어 청나라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일체의 행사나 문서와 대화를 주고받는 일을 모조리 역관에게 맡겨버린다.



책문(柵門)에 들어서서 연경에 이르기까지는 2천 리 길인데 경과하는 고을의 관원과 상견례하는 법이 없다. 다만 각 지방에 통관(通官)이 배치되어 각 지방에서 사절을 접대하고 말에게 먹일 꼴과 사절이 먹을 식량을 공급하는 일이나 처리할 뿐이다. 저들의 의도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저들을 싫어하여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예부(禮部)와 접촉을 한다 해도 입으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으랴? 역관이 이러저러하다 하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조선관 안에 틀어박혀 있다보니 눈으로 무엇을 관찰할 수가 있으랴? 아무리 귀를 기울여 들어보아도 지척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 사신을 해마다 새로 파견하기 때문에 사신으로 가는 일이 해마다 생소하다. 다행스럽게도 천하가 평화로운 시절이라 서로 관련된 기밀이 없으므로 역관들에게 통역을 맡긴다 하더라도 별다른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의의 전란이라도 발생한다면 팔짱을 낀 채 역관의 입이나 쳐다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저 한어를 익히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만주어나 몽고어, 일본어까지도 모두 배워야만 수치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역학이 쇠퇴하여 훌륭한 통역자라는 칭송을 듣는 사람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이른바 열 명의 훌륭한 통역자조차 다 선발시험에 뽑힐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일단 선발시험에 뽑히면 입으로 중국어 한마디를 할 줄 몰라도 반드시 북경을 가는 사행(使行)에 충원시켜 역관의 녹봉을 받게 한다. 이와 같은 실정이므로 역관이라는 직책은 역관배들이 번갈아가며 장사를 해먹기 위하여 설치한 직책인 셈이다. 그러므로 두 나라의 말을 통역할 때 국사를 그르치거나 응답을 잘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 리가 없다.



따라서 통역에 재능이 있는 인재를 뽑을 때에 기왕의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면 통역 교육이 저절로 진흥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역관의 시험을 주관하면 좋은가? 시험의 주관을 역관에게 맡기면 같은 패거리를 뽑을 것이고, 사대부에게 맡기면 귀머거리에게 맡기는 격이다. 하지만 역관의 선발 역시 사대부가 져야 할 책임이다.



관서 땅의 마부는 한어는 잘하지만 글자를 아는 자가 드물어 아무리 노력해도 역관으로 만들 수는 없다. 간혹 문장에 능숙한 자도 있는데 이들은 오직 장사하는 데만 익숙하여 관원이나 수재(秀才)를 접해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이 갑자기 먼 지방의 사대부나 표류한 배의 선원을 만나면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남의 말을 배우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기가 어려운 데 있다. 남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어야 지극한 즐거움이 생긴다. 일찍이 축지당(박제가가 북경에서 만난 학자)과 반난타(홍대용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 교류한 학자) 등이 대화를 나눌 때 대화 가운데 시부와 백가어를 뒤섞어 사용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는데 역관들은 그 대화를 알아들었다.우리 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다른 것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그 가운데 저들이 입고 먹는 것의 풍족함을 가장 당해낼 수 없다. 중국 백성들은 비록 외진 마을의 가난한 집이라 해도 대개가 여러 칸 크기의 광을 소유하고 있다. 그 광 안에 곡식을 쏟아 붓는다. 곡식이 광 전체를 채운 집도 있고, 반 정도를 채운 집도 있다.



우리 나라의 가난한 백성은 모두가 아침저녁 먹을거리조차 없는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는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 이른바 어려울 때를 대비해 준비한 곡물이란 것도 옥수수 몇 자루나 마늘 수십 개를 그을음으로 검게 탄 초가집 벽에 달랑 달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중국의 백성들은 대개가 비단옷을 입고 담요에서 잠을 자며, 침상이나 탁자를 구비해 놓고 산다. 농사를 짓는 자조차도 옷을 벗지 않고 가죽신을 신으며, 정강이에 전대를 차고서 밭에서 소를 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시골의 농부들은 한 해에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그 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기른다.

