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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김용석 지음 | 푸른숲
모두가 열림을 추구하는 분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모두가 열림을 지향하는 닫힌 사회'에서는, 닫힘을 논하는 것조차도 이단아의 객기나 이방인적인 태도, 이상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곧 '미운 오리새끼'가 될 수 있다. 안데르센의 우화는 '닫힌 사회'의 특성을 다양한 차원에서 보여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닫힌 사회-열린 사회'의 역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연히 오리알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백조는 그의 다른 모습 때문에 엄마 오리를 제외한 모든 오리들에게 구박을 받고 무시당한다. 그뿐 아니라 닭·칠면조 등 이웃들에게도 놀림감이다. 따돌림을 당하고 이유 없는 폭력을 감수해야 한다. 철새인 기러기가 조금 동정심을 베푸는가 했더니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 백조는 무리에서 떨어져 한 농가로 숨어든다. 그곳에는 할머니, 고양이, 암탉이 살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오리알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할머니의 기대감 때문에 얼마간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기 백조는 집안에 이득이 되는 일은 하나도 못하면서 말참견을 한다. 그 바람에 따돌림을 당해 그 집에서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방랑생활을 겪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 새 봄이 온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새끼가 아니고, 어느새 아름다운 백조가 된다. 그리고 백조 무리 속에서 인정을 받고 자기 자신을 찾게 된다.



이 우화에서 두 가지 형태의 닫힌 세상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는 오리 무리인데 자연적 성격의 닫힌 세상이라 볼 수 있다. 둘째는 할머니의 집으로 사회적 성격의 닫힌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양쪽의 공통점은 '다른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들과 모습이 다른 아기 백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오리의 이웃들도 다른 것이 섞인 부조화를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 곧바로 뒤따르는 것은 무시와 폭력이다. 다르다는 것이 폭력을 정당화하며, 미적(美的)으로 낮은 가치와 동일시된다. 그래서 그는 밉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리를 떠나는 것뿐이다. 그에게 무리는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 암탉, 고양이는 자연적 조건과 모습이 서로 아주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같이 산다. 암탉은 달걀을 낳고, 고양이는 쥐를 잡고 귀여움을 떨며, 할머니는 먹을 것과 따스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사회'를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관계로 엮어진 사회의 틀은 그들이 진리라고 믿고 주장하는 것들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다.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어른이고, 암탉과 고양이는 그들이 사는 곳이 최고의 세상이며, 세계의 반을 차지한다고 믿는다. 미운 오리새끼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견도 제시할 수 없다. 그는 '우리'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아기 백조는 자신을 본질적으로 개조하거나, 아니면 그 사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 사회가, 사회의 진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에게 적응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로 태어나 다 자란 아름다운 백조가 될 때까지 그가 경험한 것은 닫힌 세상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성숙한 백조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을 때에 그를 받아준 곳도 사실은 백조들의 닫힌 사회였다. 백조로서 그의 정체성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으로, 백조들 사이에서는 즉각적으로 동일화될 수 있었다.



그의 여정은 다름아닌 닫힌 사회에서 출발하여, 닫힌 사회를 거쳐, 닫힌 사회에 안주한 것이다. 그 자신에 맞는 '우리'를 찾은 것이다. 이 세상의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사회는 '우리'라는 이름의 닫힌 사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동일성이 요구하는 '우리'의 조건에 맞는 자에게만 열린 사회이다. 각각의 닫힌 사회는 마치 하나의 소우주처럼 존재한다.1장 열린 사회의 신화