그렇다면 오늘날 당면한 계책은 무엇인가? 우선 농사법과 양잠의 방식부터 완전히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양선( 扇)이란 것이 있는데 한 사람이 양곡기를 돌리면 1만 석의 곡식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찧어낼 수가 있다. 또 돌방아가 있는데 만 섬의 곡식도 찧기가 어렵지 않다. 수차란 것은 마른 땅에 물을 댈 수도 있고, 물이 고인 땅에서 물을 뺄 수도 있다. 호종(瓠種)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씨 뿌릴 때에 발뒤꿈치가 아프지 않다. 입서(立鋤)란 것이 있으면 김을 맬 때 허리를 아프게 구부리지 않아도 된다.



현재의 우리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벼를 모아 놓고 까불기 위해 바람 부는 앞에서 날린다. 긴 멍석 가운데에 벼를 놓고 밟은 다음 멍석 양끝을 잡고서 떨어낸다. 여러 사람이 힘들여 일해도 겨우 하루에 10여 섬의 좁쌀을 까불고서 기진맥진하지만 그래도 정(精)하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누에를 옮길 때에는 성장한 정도를 일일이 구별하여 옮기려면 하루 온종일 해도 얼마 옮기지 못한다. 잠망을 사용하여 그물을 덮어 뽕잎을 먹인다면 모든 누에가 일제히 그물 위로 나온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본래 누에가 토해내는 실은 지극히 균일하다. 하지만 고치 켜는 사람이 아예 고치를 살펴보지도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그 수를 늘렸다 줄였다 하기 때문에 실은 꺼칠꺼칠하고 비단은 털이 부숭부숭하다.



위에서 제시한 도구들을 한 사람이 사용한다면 그 이익은 10배가 될 것이고, 온 나라가 사용한다면 그 이익은 백 배가 될 것이다. 이 도구를 10년을 사용한다면 그 이익은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정도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도구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은 시행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고, 힘을 가지고 있는 자는 힘을 발휘할 적절한 시기를 얻지 못하기 일쑤다. 농업과 잠업의 이익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은 그 일을 떠나 다른 데로 달려가고 있다. 미곡 값이 오르고 옷감이 귀하게 되는 현상이 아무 이유 없이 발생하겠는가?과거(科擧)란 무엇인가? 인재를 뽑기 위한 것이다. 인재를 뽑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차 그들을 쓰기 위한 것이다. 인재를 뽑을 때 문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그의 문장 솜씨를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인재를 뽑을 때 활쏘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그의 활솜씨를 이용하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과거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앞서 치른 과거에서 거두어들인 인재를 미처 기용하지도 않았는데 뒤에 치른 과거를 통해 또 다시 급제자가 무더기로 배출되는 형편이다. 3년 만에 한 번씩 치는 대비과 외에 반시, 절일제, 경과, 별시, 도과라는 명목의 다종다양한 과거가 번잡하게 치러진다. 수십 년 동안 크고 작은 과거에서 배출된 인원이 국가에서 정한 관작의 수에 비해 10배는 된다. 정원의 10배가 되는 인원을 결코 모두 기용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중의 9할은 쓸데없이 배출한 인원임이 분명하다.



사람이 태어나 나이 열 살 무렵이면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차 성장하는데, 마치 대나무가 처음 솟아날 때부터 1만 자 크기로 자랄 기세를 보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때에 과거시험 문장을 가르쳐서 몇 해를 골몰하게 만들면 그 이후에는 그 병을 고칠 길이 없다. 요행히도 과거에 급제하면 그 날로 지금까지 배운 것을 버린다. 한 사람이 평생의 정기를 몽땅 과거시험에 소진하였건만 정작 나라에서는 그 사람을 쓸 데가 없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역대 명신들이 이 시험을 거쳐 배출된 자가 많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그것은 사정을 모르는 소리다. 천하의 모든 길을 막아 놓고 문을 하나만 만들어 놓는다면 공자라 할지라도 그 문을 통해 가야 할 것이다. 더구나 옛날에는 과거에 응시한 유생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응시한 유생의 수효가 4백 명을 채웠다고 하여 축하를 받은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는 어떠한가? 그때보다 백 배가 넘는 유생이 물과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까닭이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오늘날에는 온 나라 사람이 과거는 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은 듯하다.