닫힌 사회 : 『미운 오리새끼』의 우화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아 순수 창조의 의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교 하느(나)님의 창세일 것이다. 이때의 '창세'라는 말의 의미는 이 세상이 '무(無)로부터' 존재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 창조의 개념은 고대 역사에서도 히브리교 전통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창조의 의미는 '전혀 새로운 것'의 발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행위는 무엇인가 주어진 것을 가지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창조행위는 변화·변용·조합 등 넓은 의미에서 구성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신(神)이 곧 창조성의 근원이며, 인간에게 이를 발휘할 수 있는 재능을 부여했다는 사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믿음은 인본주의적 르네상스인들에게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궁극적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는 문화적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화관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 능력이 신의 창조력으로부터 나왔다 하더라도, 근원적 유사성을 가질 뿐이고, 현실에서는 사실 2차적 창조성이며, 창조와 구성의 조화라는 제한된 창조성임은 부인할 수 없다. 창조와 구성의 조화라는 조건에서 인간의 창조성은, 짐멜이 지적하였듯이, 인간이 역사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짐멜의 예에서처럼 동물은 그가 속한 종(種)에서 어미가 했던 행위를 처음부터 반복한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 반복을 하지 않는다. 모방을 해도 똑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 이전의 주어진 것, 이전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이 가미된 작품을 만듦으로써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에코가 말했듯이 책을 쓴다는 것도, 다른 책으로부터, 다른 책에 대해, 다른 책 주위를 돌며, 자신의 생각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절대 의미의 창조자라면 인간은 초역사적인 존재일 것이다. 또한 인간이 단순 반복 행위만을 한다면, 그는 탈역사적 존재일 것이다. 창조와 구성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인간적 창조행위의 진리라는 사실은,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피조물이 불완전한 창조자를 배반하거나, 그에 도전하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인간의 창조행위에 항시 내포되어 있다. 인간이 창조하고 싶은 것은, 절대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최고의 생명체인 바로 인간 자신의 모습과 특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모습을 갖춘 피조물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에 따른 갈등이 문학작품과 영화의 주제가 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가위손>도 창조자와 피조물의 변증관계에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피조물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인간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인간의 모습을 했으나 불완전한 피조물이 인간사회에서 겪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발명가가 가위손 에드워드를 만들 때에 심장도 주었고 뇌도 주었지만,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준" 것 이라는 대사는 인상적이다.



메이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인간과 '거의 같은' 존재를 창조한 발명가와 그 피조물 모두의 비극적 결말을 그리고 있다. 청년 과학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을 닮은 생명체를 창조하지만 피조물의 추하고 무서운 모습에 자신도 괴물로부터 도망치게 된다. 홀로 남은 괴물은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고립된 생활 속에서 잔혹하게 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 및 그 가족과 친구에 대해 복수할 계획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 프랑켄슈타인 역시 괴물을 죽여 없애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셸리의 소설은 비평가들이 흔히 말하듯이 신의 흉내를 낸 인간 창조행위의 비극적이고 소름끼치는 결말과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어떤 불행한 '괴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작품 속에 들어가 보면 인간의 창조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책임에 관한 메시지이다. 빅토르를 찾아간 괴물은 자신을 찾아 죽이려는 자신의 창조자에게 절규하듯 항변하며 창조자의 책임을 묻는다. 괴물의 절규에 빅토르도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둘째, 피조물은 창조자가 예기치 못할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는 괴물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 괴물은 위압적으로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빅토르가 자신의 창조자'이지만, '자신은 빅토르의 주인'일 수 있다며, 자신의 말에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보장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셋째, 피조물은 언제든지 창조자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전하고 있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며, 인간은 자신과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는 상대를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어떤 학자는, 절대라는 단어를 구시대의 산물로 만들어버리고 절대의 모든 형태에서 해방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시대에도 절대성에 근접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일 것이라고 했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서 일상생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유의 개념과 현대문화의 문제를 연계하는 담론에 의미를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비자유가 존재하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과, 문화의 발전은 현실적으로 '비자유의 조건'을 형성할 가능성을 항상 배태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자유의지 표출의 방식은 모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자유의 실현이지만 동시에 비자유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자유는 '욕망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인가' 아니면 '욕구의 완벽한 실현인가'하는 실존적 문제가 대두한다. 과거 문화의 주류가 전자의 입장에 바탕을 두었다면, 현대문화의 주류는 후자의 입장에 기준을 둔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나로부터의 자유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자유인가'의 문제이다.



동전의 양면 같은 자유와 비자유는 문화의 물질적 성과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찰된다. 문명의 이기는 생활에서 자유의 폭을 넓혀주지만, 동시에 제한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는 거리 이동 자유의 폭을 넓혀주지만, 자동차 소유는 생활의 다른 부분에서 인간을 제약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도록 되어 있지만, 자유는 또한 인간에게 '무익한 선물'이라는 입장이 나오기도 한 것이다. 현대문화는 자신이 지니는 시대적 특성으로 좀더 구체적인 면에서 비자유의 조건을 형성하며, 그것이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다.



현대문화는 본질적으로 과학기술 사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경과 인종을 넘어서 인류의 삶에 유일한 공통 분모로 자리매김한 것은 기술 사회와 그에 따른 경제 체제 및 문화 구조이다. 따라서 문화적 맥락에서도 지구촌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이제 '세계사회'라 불릴 만한 것이 경제·문화 체제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것은 '기술왕국'의 모델과 정보로 그 일치성을 강화해가고 있다. 이러한 일치화 과정은 발명과 계속적인 변화 그리고 무한 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러한 일치는 무엇을 뜻하며, 이것이 각 개인에게도 의미 있는 '세계 만들기'인지 등에 관한 물음을 낳게 있지만 오늘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기술왕국의 내재적 원칙이 금하고 있다. 의미에 대한 물음조차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제 기술왕국이 인류에게 가져온 것은 '유도된 필요성'뿐만 아니라, '유도된 한계'인 것이다. 곧 자신의 진행 방향과 맞지 않는 가능성의 추구와 창조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술왕국이 현대인에게 가하는 가장 위험한 문화적 비자유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의미의 가능성을 허무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의미 추구의 의미를 일축하는 기술왕국에 바탕을 둔 현대문화의 허무주의, 그 진실은 이렇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곧 사람과 생각을 철저히 분리한다. 능력과 권력, 곧 힘으로서의 문화는 실존적 문제로서 문화 비판의 가능성을 없애려 한다. 이에 역으로 "생각이 문화를 자신의 주된 표적으로 삼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비판은 자유의 유일한 현실적 무기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합리적 사고를 지닌 인간이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대답을 반드시 전제로 하는 질문이 될 수는 없음에도 인간은 또 다른 물음을 던진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제 의미의 질문은 인간 정체성을 보고자 한다. 의미의 물음과 의미 추구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미가 허무로 환원되는 상황이 오면 상처 입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한다.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 갇힌 삶 속에서 그것과 다를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찾고자 한다. 곧 비자유의 조건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을 찾고자 한다. 이때, 아직도 물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의미는 일축할 수 있어도 자유는 일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 한 번 묻게 된다. 나 자신을 비추어주는 거울은 있는가?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진리의 비밀을 묻는 것이다.근대 이전에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물음의 틀이었던 '존재냐, 비존재냐"를 원용한 '존재냐, 소유냐'라는 실존적 질문은 산업사회의 주된 화두였다고 볼 수 있다. 후기산업사회, 정보지식사회, 오락활성화사회에서는 '존재냐, 활동이냐'가 주된 물음이라는 관점을 가져볼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이 근본적 생존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질문에는 명백히 경제성이 가미되어 있으며, 세 번째 질문은 문화성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물론 활동하지 않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이 특정한 의미, 또는 지배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문화라는 것이 생산적 형태와 소위 대중적 형태를 지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현대사회가 자신의 특정한 문화성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문화의 세기'가 시작하면서 인간은 철저히 인간 자신을 가만 놓아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레크레이션의 진의가 여가를 이용하여 심신의 피로를 풀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인간의 탈진'을 방지하고 균형잡힌 활동을 위한 인간의 조건을 재창조하는 것이라면, 여가 후에 더 피로를 느끼며, 여가를 보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기 쉬운 현대인의 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활동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있음'과 '움직임'은 인류 사상의 저변에 면면히 흐르는 세계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있음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고, 움직임은 있음을 확인해 준다. 운동과 변화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재인식하고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활동은 활동 자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고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가 무엇을 하는가가 곧 나의 정체성'이라는 현대사상의 주요 명제에서 강조점은 '한다'와 '정체성' 양쪽 모두에 놓여 있다. 즉, 활동과 존재 모두에 그 중점이 있다. 다만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깨달아야만 '나의 정체성'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다. 즉, 활동과 존재를 인식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거의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삶의 균형을 이루는 활동이면 된다. 존재에 대한 인식은 순간적일 뿐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다만 그러한 순간 순간들이 삶 속에 최소한 보장되어야 한다.탈인간화의 다른 일면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벗어나는 어떠한 힘을 얻고자 할 때에 일어난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초인간적 욕망을 투영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사회계층에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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