중국의 과거시험은 모두 건물 안에서 문을 닫아건 채 치르는데 이를 장옥(場屋) 또는 쇄원(鎖院)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간사한 행위를 방지하고 비바람을 맞는 것을 대비한다. 일찍이 중국의 시험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가시나무로 주변 둘레를 에워싼 시험장이 빈틈이 없고 견고하였다. 선비 하나에 방 하나를 주고, 뜰 한 칸을 배정하였으며, 붓과 벼루, 음식, 오줌통과 같은 물건이 모두 그 안에 놓여 있었다. 두 명의 나졸이 그를 지키는데 한 사람은 심부름을 하고 한 사람은 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문을 닫아건 채 시험을 치르고, 남이 쓴 글을 베끼는 짓이나 능력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시험을 치르는 행위를 엄중히 금지한다면 확고한 주견을 세울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시험장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 반드시 유생의 능력 여부와 항간에 돌아다니는 공론을 장부에 기록하여 시험 답안과 참고하여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하면 합당하지 못한 자를 뽑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선비를 어떻게 과거라는 제도로 다 얻을 수가 있겠는가?이재(理財)를 잘하는 사람은 위로는 천시(天時)를 잃지 않고, 아래로는 지리적 이점을 놓치지 않으며, 가운데로는 사람이 할 일을 잃지 않는다.



기물을 편리하게 사용하지 못하여 남들이 하루에 할 일을, 한 달 두 달 걸려 한다면 이것은 천시를 잃는 것이다. 밭 갈고 씨 뿌리는 방법이 잘못되어 비용은 많이 들었는데 수확은 적다면 이것은 지리적 이점을 놓치는 것이다. 상인들이 교역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들이 날로 많아진다면 이것은 사람이 할 일을 잃는 것이다.



옛날 신라는 경상도라는 한 도를 기반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서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였다. 당나라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 안에 들어와 주둔하는 것이 한 해에 몇 달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만약 저들에게 군량미를 제공하고 접대하는 것에 예법의 실수를 한다거나 말을 먹이는 식량이 고갈되는 일이라도 한번 발생했다면 신라라는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라는 결국 버티고 유지하여 넉넉하게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경상도 크기의 도가 여덟 개나 된다. 그러나 평상시에도 관리 한 사람 당 한 섬의 녹봉밖에 주지 못한다. 칙사라도 왔다가 가는 날이면 경비가 완전히 바닥난다. 우리 나라는 태평시대를 누린 지가 1백여 년으로, 위로는 외국을 징벌하거나 임금님이 지방을 순시한 일도 볼 수가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려함을 즐기고 사치함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음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나라의 빈곤이 갈수록 심해지니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남들은 곡식을 세 줄로 심을 때에 우리는 두 줄로 심는다. 그렇게 하면 1천 리의 지방을 가져다 6백 리의 지방으로 줄여서 사용하는 셈이다. 남들은 농사를 지어 하루에 50∼60섬을 거둔다면 우리는 20섬을 거두니 그럴 경우 6백여 리의 지방을 가져다 2백여 리의 지방을 만든 셈이다.



남들은 곡식을 5푼 파종한다면 우리는 10푼 파종하는데 그럴 경우 또 1년 동안의 종자를 잃는 셈이다. 사정이 이런 데다가 또 배나 수레, 목축, 가옥, 기물을 쓸모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폐하고 강구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을 전국적으로 계산하면 백 배의 이익을 잃는 셈이다. 현재의 토지만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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